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병진

 


'''주병진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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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대상 코미디부문 최우수상'''[25]
이규혁
배연정
(1989년)

'''주병진
(1990년)'''

이경규
(1991년)

<colbgcolor=#595959><colcolor=#FFFFFF> '''주병진
朱炳進 | Joo Young Jin'''
'''출생'''
1959년[1] 4월 19일(음력 1959년 3월 12일) (64세)
서울특별시 중구
'''국적'''

'''본관'''
신안 주씨
'''신체'''
175cm, 77kg, O형
'''직업'''
코미디언, MC, 기업인
'''가족'''
2남 1녀 중 둘째, 반려견 대, 중, 소[2]
'''학력'''
서울덕수초등학교 (졸업)
양정중학교 (졸업)
광운전자공업고등학교 (졸업)
인천체육전문대학 (체육과 / 전문학사)
중앙대학교 (연극학·경영학 / 학사)[3]
'''종교'''
무종교
'''데뷔'''
1977년 TBC 전속 개그맨
1. 개요
2. 연예계 데뷔 및 전성기
3. 속옷 사업
4. 요거트 아이스크림 사업
5. 2011년 연예계 복귀
6. 사건사고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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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코미디언, MC, 사업가.
천부적인 입담으로 개그맨 출신 톱MC의 자리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메인MC를 시작으로 주병진쇼 등 주로 토크쇼를 맡아 진행해서 '''토크 황제'''로도 통한다. 그 이전까지 MC의 역할은 이덕화 같은 배우나 가수가 맡아 대본에 따라 멘트를 하면서 진행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주병진은 방송 전반에 영향을 끼치며 재치와 순발력으로 프로그램을 이끌어나갔다.
그동안 비주류였던 '콩트에 큰 영향을 받지않은 예능 버라이어티'[4]를 개척 및 발전시켜서 한국 코미디의 주류로 바꾼 3명 중 1명이다.[5] 다른 두 명은 이경규이홍렬 인데, 당시 여러 가지 사건으로 방송계를 떠난 주병진의 대체제에 가까웠다. 즉 이경규와 이홍렬은 당시 주병진의 위상과 인기에 상대가 안 되던 수준.
1980년 초, 중반부터 이미 주병진은 최고의 인기스타였다. 다만, 희극인이 안 망가질려고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와 연말 시상식에서 시청자들에게 상당히 무례한 태도를 보인 적이 여러 차례 있어서[6] 이미 그 당시부터 상당수의 안티를 가지고 있었다. 속옷사업으로 성공한 사업가가 되기도 했으나, 음주운전과 불법 도박 등 불미스러운 사건에 여러 차례 휘말려 불명예스럽게 이름이 다시 거론되었고, 이 중 성폭행 혐의에 공소기각 판결을 받은 뒤 방송 복귀를 시도했으나 처참하게 실패했다.

