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창대군

 



'''조선 선조의 왕자'''
'''영창대군
永昌大君'''

'''군호'''
영창대군(永昌大君)[1]
'''본관'''
전주(全州)
'''이름'''
의(㼁)
'''부왕'''
조선 선조
'''모후'''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 金氏)
'''자녀'''
1남[2]
'''생몰
기간
'''
'''음력'''
1606년 3월 6일 ~ 1614년 2월 10일
'''양력'''
1606년 4월 12일 ~ 1614년 3월 19일
'''묘소'''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
1. 개요
2. 출생 과정
3. 출생 당시의 정치적 상황
3.1. 북인 집권기
3.2. 선조의 실추된 권위
3.3. 적장자 계승 원칙의 반례
3.4. 종법적으로 문제 없었던 광해군의 즉위
3.5. 광해군과의 나이 차이
3.6. 어린 왕자의 입지
3.7. 선조의 죽음
4. 9살의 짧은 생을 마감하다
4.1. 영창대군 사망의 전말
5. 결론 : 인조반정을 일으킨 어린 아이
6. 가족
7.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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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선조의 14왕자 중 13번째 왕자이자 인목왕후의 소생으로, 선조의 유일한 적자(嫡子)이며 정명공주의 친남동생이다.
어린 나이에 죽었지만 존재 자체로 광해군에게 폐모살제(광해군이 소성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죽인 것)를 저지르게 하여, 그가 인조반정으로 쫓겨나는 가장 큰 명분을 제공했다는 데서 그 존재감은 적지 않다.

2. 출생 과정


선조는 정비 의인왕후 박씨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두지 못했다. 대신 후궁들에게서 13남 10녀라는 많은 서자를 두었는데, 그중 가장 총명하다고 평가받는 2왕자 차남 광해군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임시로 세자로 삼았다.[3]
전쟁이 끝나고 의인왕후 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자신이 직접 말을 꺼내 연안 김씨 가문 김제남의 차녀를 계비로 맞았는데 그녀가 인목왕후다. 당시 선조는 51살, 인목왕후는 19살이었다.
승하하면 세자가 뒤를 잇는 왕과 달리, 내명부의 수장인 왕비는 자리가 비면 왕이 다시 가례를 올리는 것 말고는 들여올 방법이 없다. 따라서 왕비가 왕보다 먼저 사망하여 자리가 비면 왕이 재취하는 것은 특별한 게 없는 일이었지만[4] 전란으로 혼기를 놓쳐 당시 기준으론 나이가 있었던 인목왕후를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칠서의 옥 이후 대북과 원수가 되면서 완전 서인으로 분류되긴 했지만, 선조 시절 김제남은 유생들이 자기들끼리 무리짓는데 거부감을 느끼고 잘 어울리지 않았던 서인 무당파적인 인물이었고,[5] 가문 자체(연안 김씨)도 김안로가 몰락하면서 완전히 기울어 외척으로서 세도를 부릴 위험이 적었다. 또한 김제남의 첫째 사위 심정세가 인빈 김씨 소생 능양군(훗날 인조)의 이종 사촌이고 심정세의 아버지 심엄이 광해군의 처남 류희발과 인척이라, 기존 왕실 구성원들과 잘 섞일 수 있다 판단했을 것이다.[6] 아무튼 인목왕후는 1603년 정명공주를 낳고, 1606년 영창대군이 되는 왕자 이의를 낳았다.
흥미로운 점은 왕자 이의는 사실 선조 생전에 대군으로 봉해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극 등에서 선조 시대에 '영창대군' 운운하는 대사가 나온다면 고증 오류다. 워낙에 영창대군으로 알려져 있기에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처사긴 하겠지만. 적자였으나 '원자'는 결코 아니고 대군도 아니었는데도 탁소북에 의해 세자와 왕위계승 가능성이 점쳐졌으니 그야말로 억지스러운 일이었다. 광해군은 비록 출발은 대군도 아닌 군이었으나 영창대군이 태어났을 당시에는 동궁, 즉 세자로 상황이 매우 달랐다.

3. 출생 당시의 정치적 상황



3.1. 북인 집권기


왕자 이의, 즉 영창대군이 휘말린 소용돌이를 파악하려면 임진왜란 전후의 붕당 정국과 선조의 추락한 권위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임진왜란 직후 집권당은 북인이었는데 전쟁 기간 동안 강경책을 제시했고 정인홍, 곽재우 같은 조식의 제자들이 낙동강 서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면서 손쉽게 집권당이 되었다. 집권당이었고 향촌 거점인 영남 동부가 왜군에게 짓밟힌 남인류성룡, 김성일 등 조정과 정규군을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류성룡이 종전을 앞두고 주화오국했다는 북인의 탄핵과 류성룡과 조목의 대립으로 촉발된 남인 자체의 내분으로 실각한 상황이였다.
서인 역시 의병장은 다수 배출했지만 정철 (1593년 卒), 성혼 (1598년 卒), 윤두수 (1601년 卒)같이 당파를 이끌 거물 정치인들이 차례로 병사하고, 조헌, 고경명, 김천일 같은 서인계 의병장 대부분이 금산 전투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해버려 성격이 불같은 이귀나 당색이 옅은 김류 정도를 빼고는 한동안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전쟁 이후 집권당이 된 북인은 분열한다. 홍여순의 대사헌 임명건을 둘러싸고 남이공, 김신국과 홍여순이 대립하면서 북인은 소북대북으로 나뉘었고 남이공, 김신국이 파직되며 대북이 우위를 점했다. 대북은 다시 이산해 중심의 육북, 홍여순 중심의 강경파 골북,[7], 류몽인 중심의 중도파 중북으로 나뉘었다. 이에 선조는 견제 차원에서 소북의 대신 유영경을 영의정으로 삼아 힘을 실어주었다. 유영경의 권세가 강해지자, 소북 내에서 다시 반발하는 인사가 나와 남이공 중심의 청소북[8]과 유영경 중심의 탁소북[9]으로 나뉘었다.

