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괄

 


1. 개요
2. 생애
2.1. 성장
2.2. 인조반정
2.3. 이괄의 난
3. 용병술
4. 평가
5. 기타
6. 관련 문서


1. 개요


李适
1587년 ~ 1624년 2월 14일
조선 중기 무신. 인조반정으로 반정공신이 되었다가 이괄의 난을 일으킨 군인. 자는 백규(白圭), 본관은 고성 이씨.

2. 생애



2.1. 성장


이괄의 집안은 고려 시대부터 문신 집안이었는데 족보에 따르면 이괄은 이암#s-2의 8대손이라고 한다.[1]
선조 말기 불과 10대 중후반의 나이부터 관직에 올라 선전관부터 목사까지 높은 직책을 오갔다. 하지만 정치에만 엮였다 하면 문제가 심각해지는 인물이었고 덕분에 평가는 좋지 못했다. 출생적으로는 광해군의 지지 세력이었던 대북파는 아닌 온건파였던 중북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시 전공이 없었던[2] 어린 시절부터 고위직들과 어울릴 수준은 되었으며 비슷한 명문의 귀족 장수들과 교우 관계를 쌓았다.
임진왜란의 전쟁 영웅들이 넘쳤던 시대임에도 이괄은 젊은 시절부터 전형적인 벼슬길을 밟았다. 출생답게 용병술보다는 서예 방면으로 명성을 떨쳤다.[3] 하지만 선조 말기부터 불량한 근무 태도와 월권 행동, 광해군 때는 군수 물자를 별도로 조련하여 빼돌렸음이 광해군에게 보고되어 쫓겨날뻔한 기록이 있다. 그밖에도 군법을 사사로이 어겼다는 기록들이 나오는데 이러한 비타협적이고 이기적인 성품이 이괄의 인생을 결정짓게 된다.
붕당역사에서는 북인을 몰락시키고 서인들이 집권하는 계기를 마련한 인물이기도 하다. 광해군 퇴출과 이괄의 난으로 쓸려나간다.