2. 연예계 데뷔 및 전성기


DJ 이종환이 부업으로 운영하던 카페 '셸부르'의 사회자를 거쳐 1977년, TBC 전속 코미디언으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했다.
원래 어릴 때의 꿈은 가수여서 셸부르의 가수를 뽑는 콘테스트에 출전했는데, 노래 가사를 까먹는 바람에 그냥 내려오기는 뻘쭘해서 시간을 때우려고 생각나는 대로 웃기는 말을 했단다. 그런데 당시 심사를 하던 이종환이 그의 웃기는 말을 듣고서는 사회자의 자질인 순발력이 있다고 평가해서 DJ로 특채했다고.
이후 동양방송언론통폐합으로 KBS에 통폐합된 뒤 당시 서세원이 MC를 맡던 MBC '영 일레븐'에 밀려 시망 위기에 몰린 '젊음의 행진'에 투입되어 시청률을 역전시키며 인기 개그맨으로 급부상했고, 80년대 중반 MBC로 이적 후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메인 MC를 맡아 노사연, 이경규, 김흥국 등 막강 패널을 키워내며, MBC 예능의 대표 흥행 보증수표로 불리운다. 참고로, 그 유명한 김흥국유행어 '''"아, 응애에요~"'''도 일밤에서 게스트로 김흥국과 같이 방송했을 때 주병진이 직접 만든 유행어다.
주병진은 당시의 주류였던 일본식 슬랩스틱 코미디 노선을 탈피해서 영미식 스탠드업 코미디대한민국형으로 적절히 바꾼 신사형 개그로 성공한 케이스. 그래서 별명도 '''개그계의 신사'''였다.
일밤 오프닝 때 양 손을 살짝 들고 '여러분의 시선을 모아, 모아, 모아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7]라는 유행어가 유명했다. 다만 일밤 당시의 테이블 위에서 토크하는 방식은 프리토크 형식이었지만 실제로는 잘짜여진 꽁트나 마찬가지였다. (스탠드업 특성상 즉흥적인 코미디라고는 할 수 없다.) 주병진의 강점은 미리 준비한 것을 뛰어난 연기력으로 준비하지 않은 듯 애드립치는 능력이다. 능청도 엄청나서 반대의 분위기로 바람잡다가 반전성있는 애드립을 터뜨리는데 대단한 재능을 가졌었고, 그러한 과정에 필요한 연기력도 아주 일품이었다. 이때 그가 보여주는 입담과 애드립은 지금 봐도 세련되고 개그감이 살아있어, 현시점에서는 다소 유치하거나 지루한 동시대의 개그 프로나 토크쇼와는 달리 세련돠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주병진은 청춘만만세(청춘행진곡 - 現 폐지됨), 일요일밤의 대행진(일요일 일요일 밤에 - 現 일밤) 등 MBC에서 하는 모든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그야말로 주역이었고 그가 없으면 프로그램 진행이 안 될 정도였다. MBC에서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운영할 때 주병진을 중심으로 김병조, 이용식, 이주일 등을 내세워서 운영했다.
이경규김정렬은 주병진 옆에 끼워서 출연시키다시피 했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주병진이 토크에만 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대표 코너 중 하나인 배워봅시다는 다양한 것을 해보면서 몸개그와 상황극이 복합된 코너로 노사연을 스타덤에 올린 코너이기도 했다. 이 컨셉의 후속작이 이경규대단한 도전.
이경규가 무서워한 선배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동대 시절 선배인 강석우, 그리고 또 하나는 바로 코미디언 선배[8]이자 자신을 보조 MC로 데리고 있던 메인 MC 주병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주병진이 은퇴함으로서 병풍이나 쩌리... 소리를 들었던 이경규가 메인으로 성장했으니, 전화위복인 셈.[9] 주로 주병진이 일방적으로 이경규를 골탕먹이고 억누르는 역할이었는데 개그 스타일이 영미식 스탠드 코메디의 형태를 띄던 주병진이 이경규의 재능을 인정하여 이경규의 코미디 스타일(콩트가 가미된 일본식 만담)에 맞춰주면서 함께 방송에 출연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던 1991년, 주병진은 돌연 연예계 은퇴를 선언한다. 그가 연예계 은퇴 선언을 한 지 1달만에 SBS가 개국하면서 MBC 코미디언들의 대부분을 데리고 가 버리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데,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담당 PD가 주병진이 당시 진행하던 라디오쇼[10] 에 찾아가서 은퇴 시기를 늦춰 달라며 무릎 꿇고 통사정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희극인들은 악극단 내지 미8군 쇼 출신의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고 방송국 PD들은 학벌 좋은 고학력자가 많던 시절이라 PD들이 희극인들을 엄청 낮춰서 보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당시 주병진의 인기가 정말 대단했음을 말해준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의 이주일, 영구야 영구야의 심형래 등과 달리 점잖은 모습으로 웃음을 주는 주병진의 MC형 진행 방식은 주병진 은퇴 후 정재환으로 이어진다. 다만 MBC가 주병진의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밀어 준 정재환은 주병진의 신사답고 지적인 이미지는 제대로 계승했으나, 주병진이 워낙 순발력과 상황판단능력이 개쩔었던지라 그 정도까지의 무시무시한 순발력은 없는 데다가 주병진의 개그 센스만큼은 따라가지 못했다.
특히, 정재환은 콩트보다 진행을 재치있게 하는 스타일이었으나 SBS 개국과 함께 이적한 후에는 자신의 마지막 콩트 코미디 출연작인 대한민국 황대장 포함하여 MBC 시절 잘 하지 않았던 콩트 코미디에만 집중 투입되었으며 그 결과 최양락 이봉원 등의 KBS 출신, 신동엽 홍록기 김경식 등 자사에서 키운 신인급에게 밀려 용도폐기됐고 '대한민국 황대장' 이후 MC로 전업했다.[11]