3.2. 선조의 실추된 권위


한편 선조임진왜란 이후 땅에 떨어진 권위로 고심하고 있었다. 파천도 파천이었지만 전쟁 중에 왕이 요동으로 망명을 추진하거나 이순신을 파직시켜서 수군을 궤멸시키고 삼남 지역을 통째로 내줄 뻔 하는 등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 때문에 신하들이 선위를 요구하는 반역에 가까운 일이 발생했다.
평양을 나와 평안북도 의주로 튀던 중 선천에서 류성룡정철이 선조에게 직접적으로 양위해줄 것을 요구하려 했다가 서로 말을 못 꺼내서 실패했고(선조실록 1592년 6월 18일) 선조의 충신이었던 이항복이덕형조차 분조 후 즉위한 당숙종의 사례를 거론하며 대놓고 선위를 주장했다. 당시 선조는 요동까지 피난하려 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나올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유생 남이순·송희록은 선조에게 직접적으로 "선위하고 물러나라"는 상소까지 올렸다.
반면 세자 광해군임진왜란 기간 분조 활동을 통해 선조가 위협을 느낄 정도로 권위가 강해져 있었다. 더군다나 임진왜란 이후 집권당은 정인홍 같은 광해군 절대 충성파가 다수 포함된 북인이었다. 서인정철은 아예 광해군을 염두에 두고 건저의 문제를 일으켰고, 이귀 역시 광해군을 호종했다. 남인도 당장 수장 류성룡개경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만든 사람이었으니, 광해군 지지파에 가까웠다.
다른 왕자들을 살펴보면 선조가 가장 총애하던 4남이자 인빈 김씨의 장남 신성군은 이미 전쟁 중에 병사했고, 그나마 나이가 찬 장자 임해군, 정원군, 순화군은 왕자가 아니었다면 진작 사약 마시고 죽었을 강력 범죄자들이었다. 결국 광해군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붕당의 고른 지지를 받고 있었고, 그 때문에 결국 자의든 타의든 광해군은 선조의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선조로선 왕 노릇을 계속하기 위해서라도 광해군을 어느 정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마다 선위 카드를 꺼내들어 선수치고 후세 사람들이 보기에는 굴욕적일 정도로 명나라에 기대는 방법으로 어떻게든 권위를 끌어 올리려는 무리수를 썼지만 당연히 한계에 부딪혔다.
이런 와중에 선조는 50살이 넘어서 적자 이의를 낳았고, 유영경을 중심으로 한 극소수 탁소북이 왕자 이의를 지지했다. 그리고 선조는 광해군 견제를 위해서 탁소북을 키우게 된다. 아버지가 아들을 경계해 견제한다는 게 언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왕조 국가에서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았다.[10][11][12]

3.3. 적장자 계승 원칙의 반례


따지고 보면, 세자의 경우 적장남이 되는 게 우선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례가 꽤 많았다. 조선 초 대표적 사례로는 태조의 막내 아들 폐세자 (의안대군) 이방석과 정종의 아우인 태종, 태종의 3남인 세종인데, 간략히 상황을 따져보자면,
  • 의안대군은 막내 아들이고 나이도 어렸지만, 조선의 건국 이념과 건국 주도 세력의 의중이 작용했다. 조선 건국을 주도한 정도전과 그를 지지해준 태조는 새 왕조가 모든 면에서 구 왕조와 완벽히 결별하길 바라며 급진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세자 책봉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다음 왕이 흔들리지 않고 건국의 이념을 계승해 가려면 고려 구 세력과 이어지지 않아야 된다고 보았다. 신의왕후 소생 5왕자는 건국 과정에서 제각기 공이 있었으나 태조가 고려 정계의 일원이었던 시절에 혼기가 찼던지라 권문세족으로 통칭하는 고려 구 세력과 혼맥으로 밀접히 이어져 있었다.[13] 남는 건 왕비의 자식이면서 아직 혼인을 하지 않아 고려 구 세력과 뚜렷한 연결고리가 없는 이방석 뿐이었다. 자연스럽게 방석이 건국 이전부터 세자로 낙점되었다.[14] 현 왕비의 자식이고 동복형 이방번은 처음부터 경쟁 대상이 못 되었으며[15], 고려 제일의 무장이었던 건국자 태조정도전, 남은 같은 핵심 공신들, 매형 이제 등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기반이 약하지도 않았다.
  • 태종정종의 아들이 아니라 동복 동생이다. 적장자 계승을 명분으로 왕위에 오른 정종에게 적장자가 없다는 점을 노려 일어난 2차 왕자의 난에서 승리한 태종은, 정계를 장악하고 형의 양자가 되어 적장자 계승 명분으로 왕위를 승계했다. 다만 이 명분을 끝까지 끌고 가지 않고 정종을 슬쩍 묻어버리며 택현(擇賢)을 명분으로 세워 족보를 정리하고 자신을 실질적인 창업주로 내세워 권위를 강화한다.
  • 을 밀어내고 즉위한 세종은 태종이 세자였던 양녕대군을 폐하고 세자로 세웠는데, 그전에 양녕을 지지할 만한 외척 세력과 경험이 부족한 세종을 뒤흔들 공신 세력이 모두 제거되었다. 태종 본인의 즉위 명분이 택현(擇賢)이었으며 무엇보다 양녕이 수 년 간 쉬지 않고 파행을 저질러 명분을 그야말로 퍼다줬다. 게다가 즉위 후엔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이 사돈 심온을 사사하여 조정을 한 번 더 정리해줬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적장자보다 약한 정통성을 보완해 줄 기반이 확고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세자 이방석신덕왕후의 사망과 태조의 병환이란 변수 아래 쟁쟁한 이복형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무인정사(1차 왕자의 난)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더욱이, 세조 이후에는 적장자 계승이 손에 꼽는다.
이 경우는 세조의 경험(...) 때문인지, 어리고 뒷배경이 약한 후계자 대신에 어느 정도 장성했고 지지 세력이 튼튼한 후계자를 선정했다. 월산군은 세조 당시에는 너무 어린 불과 3살, 제안대군 역시 예종의 사망 시 4살에 불과했다. 둘 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였기 때문에 제2의 단종이 될 가능성 때문에 밀려났다. 성종월산대군보다는 어렸지만 당대 최강의 실력자이자 세조의 오른팔 한명회를 장인으로 두고 있었다는 든든한 정치적 배경[16] 덕분에 비록 어린 나이에 왕이 되더라도 당시 왕실어른 이였던 정희왕후, 인수대비, 인혜대비가 있어서 지지 기반이 튼튼했다.
적장자 계승 원칙이 절대 불변의 확고한 법칙이었다면 모를까 이미 조선 초부터 적장자 계승 원칙은 이처럼 수많은 예외를 가지고 있었다. 세조 이후 후계 선택을 보면 알겠지만 왕실의 안정을 위해서 적장자 여부보다 나이와 왕위 등극과 집권을 지지할 지지 기반이 더 중요했다.
그리고 적장자 계승 원칙이 유교적으로 최고의 원칙도 아니었다.[17] 유교 질서에서 장자 상속이라는 체제가 강조되지만, 유학에서 정치적으로 더 중요한 건 바로 성인(聖人)에 의한 통치였다. 왕과 대신들도 성인이 되어서 성인의 통치를 하기 위해서 유학을 배웠다. 그렇기 때문에 논리상 진짜 성인이 나타나면 그에게 통치를 맡기는 게 맞았다. 유학에서 이상적인 정치로 꼽는 요와 순은 혈족 계승이 아니라 뛰어난 타인에게 계승한 것이었고, 고대 중국에 이런 면면은 유학적 이상향으로 이후 수많은 찬탈의 사상적 근원이기도 했다. 즉, 이론상 능력 위주로 후계자 뽑는 게 맞고 실제로 세종도 능력으로 후계자가 되었다. 후술하지만 광해군은 왕자 시절부터 왕의 자질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어 대신들의 지지를 받았고 전쟁 중에 훌륭하게 증명해냈다. 그런데 검증도 안 된 꼬맹이와 교체하려고 시도하는 건 무리였다.