2.2. 인조반정


주로 후방에서 지방 관리로서 일했다. 광해군 시절에 특히 총애를 받았으며 북방에서 여진족을 쫓아내기도 했다. 이후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떠날 즈음 신경유 같은 친구들의 귀띔을 받고 광해군을 끌어내리는 인조반정에서 착호갑사들을 이끌었다. 하지만 공서파의 대표였던 김류와 불화했는데 이유는 김류가 늦게 합류해서 자신이 대신 통솔을 했음에도 후에 김류는 1등공신의 판서로 책봉되고 자신은 2등공신으로 끝난데 앙심을 품은 것이다. 이는 이괄이 얼마나 분별이 없고 자기 과신이 심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인데 김류와 이괄은 절대 동급이 될 수 없었다. 김류는 왕조 국가의 하늘과도 같은 왕을 추천하는데 동참한 인물로서 설사 김류 본인이 원하지 않았더라도 후견인들의 얼굴마담으로서 결국에는 1등공신에 올랐을 위치였다.
이전부터 지적받던 오만하고 철없는 행실은 그대로라서 반란 세력과 민중 어느 쪽에서도 특별한 평판은 커녕 도리어 미움을 사서 2등공신으로 책봉되고 한성판윤으로 부임했다. 한성판윤이 한직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일인지하 만인지상 영의정조준이 올랐을 때와 수양대군이 올랐을 때가 다르듯이 모든 자리는 사람이 만드는 거다. 직 자체는 한성부 내에 모든 행정, 사법, 치안권을 가지고 판서와 같이 九卿이라고 불리는 만큼 한직이라는 것에는 어폐가 있고 임명되는 인물에 따라서 다르게 봐야 한다. 대표적으로 정사 1등공신에 책봉된 인조의 외척인 구굉은 이괄의 난이 평정된 이후에 한성부판윤에 올랐는데 그의 위치를 생각하면 한직으로 보내졌다고 보기에는 큰 문제가 있다. 더군다나 한성부판윤은 나중에 허적, 민정중, 민유중, 민진후, 이이명, 조태채 등 여러 외척이나 조정 핵심 인사들도 거쳤던 자리이다. 이괄은 어땠는가? 인조가 한성판윤 재임 1달도 되지 않아 사직하겠다는 이괄에게 '경은 공을 세워 상을 받은 것인데 왜 그러냐'며 만류하고 기어이 조선 최정예 병력을 맡길 정도로 왕의 확고한 신임을 얻고 있었고 이때 주로 했던 임무가 북인 잔당의 역모를 기찰하는 임무였으니 한직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1달도 되지 않아 사직 의사를 표한걸 볼 때 이괄은 한직이라고 생각했던 걸로 보인다.
이후 평안도의 병마절도사가 되어 전방으로 부임한다. 이괄이 맡은 평안병사와 부원수직 중에서 평안병사직은 요동 지역을 점령한 후금의 군대가 침공해 올 위치이자 조선이 진출할 수 있는 전진 기지가 될 수 있는 곳이다. 함경도 지역은 대부분이 산지여서 대규모 병력이 기동할 여건이 되지 못하며 요동을 근거지로 마련한 만주족들이 압록강을 건너서 평양을 거쳐서 한성으로 갈 수 있는 단거리 공격 루트로 올 수 있는데 쓸데없이 함경도에서 우회하여 공격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 시기 후금에 대한 공격 전술과 이후 조선으로의 침공 모두 이러한 루트를 따라서 진행되었다.
인조는 이괄을 매우 신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최고 정예군단 1만 5천명을 맡김은 물론 직접 어검을 내려주고 이괄의 수레를 왕의 손으로 밀어주기까지 했으며 이괄의 아들만 체포하라는(한양에 있던 이괄의 가솔들도 무탈했다.) 지시를 내리면 이괄이 자신의 깊은 신뢰를 알아줄거라 생각하고 이괄이 자신이 보낸 금부도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조차 전혀 믿지 않았을 정도였다.
이괄은 정치적으로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었으나 인조와 장만이 배려해준 덕분에 군사적으로는 국가의 생명을 쥐었다고 볼 수 있는 상태였다. 이괄이 병마절도사로서 부임한 평안도는 흔히 벽지로 착각하기 쉬운 관서의 다른 지방들과는 달리 조선에서 2번째로 발전한 지역이었고 질환 때문에 군사 활동을 할 수 없는 늙은 도원수 장만을 대신하여 사실상 조선의 군사 실권을 이괄이 맡는다는 뜻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조는 이괄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겨놓은 것이나 다름없는 파격적인 신뢰와 책임을 맡긴 것에 가깝다. 이러한 인사를 추천한 장만은 이괄을 포함한 주변의 다른 장수들과도 친분이 있었다지만 인조와 아무런 연줄도 없는 이괄의 배경을 고려하면 인조 평생에 이렇게 전폭적으로 누군가를 믿어준 적이 없다.