3. 속옷 사업


은퇴 이후 내의 회사 ‘좋은 사람들’을 설립한다. 제임스 딘을 동경해 주병진 자신이 경영하던 카페이름도 제임스 딘으로 지었었고, 자기 회사의 내의 브랜드도 제임스 딘으로 발매했다.
본인의 책에 따르면, 자기가 카페를 열 당시에 정부에서 외래어로 된 상호는 등록을 안해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구청에 '쟤 임씨든?'(…)이라는 이름으로 서류를 냈다고 한다.[12] 문제는 상표법 제7조1항2호 등 등록 거부 규정의 해석에 있었다. 당시 특허청에서는 실존 인물의 이름을 관련 없는 사람이 그대로 상표로 사용하는 것이 이에 위배되는 행동이라고 판단한 것. 법정 공방은 대법원까지 가서 결국 주병진씨의 승리로 끝이 났고, 인명 상표등록 판례(96후2173)로 남게 되었다. 나중에 제임스 딘의 이름을 썼다고 미국의 유족으로부터 소송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주병진 측이 승소하였다. 이는 국내에 드문 퍼블리시티권 판례로 남아 있다. 분쟁 과정에서 반쯤 보험 목적으로 만든 브랜드인 보디가드 역시 성공적인 속옷 브랜드가 되었다.
자금이 넉넉치 않은 중소기업으로 출발했기에 개그맨 출신다운 재미있는 마케팅으로 회사를 키웠다. 매일 손톱만한 광고를 신문에 짱박아서 마치 월리를 찾아라와 비슷한 유행을 만드는가 하면 지하철 내부 광고에 주병진식 개그가 실린 광고를 부착, 코믹 컨셉 카피의 광고로도 입소문을 탔다. 당시 주병진씨가 기획한 지하철 내부 광고는, 해당 광고를 보느라 광고 앞 자리가 붐빌 정도였다. 다음에는 어떤 기발한 카피를 내세워 광고가 나올까 기다릴 정도. 요즘이라면 다들 각자의 스마트폰을 보느라 눈이 바쁘겠지만 디지털 기기가 없던 당시에는 주병진이 기획한 광고 속 카피들이 지루한 출퇴근 시간 지하철 속 승객들의 활력소가 되었다. 이를 통해 '좋은 사람들'은 내의 시장의 강자로 성장했다.
좋은 사람들의 마케팅 중 가장 화제를 불러모은 것은 주병진 본인의 누드광고 사건이다. 정장을 입은 모습으로 신문광고에 출연, 1995년 2월 21일에 옷을 벗겠다고 공언하였다. 21일자 신문에는 약속대로 겉옷을 벗고 속옷차림의 모습으로 광고에 출연하였는데 한술 더 떠 24일에는 속옷까지 모두 벗겠다고 공언하였다. 지금보다는 보수적인 시대였던 만큼 파장이 엄청났다. 좋은 사람들 사무실은 항의전화로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예정된 24일이 되자 약속대로 올누드 차림의 신문광고가 나왔는데 그것은 바로 돌사진이었다.(당시 전면광고 보기) 28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일부 소비자들은 우롱당한 느낌이 든다며 항의전화를 걸기도 했지만 대부분 참신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광고였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보수적인 사회분위기 속에서 주병진이 속옷차림의 광고가 나온 직후 더 이상 벗을 옷이 하나(?)밖에 남지 않자 알 수 없는 단체들에서 주병진에게 협박 전화나 편지를 많이 보냈다고 한다. 회사에 전화가 와서 주병진이 받으면 "당신 요새 이상한(?) 거 하던데 위에서 지켜보고 있어. 조심하시오."라는 식의 말만 하고 끊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정부기관측에서 경계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광고는 베네통의 광고를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현재까지도 성공적인 티져 광고사례로 꼽히고 있다. 이후 황금어장 2011년 7월 13일자 방송에서 이 사진은 본인의 사진이 아니라 부하직원의 돌사진이라고 밝혔다. 이유는 본의의 누드 돌사진이 없어서라고..[13] 물론 당시 사람들은 그게 주병진의 돌사진인 줄 알았다고 한다.
사실 주병진이 기획한 이 광고는, 1994년 프랑스 어느 선거에서 모 정당이 사용한 홍보 기법을 발빠르게 도입한 것으로, 미모의 여성 모델이 날짜를 정해놓고 한 번에 옷 하나씩 벗어서 화제를 모았던 정치 홍보 이벤트였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해진 날짜에 내보낸 광고에서 해당 여성모델이 가슴(!)을 시원하게 보여줘서 관심을 모았었다. 이후 다음 날짜에 전신 누드를 공약, 세계적인 관심을 끌어놓곤 여성모델의 '뒷모습' 전라만 보여줘서 반전을 가져왔던 것인데 노출에 관대한 유럽이라 가능했던 이 독특한 광고를 주병진이 한국식으로 재치있게 변용해서 내보냈던 것.
참고로 베네통식 뒷모습 누드 광고를 선보였던 것은 고 최동원씨가 현역 은퇴 후 '안티구아'란 이름의 스포츠 의류 브랜드를 국내에 런칭하면서 기획했던 광고로,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 그리고 백인 아이가 마치 한 가족처럼 서 있는 뒷모습을 지면광고로 내보내서 이목을 끌었었다. 하지만 이 광고는, 누드 광고는 물론이요 흑인남성의 성적매력을 터부시하던 국내 정서에 맞지 않았던 데다가 '안티구아'란 브랜드 자체가 국내에선 듣보잡이라서 반짝 화제에 그치고 말았고 베네통의 파격적인 광고를 흉내낸 국내 광고가 있었다더라 정도의 기억만 남기고 '안티구아'란 제품은 사라졌다. 최동원이 주도한 광고였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려졌었다.
아무튼 주병진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광고에 힘입어 비록 후발주자였지만 활로를 개척, 당시 내의업계의 양대 강자였던 쌍방울태창이 부도가 난 것에 대한 반사이익과 '패션 내의'라는 컨셉으로 소비자들에게 어필한다. 그 결과[14] 지금은 코스닥에서도 알아주는 저평가 우량주 회사로 성장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꿈이 사업가로서의 성공이라고 말해온 그였기에 연예계 복귀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변의 관측이 많았다. 물론 MBC 코미디 프로 위기론이 나올때마다 복귀설이 있지만 본인이 거부했었다.
창업자로서 좋은 사람들의 경영자이자 최대주주였던 그는 2008년 자신의 지분과 경영권을 매각하고 속옷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 다만 사장과 경영권만 바뀐거지 회사는 여전히 잘 굴러간다. 2013년에는 유명 유아복 브랜드였던 베비라를 인수하기도 했다.
영화 인류멸망보고서에서 90분 토론에 출연해 여성 국회의원에게 막말을 하다가 '요즘 란제리 사업이 잘 안되시나 보네요?'라며 디스당했다. 배우는 주병진 닮은 꼴로 유명한 윤제문.

