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익

 



이원익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이원익
李元翼

[image] [image]
40대 후반 리즈 시절(1595년)[1]
본관
전주 이씨
출생
1547년 12월 5일
조선 경기도 금천현 서면
사망
1634년 2월 26일 조선 한성부 (향년 87세)
경상도 안동부 풍산현 서미동 초당 정침
(現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서미리)
시호
문충(文忠)

오리(梧里)

공려(功勵)
가족관계
증조부 수천군 이정은
조부 청기군 이표
부친 함천군 이억재
어머니 동래 정씨
부인 정씨
아들 이의전
사돈 이순신[2]
신장
137cm
관등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공훈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 2등
봉작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1. 개요
2. 생애
3. 사상
4. 여담
5. 대중 매체에서
6. 관련 문서

[clearfix]

뜻과 행동은 나보다 나은 사람과 비교하고 분수와 복은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라.

(志行上方 分福下比)

- 이원익의 좌우명 -

영남사람들이 이원익과 류성룡을 두고 말했다.

‘이원익은 속일 수는 있지만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류성룡은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가 없다'.

(嶺南人稱完平西厓曰:完平可欺而不忍欺, 西厓欲欺而不可欺.)

- 남학명(南鶴鳴ㆍ1654년 ~ 1722년)의 <晦隱集>(회은집) -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조선시대 인물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실무형 관료 중 1명. 서로 다른 정치 세력에 의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인조가 모두 첫 영의정으로 선택한 인물. 보통 야사 등에서 호를 사용해 '오리 대감'이나 '오리 정승'으로 부르는 인물.[3] 자는 공려(功勵),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전주. 태종의 왕자 익녕군 이치(益寧君 李袳)의 4세손. 경기도 금천현(현 광명시) 출생.[4]

