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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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족. 덕흥대원군의 적장남이자 선조의 큰형이다.
2. 생애
1545년(인종 1년) 2월 4일[4] 에 한성부 서부 인달방 덕흥군 사저에서 중종의 서자 덕흥군과 부인 하동 정씨[5] 사이에서 적장자로 태어났다. 14살 때인 1558년(명종 13년)에 하원정(河原正) 작호를 받았고[6] , 1559년(명종 14년) 아버지 덕흥대원군을 잃고 3년 상을 치른 직후 하원군(河原君)으로 봉해졌다.
1567년(선조 즉위년) 둘째 남동생 하성군이 선조로 즉위하고 2년 뒤인 1569년(선조 2년)에 친부모인 덕흥군 부부를 대원군과 부대부인으로 추증했다. 이에 하원군 역시 작위 1품에 올랐고, 덕흥군 사저(도정궁) 내에 사당인 '덕흥궁(德興宮)'을 세워 덕흥대원군 내외의 제사를 모셨다. 이후 이따금씩 선조가 도정궁에 직접 찾아와 제향을 모시고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
문소전, 연은전, 종부사옹, 시원 등의 총책 직을 맡았으며 1591년(선조 24년)에는 왕실 족보의 오류를 바로 잡은 종계변무의 성사로 광국원종공신 1등이 되었다.[7]
1592년(선조 25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선조를 호위하며 의주로 함께 피난갔다. 1597년(선조 30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왜군과 싸우려 '분의복수군(奮義復讐軍)'에 가담했다.
3. 사망과 이후
1597년(선조 30년) 가을에 왕실이 황해도 수안군으로 잠시 피신할 때에 사옹원 제조로서 같이 따라 갔다가 그 해 10월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향년 53세.
전쟁이 끝난 1599년(선조 32년) 12월 29일에 경기도 양주군 남면 수락산 기슭의 아버지 덕흥대원군묘 근처에 묻혔다. 묘역과 신도비는 덕흥대원군묘와 함께 경기도기념물 제55호로 지정받았다.
1604년(선조 37년) 호성원종공신2등(扈聖原從功臣二等)이 되었으며 1758년(영조 34년) 시호 '의헌공(懿獻)'을 받았다. 1771년(영조 47년)에 그의 신주가 영조의 명으로 덕흥궁(德興宮)에 몇 대가 지나도 꾸준히 제사를 받을 수 있는 불천지위로 정해졌다.
4. 여담
- 성격이 아버지와 별반 다른 것 같지가 않은 듯하다.(...) 생애 초반에는 주색에 빠지고 주변에 세상 모르는 망나니처럼 횡포를 부리는 등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 하지만 이런 망나니같은 생활을 하는 것이 자기 보신에는 이롭다. 총명하고 겸허하게 행동해봐라 자칫하면 역모 사건에 휘말릴 수 있으니 적당히 사고치면서 평판을 나쁘게 해야 자신의 목숨을 연장할 수 있었다. 국왕의 친형이래도 선조뿐만 아니라 다른 역대 제왕도 역모 사건에 민감한데. 다음은 하원군의 성품을 나타내는 기록.
>선조실록 6권, 선조 5년 9월 14일 정유 5번째 기사. - 간원이 하원군의 난행을 지적하여 파직을 청하다.
>
>간원이 아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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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원군(河原君) 이정(李鋥)은 스스로 ‘왕실의 지친인데 나에게 어쩌겠는가.’라고 하여 방종하고 패망(悖妄)하여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헌관(獻官)>은 싫다고 피할 일이 아니고 궐정(闕庭)은 사람을 포착(捕捉)하는 곳이 아닌데 헌관에 임명된 것을 분히 여겨 색리에게 화를 내어 붙잡아다가 마구> 구타하여 자기의 분풀이를 했으니, 이 어찌 신하로서 차마 할 수 있는 일입니까. 법으로 조치하면 죄가 파직하는 데 그칠 일이 아닌데 상께서 도>리어 공론을 거절하여 오래도록 윤허하지 않으시니 어떻게 그의 기탄없는 마음을 징계하며 흉악한 습성을 근절하겠습니까. 형벌은 가까운 사람이>라도 굽히지 않는 것이 옛날의 법도입니다. 국가의 기강이 밝다면 이정은 의당 죄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속히 파직시키소서."
>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출처: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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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원이 아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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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원군(河原君) 이정(李鋥)은 스스로 ‘왕실의 지친인데 나에게 어쩌겠는가.’라고 하여 방종하고 패망(悖妄)하여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헌관(獻官)>은 싫다고 피할 일이 아니고 궐정(闕庭)은 사람을 포착(捕捉)하는 곳이 아닌데 헌관에 임명된 것을 분히 여겨 색리에게 화를 내어 붙잡아다가 마구> 구타하여 자기의 분풀이를 했으니, 이 어찌 신하로서 차마 할 수 있는 일입니까. 법으로 조치하면 죄가 파직하는 데 그칠 일이 아닌데 상께서 도>리어 공론을 거절하여 오래도록 윤허하지 않으시니 어떻게 그의 기탄없는 마음을 징계하며 흉악한 습성을 근절하겠습니까. 형벌은 가까운 사람이>라도 굽히지 않는 것이 옛날의 법도입니다. 국가의 기강이 밝다면 이정은 의당 죄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속히 파직시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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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출처: 조선왕조실록.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종친 대표로 선조를 옆에서 모시고 왜군과 맞서는 군대에 가담한 것으로 보아 전란 이후에는 성격이 좀 누그러진 듯 하다.
5. 가족과 자손
17세인 1561년(명종 17년)에 영의정 홍섬의 딸인 남양군부인 홍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자녀 3남 1녀를 두었다. 그러나 25살에 사별하고 이후 증 이조판서 이의로의 딸인 신안군부인 이씨와 재혼했다. 이씨 부인 사이에서는 자녀를 두지 못했고, 소실 4명에서 6남 5녀를 두어 적, 서자녀 합쳐 총 9남 6녀를 낳았다. 장남 당은군 이인령의 가계로 도정궁 종가가 이어진다. 자세한 가계는 당은군 항목 참조.
다른 후손으로는 서3남 연성수 이복령의 12대손으로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지낸 이해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