4. 요거트 아이스크림 사업


3년 만에 다시 사업가로 복귀해서 2011년 스노우 스푼이라는 요거트 아이스크림 전문 브랜드를 창업했다. 홍대 앞에 있는 스노우 스푼의 사장이 바로 주병진이다. 가게는 매우 깨끗한 편이었으나 현재는 외부에 비해 내부는 낡은 느낌과 청소가 제대로 안 되어있는 모습이 잦다... 아이스크림 및 토핑을 자유롭게 골라 먹는 방식. 북미나 일본쪽에선 이미 유명했던 방식이었다. 가끔 밤에 가면 혼자 창가에 앉아서 유유히 커피를 마시고 있는 주병진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근데 좀 비싼 면이 없지 않아 1g당 25원씩 받는데, 이거 의외로 가장 작은 컵에 가득 담으면 5천원은 훌쩍 넘어버린다. 지금은 문을 닫았다.

5. 2011년 연예계 복귀


2011년 7월 6일[15] 황금어장 무릎팍도사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10년 만에 방송에 출연하는 것이어서 사람들이 많은 기대를 했고, 올밴방송분량을 책임지며 녹슬지 않은 입담을 보여주었다.
MBC는 그를 모시기 위해 물밑 접촉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공석을 만들기 위해 FM4U 두시의 데이트윤도현에게 DJ자리에 관한 아무런 사전교감없이 일방적으로 시간대 변경을 통보해버렸다. 무례한 조치에 반발한 윤도현은 9월 27일 DJ를 그만둔다고 선언하였고, 그러고 나서 MBC가 주병진더러 그 자리에 앉으라고 하니 부담을 느끼면서 당연히 고사한 다음 9월 29일 잠적했다. 연예기사와 뉴스댓글란에서는 후배를 밀어내는 모양새를 연출한 MBC에게 비판이 집중되었다.#
속옷 사업에서 손을 뗀 이후 무릎팍 후속이나 1박 2일 후속으로 들어간다는 루머들도 꾸준히 있었으나 모두 사실이 아닌 것들로 판명되었다. 2011년 12월 1일부터 매주 목요일 밤 11시에 자신의 이름을 건 주병진 토크 콘서트로 연예계 복귀가 확정되었다.
하지만 결국 토크 콘서트는 '주병진만 모시면 된다'는 일념으로 급히 기획되다보니, 프로그램 컨셉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매회 컨셉이 바뀌게 되고, 게스트 섭외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서 MC인 주병진 개인의 인맥을 총동원하는 수준이었다.
사실 이는 2010~12년 김재철 사장 집권 하의 MBC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고 시청률 부진으로 조기종영. 프로그램 컨셉이 안 잡혔고 주병진이 최신 방송 트렌드에 적응하지 못하는 중이라고는 하지만, SBS 런닝맨의 성공사례처럼 당장 실적에 연연하지 말고 한 번 느긋이 믿어줬으면 하는 시청자들의 아쉬움을 샀다. 결국 이 이후 주병진은 다시 모든 방송을 접게 되었고, 본인의 이미지에 오히려 악영향만 미쳤다.
그리고 그 이후 2014년tvN의 전 방송이었던 근대가요사 방자전으로 다시 컴백했다.
또한 SNL의 호스트로도 출연. 신동엽과 꽃뱀 드립까지 치는 등 크게 활약하며 호평을 받았다.
2015년 KBS 제2라디오의 개편으로 오전 9시 5분부터 오전 11시까지 방송하는 "매일 그대와"의 진행을 성악가 김동규로부터 이어받아 진행했다. 2016년 1월 17일을 마지막으로 유열에게 넘기고 하차.
2015년 12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는 채널A개밥 주는 남자웰시 코기 대, 중, 소와 함께 출연했다. 웰시 코기 종의 특성상 털빠짐 때문에 돌겠다고..... 하지만 세 마리 덕분에 2000년대 이후의 출생자들에게 있어서도 본인인지도도 조금씩 올라가고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일지도...
2018년 1월에는 미운 우리 새끼에 등장했다. 박수홍과 같은 아파트에 살아서 박수홍 및 지인들인 지상렬, 김수용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나왔다.[16] 개밥 주는 남자에서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었다. 큰 펜트하우스에서 부유하게 생활하는 모습과, 냉장고에 제대로 된 반찬이 없어서 박수홍이 집에서 반찬을 가져다 주는 쓸쓸한 솔로의 모습이 겹쳐서 나왔다. 주병진 본인도 '이런 집의 모습은 껍데기 뿐'이라고 자조하고 박수홍에게 빨리 결혼하라고 협박(?)하기도 하였다.