2. 생애


명재상으로 유명한 동고 이준경의 문인으로 1569년(선조 2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있었다. 성품이 소박하고 조용해 사람 사귀기를 즐기지 않아 공적인 일이 아니면 나오지 않았으므로 이원익을 아는 이가 없었으나 류성룡만은 이원익의 슬기로움을 알고 존경하였다. 1573년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성절질정관(聖節質正官)이 되어 하사(賀使) 권덕여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온 1574년 예조랑(禮曹郞)에서 뽑혀 종5품 황해도 도사(都事)가 되어 병적(兵籍) 정비에서 실력을 발휘했다.
이 때가 율곡 이이가 황해감사로 있을 때여서 이이의 신임을 얻었으며[5] 후에 이이가 천거하여 1576년 정6품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고 1578년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1583년 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왕자사부 하낙승정원이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고 상소함으로써 책임을 지고 파면되었다.
1587년 평안도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안주(安州)에 전염병과 기근이 닥쳐 폐촌(廢村)이 될 지경에 이르자 이조참판 권극례(權克禮)가 이원익의 실무 능력을 이유로 추천해 정3품 안주목사에 기용되었다.[6] 이원익은 우선 양곡 1만석을 동원해 기민(棄民)을 구호하고 곡식 종자를 마련하는 한편 백성들에게 누에치는 법을 가르치고 권장해 재활에 힘썼고 피폐해진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자 번상병제의 교대 기간을 3개월에서 2개월로 줄였는데 성과가 뛰어나서 이 조치는 후에 윤두수의 건의로 전국에 확대 적용될 정도였다.
그 후 종2품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2품 이조판서로서 평안도 도순찰사를 겸직하여 선조가 피란하는 길에 앞장섰으며 흩어진 군사를 모아 적과 싸웠다. 또한 곽재우 등의 의병장과 교류하여 이를 위무하였고 한산도에서 열심히 자력갱생하고 계시던 이순신과도 통하여 후에 이순신이 선조의 정략에 휘말려 삼도수군통제사 관직을 박탈당하고 참수당할 위기에 처하자 정탁, 당시 도원수 권율과 함께 이순신을 극력 변호하였다.[7][8]
1599년에는 평양 탈환 작전에 공을 세워 영의정이 되었으나 북인의 맹렬한 공격을 받은 류성룡을 변호하다가 함께 사직했다. 이후 소하리 선산(先山)에 가 있었으나 1600년 다시 소환되어 이항복의 뒤를 이어 좌의정이 되었고 1604년 비로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피봉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영의정이 되고 1608년 대동법을 건의하여 시행하도록 하였으며 불합리한 세금 제도를 고치게 하고 군사 제도를 개혁하였다. 1615년 인목대비 폐모(廢母)론을 반대하다 홍천유배되었으며 1619년 풀려나왔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 중신이자 인망이 있다는 이유로 남인임에도 불구하고 영의정직에 올랐다. 이후 광해군 정권에 대한 처벌과 관련된 논쟁에서 온건파로서 광해군 정권의 핵심 인물들만 처벌하고 단순 가담자는 봐주자는 의견을 제시해 민심을 수습해야 했던 인조 정권으로 하여금 광해군 정권 인사들에 대한 보복의 강도를 감소시키는데 공헌하였다. 그러나 이괄의 난이 일어나면서 전후에 기자헌을 위시한 중북(인조반정에 참여하거나 우호적이었던 북인 세력)이 대거 숙청되자 공주에서 늦게 소식을 접한 이원익은 "이제 나도 폐물이 되었구나. 수십 명씩 죽었는데도 알지 못했으니."라며 혀를 찼다고 한다.
야사에서는 인조반정 직후 살기등등한 반정군 사이를 유유히 지나 유폐되어 있던 광해군에게 '왜 자기 말을 듣지 않았냐'면서 눈물을 흘리자 광해군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궜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인조에게 "광해군을 사사한다면 자신도 관직에 더는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고도 하는데 애초에 둘 다 야사일 뿐이며 광해군을 살리는 건 인조를 포함한 반정 측 인사들의 공통된 합의였기에[9] 딱히 그런 발언이 대단한게 아니라고는 하지만 새로운 왕과 그 무리를 두고 쫓겨난 왕에게 예를 다한 점은 범상한 게 아니다.
인조반정 직후 영의정에 올라 인조가 '당장 해야 하는게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군사를 정비하는 것이나 인사 문제보다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민생 안정에 있어서는 공납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이다'는 요지의 건의를 하여 3도 대동법(시행 지역 :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시행을 주장했다. 그러나 전결 파악의 미비, 거듭된 흉년으로 인해 더 확대되지 못한채 강원도 일대만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으며 자신도 대동법 철폐를 주장하기에 이른다.
1624년 이괄의 난 때에 공주로 피란하는 왕을 모셨으며 정묘호란 때에는 도체찰사로 세자를 호위하여 전주로 갔다가 강화도로 와서 왕을 호위했다. 서울로 환도한 뒤 훈련도감 제조에 제수되었으나 고령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고 오리곡(지금의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으로 낙향했으며 여러 차례 왕의 부름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1634년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10] 사후 인조의 사당에 함께 모셨다. 빈소에 소현세자가 직접 조문했다고 하는데 저서로 《오리집》 등이 있다. 묘는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있으며 묘 주변에 이원익을 기리는 충현박물관과 충현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원익의 호를 딴 도로인 오리로가 묘역 주변을 지나간다.

3. 사상


사상적으로, 이원익은 공리공론에 머물지 않고 실제적으로 정치행정에 활용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같은 사상은 최초로 대동법 시행을 정책적으로 실현한 면모를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연풍 현감으로 부임하는 손자에게 내려준 지침에는 마음가짐을 비롯하여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방법, 쓸데없는 일을 벌이지 말 것을 당부하는 내용 등 실질을 숭상하는 모습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유서를 비롯한 유훈에는 풍수설에 구애받지 말고 소하동 선산에 안장할 것을 당부하였고, 재물로 가족들이 화목하지 못함을 경계하여 불의한 재물을 모으지 말 것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

손자에게 내려준 지침 전문 (서여손수약부연풍현, 書與孫守約赴延豊縣) 출처

1.너의 아버지는 전후 고을을 맡을 때마다 청렴과 간명簡明으로 백성을 보호한다고 여러 번 임금에게 알려졌다. 너는 네 아버지의 아들이니, 마땅히 마음에 새겨 자신을 가지고 집안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말라.

2.세상을 다스리는 데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몸을 닦는 데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3.천하의 실정을 안 다음에야 천하의 일을 이룰 수 있다.

4.일에 임했을 때 지나친 분노를 경계하고, 서서히 일의 실정을 파악하라.

5.사람을 다스림에 상벌이 없을 수가 없으니, 착한 자에게는 상을 주고, 악한 자는 벌을 주어야 한다.

6.하나의 이익을 일으키는 것이 하나의 폐단을 제거하는 것만 못하고, 한 가지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한 가지 일을 줄이는 것만 못하다.