3.4. 종법적으로 문제 없었던 광해군의 즉위


단종은 정통성이 강력했던 왕이었음에도 단지 어리고 지지 기반이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찬탈이 벌어졌다. 왕자 이의의 후계로 더 취약해지면, 왕실 내 찬탈이 문제가 아니라 진짜 역성혁명 가능성도 있었다. 세조 대의 예만 들어도 왕실 안전을 위해서는 나이로 보나 지지 기반으로 보나 광해군이 후계자로 더 알맞았다.
선조가 정말로 광해군을 폐하고 왕자 이의에게 후계자 자리를 물려주려 했을 가능성은 낮다. 세자와 10년 이상 '''정적'''으로 지내면서 위태위태하게 왕권을 지켜온 터라 늘그막에 얻은 아들로의 후계 교체는 한 번쯤 고민했을 가능성은 있고 뒤의 행적으로 보았을 때 어느 정도 냄새는 풍기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여지가 없었다. 권위가 바닥을 쳐 십수 차례 선위 파동을 일으킨 마당에, 10년 넘게 아무 문제 없이 능력을 인정받은 세자를 2살짜리와 교체하는 무리수를 두는 건 불가능했다. 전쟁 때 분조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국정 경험이 풍부한 장성한 세자를, 3살도 안 된 아기와 교체한다?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될 뿐더러 선조에게는 그럴 권위조차 없었다.[18] 당연히 유영경을 제외한 신하들도 전부 광해군을 지지하고, 오히려 적자인 왕자 이의의 지지 기반이 서자인 광해군보다 훨씬 취약했다. 선조의 마음이 때때로 영창대군으로 갔음에도 결국은 광해군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이런 면 때문이었다. 설사 영창대군이 세자가 되더라도 지지 세력도 없거니와 숙청을 하려고 하면 전쟁 영웅과 공신을 비롯한 사대부 전체를 쓸어버리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광해군은 세자 책봉 이전부터 동서인이 모두 인정한 후계자 1순위였고, 임진왜란 때 활약으로 민간의 지지도 높았다. 이후 10년 간 세자 자리를 지키면서 능력과 지위가 더욱 탄탄해졌다. 조선에서 세자의 실무 경험은 혈통만큼 큰 정통성을 부여해 주었다. 환국의 그늘 아래 세자 자리가 위태로웠던 경종이 대리청정을 통해 차기 국왕으로 자리를 굳혔다.[19][20] 더구나 그 실무 경험은 다른 때도 아니고 전쟁 중 나라가 망하기 직전(!)의 상황에서 전쟁터를 돌아다니면서 증명한 것이었다.[21] 선조가 요동까지 가려는 상황에서 대리 청정과 비교되지 않는 업무를 분조를 이끌며 다해낸 광해군에게 당색을 막론하고 신하들의 지지가 몰리는 것은 당연했다.
광해군이 차남인 점은 장남 임해군이 워낙 심한 개망나니라서 처음부터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22] 또한 건강에 문제가 있던 것도 아니니 허약하다는 걸 핑계로 세자 자리에서 폐할 수 없었다. 유일한 약점은 서자라는 점이었지만, 정명공주가 태어나기 전까지 선조에게 왕비 소생의 자식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아니었다.
혈통의 문제를 가지고 따지면 선조의 정통성이 더 허약했다. 적어도 광해군은 왕(선조)의 친아들이지만, 선조는 덕흥대원군의 3남, 즉 중종의 서손이다(아버지 덕흥대원군이 서자). 명종이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다면, 그의 삼촌들이나 형 하원군, 하릉군[23]이 후계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다만 하원군과 하릉군의 경우 명종 사망 당시 20살을 넘겼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훗날의 서자 출신인 영조형을 독살했다는 혐의가 문제가 되었지 자신의 적장자 여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반면 선조의 손자 인조는 선조의 희망처럼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귀양보내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았는데, 덕분에 인조의 아들과, 손자, 증손자까지 이 문제로 고생을 했다. 적자가 계승했는데도.
게다가 당시 예학의 종법 해석으론 광해군이 영창대군보다 정통성에서 우월했다.# 참고 글

3.5. 광해군과의 나이 차이


무엇보다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났다.''' 영창대군과 광해군의 나이 차이는 자그마치 31살. 어머니 인목왕후조차 광해군보다 9살이나 어렸고, 광해군의 아들인 조카 이질도 영창대군보다 한참 많은 나이라 이미 세손 책봉을 고려해야 할 나이(10살 전후)였다. 설사 광해군의 입지가 취약했다 쳐도 2살 유아가 어머니보다 나이 많은 이복형과 경쟁이 될 리 없었다.
명나라도 당시 만력제가 억지로 아무 문제없는 적장자를 대신해 3남을 황태자로 삼으려고 한 "쟁국본" 때문에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라고 반대한 거지, 광해군의 능력과 차기 왕위에 대해서는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강제로 폐하고 세자인 광해군을 세울 생각까지도 했던 명국이었다.[24] 그저 쟁국본 및 책봉 문제를 핑계로 조선을 길들여 이익을 얻고자 했을 뿐이다. 실제로 명나라는 선조 승하 후엔 못이기는 척 광해군의 승계를 인정했다.[25]
종합하면 '''광해군의 신료들의 지지, 실무 경험, 나이, 종법 등 모든 면에서 우월하여 그 기반이 결코 불안하지 않았고, 선조는 세자 교체할 힘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으며 자기가 왕위에 계속 있기 위해서 견제 용도로 활용했을 뿐이다.''' 실제로 선조는 죽음이 가까워오자 전위의 명을 내렸으며, 이때마다 전위에 적극 찬성하는(!) 정인홍 등 과잉 충성파는 제어하면서도, 세자가 석고대죄 할 때마다 "세자의 지위를 흔들 수는 없다"는 이야기를 몇 번씩 했다. 유영경도 당연히 "전위는 안 되지만 세자의 지위는 흔들 수 없다"는 해명문을 올려야했다.[26] 그만큼 광해군의 승계는 당연시 되었던 것이다. 유영경 등이 선조가 장수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27]에 바탕을 두고 세자를 교체하는 계획을 세웠을 정황은 높다. 그러나 유교 국가 조선에서 군신의 의리는 한 번 정해지면 뒤집을 수 없다는 명분을 뒤집기란 어려운 것이었고,[28] 유영경조차도 겉으로는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은 여러모로 아버지 선조를 좀 본받을 필요가 있었다. 왕권에 대한 위협이라면 광해군과 선조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선조는 "왕에게 전란과 파천의 책임을 전부 지게 하여 선위시키자"는 주장을 임진왜란 때부터 재위 말기까지 10년 넘게 들었고, 아예 '''조정이 광해군 지지세력으로 가득 들어차 있었는데''' 광해군 같이 자신의 자리까지 흔드는 의심병이나 붕당 간의 균형을 붕괴시키는 옥사는 일으키지 않았다.