6. 사건사고


70년대 후반 연예계를 뒤 흔들었던 대마초 밀반입 사건, 음주 측정 거부사건, 필리핀 원정도박 사건 등의 혐의로 여러 차례 구속되었다. 하지만 그 많은 사건 중에서도 주병진을 가장 나락으로 떨어트린건 2000년에 일어난 성추문 사건이다. 강남 모 호텔에서 꽃뱀 강민지를 떼어내려고 1억이 든 돈가방을 줬다가 성폭행 누명을 쓰고서 2년 간 재판을 받은 끝에 공소기각 판결을 받은 안습한 사연은 지금도 네이버에서 주병진을 검색할 시 연관 검색어로 뜰 정도다. 이 사연은 2003년에 MBC의 <실화극장 죄와벌>이라는 극화 드라마에서 장장 2부작에 걸쳐 방영되었다.[17]
특히 위의 성폭행 사건은 찌라시의 단골소재가 되었다. 일례로 주병진 미스터리…강간? 화간?. 당시 검찰은 주병진에게 징역 3년을 구형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1심의 재판장이 성범죄에 대해서는 '유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한다고 반농담 삼아 얘기가 나올 정도로 성범죄에 매우 엄격한 법관이었고 결국 집행유예 4년 선고를 받았다. 공판 때는 성폭행 혐의를 부인하기도 했다. '고소인에게 돈을 줬다'라는 얘기가 잡지에서 다뤄진 적이 있는데, 정확히는 '''1심 판결 전에''' 변호사가 고소인과 합의를 해 고소를 취소하게 하고 합의금으로 돈을 준 것.[18] 원래 강간치상은 친고죄가 아니기 때문에 고소를 취소하면 양형 정도에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변호사가 쓸데없는 짓 한 거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런데 이후 사건은 급반전. 합의금의 분배를 둘러싸고 고소인 측에서 분열이 일어났고, 결국 '''증인이 고소인의 상처는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폭로했다.''' 그리고 진실(상처 조작)이 밝혀지자 항소를 했고, 항소심서 무죄를 받았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무죄 판결은 아니다'''. 링크된 기사는 2심 판결에 대한 기사이고, 3심인 대법원의 최종판결은 '공소기각 판결' 이었다.‘주병진씨 성폭행’ 공소기각 확정판결 최종판결 이후에도 법을 잘 모르는 기자들이 '무죄'라는 단어로 기사를 많이 쓰다보니, 본 문서에서도 그렇고 일반인들도 대부분 무죄판결이 났다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당시에는 성폭행이 친고죄였기 때문에 피해자가 가해자를 고소하지 않으면 재판을 열 수 없었고, 일단 고소를 해서 재판이 열렸다 하더라도 이후 피해자가 고소를 취소하거나 합의를 하면 사실관계를 따지지 않은 채 재판을 종료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단순 강간이 아닌, 강간치상은 친고죄가 아니다. 그래서 검사는 합의 여부와 상관없이 주병진을 잡아넣기 위해 단순 강간이 아닌, 강간치상으로 기소했다. 당시 강민지는 강간 당하는 과정에서 주병진에게 맞아 얼굴에 상처가 났다고 주장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심 판결 전[19] 주병진의 변호인인 이재만 변호사가 피해자 측에 거액(알려지기로는 2억)을 주고 고소취소 합의를 하였다. 