7.읍중에 일이 있거든 노련한 관리와 연로한 인민에게 물어서 인정에 합하기를 힘써야 하고, 거만을 부리고 자신이 옳다고 하여 민심을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

8.백성은 마땅히 어루만지고 은혜를 베풀어야하고, 관속을 대우하는 것도 너무 각박하게 해서는 안 된다.

9.모든 일은 마땅히 때에 따라 마음을 다해야 한다. 어찌 일일이 지휘할 수가 있겠느냐?,


4. 여담


  • 청백리하면 으레 거론되는 위인 중 한 명이며 당파로는 남인에 속해 있었으나, 성품이 원만하여 반대파로부터도 호감을 받았다. 위의 이준경의 문인으로 이이로부터 극찬을 받았다는 것부터가... 당시 선비들은 이원익을 두고 "이원익은 속일 수는 있지만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류성룡은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가 없다." 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나중에 쫓겨났을 때는 남자 백성들이 윗통을 벗어서 그가 밟는 길에 놓았으며 모두 통곡했다고 한다.
  • 단신으로 유명하다. 키와 관련된 야사가 좀 많은데, 한 야사에 따르면 관직에 오른지 얼마 안되었을 당시에 영의정 이준경이 그를 천거하면서 몸이 약해 산삼 20근은 족히 먹여야 하지만 빈궁하여 그러질 못하고 있다고 하자 선조는 즉시 산삼 20근을 내렸다. 그 후 벼슬길에 오른 신임 관리들을 친견하는 자리에서 이원익의 모습을 보고자 하니, 이준경이 "이원익은 키가 매우 작으니, 발돋움하셔야 보일 것입니다" 하니 정말 그러했는데 이 모습을 본 선조는 "아까운 산삼만 버렸구나"라며 웃었다고 한다. 그의 키는 기록에 따르면 3척 3촌(사실이라면 1미터도 안된다) 정도라는데, 이걸 믿어야 할지 어떨지...[11]

구글 프로필에는 137cm로 나왔다.
다른 버전에서는 명종이 산삼 20근을 주고 "아까운 산삼만 버렸구나"라고 웃고 훗날 임진왜란이 터진 후에 이원익이 종횡무진 활약하자 선조가 "선왕께서 잃어버린 산삼을 이제야 찾았구려"라고 했다고 한다. 이쪽이 더 재밌고 전후 관계가 딱딱 들어맞긴 한데 앞서 기술했듯이 이원익이 벼슬에 오른건 선조 2년이다. 야사는 야사일 뿐, 판단은 각자 알아서...
다른 야사에 따르면 그도 키가 작은 것에 컴플렉스가 있었는지 젊을 적에 한 치(약 3cm)가 되는 나막신을 신고 다녔는데, 그것을 본 관상쟁이가 "아깝다, 키가 딱 한 치만 작았으면 영의정이 될 상인데."라고 하며 혀를 찼다고 한다. 그러자 이원익은 그 자리에서 나막신을 벗었고, 관상쟁이는 미래의 영의정을 뵙는다며 절을 올렸다고 한다.
  • 벼슬에 오른 후 중국어를 익혔다고 한다. 어찌나 열심이었던지 퇴근 후에는 집에 틀어박혀 얼굴을 볼 수 없기에 주변에서 처자정자(處子正字)[12]라 부르며 놀렸으나 동기인 강서[13] 혼자만이 "너희들은 이원익에 미치지 못한다. 이원익은 훗날 나라가 어지러울 때 정승이 되어 큰 일을 할 것이다."라고 홀로 변호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명나라에 갔을 때 직급이 낮았기 때문에 역관들조차도 무시하고 때론 중국어로 놀리기까지 했는데도[14] 성품이 온화했던 이원익은 잠자코 넘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명나라에 도착하자 명나라 예부 상서를 만나 통역도 없이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하며 일사천리로 일을 끝마치자 이때까지 이원익을 무시하던 역관들이 두려워하고 감복했다고 한다.
  • 아버지의 약을 구하기 위해 의원을 찾아가 약을 지었는데 하필 의원이 각기병에 걸려서 거동이 불가능한 상태라 매번 직접 찾아갔다고 한다. 때문에 의원의 집에서는 이원익이 벼슬아치인줄도 몰랐다고 한다.[15]
  • 영의정 시절 야사. 한 번은 이원익이 사가에 다녀올 일이 있어 길 안내할 아이 하나만 데리고 길을 떠났다. 길을 가던 도중 주막에서 국밥으로 요기를 하는데 하필이면 그날 그 고을에 신임 사또가 행차한 날이었다. 사또는 주모에게 진수성찬을 차려오라 강요했고 주모는 할 수 없이 쌀과 고기를 빌려다가 사또의 상을 차렸다. 그런데 정작 한 상 잘 차려먹은 사또는 주모에게 음식값 한 푼 주지 않고 그대로 가버렸다. 이에 대노한 이원익은 곧장 관아로 가 사또를 크게 질책하고 직첩과 관인을 도로 빼앗았다고 한다. 즉 부임한 그날 바로 짤린 것.
  • 유배 당시에는 별로 할 일이 없자 서툴게나마 돗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원익 본인이 말하기를,

