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흥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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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중종의 서7남이자 선조의 친아버지.[1] 인종의 이복동생이자 명종의 이복형이다.
조선 왕실 '''최초의 대원군'''이다. 그리고 사실상 조선 왕실의 실질적인 중시조이며[2] 전주 이씨 덕흥대원군파의 파시조이다.
2. 생애
1530년 중종과 창빈 안씨와의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9살 때 덕흥군에 봉해졌으며, 13살 때 정인지의 증손녀와 가례를 올렸고 그 사이에서 선조를 포함한 3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첩 사이에서 딸 하나를 더 얻었다. 어릴 때부터 주색에 빠져 2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선조 즉위 후 1569년에 대원군으로 추존된다.
성품은 다음의 기록들로 볼 때 그리 좋은 인물은 아니었던 듯 하다.
이상한 점은 명종이 오히려 4살이 어린데도 덕흥군을 '어리다'라고 감싸주고 있는 것. 어쨌든 다음은 그의 노비들이 장인인 하동 정씨 정세호의 노비들과 분쟁이 벌어졌을 당시 사관의 논평명종 13권, 7년(1552년 임자 / 명 가정(嘉靖) 31년) 4월 23일(을해) 2번째 기사
사헌부에서 덕흥군 이초를 파직시킬 것을 건의하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덕흥군(德興君) 이초(李岧)는 성품이 교만하고 패려하여 재상을 능욕하고 사류(士類)를 구타하며 창기(娼妓)와의 사랑에 빠져 변복(變服)으로 나돌아다니고 있으니, 지금 다스리지 않으면 불의(不義)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파직시켜 마음과 행동을 고치게 하소서.”
하니, 왕이 답하기를,
“이초(李岧)가 연소하여 사체를 몰라서 망령된 행동을 하는 것인데, 파직까지야 할 수 있겠는가? 교계(敎戒)를 가하여 이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일찍 죽은 결과 자신의 3남 하성군이 왕이 되는 로또를 맞았다. 주색에 빠져 일찌감치 인생 퇴갤이 된 상황에다가 자신의 부인도 죽으면서 하성군이 최적의 왕위 계승자 감이 된 것이었다. 덕흥군은 창빈 안씨 가문도 듣보잡인데다가 하성군의 생부 생모가 빨리 죽어서 명종시절 문정왕후 외척들에 시달린 신하들한테 매우 매력적인 양자 감이었다.명종 16권, 9년(1554년 갑인 / 명 가정(嘉靖) 33년) 3월 30일(경오) 1번째 기사
사헌부에서 덕흥군과 정세호를 노비가 투탁한 죄로 추고할 것을 아뢰다
"덕흥군은 종실(宗室)의 무식한 사람이니 논할 것도 못 된다."
출처 여기
제안대군같이 예종이 갑자기 승하해서 너무 어리거나 대신들에 의해 옹립 된 성종, 철종, 고종같은 왕들은 대부분 장남도 아니었고 나이가 어린데도 왕이 된 이유는 아무래도 정통성이 떨어지고 어린 왕이 대신들이 권력도 나눠 가질 수가 있었고 다루기가 더 편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집권 내내 대신들에게 훠둘리고 약한 왕권 때문에 고생해야 했다. 선조는 실제 혈통으론 중종의 서자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이었지만 명종의 양자가 되었기에 왕위에 오르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3]
손자들인 임해군, 정원군, 순화군보다는 덜하지만, 이쪽도 만만치 않은 막장이다. 그러나 3남 선조가 왕이 돼서 그런지 이러한 행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실록은 아무리 왕이라도 함부로 열람할수도 수정할 수도 없었기에[4] 위에 언급된 명종실록에 기록된 덕흥대원군의 몹쓸 행각은 지워지지 못하고 전해내려오는 것이다. 선조는 생부 덕흥군을 왕까지 높이려고도 하지 않았고 봉사손[5] 을 1품으로 세습 시키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신하들 반대로 무산되었다. 추존의 예는 왕이라도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었다.선조수정실록 3권 2년 11월 1일선조실록 203권 39년 9월 2일 하지만 그의 증손자 인조는 얄짤없이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아버지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마침내 결국 추존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런 망나니같은 생활을 하는 것이 자기 보신에는 이로울 수 있다.'''[6]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수락산에 묘가 있다. 덕릉(德陵)으로 불리는데 원래는 잘못된 명칭으로 대원군의 무덤은 능(陵)이 아니라 묘로 일컫는다.[7][8]
비록 왕으로 추존되지는 못했으나 덕흥대원군의 후손들은 도정궁(都正宮)이라는 궁호를 받고 선조의 부모인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의 제사를 대대로 받들었다. 도정궁 종사손은 조선시대 내내 경술국치 전까지 정3품 대우를 받을 정도로 예우를 받았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에 자리했던 도정궁은 일제강점기까지 존속했다가 1913년에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3. 자손
3.1. 인물
정치인 이해찬 前 국무총리와 네이버 등기회사이자 라인 회장 이해진,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 선수가 있다.[9]
3.2. 후손들의 위상과 항렬
조선 후기부터 대한제국까지 사실상 종실로 대접받을 정도로 처우가 매우 좋았다. 실제로 덕흥대원군의 3남인 선조(물론 선조는 법적으로 명종의 양자로 입적), 선조의 5남인 정원군, 정원군의 장남인 인조의 자손들은 조선 후기에 거의 종실로 대접받는다. 보통 몇 대를 흘러가면 왕이 되지 못한 왕족들의 후손들은 일반 양반과 다를 게 없는 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이례적인 케이스.