강간치상은 친고죄도 아닌데 이런 큰 돈을 주고 굳이 합의를 할 필요가 있나 하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신의 한수'가 되었다. 피해자인 강민지는 합의금을 받아 다른 일당과 나눠먹기로 한 약속을 어긴 채, 이 돈을 혼자 꿀꺽해버렸고, 돈을 나눠주지 않은 것에 앙심을 품은 다른 일당이 위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강민지의 얼굴에 난 상처는 주병진에게 맞아서 생긴게 아니고, 나와 강민지가 짜고 내가 강민지를 때려서 만든 것' 이라고 폭로해 버린 것.
결국 강민지의 상처가 주병진과 무관하다는 것이 밝혀졌고, 따라서 이 사건은 강간치상 사건이 아닌, 그냥 강간사건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단순 강간은 친고죄인데, 피해자가 2억을 받고 합의를 해줬기 때문에 결국 사실관계를 따지지 않고 재판을 종료한다는 판결, 즉 공소기각 판결이 내려지게 된 것이다. 합의금으로 꽃뱀 일당의 내부분열을 유도하고, 결국 재판까지 종료시켜버린 일거양득의 한 수가 된 셈. 추가로 고소취소를 받아낸 시점도 3심 판결이 나기 한참 전인 1심 판결 전으로 보인다. 고소취소는 1심 판결 전에만 가능한데, 비친고죄로 기소 되었음에도 만약을 위해 미리 유효한 고소취소를 받아낸 것.
즉, 대법원 재판부는 주병진이 실제 강간을 했는지 안했는지는 판단하지 않았다. 강간을 했든 안했든, 피해자가 유효한 고소취소를 했으니, 사실관계는 따지지 않고 그냥 재판을 종료한다(공소기각)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친고죄와 고소취소, 공소기각 등의 법적 의미를 잘 모르는 기자들이 이를 무죄판결이라고 보도하였고, 이런 기사를 읽은 일반인들 역시 주병진이 무죄판결을 받았다고 인식하게 되었다.[20]
여담으로, 이때 주병진의 변호를 맡아 주병진이 꽃뱀에게 당한 피해자임을 입증해 공소기각 판결을 이끌어내고 아울러 주병진의 명예까지 회복시켜준 이재만 변호사는 연예계에서 매우 유명해져 이후 연예인들이 문제가 생겼을때 단골로 찾아가는 변호사가 되었다.(편승엽-길은정 명예훼손사건, 송일국-김순희 기자 폭행사건, 주지훈 마약사건, SS501 김현중 여친 임신사건 등등)
참고로 이 때 후배 코미디언들인 이경실, 박미선, 이성미 등은 주병진의 누명을 벗겨주려고 이 사건의 목격자를 찾아내기 위해 사방 팔방을 돌아다녔다. 특히 이들 중에는 당시 임신한 상태인 코미디언도 있었다. 이휘재는 당시 빡빡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스케줄을 다 끝낸 시각이나 어쩌다 스케줄없는 날에도 강민지와 그의 지인이 있는 룸쌀롱 및 주점을 샅샅이 뒤져 겨우 찾아내어 주병진의 억울함을 해결하려고 했다.
그런데 주병진의 상대녀가 의사에게 가서 진단서 끊을 정도의 상처는 없다고 하자 친구에게 부탁해서 상처를 냈다던가, 돈을 더 받으려다가 가짜라는게 들통나자 강민지는 허위고소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으나 미국으로 도피했다는 정황을 보아 '''합의금을 내줬지만, 강제로 한 건 아니다.''' 강민지 검거 소식이 없는 걸로 보아서 아직 못 잡은 듯.
나중에 언론을 상대로 일부 승소하여 모 언론사는 그에게 배상한 적이 있으며, 액수는 무려 1억 9천만원이었다.

