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헌
1. 개요
기자헌은 조선시대 99대 영의정 출신이다. 인조반정 때 반정에 불응하였다가, 수감된 후 처형을 당하였다.
2. 생애
1582년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유생이 되었다.
1604년 사헌부대사헌에 발탁되고 거듭 승진해 공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서 우의정과 좌의정으로 승진했으며 이때 소북의 유영경 등이 영창대군을 앞세워 광해군의 즉위를 저지하려 하자 그는 광해군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선조가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려 하자 이를 끝까지 반대하여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했다.
1623년에 인조반정에 성공을 하자 이원익에 부름을 받았으나, 옛 주인을 배신을 할 수 없다며 사양하고 관직에서 물러았다. 그러나 인조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나 물증이 없어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1624년에 이괄의 난으로 인해 이괄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처형을 당하였다.
가족관계로는 부인 이씨는 덕흥대원군의 장남이자 선조의 형인 하원군 이정의 딸이며 아들로는 기순격과 기준격, 기신격, 기민격이 있다. 이중 기준격은 허균과 친했으나, 허균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했다. 결국 허균은 처형당했는데 다음 해에 고변을 늦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자신도 강릉에 유배당하였다. 인조반정 후 아버지, 형과 함께 모함을 받아 처형된다.
3. 기타
기자헌은 감옥에 있으면서 내통할 가능성이 없었으나, 그의 사촌형제 기익헌이 이괄과 내통을 하게 되어서 처형에 영향을 미쳤다.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과 공통점이 있는데, 둘다 비록 탐관오리라는 악명이 있었지만, 강경노선으로 일관한 북인 중에서는 중립을 지키는 인사였으며 폐모론에 반대했다. 그러나 둘다 반정 직후 정국의 혼란 속에 모함을 받아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