3.6. 어린 왕자의 입지


이런 와중에 소북 영의정 유영경은 부화뇌동하여 노골적으로 세자 교체에 열을 올렸고 인목왕후는 궁중 법도를 어겨가며 아들 이의를 세자처럼 입히고 다니는 상황이였다. 다만 전술했듯 광해군의 지지기반이 훨씬 탄탄했고 인목왕후는 본인에게 힘이 있었고,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했던 인조대의 형편없는 처세를 감안하면 그냥 아무 생각이 없이 부귀누리는데 열심인 소시민형에 가깝다.
거기에 선조는 이의파를 키워주기 시작하는데, 일례로 김제남이 자신의 아들인 김규(이의의 외삼촌)를 선조의 딸 정신옹주(貞愼翁主)[29]의 부마인 달성위(達城尉) 송강(松岡)[30] 서경주(徐景霌)[31]의 장녀와 결혼시키려 했는데, 서경주는 훗날 왕이 될 광해군과 척을 지고 싶지 않았기에 이 혼사를 거부했다. 그런데 대뜸 선조가 서경주에게 편지를 보내 김규와 결혼할 것을 요청하고, 왕명을 거부할 수 없었던 서경주는 자기 딸과 김규를 결혼시킨다.[32] 원래 부마의 집안은 조선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들이고, 세자 책봉은 왕족들의 입김이 강한 부분 중 하나인데, 아버지 선조가 이의 파를 키워주는 행보는 광해군을 더욱 불안하게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때문인지 훗날 민인백의 태천집에는 진위는 불분명하지만 서경주가 사돈 김제남에게 보낸 편지를 기록했는데, 여기서 서경주는 이의가 창진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역병을 앓고 있는 아이에게 침을 놓아서 소경으로 만드는 방법이 있으니, 그 방법을 이용하여 이의가 눈을 멀게 하라"는 편지를 보냈으나 김제남은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다고 한다. 만일 서경주의 말대로 이의가 눈이 멀었다면 평생 장애를 가지고 살았겠지만 비참한 죽음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33] 죄 없는 어린 아이를 장님으로 만들자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당시의 분위기는 일촉즉발 같았고, 여기에 장성한 세자와 어린 왕자의 애비 선조는 의도야 어찌됐든 불을 넘어서 네이팜을 들고 와 도배를 하는 꼴이였다.
하지만 이는 결과론일 뿐 선조가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라고 하지 않았다 한들 영창대군이 안전할 거라는 보장은 없다. 선대 왕가들의 행태와 권력의 속성을 보건데, 그 때가 조금 빠르냐 늦냐의 차이일 뿐 결국 영창대군은 제거되었을 거라고 보는 게 맞다. 왕의 아들로 태어나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왕자들은 말이 좋아 형제지, 언제나 왕권의 안정을 위협하는 제 0순위 경계대상일 뿐이다. 더구나 왕으로 즉위한 광해군은 서자이고, 왕위계승에서 밀려난 동생은 적자인 상황은 두고두고 현 왕의 정통성과 안위를 불안하게 만드는 위험요소일 수밖에 없으므로, 반대파들에게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영창대군은 없어져야만 했을 것이다. 동생의 아들과 손자가 왕이 되는 상황에서 조카에게 왕위를 차지하라고 했던 양녕과는 분명 다르다. 영창대군은 태생부터 죽음이 예상됐다고 보는게 맞다. 적어도 영조처럼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여 손자에게 바로 양위하지 않는 이상...

3.7. 선조의 죽음


이윽고 선조는 세자 승계를 교지로 내리고 눈을 감는다. 선조는 어린 자식이 걱정되었던지 유영경 등에게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왕자 의를 잘 부탁한다는 유지를 남겼다. 유언에서조차 '''"누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이의를 네가 지켜야 된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뒤에 보겠지만 결국, 그 사랑이 이의의 목숨을 앗아갔다. "동기를 사랑하라"는 선조의 유언이 아이러니 하게도 사랑하는 막내 아들의 목숨까지 흔드는 행동이 된 것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하 <박시백의 조조록>) 영조실록의 표현을 빌리면, '''"현재의 권력이 미래를 규정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역사는 늘 증명하지 않았던가?"''' 이 와중에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유영경이 왕자 교지를 감춰버려서 계승에 차질을 빚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대비가 된 인목왕후가 이미 대세가 넘어간 것을 파악하고 광해군의 즉위를 선조의 훙일 다음 날로 서두르면서 광해군은 그대로 왕위를 승계한다.[34] 어심을 읽은 줄 알고 줄을 잘못 선 유영경과 탁소북은 즉각 숙청되었다(...)[35]
결국 이러한 선조의 견제와 유영경의 부화뇌동은 겨우 2살 ~ 3살짜리 왕자를 광해군 최대의 정적으로 만들어 버렸고, 광해군과 대북파가 왕자 이의를 숙청 대상 톱 순위로 세우는 한 요인이 되었다. 덧붙여 광해군도 이와 관련된 여파로 인해 결과적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4. 9살의 짧은 생을 마감하다


왕자 이의는 6살이 된 광해군 3년에야 영창대군으로 봉해지게 된다. 그러나 불과 2년 뒤인 1613년(광해군 5년), 칠서의 옥을 통해 역도들이 옹립하려 했다는 혐의로 폐서인되어 강화도(교동도)에 위리안치되었고 결국 다음 해인 1614년 음력 2월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이렇게 죽은 당시 나이가 겨우 만 8세. 어린 나이에 비참한 죽임을 당한 건 고려 창왕도 마찬가지지만, 그보다도 1살 더 어렸다.
칠서의 옥은 처음엔 강도 살해 사건에서 시작되었는데 대북의 침소봉대식 조작일 가능성이 높다.[36] 이 일당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전직 영의정 박순의 서자 박응서의 고변으로 영창대군의 연루는 결정지어졌는데, 응서는 이후 실수라며 이 밀고를 번복한다. 그러나 한 번 걸린 고변을 놓치지 않은 이이첨, 김개, 김창우 등의 주도로 압슬형을 비롯한 각종 고문을 통해 영창대군과 연관된 반역 사건으로 몰고 갔다.
어찌되었든 광해군은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창대군이 병으로 죽은 것을 어린 아이를 섬에 보낸 자신의 탓이라며 대군의 예로 후하게 장사지내도록 시킨다.