7. 기타


  • 과거엔 평범했던 이름이 요즘엔 인터넷 비속어 중 하나로 사용되는 바람에 몇몇 사이트에서는 주병♡으로 필터링되기도 하는 안습함도. 참고로 90년대 만화 짬보람보에서는 주병신이란 이름으로 나왔다. 이 만화에서 변진섭이 변변섭으로 나오기도 했지만 주병진은...
  • 탤런트 윤제문이 주병진, 특히 현재의 모습을 거의 빼다박은 듯이 닮았다. 음주운전으로 검거된 이력도 공통점이다.
  • 1978년 제1회 TBC 해변가요제에 친누나인 주선숙과 같이 '속삭여 주세요'라는 곡으로 출전한 적이 있다.
  • 2018년에 '오! 캐롤'이라는 뮤지컬에 주연으로 출연을 했었다. 그는 시작 전부터 '내 목표는 실력 없는 뮤지컬 배우다. 실력은 없지만 뮤지컬 배우로 인정받는 수준까지 올라가는 게 목표다.' 등의 발언으로 뮤지컬의 중요 요소 중 하나인 넘버 소화도 못하면서 뮤지컬 주연을 맡는다는 비판을 받았고, 게다가 첫 공연에서도 7세 관람가 힐링 뮤지컬에서 관객 외모 평가에, 성적 발언을 서슴지 않아서 논란을 일으켰다. # 물론 이러한 섹드립들은 대본에 전혀 없는, 그가 만들어낸 애드리브다.
  • 자신의 후배 중 하나인 최양락과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다. 한때 개그맨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주병진이 야자타임 놀이를 제안했고, 후배 개그맨들이 이에 응했다. 그런데 문제는 최양락이 도를 넘어서서 야자타임 놀이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주병진에게 반말과 욕설을 가했고, 결국 개친 주병진이 책상에 놓여진 족발을 들고 최양락을 인정사정없이 패버렸다는 것. 최양락은 주병진에게 족발로 얻어맞고 서러워서 울었다고 한다. 물론 당연하게도 선을 넘은 100% 최양락 잘못이긴 하지만[21]... 그렇다고 이것을 폭행으로 대응한 주병진도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다. 족발에 맞아 서러워 우는 줄 안 선배들은 '양락이도 체면이 있고 자존심이 있지 연예인인데 족발로 때려서야 되느냐'며 최양락과 주병진사이를 말리며 사태를 진정 시켰으나[22][23] 당시 최양락이 울었던 진짜이유는 서러워서가 아니라 '정말 아파서..' 울었다고 회고했다. 족발을 먹다보면 마지막에 살은 다 발라낸 거대한 족발뼈가 나온다. 이거에 맞았으니.... 물론 주병진은 고의로 그런 게 아니라 최양락이 감히 주병진의 인내심을 테스트했고 이로인해 주병진이 이성을 잃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실제로도 주병진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최양락이 너무 서럽게 울고 있어서 놀랐다. 한마디로 주병진은 이성을 잃고 팬거고 최양락은 그 주병진한테 너무 제대로 맞아서 통증이 극에 달해 울었을 뿐이다.
  • 환갑이 넘은 현재까지도 미혼이다. 과거에 겪은 평지풍파가 크게 영향을 미친듯. 하지만 미우새에 출연했을 당시 혼자 사는 후배들인 지상렬과 박수홍 앞에서 털어놓은 바에 의하면 '난 어린 시절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고 나이 들어서 그 꿈을 이룬 줄 알았으나 껍데기에 불과했다. 좋은 집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라며 '내가 전재산을 털어서라도 너희들 나이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면 난 그렇게 할 것이다. 너희들 나이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사는 아름다운 집을 가질 것이다.' 라는 소망을 드러냈다.[24]
  • 마포구 성산동에 음식점 더평양을 오픈해 사업에 복귀했다. 평양냉면 전문점인데 음식의 맛과 평은 좋은편이다.#