2.3. 이괄의 난


이괄이 정치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1등공신에 오르지는 못하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인 자기 과신이 심하고 과격하며 비타협적인 성품과 상습 월권을 일삼는 부적절한 처신은 북방으로 떠난 다음에도 문제가 되었다. 심지어 이괄을 직접적으로 영입했던 이귀마저도 이괄의 아들을 역적 모의에 엮기 시작했다.
결국 인조는 이괄을 체포하라는 반정공신 이귀의 등쌀에 참다못해 적당한 온정을 베풀어서 이괄의 아들만 데려오라는 어설픈 절충안을 내놓지만 이괄은 "역적의 아비가 무사한 경우가 있느냐"며 금부도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다만 옹호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닌게 이괄이 난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자신의 아들이 반역 혐의로 압송되게 된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불만이 있기는 했어도 국방 의무도 성실히 잘 지키고 있었던 걸로 보아 이 사건만 없었다면 반란까지 일으키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막중한 사령관의 도의를 져버렸다고는 하나 당장 자신의 아들로 인해 역모죄로 처형당할 상황에서 가만히 있는 인간이 있다면 그게 이상한거지, 이괄이 이기심이 심해서 그랬다고 하는건 심한 평가다. 저 상황에서 이괄한테 '반란 일으키지 말고 얌전히 조정 말 따르라'는 건 '얌전히 조정으로 압송되어서 아들이랑 같이 목 잘려라.'고 하는거랑 똑같은 소리다. 이 과정에서 이괄이 잘못한게 있다면 아들 단속을 똑바로 못해서 역모에 말려들게 했다는거지만 이것도 당시 분위기로 보아 '모월 모일 이괄 아들내미가 불충하기 이를데 없는 소리를 하더라.' 같은 카더라 통신에 불과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결국 1만 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방군과 항왜를 동원하여 광해군의 사르후 전투 원정으로 복구되지 못한 관군들을 우회하거나 박살내며 한양으로 진격했다. 인조는 자신이 전폭적인 지지를 보이며 이괄에게 맡겨놓은 정예군단에게 쫓겨서 충청도 공주로 도망쳐야만 했다. 이렇듯 손쉽게 한양을 점령하고 조선 선조의 10번째 서자였던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한다. 그러나 인조를 뒤쫓지 않고 한양에서 안일하게 뭉개는 치명적인 실책을 범했다.[4]
다음날 이괄은 정충신의 보잘 것 없는 진영을 공격했다가 참패했고 겨우 목숨을 건져 경기도 이천으로 달아났으나 부하인 이수백과 기익헌에게 배신당하여 취침 중 목이 잘린다. 이괄의 목을 가져온 두 사람은 용서받고 하위직이나마 벼슬을 살게 되지만 이수백은 마탄 전투에서 패해서 수급이 잘려진 장수들의 자식들에게 대낮에 목이 잘리는 끔살을 당했다. 반면에 기익헌은 조용히 살다가 천수를 누렸다.

3. 용병술


조선 시대의 여포라는 주장도 있지만 실제로는 정치 군인으로 더 오랫동안 근무한 인물이다.[5] 이러한 후방 근무 경험 덕분에 성공할 기회를 여러번 얻은 정치 군인이지만 현대에는 이미지가 180도로 변하여 변방의 마초 장수처럼 알려지게 되었다. 덕분에 이괄에 대한 평가는 좋아졌는데 혈통과 인맥을 따라 광해군 때 출세가도를 밟던 시절은 잊혀지고 인조반정 이후 인조를 엿먹인 멋진 인물로 완벽히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반란에서는 인조반정에 참여하지 않아서 포졸 수준의 병사들만 이끌어야 했던 관군들을 도륙했다.[6] 특히 친구였던 정충신을 상대로 거짓 투항을 통해서 방심시킨 다음 소드마스터급 항왜들을 이용해서 적을 혼비백산시키고 격파하는 기만책을 보면 현대의 무력이 뛰어난 군인으로 왜곡된 이미지와는 달리 정치 군인과 꾀돌이에 가까운 당시의 평가와 역사 기록에 더욱 부합하는 인물이다.[7]
이후 패잔병까지 병력에 넣으며 맹렬하게 따라오는 정충신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서 산길[8]을 통해서 진군하며 자기 나라 땅에서 청야전술을 사용하는 역발상을 통하여 앞을 막는 관군과 추격하는 정충신을 동시에 따돌리면서 전격전을 펼치는 모습을 보면 말이 안 나온다. 인조가 이괄에게 준 병력은 그만큼 중요한 정예병이었다.
연려실기술에서 정충신은 이괄이 인조를 추격하면 상책이오, 모문룡과 손을 잡으면 중책, 한양에 머무르면 하책이라고 평가했다. 속잡록의 기록에서는 장만이 모문룡과 손을 잡으면 상책, 오랑캐 추장들에게 의탁하면 중책, 한양에 머무르면 하책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장만과 정충신이 상중하책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으며 기록된 두 기록의 내용도 조금 다르고 화자조차 다르다. 때문에 신빙성은 떨어진다.
기록들을 조합해보면 이괄군이 1만이 넘는 정예군을 독식한 상황에서 잔꾀를 잘 부린다는 기록이 많은 이괄의 용병술이 관군을 초반에 압도하는 원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대오를 꾸린 관군들의 보잘 것 없는 병력에 격파당했으므로 이괄이 당시 조선의 유일한 명장이었다는 인터넷에 퍼진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이괄을 격파한 관군 장수들이 권율이순신 밑에서 직접 종군한 영웅들이다.[9] 반란의 진행 과정에서 보여준 이괄의 용병술 자체는 뛰어나다 하겠지만 현대에는 애시당초 승리할 수 없는 병력으로 싸운 관군 장수들의 능력이 과소평가되었다.