강화 별장 이정표(李廷彪)가 의(㼁)의 죽음을 치계하였다. 전교하기를, “내가 덕이 없어 이 고아로 하여금 섬에서 병으로 죽게 하였으니, 비통하기 그지없다. 장례를 치르는 일과 제물을 올리는 일을 본관으로 하여금 각별히 살펴서 치르게 하라. 내가 마땅히 중사(中使)를 보내어 염(斂)하는 것을 살피도록 하겠다.” 하고, 이어서 전교하기를, “의의 장례를 대군(大君)의 예로 치르도록 하라.” 하였다. (음력 2월 10일자 기사)

도승지 이덕형[37]

등이 아뢰기를, "역적 영창의 죽음에 특별히 장례와 제전을 후하게 하라는 전교를 내리셨습니다. 신들이 전하의 우애하는 지극한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만, 영창대군이 종묘 사직에 죄를 지어 속적이 이미 끊어졌으니, 관에서 장례를 도와주는 것은 공론에 거슬리는 점이 있습니다. 신들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받들 수가 없으니, 황공하오나 감히 아뢰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 일은 규정을 따지며 막을 일이 아니다. 전례에 따라 속히 하유하라."

물론 따지고 보면 어느 쪽이 사실이든 전후 사정을 봤을 때 광해군이 죽인 것이나 다름 없어 보인다. 광해군의 특기가 '''잔뜩 분위기 조성해서 밑에서 알아서 처리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해 음력 5월 ~ 6월 내내 영창대군을 죽이라는 상소 릴레이에도 짐짓 따르지만 않고 방치해왔던 모습이 대표적이고, 뒷날의 소위 폐모 여론 조사 부분에서도 아주 잘 드러난다.[38] 특히 영창대군을 죽이자는 이정표의 권유를 거부한 별장 홍유의가 교체되고, 강화 부사 기협은 "강화 수령으로 있을 때 역적 의를 비호하여 하지 않는 짓이 없었으며, 음식 공급을 그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었다"는 이유로 파직된 걸로 볼 때 광해군의 의도는 '악어의 눈물'이었을 것이다.[39]
어린 나이에 비명횡사한 영창대군과 달리, 친누이인 정명공주는 83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4.1. 영창대군 사망의 전말


실제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나고 서인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이와 관련해 재조사가 이루어지는데, 이 때 영창대군이 병사가 아니라 살해당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일기>에 기록된 유력한 살해 과정은 증살(蒸殺), 방에 가두어 둔 상태에서 불을 때워 그대로 쪄서 죽인 것이다.[40]

정항(鄭沆)이 강화 부사로 도임한 뒤에 영창대군에게 양식을 주지 않았고, 주는 밥에는 모래와 흙을 섞어 주어서 목에 넘어갈 수 없도록 하였다. 읍 안의 한 작은 관리로서 영창대군의 위리(圍籬, 가시 울타리)를 수직한 자 불쌍히 여겨 몰래 밥을 품고 가서 먹였는데, 정항이 그것을 알고는 곤장을 쳐서 내쫓았다. 그러므로 영창대군이 이때부터 밥을 얻어 먹지 못하여 기력이 다하여 죽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 정항은 그가 빨리 죽지 않을까 걱정하여 그 온돌에 불을 때서 아주 뜨겁게 해서 태워 죽였다. 영창대군이 종일 문지방을 붙잡고 서 있다가 힘이 다하여 떨어지니 옆구리의 뼈가 다 탔다 '고 하였다. 지금의 강화도 사람들은 그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다만 영창대군의 죽은 사인(아사, 증살 등)은 위에서 보듯 실록 자체에서도 모호하다. 영창대군의 비문과 인조 실록에는 이정표가 잿물을 먹여 죽였다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광해군이 이정표를 별장(別將)으로 삼아 지키게 하면서 몰래 빨리 죽이도록 하자, 이정표가 광해군의 뜻을 받들어 영창대군이 거처하는 곳으로 가서 방에 불을 넣지 않았다. 이에 영창대군이 늘 의롱 위에 앉았고, 때때로 섬돌 가에 나아가 하늘을 향하여 빌기를 '한 번 어머니를 보고 싶을 뿐이다' 하였다. 이정표가 음식에다 잿물을 넣어 올리자 영창대군이 마시고서 3일 만에 죽었다. 강화 사람들이 지금도 이 일을 말하려면 슬픔으로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한다.

결정적으로 영창대군이 세상을 떠난 당시에도 정항은 범인으로 지목되었으며, 인조반정 이후에 임해군의 살해범으로 지목된 이정표와 함께 대놓고 처형하자는 상소가 줄을 이었으나 죽지 않았다. 집권한 서인 측에서도 '''"그런 소문만 믿고 일을 처리하면 안 된다"'''라는 주장이 나왔으며, 인조 역시 화를 내면서 재조사를 막았다. 폐모살제, 즉 영창대군의 죽음은 인조반정의 가장 큰 명분 중 하나였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는 당연한 일이다. 정황상 광해군이 죽인 것이 99%는 확실해 보이지만, 만약에 1%의 가능성에 의해 영창대군이 '''정말로 광해군이 죽인 게 아니라 사고나 병으로 죽은 것이라면''', 폐모살제를 명분으로 내세운 인조반정은 '''그 즉시 가장 큰 명분이 반토막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조로서는 이미 반정이 성공한 데다 다들 광해군이 죽였겠거니...하고 생각해 주고 있는 판국에, 괜히 철저한 재조사를 해서 위험 부담을 짊어질 필요가 없었다는 소리다. 인조 정권에 있어서 영창대군은 광해군에 의해 죽은 것이'''어야만 했다'''. 사실 여부에 상관없이. 죽어서도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한 아이의 운명이 다시금 씁쓸하게 느껴진다.
실제로 정항은 영창대군이 세상을 떠나기 전날에 보낸 급박하다는 서신을 보낸 이야기가 실록에 실리기도 했다.[41] 영창대군의 죽음에 이의를 제기한 정온 역시 광해군 때 정항을 탄핵하긴 했지만 '''부주의'''를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42] 광해군은 정항을 친국했으나, 이후 풀려났다.