"글과 친하려니 노후(老後)가 가까웠고, 글씨나 시를 즐기자니 혼자서 하기는 겸연쩍다. 사람들과 모여서 즐기자니 어울릴 만한 사람도 없다. 그렇다고 장기나 바둑은 악습(惡習)이라 좋아하지도 않는다. 반면 돗자리를 짜면서 소일하면 백 가지 잡념이 가라앉곤 한다."[16]

나이가 일흔이 다 되어서 늦게 배운 솜씨라 서툴렀지만 계속 이것만 만들다보니 나중에는 제법 실력이 늘었고 그렇게 만든 돗자리를 거리낌없이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냥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배가 풀리면서 영의정이 되자 유배 당시에 그가 만든 돗자리는 영상 대감이 만든 돗자리로 알려져 값이 엄청 올라 그냥 받은 돗자리를 5백냥이나 되는 거액에 판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 이름하야 영상수직석(領相手織席).
  • 그리고 약 250년이 지나서 흥선대원군도 어느 선비가 낡을대로 낡은 돗자리를 선물했기에 "이게 뭔가?" 했더니 오리 이원익 영상 대감이 손수 지은 돗자리라는 답변에 놀라워하며 아꼈다고 한다. 다만 돗자리가 250년간 버틸 가능성은 없으니 사기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현재는 이원익이 만든 돗자리는 남아 있지 않다.
  • 그 외에 길을 가다 동전 한 닢을 깊은 내에 빠트리자 지나가던 백성 둘에게 각각 한 닢씩 사례금으로 주고 내에 들어가 빠진 동전을 찾아냈다. 이걸 보고 사람들이 동전 한 닢을 위해 동전 두 닢을 썼으니 손해라고 말하자, 물에 빠진 동전 한 닢은 그대로 두면 죽은 돈이 되지만 이렇게 건져내고 또 그를 위해 쓴 사례금 두 닢은 돌고 돌아 경제에 공헌할 테니 손해가 아니라고 말하여 그 시야의 넓음에 모두들 감탄했다고 한다.
  • 어찌나 청렴한 생활을 했던지 다 쓰러져가는 방 두어칸의 초가집에서 살았고 말년에 인조가 그 청렴함을 높이 사 5칸짜리 집을 하사했다. 관값마저 없어 결국 나라에서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한다.
  • 출생지인 경기도 광명시에 가면 이원익 관련 박물관인 충현박물관과 함께 그의 묘소가 있다.[17] 다만 이원익의 고택은 일제 강점기에 다시 중건된 것. 또한 그의 호를 딴 도로명인 '오리로'가 있다. 종택인 관감당은 과거 문이 잠겨있었으나 충현박물관 개관과 함께 개방되어 일반인들도 관람이 가능하다.
  • 나이에 비해 백발이 많았다고 한다.