4. 평가


무신으로서의 재능은 상당했으며, 남들이 한번도 얻기힘든 기회를 여러번 받은 축복받은 입장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야망을 현실로 만들어줄 수 있는 정치와 법을 업신여기면서 모든 기회를 걷어차버린 인물이다.[10] 당장 광해군 때 잘 나간 정치장수인데 그를 끌어내리는데 앞장섰고, 그밖에도 무수한 행운들이 겹쳐서 다른 장수들보다 정치군인으로서 엄청난 이득을 보았으나, 그 기회들을 오만한 성격 때문에 모조리 걷어찼다.
인조반정 이후 반역의 주모자들과 친해져야만 하는 시점에서 김류와 불화하다가 서인들의 노여움을 사서 쫓겨나거나[11],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10대 시절부터 일찍 벼슬자리에 얻는 행운을 받았음에도 그때부터 군법을 무시하고 오만방자했다는 기록들이 남아있다. 같은 시대의 다른 장수들은 평생 한번도 얻지못한 기회와 행운을 수없이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숙하지 못한 태도로 밥상을 걷어찼다. 여러모로 죽을때까지 철이 안 들었다는 평가가 어울리는 인물.
본디 많은 고생을 하고 출세한 인물들은 그 출세의 맛을 알기에 저렇게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차분한 법이지만 이괄은 너무 어린 나이에 관직에 오른 탓에 관직에 오르는 게 쉬운 줄 알았고 그래서 다른 문무백관들이 어떤 고생을 해서 그자리까지 올라갔는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일례로 권율은 46살이나 되어서야, 그것도 동네 아는 동생도 아니고 '''딸'''의 남편(나이는 19년 차이)인 이항복보다 2년이나 늦게 관직에 올랐는데 그랬기에 사적으로는 촐싹거리는 성격이었음에도 관직의 무게를 잘 알기에 도원수로서의 권율은 공과 사의 구분이 명백했지만 이괄은 이런 권율의 안티테제였다.
결국 1만 5천명의 정예병을 '''반란에서 잃음'''으로 인해서, 정묘호란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초기방어에 실패해 크게 당하는 나비효과까지 야기하고 말았다. 이괄 뿐만 아니라, 평안도의 대여진족 병력들까지도 역적으로 몰릴까봐 도망치거나 여진족에 투항해서 길잡이 노릇을 했으며, 이미 한윤 등의 부하들이 탈주하여 홍타이지에게 가서는 조선의 실정을 낱낱히 알렸다. '''결국, 이괄이 병자호란의 기반을 만든 셈이다.'''
사실 금부도사가 찾아온 시점에서 이괄에게는 사실상 반역 외에는 선택권이 없었다. 다만 서인들 중에도 이괄보다 어이없이 숙청당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당시의 혼란한 정국이 더 큰 원인이었다.
이괄 본인도 반란 직후 북인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서 악명을 떨쳤고, 참혹한 내전을 일으켜서 동료장수들의 목을 벨 때의 잔혹함을 보면, 이괄은 정치술이 아닌 용병술로 권력다툼을 벌였던 인물에 가깝다고 평할 수 있다.[12]