5. 결론 : 인조반정을 일으킨 어린 아이


사실 영창대군의 죽음 자체는 조선사에서 대단한 패륜은 아니었다.[43]그 전부터 왕의 눈 밖에 난 형제 대군들과 왕족들이 유배 → 사사 테크를 당하는 일은 적지 않았고, 영창대군은 그래도 명목상 사사는 당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이다.[44] 그래서 훗날 폐모에 반대하여 이름을 얻은 기자헌 등 중북, 무당파 대신과 대부분의 신료들조차도 눈치를 보며 "영창대군이 죽어야 나라가 편해질 것"이라며 강경하게 나섰고, 대군의 예로 장례를 치르는 것을 반대하기도 했다. 예외는 "죄는 크나 죽으면 안 된다"는 상소를 올린 망우당 곽재우, 한음 이덕형(李德馨) 정도였다. 병권을 쥐었던 백사 이항복은 아예 "정협(鄭浹)의 무리, 김제남의 잔당"으로 몰렸다.[45]
광해군에 대한 충성을 내세우며 선조조차 위협한 대북이 권력을 쥔 상황에서 광해군 견제에 이용된 영창대군이 살 길은 별로 없었다고 봐야 옳다. 영창대군을 광해군 견제하는데 써먹은 선조부터 이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유지를 남긴 것이다. "형을 죽이고 아우를 죽이다니, 착하지 않은 사람이 임금이 되었구나!"는 식의 말들이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당시만 해도 매우 극단적인 재야의 인식이었다.[46]
영창대군의 죽음 자체는 일단 병사일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당장 어린 나이에 유배를 당해서 고생하다가 병에 걸려 죽었을 수도 있고.[47] 하지만 직접 사인이 뭐든 실질적으론 광해군이 죽인 것이었다. 광해군도 본인이 직접 영창대군이 그렇게 죽었을 것이라고 하며 '''자신이 죽인 것이나 다름 없다.'''라고까지 말했다. 훗날 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 본인조차도 늙은 나이에 유배지를 옮겨다니는 숱한 고생을 했다. 일종의 응보였을까.
이렇게 살제로 불거진 광해군의 의심병은 폐모로 이어졌는데, 이는 유교적 도덕 질서가 자리잡은 조선에서 있을 수 없는 패륜이었다.[48] 결국 대북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지층을 잃은 광해군은 뒤늦게 다른 당파들을 포용해 나가지만 정작 소북과 더불어서 가장 신뢰하기 시작한 서인들이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몰락한다.

6. 가족


어린 나이에 죽었으니 당연히 실제 후손은 없다. 다만 이복형 경창군의 4남 창성군이 사후 양자가 되어 가계를 이었다.선원보략수정의궤 1872년판 중에서 031을 참조[49]

