신분활국

 


1. 개요
2. 비정 위치
3. 기리영 전투의 주체?
4. 멸망 시기


1. 개요


臣濆活國[1]
마한 54개국 중 하나.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앞 부분에 나온 것으로 보아 지금의 경기도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재구된 상고한어에 따르면 濆의 발음은 당대에 /*prals/ 또는 /*bɯl/이었기 때문에, 濆은 다른 소국명에서 나오는 卑離와 같이 "벌"을 뜻할 가능성이 높다.

2. 비정 위치


처음 두계 이병도가 경기도 안성시 양성(陽城)면의 고구려 시대 지명 사복홀(沙伏忽) 혹은 사파을(沙巴乙)이 신분활과 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이곳을 비정 위치로 추정하였다(삼한문제의 신고찰, 1936). 그러나 천관우는 삼국지가 기록한 마한 소국들의 순서가 대체로 북에서 남 방향으로 지역에 따라 쓰였다는 추측에 따라, 6번째인 우휴모탁국(優休牟啄國)이 강원도 춘천에 비정되고 8번째인 백제국(伯濟國)이 서울특별시 강남에 비정되므로 7번째인 신분활국은 대체로 그 사이인 가평에 비정될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다(마한제국의 위치 시론, 1979). 현재 대세는 안성보다는 강화 ~ 파주 ~ 가평 정도의 경기 북부 지역이다.

3. 기리영 전투의 주체?


백제와 함께 서기 246년에 일어났던 기리영 전투의 주체로 고려되는 유력 후보 중 하나다. 한자 해석을 다르게 함으로써 신분활국이 이 전투를 주도했다는 설인데, 기리영 전투의 주체가 백제일 때 생기는 많은 의문점들을 해결하고 있어서 현재 기리영 전투의 주체가 고이왕이 이끌던 백제국이라는 설과 맞서고 있다. 이 때문에 신분활국의 위치가 임진강 하구에 위치한 파주 육계토성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기리영 전투의 상대가 한군현낙랑군대방군이기 때문에 일개 마한 54개의 소국인 신분활국이 그러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느냐라는 반론이 나오는데, 금문 삼국지에서는 신지격한분(臣智激韓忿)이라는 구절이 남송 당시의 서적인 통지(通志)에 인용된 고문에서는 '''신분고한분(臣濆沽韓忿)'''으로 대체되어 있으므로 신분고국이 기리영 전투의 주체일 가능성이 높다.
기리영 전투의 주체가 이 나라라면,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서 이미 온조왕 시대부터 마한 일대를 병합했다는 기록과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에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어디까지 받아들이냐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4. 멸망 시기


대부분의 원삼국시대 소국들이 늘 그렇듯이 멸망 년도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만약 신분활국이 기리영 전투의 주체라면 기록 끝에 '''한(韓)을 멸하였다'''라는 구절이 있기에 기리영 전투 이후에 멸망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경기도 지역의 국가이므로 빠르면 백제 고이왕에 의해 늦게까지 잡으면 근초고왕에 이르러서야 흡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리영 전투의 주체를 신분활국으로 추정하는 경우 고이왕 시대 이후 백제가 갑자기 성장한 것에 대해 백제가 이 시대 이후 한강 중상류로 패권을 확대하며 대중국(대방) 무역 경로를 차지하고 철기 문화를 확실히 수용하기 시작한 것 때문으로 본다.[2]

[1] 活(살 활)의 획이 누락된 것을 보아서 臣濆沽國(신분고국), 臣濆沾國(신분첨국)이라고도 한다. 기리영 전투의 주체로 볼 때는 신책첨한(臣幘沾韓), 신분고한(臣濆沽韓)으로 본다.[2] 한강 하구 및 서울/경기 지역은 지금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지 않겠지만 철기 문화적으로는 상당히 후진적인 곳이었다. 오히려 한강 상류 지역에서 기원전, 후부터 철기 관련 고고학적 유물이 꾸준히 나타난다. 그리고 3세기 중반 즉 고이왕 대 이후로 폭발적으로 한강 하류에서 철기 문화가 성장하여 4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인 제철 유적 등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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