애시당초 이괄은 인조반정에 참여했을 때부터 명백히 야망과 적절한 시점의 군사행동을 보여준 정치군인이고, 단지 본인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권력은 탐내면서도 정치라는걸 전혀 하지 않았던 오만한 인물이다.
참혹한 내전의 칼을 뽑은 인물인데도, 이괄에 대한 비판을 완강히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괄의 책임을 삭제하려는 주장은 역사의 교훈을 반토막 내는 왜곡에 가깝다.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고 반란군과 청나라에 맞선 임진왜란의 베테랑 영웅들은 잊혀지고, 서인들과의 권력다툼에 '''국가의 목숨'''(정예군단)을 사용한 이괄을 무고한 피해자로 묘사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관점이다.
다분히 개인적인 반란인지라, 이미 사망한 장수들까지 목을 베어서 사기전술에 쓴 것도 멍청한 행동으로언급된다. 내전 상황이고 수비한 장수들에게 죄가 없었임을 감안하면 생존형 쿠데타의 명분까지 훼손하고 심각한 후환을 남기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자주 무시되기도 하지만, 다른 명분으로 일어난 참수와는 달리 쇼킹한 이슈였다.[13][14]
군사적인 재능이 있긴 했으나, 여러가지 행운이 겹쳐서, 무소불위의 명장으로까지 미화되는 인물이기도 하다.[15] 이괄에 대한 미화는 '''인조시대의 조선이 겪은 군사적 패배에 대한 보상심리'''를 찾기 위해서 도피처로 이괄을 밀어주는 심리에 가까운데, 1) 정치다툼에서 패배한 인물에게 생겨나는 언더 도그마, 2) 이괄의 난 이후 약해진 조선의 군사능력에 대한 변명수단, 3) 인조정권에서 제거당한 이괄이라는 인물에게 투영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서, 객관적으로 분석한다면 일종의 유사역사학적인 심리에 가깝다. 실제로는, 통솔하는 병력의 차이를 제외하면 당시 이름있는 장수들의 능력은 엇비슷했던 것으로 보이는 기록들이 많다.
그렇지만, 이괄에 대한 언더 도그마와 잘못된 편견 때문인지, 국가를 위협하는 세력들을 상대로 말이 안될 정도의 군사적 열세에서도 목숨을 걸고 의기를 보여준 당대 조선 장교들의 충성심이 이괄의 난, 외침 등에서 악역으로 뒤바뀌거나 조롱받는 억울한 상황이 종종 나타나기도 한다.
북한에서는 조선왕조를 약화시켜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인민영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중국에서 명나라를 무너트린 이자성을 두고 인민혁명을 성공시킨 영웅이라고 자랑하자, 북한 쪽에서 대응해서 만든 이론이다. 당시 북한에서는 '정의로운 평안절도사'였던 이괄이 군사를 일으켜 '썩어빠진 한양'을 휩쓸고 개혁을 추구했다며, 딱 북한판 프로파간다에서 써먹기 좋은 인물로서 왜곡했다.