7. 창작물에서


  • 쾌도 홍길동(KBS2)[50]
왕자 이의에서 모티브를 따온 창휘라는 캐릭터가 출연한다.이복 형인 광휘[51]를 위협할 왕실의 적통으로 궁궐을 휩쓴 화마에 의해 죽을 뻔 했지만, 대비가 왕자 이의를 살리기 위해 신임하는 상궁 노씨를 시켜서 창휘를 빼돌린다. 이후 창휘는 객주가 된 노 상궁과 함께 암약하면서 마침내 반정에 성공한다. 창휘 역은 장근석이 열연했다.
광해(차승원)와 영창대군의 사이를 서로 무서워 하는 관계(...) 라고 한다. 최후 부분은 과정은 나오지 않고 죽은 부분만 나왔다.
실제 역사와 달리 능양군[52]에게 살해당한다.
[1] '영창'은 경기도 이천의 별호였다. 전형적인 대군 작명. 다만 그럼에도 그 한자는 전국옥새에 세겨진 '수명어천 기수영창(受命於天 旣壽永昌)'의 영창과 완전히 일치한다. 이런 장수를 기원하는 근사한 군호는 사실 광해군 3년(1611)에 내려졌다.[2] 후술하겠지만 양자이다.[3] 서자 중 장자인 임해군을 비롯해 장성한 다른 아들들 중엔 인격에 문제가 심각한 왕자들이 많았고, 나머지들은 너무 어렸다. 초유의 국난 상황으로 인해 국왕이 갑자기 죽거나 잡히는 상황도 올지 모르니 미루던 세자 책봉을 해야만 했고, 나이와 능력으로 보면 광해군이 세자를 맡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은 선조 본인도 거의 즉각 동의했다. 그러나 그때도 자신이 먼저 전위 이야기를 꺼내 신하들을 떠볼 정도로 선조는 신하들을 믿지 못했고, 떨어진 권위에 심한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4] 태조, 세종, 문종의 사례가 유명해서 왕이 새로 왕비를 들이는 게 일반적이지 않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성종만 봐도 공혜왕후 사후 폐비 윤씨, 윤씨 폐출 이후 정현왕후를 들였고 중종단경왕후 폐비 후 장경왕후, 장경왕후 사후 문정왕후를 들였다. 태조, 세종, 문종은 상복 입느라 새 왕비를 들일 틈이 없었다. 태조는 신덕왕후의 3년상 끝나갈 무렵에 1차 왕자의 난으로 보위에서 내려와야 했고, 세종은 현덕왕후, 광평대군, 평원대군, 소헌왕후 초상을 연달아 치룬뒤 본인도 자리 보전하다 승하하고, 문종은 전술한 초상 다 치르고 아버지 3년상까지 치르는 바람에 건강을 급격하게 해쳐 재위 3년을 못 채우고 승하했다.[5] 서인 자체가 대체로 유생들의 친목질에 거부감이 있는 이들이 외척 등과 뜻을 같이 한 정파였으므로, 김제남을 범 - 서인으로 보는 것이 무리만은 아니다.[6] 심정세는 현감을 지내다가 역시 칠서의 옥에 연루되어 죽었다.[7] 문제의 이이첨은 의외로 이산해와도 대립하고, 홍여순과도 대립해서 골북이냐 육북이냐에 대한 논란이 있다. 청소북, 탁소북의 분열 이전에 생겼기 때문에 이를 기준으로 칠서의 변과 폐모론을 끼워맞추는 것이 어렵다는 분석도 있다.[8] 남이공의 성을 따 남당이라고도 불렀다.[9] 유영경의 성을 따 유당이라고도 불렀다.[10] 당장 위에 언급된 당현종당숙종만 해도 현종이 계속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숙종을 견제하면서 조정이 갈라졌고 정쟁 끝에 현종 지지파가 귀양가는 걸로 막을 내렸다. 뒷날의 인조소현세자를 들어 수차례 겁박을 일삼는 청나라의 태도에 청의 영향력 아래 있는 조선 왕이 탄생할 가능성을 바짝 경계했고, 결국 세자빈 민회빈 강씨를 사사하고 세손들을 귀양 보내게 되었다.[11] 조선 태종과 폐세자 양녕대군의 관계도 대중들이 흔히 아는 비행에 의한 어쩔 수 없는 폐위 같은 내용 대신, 태조가 내정한 적장자 말고 태종 자신의 즉위 명분인 택현(擇賢)에 맞는 후계자를 세워 자신의 권위를 굳히려 한 노림수로 보는 학계 주장도 일부 있을 정도다. (윤정 저, 국왕 숙종 잊혀진 창업주 태조를 되살리다, 여유당, 2013년) 다만 기록대로라면 양녕이 각종 비행을 엄청 저질러댄 망나니도 맞긴 해서, 태종이 안 그래도 택현을 명분으로 충녕을 밀까 하고 있던 참에 그런 아버지 속마음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양녕이 그 명분을 아주 신나게(...) 뒷받침해줬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12] 설사 세자가 왕권에 도전할 생각이 없다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세자 쪽으로 자연스레 사람이 들러붙게 된다. 당장 영창대군만 하여도 탄생하자마자 탁소북이 들러붙어 광해군을 견제하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전제왕정에서는 정작 본인의 의지가 없더라도 왕권에 도전할 정통성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전부 경계의 대상이 된다. 특히 선조처럼 임금의 권위가 추락하고 세자의 권위가 높은 상황이면 더더욱.[13] 예를 들어 맏이 진안대군정도전에게 아들과 제자를 잃은 이색과 인척이다(이색의 손자가 진안대군의 사위다). 심지어 태종의 정실 원경왕후도 고려의 최고 권문세족으로 통했던 여흥 민씨 가문 출신이다.[14] 이방석의 세자 책봉은 건국 1달 후에 이뤄졌는데, 건국과 세자 책봉의 텀이 짧은 점을 고려하면 건국 이전부터 이미 낙점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1394년 신진 사대부 출신이자 왕씨 숙청에 참여했던 심효생의 딸과 혼인한다.[15] 이방번의 장인은 공양왕의 형 왕우다(공양왕이 왕이 된 이유도 이 때문이며, 왕우도 조선 건국 이후 이런 이유로 왕씨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자손은 훗날 무인정사 때 멸족되었지만). 방번이 세자가 되면 태조가 도륙낸 고려 왕실의 일원이 국구가 되는 사태가 일어나기에 성격 핑계로 처음부터 제쳐버렸다.[16] 그 외에 예종의 양자로도 입적했다.[17] 주석을 하나 달자면, 사종지설이라고 아비가 죽으면 후사를 이은 자가 3년복을 입는 것에 대한 예외 원칙이 있다. 적손으로 이은 자, 서손으로 이은 자, 서자로 이은 자, 장자가 폐질이 있어 이은 자, 이런 식으로 적장자를 우선했지만, 그것이 유일한 가치는 아니었다. 적장자라도 폐질이 있으면 얼마든지 갈아치워질 수 있었다.[18] 설령 있다 쳐도 만일 그러면 역성혁명부터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내몰려 자칫하면 조선의 명맥을 끊은 왕이라는 오명을 쓰게 된다. 특히 선조가 병들어서 내린 교지를 보면, 개인적인 좋고 싫음보다 현실을 택했음을 보여준다.[19] 대리청정 중 아버지 숙종경종의 돌발 행동(승지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승지들이 경종을 기다리게 만들었는지 대뜸 "승지고 사관이고 죄다 물러나라"며 심한 히스테리를 부렸는데, 워낙에 전에 없던 일이라 다들 어쩔 줄 몰라했다. 경종도 잠시 후 지나쳤음을 인정했지만)을 질책하자 소론 신하들이 숙종을 비판했고, 이것에 대해 숙종도 수긍할 정도였다.[20] 노론 쪽에서도 사간 이봉익이 상소를 올려, 숙종이 승정원에 내린 비망기가 지나쳤다고 말했을 정도였다.[21] 여담으로 미국 대통령 중 위대한 순위 상위권에 있는 에이브러햄 링컨,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조지 워싱턴 등은 국난 극복이 가장 크다.[22] 인조반정 이전에는 생전 무사들과 즐겨 모이던 임해군의 반란 가능성은 충분히 혐의가 있다고 여겨지는 건이라, 곽재우조차도 죽어 마땅하다고 논했다. '''임해군과 영창대군은 달랐다.'''[23] 더구나 하릉군은 가장 서열이 빠른 금원군의 양자. 하원군은 덕흥대원군 집안을 이어야 할 가능성이 높기에 명분상 둘째 하릉군이 가장 유력했다.[24] 무엇보다 임진왜란 당시 만력제가 광해군을 칭찬하는 조서를 내렸는데, 이때 만력제는 광해군을 "조선의 세자"라고 표기하였다. 명나라 황제와 명 조정이 세자 첩지와는 상관없이 사실상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한 것이다.