조선 후기에 갈수록 왕실 직계의 손이 귀해지면서 덕흥대원군의 자손들이라면 파(派)를 가리지 않고 '''(대가 끊긴) 종친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실의 일원이 되었다.''' 게다가 덕흥대원군의 종손(사손)들은, 순조 이후부터 한일합병 때까지 '대원군 적장손 세습제'라 하여 '''몇 대가 흘러가도 군 작위를 받는 정식 왕족으로 인정'''[10] 받았다. 또한 1868년 3월 5일에는 흥선대원군이 아예 덕흥대원군의 후손들이면 파(派)와 상관없이 '''전부 항렬자를 통일시키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같은 일가친척이란 인식이 더욱 강해졌다.[11]
항렬은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본가인 인평대군파의 것을 기준으로 맞추었다. 흥선대원군의 항렬인 덕흥대원군 11세손 'O응(應)[12] '부터 통일되어 그 밑으로 '재(載)O[13] ', 'O용(鎔)[14] ', '해(海)O[15] ', 'O주(柱)', '우(愚)O', 'O기(基)', '의(義)O', 'O운(雲)', '종(種)O'[16][17] , 'O희(熙)', '교(敎)O' 순으로 나간다.전교하기를,
"선파(璿派)의 후손들을 하나의 족보로 닦는 것은 한 뿌리에서 천 개 가지로 나누어지고 만 갈래가 근원을 하나로 하는 것이니, 이 일은 참으로 성대한 일이다. 하늘에 계신 역대 조상들의 영혼도 반드시 굽어보고 기뻐할 것이다. 생각건대, 우리 선조(宣祖) 이후의 여러 계파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을 시조로 삼아 10여 파로 나뉘어졌는데, 모두 한 조상의 같은 핏줄이다. 항렬이 각 파가 같지 않은 것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구족(九族)을 친애한다는 의리에 매우 어긋난다. '''‘응(應)’ 자 이하를 반드시 한 가지로 정하여 설사 문관(文官), 음관(蔭官), 무관(武官)으로 벼슬한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이름을 고치도록 하는 일로 종친부(宗親府)와 이조(吏曹)에 분부하라.''' 다른 성씨들에 대해서도 이 예에 따라 고쳐 정하는 것이 실로 또한 각 집안에서 돈독하게 하는 방도이니, 함께 거행(擧行)하도록 하라."
하였다.
다만, 현재는 이미 조선왕조가 멸망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덕흥대원군 22세손 '교(敎)O' 이후부터는 파마다 항렬자를 다르게 정한다. 예를 들어 (좁은 의미의)덕흥대원군파[18] 는, 'O호(鎬)', '원(源)O', 'O근(根)', '병(炳)O'으로, 선조의 자손이지만 인조의 자손이 아닌 파들은[19] 'O석(錫)', '윤(潤)O', 'O병(柄)', '영(榮)O'으로 정했다.
참고로 금원군파와 영양군파[20] 의 항렬은 덕흥대원군파의 항렬과 같다.[21] 금원군파의 경우 덕흥대원군의 둘째 아들 하릉군(河陵君)이 입양되어 뒤를 이었기에 사실상 덕흥대원군파로 봐야 하고, 영양군은 왕자들 중 덕흥대원군의 유일한 동복 형제였기 때문이기도 해서 그런지 후에 선조의 후손들에서 양자들을 들여온 기록이 곳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양녕대군파, 광평대군파 다음으로 많은 후손 수를 자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