5. 대중 매체에서


지금까지 대중 매체에서는 서궁, 왕의 여자, 불멸의 이순신징비록, 그리고 화정에서 다루어졌다.
서궁에서는 관록의 노배우 신구가 열연했다. 연기력이야 말할 필요도 없고 당시 중신의 위치에 있었으면서 청백리로도 통했던 이원익의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 드라마에서 돗자리 짜는 장면도 나온다. 한쪽이 다 헤진 정자관을 쓰고 바지, 저고리만 입고 흙방에 앉아 돗자리를 짜는데 싱크로율이... 그러면서도 이이첨 역의 서인석, 광해군 역의 김규철에 밀리지 않는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왕의 여자에서는 중견 배우 강인덕[18]이 연기했다. 배우의 풍채가 상당히 좋은 편이어서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 자체가 초상화와는 전혀 딴판이었고, 배우의 필모에서도 드러나듯 주로 맡아온 배역들이 선 굵은 용장이어서 이원익의 내면적인 이미지(?)와도 괴리가 좀 있다는 평을 듣는 편.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중견 배우 윤덕용[19][20]이 연기했다. 전형적인 문신 이미지이기는 한데, 드라마 포커스 자체가 이순신에 집중되어 있다보니 별다른 비중은 없는 편. 거기다 실제 역사에서 이순신을 옹호하였던 이원익과는 달리, 류성룡이 이순신을 옹호하려 하자, 그걸 말린다(...).
그런데, 이원익은 임진왜란 당시 46세로, 류성룡(임진왜란 당시 51세)은 물론 이순신(임진왜란 당시 48세)보다도 나이가 어린 인물이어야 하는데, 위 드라마들에서 이원익 역할을 맡았던 강인덕이나 윤덕용은 전부 50대~60대의 중견 배우들이라 갭이 좀 심하다. 그나마 왕의 여자는 출연진 전체의 평균 연령이 높아서[21] 그나마 괜찮았지만, 불멸의 이순신의 경우에는 류성룡보다 위의 연배로 보인다. 아니 아예 까놓고 말해서 정탁[22]과 동년배로 보인다.
징비록에서는 배우 김정학[23]이 맡았다. 위의 드라마들에 비해 확실히 젊은 연령의 배우가 연기한다.
화정에서는 가수 겸 배우 김창완[24]이 연기했다. 이 드라마 자체가 왜곡이 좀 심한데(...) 우선 외적으로는 미염공의 간지 넘치는 수염을 자랑했던 이원익의 초상화와는 딴판으로 수염이 매우 적고, 짧다(...). 흰칠만 안했으면 이덕형보다 연소해보인다(...). 거기다 광해군 대에도 대동법(당시에는 선혜법) 실시에 있어서 영향을 미쳤던 이원익의 공이 이덕형에게로 넘어갔다(...).[25]

