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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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한 (金光漢)
1946년 11월 9일 ~ 2015년 7월 9일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


대한민국팝송 DJ 겸 방송인이다. 팝송을 독학하여 1980년대 당시 대한민국에 드문 팝 전문가였다.

2. 생애


서울에서 5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하며 신문배달을 하며 고학했다고 한다. 서라벌 예술대학(중앙대 연극영화과의 전신)을 졸업했다. 혼자서 미 8군에서 나오는 팝 관련 잡지를 읽으며 팝을 독학했다고 한다.
1966년 서울 FM[1]에서 DJ로 데뷔한 그는 1년 2개월 남짓 활동한 후, 월남전에 정훈병으로 참전했다.
제대한 후에는 바로 방송에 복귀하지 않고 음악감상실의 DJ를 하다가, 1978년 MBC FM의 "박원웅과 함께" 를 통해 방송계에 복귀했다. 1980년 TBC에 입사하여[2] "탑튠쇼'를 진행했다.
1980년대가 그의 전성기다. 이 때 마이클 잭슨, 마돈나 등의 활약으로 팝송 팬들이 대한민국에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도 팝 전문가로서 활약하게 된다. 그리하여 KBS 2FM의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 그리고 TV에서 팝송 관련 진행자를 맡기도 했다.
그는 이종환이나 김기덕과 달리 라디오에만 머무르지 않고, 유머 1번지쇼 비디오 쟈키 등의 개그 프로그램에 나와서 팝을 해설해 주기도 했다.[3]
팝송 전문가였을 뿐만 아니라 일반 프로그램 진행 능력도 있었기 때문에, 팝송 관련 프로에만 머무르지 않고 1990년대 초반에는 가요 프로그램인 가요톱10을 진행하기도 했다. 본인도 진행을 맡으며 "저는 가요에 전문가가 아닙니다만, 이 기회에 가요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그는 여러가지 활약을 했지만 1992년부터 대한민국에서 모든 것을 바꿔 버린 서태지가 완전히 가요판을 새로 짜고 댄스음악이 주류가 되면서 대한민국에서 팝송의 위세는 줄어들고, 이렇게 되자 활약이 뜸해졌다. 그리하여 슬롯이 거의 없어진 팝송 전문 프로그램이 아닌, 일반 프로그램의 DJ로 방송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90년대 후반에는 서울교통방송의 밤과 음악사이를 진행하기도 했고, 2000년대 초에는 KBS 2FM으로 돌아와 아침 11시에 방송했던 "골든팝스"의 진행을 맡았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는 경인방송 라디오(iFM)에서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을 진행하도 했고, 2009년부터 2011년까지는 TBN 인천교통방송 낭만이 있는 곳에를 진행하기도 했고, 2013년~2014년에는 CBS 표준FM에서 "김광한의 라디오 스타"를 진행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SNS를 통해 팬들과 소통하는 등 소탈함을 보이기도 했지만, 극우적인 발언을 자주 하여 댓글란에서 자주 키배가 벌어지기도 했고 돌아선 팬들도 많았다. 전두환 정권 시절에 황금기를 보냈기 때문에 심정적으로 우편향이 될 수 있겠지만, 다양한 성향의 팝송 팬들과 소통하는 부분에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지적도 있다.
2015년 7월 6일에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7월 9일에 타계했다. 향년 70세. 전술한 월남전 참전 경력으로, 국립이천호국원에 안장되었다. 2015년 5월에 방송한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에 출연한 게 대중들에게 마지막으로 보인 모습이 됐다.
팝 전문가 1세대로서, 1980년대 젊은 세대에서 팝송 붐을 일으키는데 활약을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 세대의 한계로, 그의 팝 지식은 이종환이나 김기덕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크게 대단한 것은 아니고 오류도 많았다.[4] 즉 한때 그의 해설을 들으며 팝송에 입덕하던 팬들이 인터넷 시대에 접어들고, 해외 유학으로 해외 팝 정보를 두루 접하면서, 그들의 해설이 진정한 본좌급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다만 당시 제대로 된 팝송 지식이 미 8군에서 흘러나오는 잡지가 전부였던 제한된 여건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팝송 전문가 1세대로서 대한민국에 팝 문화를 정착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3. 기타


  • 방송가의 야사를 많이 알고 있던 김용민의 증언에 의하면, 방송 중 1분도 안 되는 중간 광고 시간 때 스튜디오를 나와 짬짬히 담배를 피우고 다시 칼같이 스튜디오로 들어와서 진행했다고 한다. 보는 PD들이 김광한이 시간에 못 맞춰서 방송사고가 날까봐 안절부절하지 못했다고. 당시는 실내 흡연이 가능했던 시기였기에 가능하다.
  • 슬하에 자녀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경인방송 관계자가 상주를 맡았다.
  • 그의 맏형은 6.25 전쟁에 참전해서, 국립서울현충원안장되어 있다고 한다.
[1] 주파수는 89.1MHz. 원래는 독립적으로 탄생한 민영 FM 방송이었지만, 운영난에 부딪히면서 동양방송에 흡수되어 동양 FM 방송이 된다. 따지고 보면 현재 KBS 2FM의 조상이기도 하다.[2] 애초에 그가 방송 DJ 경력을 시작한 곳이 동양 FM이었기에, 친정으로 돌아왔다고도 볼 수 있다.[3] 당시 유머 1번지와 쇼 비디오 쟈키에서 해외 최신 팝의 뮤직비디오를 소개해주는 코너가 있었는데, 혼자 나와 진행하거나 주병진이 같이 출연해 팝 소식과 소개하는 곡에 대해 입담을 나누기도 했다. 여담으로 엔야의 대표곡 Orinoco Flow의 뮤직비디오도 쇼 비디오 쟈키에서 소개되었다.[4] 예를 들어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born in the usa를 애국주의 노래라고 소개하기도 했는데,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밖에도 원래 정치적 성향이 보수적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진보적인 팝 아티스트에 대한 설명도 생략하거나 잘못 해설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