[25] 명나라의 인정으로 논하자면 태조도 명의 인정을 못받아 권지고려국사에 머물렀지만 자신의 왕권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조선에 대한 명의 책봉은 어디까지나 사후 처리지 사전에 꼭 받아와야 하는 건 아니었고 그걸로 후환이 생긴 사례는 없다. 광해군의 사례에서 유독 강조되는 건 어떻게든 왕 노롯을 계속하기 위해 선조가 핑계로 썼기 때문이다. 결론은 왕의 의지 문제.[26] 물론 유영경이 전위에 반대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래도 영상으로서 왕이 "나 물러날 거임" 하는 상소에 의례적으로라도 반대해야 하는게 신하로서의 도리였다. 문제는 유영경은 대놓고 영창대군을 빨아댄것.[27] 선조는 16살에 즉위해 총 40년 7개월을 용상에서 보냈다. 이는 조선 27왕 전체 4위이며 그때까진 1위였다. 이의가 선조의 즉위 때 나이와 같아지려면 재위 54년을 채워야 했는데, 이러려면 영조의 재위 기간을 뛰어넘게 된다. 선조는 인목왕후를 맞이했을 때 50세로 조선 왕 평균 수명을 넘겼고, 5년 사이에 정명공주와 왕자 이의를 낳았다.[28] 진짜 광해군임해군, 순화군, 정원군 하다못해 이들의 반의 반이라도 되는 사고를 쳤다면야 폐출의 명분이 되지만, 뭐 광해군은 세자 시절 워낙 모범적이라 그런 건 없었다.[29] 인빈 김씨 소생.[30] 유명한 송강 정철의 호는 "松江"이다.[31] 선조 12년에 태어나 임진왜란 직전에 부마로 정해져 환도 후에야 혼례를 올렸다.[32] 광해군일기(중초본) 1613년 5월 17일 기사[33] 참고로 서경주와 아버지 판중추부사 서성(渻)은 폐모론에 적극 반대하다가 아버지는 유배되고 서경주는 천대받게 된다. 서성은 선조의 고명 대신 가운데 가장 폐모 반대에 적극적이었고, 그래서 가장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인조반정이 벌어지면서 모든 것은 뒤집힌다. 서경주는 이괄의 난 때 호종한 공로로 숭덕대부로 품계가 오르면서 금화내자제조(禁火內資提調)를 겸하였으며, 1631년(인조 9년) 아버지가 죽자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만년에 다시 상방원(尙方院) 및 관상감(觀象監) 제조와 총관(摠管)을 겸하였다. 병자호란 때도 전란을 피해 인조 21년 64세로 죽을 때까지 혼란의 시기에 비교적 평탄한 인생을 살았다. 여담으로 김제남의 아들 김규는 칠서의 옥 때 역적이 되어 화를 보았다.[34] 대부분의 신하들도 대세를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훙일 다음 날 즉위를 부추겼는데, 이에 대해서는 광해군의 즉위가 유영경에 의해 불안해질 수 있다는 것을 다수 신료들이 인지하고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35] 근데 이건 뭐 어쩔 수 없던 게 유영경이 한 행위의 수위가 너무 높아 어쩔 수 없었다.(교지 감춘 건 둘째치고, 7년 동안 국정에서 영향을 끼쳤음에도 명나라로 세자 책봉을 요구하는 사신도 안 보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아예 "그 영감이 한 짓을 보면 누가 왕이 되었더라도 죽였을 걸" 이라는 대사가 있는데 행적을 보면 죽을 짓 한 거 맞다.[36] 선조 대 기축옥사(정여립의 난)을 조작으로 보는 시선이 많은데, 칠서의 옥은 그거보다 훨씬 심했다. 정여립 때는 최소한 대동계라는 사병 집단이라도 존재했다. 광해군 대 대북 주도로 억울한 옥사가 봉산옥사, 허균의 옥사 등 한두 건이 아니었다는 점도 의심을 깊게 만든다. 당시 상소들 중 하나에서는 누구는 도둑질을 하고 잡힌 뒤 역모를 꾀했다고 고하였다는 내용이 있던 것으로(연루자들을 거짓으로 불어 자신은 목숨을 구하려는 태도로 이미 광해군은 역모 고변자는 거짓으로 고한 자도 '''신하들의 반대를 씹고''' 보호해준 바 있었다. 원래같으면 반좌율에 걸려야 할 일이다.) 보아 분명 대북의 정치 공작이 있던것으로 보인다.[37] 당시의 정승 한음 이덕형(李德馨, 1561년 ~ 1613년)이 아니라, 5살 연하의 죽천 이덕형(竹泉 李德泂, 1566년 ~ 1645년)이다. 훗날 인조반정 공신이기도 하다.[38] 조선사의 비슷한 예로 태조왕씨 몰살 때도 비슷한 여론 조사가 있었다.[39] <박시백의 조조록>에서는 광해군의 해당 발언을 대단히 의미심장하고 위선적이게 그려냈다. 따지고 보면 중종, 인조, 정조도 비슷한 행동을 하긴 했지만. 세조는 아예 대놓고 했고.[40] 전통적인 온돌 구들장은 일반적으로도 섭씨 40도는 우습게 올라간다. 이걸 작정하고 땐다면 60도 ~ 70도까지 올라간다. 특히 어린아이인 만큼 더 견디기 어려웠을 터. 일반 가정에서도 온도를 높히면 등을 대기도 어려울만큼 뜨겁다. 시골 아랫목에 장작을 때면 데기도 일쑤였음을 감안하면 자리에 눕기는 커녕 뜨거워서 서있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사약을 내리거나 목을 치는것보다 훨씬 잔인한 살인 방법이다. 더군다나 사망했을 당시에 만 8살로 현시점으로 봤을 때 초등학교 2학년에 해당하는 어린 나이였다는걸 생각해 보자...[41] 다만 서신의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42] 영창대군의 사인에 대해 여러 말이 나온 것을 종합하여, 영창대군을 냉방에 가두며 먹을 것도 주지 않고 홀대했다가, 병이 걸리다 그제서야 겁이나 군불을 막 때는 등, 사실상 방조한 것 아니냐는 "절충설"도 있다.(...) 참고로 잿물은 상처에 대한 소독제로서도 뿌리기도 한다.[43] 다르게 말하면 조선에선 크고 작은 역모 사건이 많이 터졌단 거다.[44] 당장 세조의 경우 어린 조카 단종 외에도 동복동생인 안평대군금성대군을 역모로 몰아 사사를 지시했으며, 인조는 신료들의 의견에 끝내 삼촌인 인성군을 사사해야 했다. 다만 인성군의 경우엔 인조가 끝까지 살리려고 했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그 외에 이복동생인 이방번, 이방석을 살해한 태종. 이항, 이봉을 사사한 연산군. 자신의 아들인 진성군과 복성군을 사사한 중종. 아들 사도세자를 죽이고 손자 은언군은신군을 내친 영조. 이복동생 은전군을 죽인 정조 등 의외로 4촌이내의 친족을 죽인 왕은 많다. 그래도 중종, 정조는 고의는 아니었지만.[45] 곽재우는 심지어 "선조의 고명 대신들이 '''유지대로 대군을 지키지 못했으니''' 죽어야 한다"는 위엄찬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 때문에 광해군 눈 밖에 나고 대북이 조작한 옥사에 휘말려 역적이 될 뻔했다가 정유재란 때 함께 종군했던 배대유의 변호로 빠져나온다. 이덕형 역시 유배론을 적극 지지했다가 대대적인 공세에 시달려야했다. 정인홍의 경우가 독특한데, 영창대군의 사사는 반대하고 폐모는 어느 정도 합리화했다. 다만 인목왕후의 사사도 반대.[46] 이 상소를 쓴 겁 없는 선비는 그대로 목이 달아나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47] 아직 어린애인데다가 평생 궁중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았을 텐데, 갑자기 섬에서 제대로 된 대우도 못 받으니 병이 안 나는 게 이상할 일.[48] 광해군의 경우는 신덕왕후 강씨의 사례를 인목왕후의 모델로 삼은 것이 분명한데, 당대 여론에 크게 힘입은 신덕왕후 격하 사례와 달리 인목왕후의 광해군은 군신의 예가 분명했다. 신덕왕후는 죽은 사람이라 권위에 한계가 있었지만 인목왕후는 멀쩡히 살아있는 왕의 어미였다.[49] 다만 경창군파보에서는 창성군이 영창대군의 양자로 들어갔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50] 퓨전 사극으로 실존 인물들에서 모티브를 딴 가상의 인물들이 나온다.[51] 광해군에게서 모티브를 따온 가상의 왕.[52] 작중에는 차율무라는 가명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