6. 관련 문서



[1]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대부분 얼굴 방향이 왼쪽을 향하도록 그려졌는데 왠지 이 초상화는 오른쪽을 보도록 그려졌다. 한국사에서 오른쪽을 향한 초상화는 고려시대나 조선 말기에나 그려졌다. 이제현과 이색의 초상화나, 채용신을 비롯한 구한말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화가들은 그동안의 전통을 깨고 오른쪽 측면상이나 정면상을 많이 그렸기 때문이다.[2] 충무공 이순신이 맞다.[3] 동물 오리가 아니다. 오동나무 마을이란 뜻의 '梧里'를 사용했다. 수도권 전철 분당선 오리역한자가 같다.[4] 실제 출신지는 한성부. 금천현은 선산이 있던 곳이다.[5] 이이가 이원익에게 모든 일을 다 맡겼을 정도라고 하는데 "일과 시간에는 내 일을 돕고 네 직무는 일과가 끝나면 해라"라고 했다고 한다.[6] 윤승운맹꽁이 서당에서는 해당 일화를 소개하며 이 때의 일로 인해 '명망 높아 안주 목사'란 말이 생겨났다고 전한다.[7] 후일 인조와 대화하던 중 이 일에 대해서 이원익이 회상하길 "이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분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을 정도였다.[8] 류성룡은 뭐했느냐 하는 사람도 있는데 당시 류성룡은 이순신 비판에 가담했다. 다만 이순신에게 악의가 있는 건 아니었고 당시 남인의 영수로서 선조가 이순신을 미워하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이 무조건 이순신 편을 들면 이순신과 남인 자체가 위험해질 수 있어 어쩔 수 없이 구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비판에 가담한 것이다. 다만 못해주면 못해준거지 자신이 이순신을 모른 척한 이야기를 징비록에서 은근슬쩍 빼는 치졸한 모습을 보인다. 전후 가장 처음 남긴 기록인 난후잡록에는 이때 뇌물을 써서 이순신을 구명할 수는 없을까하고 찾아온 이순신의 조카 이분에게 '왜 나한테 그런걸 물어보냐'고 퉁명스럽게 말하고 돌려보낸 기록이 있는데 난후잡록을 바탕으로 쓴 징비록 초본에는 이 대목이 지워졌다. 써놓고 보니 자기한테 누가 될 거 같아 슬쩍 빼버린 것이다.[9] 광해군을 죽이자고 주장한 건 자기 아들인 영창대군이 비명에 간 인목대비 뿐이며 이에 대해 반정 수뇌부는 '걸, 주가 폭군이었지만 탕, 무는 단지 이들을 추방하는데 그쳤다(그런데 걸왕이 유배당한 건 기록에 남아있지만 주왕의 경우 이들의 주장과는 다르게 상나라 멸망이 확정된 이후 스스로 분신해 목숨을 끊었으며 시신은 무왕에게 목이 베였다).'거나 '중종연산군을 살린 전례가 있다.'면서 인목대비를 뜯어말렸다. 근데 진짜 광해군을 죽였다면 새로운 반역이 일어나 '너도 반역을 일으켜 왕을 죽였는데 나라고 못할쏘냐?'하고 하극상이나 반역이 일어난다. 옛날 중국에서 군주를 시해하고 군주에 오른 자들은 말로가 좋지 않았다. 설사 제위에 무난히 올랐다 하더라도 후손들에게 악영향을 미쳤다.[10] 이원익이 남긴 재산은 두어칸 낡은 집.[11] 다만 세종 대왕이 제정한 옷감을 잴 때 쓰는 포백척은 길어서 46.7cm 정도 된다. 포백척으로 계산하면 144.7cm가 된다.[12] 양갓집 규수처럼 얼굴 보기 힘든 사람이란 의미. 정자(正字)는 당시 이원익의 관직명이다.[13] 난곡 강서를 이른다. 강서는 모나지 않은 성품으로 이원익과 친했고, 여러 실무직을 거쳐 승지를 지냈다. 관악산 자락에 있는 난곡 공원이 이 사람의 호를 딴 것. 동생 강신도 여러 요직을 맡았는데, 그의 아들이자 강서의 조카가 바로 강홍립이다. 강서 본인은 정여립의 난을 예언했다고 하며 전란 3년 전인 1589년에 졸했다.[14] 조선시대 관리들은 한문을 익혔기 때문에 중국인과 의사 소통이 가능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필담에 해당되고 중국어를 말하고 듣는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하는게 일반적이었다.[15] 조선시대 양반이라면 잡일은 아랫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 조선시대 양반은 다리 6개가 아니면 외출을 하지 못한다는 말 또한 있다(말이나 노새의 다리 4개와 노비의 다리 2개...).[16] 더불어 조선시대 때 가난한 양반들은 돗자리를 짜 팔아서 입에 풀칠했다고 한다. 시대상 장사나 막일 같은건 양반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농사 짓는 것은 농본주의인 유교 이념상 양반 체면에 딱히 어긋나는 일이 아니니까 그나마 괜찮았지만, 농사도 자기 땅이 있어야 짓는 것이었고. 참고 사실 돗자리 짜다가 황제 된 양반 보면 알겠지만 과거부터 글 줄 깨나 익혔는데 생계가 막막한 사람들이 즐겨 찾던 유구한 호구지책이기도 했다.[17] 박물관과 묘소는 소하동에 있는데, 소하동에는 이원익의 선산이 있으며 충현박물관과 함께 참배가 가능하다. 참고로 충현박물관은 후손들이 세운 곳이다.[18] 용의 눈물에서 이지란, 태조왕건에서 유금필, 공화국 시리즈에서 김두한을 맡았다.[19] 2001년 명성황후에서 홍영식의 아버지인 홍순목을 연기한 바 있다.[20] 드라마 초반에 잠시 나왔다 사라진 '오상(吳祥)' 역할을 연기하기도 해서 1인 2역. 오상은 선조 초반기까지 활동했던 문신이다. 극중에서 정말 공기 비중(...).[21] 실제로 5살 차이가 나는 류성룡 역할을 강인덕보다 2살 많은 허현호가 했다.[22] 심지어 당시 정탁 역을 맡은 배우 임혁주는 윤덕용보다 13살이나 어리다(...).[23] 대왕세종에서 김문, 연개소문에서 알천을 연기한 바 있다.[24] 웃기게도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는 선조를, 드라마 일지매에서는 인조를 연기한 배우다.[25] 삼도 대동법 철폐를 주장했던 만년을 제외하면, 이원익은 시종일관 대동법 실시를 생각했고, 정승 반열에 오른 뒤 실시를 위해 항상 앞장섰던 인물이다. 심지어 한때는 반대도 다 씹고 대동법 실시를 하자고 나섰다. 완전히 역사를 왜곡한 것. 아예 여기선 대놓고 광해군이 대동법 실시를 추진하고 그걸 위해 이덕형을 영의정으로 삼는 것이 나온다. 심지어 '대동법은 대감의 숙원'이라는 소리까지. 실제 이덕형은 이항복과 더불어 대동법에 비관적이었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