5. 기타


야사에서 수많은 전설을 지닌 임경업이랑 같이 강원도에서 관심을 가지기도 한다. 도망친 이괄의 일가가 강원도에 숨어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두 장수에게는 연관성이 있는데, 임경업은 정충신 휘하에서 이괄을 토벌하고 1등공신으로 추천받아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임경업도 인조에게 숙청당했다. (...).
네이버 웹툰 칼부림이괄의 난을 중심으로 이괄을 주연급으로 다루고 있다.

6. 관련 문서


[1] 암(嵒) - 강(岡) - 원(原) - 지(墀) - 륙(陸) - 교(嶠) - 택(澤) - 제(磾) - 괄(适). 연산군 시기 폭정에 실망해 청도로 낙향하여 제자를 키운 어엿한 문인으로 알려진 모헌(慕軒) 이육(李育)은 같은 고성 이씨로 이괄의 고조부인 청파(靑坡) 이륙(李陸)과 동명이인이다. 청파 이육은 '청파극담'이라는 책을 썼는데 대동야승에도 실려있다.[2] 임진왜란이 끝난 1598년에 12살이다[3] 이괄의 명성은 반역 이전까지는 붓글씨에 대한 것이었다.[4] 물론 이괄이 놀았던 것은 아니다. 왕족 흥안군 이제를 왕으로 추대하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곳간을 열어 쌀과 재물을 베푸는 등의 회유책을 썼다. 문제는 흥안군이 왕의 그릇은커녕 기본적인 인물됨조차 막장에 가까워서 차라리 인조가 낫다는 평가까지 나올 정도라는 점.[5] 반정공신이 되기 이전 이괄의 주요한 관직 경험은 목사와 선전관이며 중앙이나 후방지역에서 근무한 시간이 더 길고 생전에는 용병술이 아닌 붓글씨로 이름을 떨쳤다.[6] 편견과는 달리 이괄을 상대한 관군 장수들의 능력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다. 포졸 수준의 지방군이 붕괴되었는데도 국가의 위기 사태를 막겠다는 일념으로 싸우다 죽은 장수들이 있는가 하면 이괄의 정예병들을 철퇴로 때려 죽이고 탈출한 관군 장수들도 있었다.[7] 이괄은 같은 조선군 장수들의 심리나 이동 경로를 잘 알고 공략했다. 정충신도 능력은 엇비슷했는데 이는 두 사람의 직책이 관서군의 행정과 보급에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두 사람이 보인 행보는 달랐다. 정충신은 이괄과 싸우기 직전까지 평양 주변을 돌며 조선군의 추가적인 분열을 차단했고 다수의 반란군을 설득으로 항복시켰다. 재미있는 점은 인조반정 때도 두 사람의 행보가 똑같았는데 그때도 이괄은 한양을 점령했고 정충신은 관서군의 내분을 막는다.[8] 거의 절벽을 타고 넘는 수준이었다. 전쟁터에서 나름 잔뼈가 굵은 정충신조차도 이괄이 지나간 길을 따라가다가 병사들이 지치고 낙오하여 마탄 전투에 제때 도착하지 못하여 관군들이 각개 격파당하고 말았다. 물론 정충신은 이괄보다 나이가 많았고 정충신이 지휘한 군사들도 역량이 떨어지는 패잔병들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9] 이괄이 죽음으로써 후진들의 양성에 실패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이괄을 상대했던 관군 장수들의 능력은 오히려 반란군 지휘관들을 압도하는 면도 있었으며 이괄을 격파한 장수들이나 후임들은 2차례의 호란 때도 턱없는 전력차에서 장렬히 싸우다 죽는다.[10] 이괄이 역적가문이라서 푸대접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져있으나, 아무런 전공도 없었던 어린 시절부터 임진왜란의 영웅세대들과 인맥을 쌓으며 최고위 군인으로서 출세한 기록이 즐비하다. 사실무근인 셈. 광해군 시절에도 대단히 좋은 대접을 받았으며, 광해군을 몰락시킨 인조반정도 인맥을 따라 참여한 것이다. 애초에 고성 이씨 자체가 이괄을 제외하면 역사에 기록된 반역자가 없다.[11] 전제국가의 성격상, 김류처럼 반역에 참여한 정치인은 홑몸이 아니라, 연줄이 닿은 인물들과 모두 함께 죽고 사는 정치공동체가 만들어진다. 따라서, 김류와 이괄처럼 서로 공개적인 대립각을 세워버리면, 김류와 이괄 본인의 의지가 어떻든 간에 엄청난 정치혼란을 불러올 수 밖에 없다.[12] 이괄의 여포 이미지는, 이괄을 기용했던 모든 왕들마다 꾸준히 문제가 될 정도로 군법을 어기고 정치하는 시늉조차 하지 않아서 생겨났을 뿐, 실제로는 중앙과 후방에서 근무하느라 행정장교 경험은 충분히 쌓았던 인물로서 정치판은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당장 인조반정에 그가 왜 참여했는지 생각해보라.[13] 마탄에서 장렬히 사망한 이중로는 개국공신(이지란)의 후손이자, 임진왜란에서도 활약한 군인이었다. 가뜩이나 신체의 훼손을 터부시했던 조선시대인데, 그런 인물이 반란에서 시체를 훼손당했으니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개국공신 가문의 참전용사가 외국군도 아닌 쿠데타 세력에게 시체훼손을 당했다고 생각해보자.[14] 결국, 이중로 등의 어이없고 참혹한 죽음에 분노한 그의 자식들은 아버지의 목을 베자는 계책을 냈던 이수백을 죽이기 위해 노비 흉내(!)까지 내면서 몇년간 그를 추격한 끝에 백주대낮에 똑같이 참수하여 죽이고 그 죄로 처벌을 받았다. 앞날이 창창했던 무인 가문의 후손들에까지 비극이 이어진 셈이다.[15] 실제로는 이괄의 승리 대다수가 약한데다 숫자도 얼마 안되는 지방군에게 승리한 것이고, 패배했을 때도 자신보다 턱없이 적은 관군을 상대로 지형에 유인당해서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