[1] 1959년생이지만, 임백천, 홍서범 등과 초등학교 동창으로써 1958년 개띠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아마도 1959년 생이라는 것은 프로필상 혹은 호적상 출생년도인 듯 하다.[2] 셋 다 웰시코기다.[3] 99년 2학년으로 편입.[4] 주병진이 히트시킨 프로그램이 이런 것은 맞지만, 주병진이 꽁트를 못한 개그맨은 아니었다. 버라이어티에서도 중간 꽁트를 넣어서 본인이 노사연, 이경규 등과 함께 소화했었고, 매우 잘했으며 20대 시절에도 꽁트프로그램에서 그런대로 인기가 있었다. 단지 그가 신인 때는 선배 레전드인 서세원이 꽁트와 진행 모두 워낙 뛰어났었고, 이후 등장한 코미디왕 심형래도 있었고 후배인 최양락 등 전설의 꽁트 연기력을 지닌 압도적인 천재 후배들이 나왔기에 어쩔 수 없이 과거가 묻힌 감이 있다. [5] 주병진 이전에도 곽규석, 김병조와 같은 개그맨 출신 MC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극히 소수였으며 이들의 코미디 스타일은 정통 코미디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더욱이 이들보다는 이주일, 서세원, 심형래, 최양락 같은 콩트 코미디언들의 인기가 훨씬 높았다. 김형곤은 꽁트와 MC를 둘 다 했지만, MC를 하는 와중에도 웃기는 부분은 스탠딩 코미디와 꽁트를 섞는 형태였다. 웃긴 이야기를 자신이 겪은 것처럼 말하는 중에도 중간에 보조코미디언이 뛰어나와 김형곤과 함께 상황재연을 하는 형태도 있었을 정도.[6] 예를 들어 시상식 석상에서 거의 대부분 정장을 하고 얌전히 앉아있는 가운데 평상 캐주얼차림으로 다리를 꼬고 거만한 자세로 앉아있던 모습을 방송사 카메라가 클로즈업해 보여주기도 했고, 시상식 소감 얘기할 때도 '고맙습니다. 상 잘받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건방지고 성의없는 소감을 얘기하면서 인사도 안하고 들어갔던 일이 있었다. # 당시 방송사와 무슨 트러블이 있어서 시상식을 망쳐버리려고 일부러 그랬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자세한 내막은 알려진 것이 없다.[7] 이 '모아'라는 유행어가 어찌나 대단했던지 명인제약이 약 이름을 일부러 "모아겐"이라고 지어서 주병진을 방송광고모델로 쓴 적도 있다. 주병진의 신뢰감을 주는 신사이미지를 잘 활용했던 유명한 광고다. [8] 알다시피 개그/코미디계는 선후배 관계가 굉장히 엄격하다.[9] 당시 둘의 메인 프로그램이었던 일밤에서 주병진이 사업에 집중하기 위해 떠나자 이경규가 전면에 나서게 되었는데, 앞 사람의 후광에 가려서 묻혔던 사람이 결국 전임자의 그림자에서 못 벗어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본다면 여기서 이경규 자신도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10] 주병진 노사연의 100분쇼. MBC라디오에서 오후 4:10~6:00까지 방송했다. 지금은 라디오 시대 프로그램의 전신.[11] '대한민국 황대장'은 정재환의 처음이자 마지막 슬랩스틱 코미디 출연작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무려 훗날 최고의 한류스타가 될 장동건을 바보연기로 특별출연시킬 정도로 한 건 하긴 했다.[12] 옆집 ‘알카포네’는 ‘알고가보네’…[13] 주병진은 60년대 어린 시절 그 시대 서민들 중에서도 빈곤층 집안 출신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래서 못 찍었을 지도 모른다. 또한 아마추어 수영선수였기도 했을만큼 운동을 잘했던 개그맨이던 청년 시절 전설적인 공포의 군기반장급 선배였던 일화와 달리, 의외로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시절에는 가난함에 위축되었는지 싸움도 못 하고 마음도 여려 괴롭힘도 당했었다고 한다. 본인 증언으로는 어릴때 학교 끝나고 괴롭히던 애들에게 도망쳐 달동네 허름한 집에 와서 혼자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으면, 괴롭히던 애들이 창문으로 와서 "야 주병진, 너 이불 속에 있는 거 다 보여. 당장 나와"라고 놀리며 말했다고 한다. 청소년기에 변한 듯.[14] 사업초기 유통망 확보가 어려워서 업계에 발붙이기 힘들 정도로 텃세가 심했는데 도매상들을 찾아가서 "당신네들 한달수입 사장님 업소에서 한탕 뛰면 버는돈이다. 재고 걱정말고 사달라"고 말해서 거래를 뚫었을정도였다고 한다.[15] 2회분으로 13일까지 방영했다.[16] 이들 중 김수용은 주병진과 초등학교 동창인 임백천의 고등학교 후배이며, 김수용과 KBS 대학개그제 공채 동기였던 박수홍은 임백천이 원년멤버로 활동한 KBS 2TV 쇼 파워비디오의 또다른 원년멤버였던 김미화 후임 MC(김경식) 물망에 한때 거론됐으며 박수홍 외에도 박수홍 김수용과 KBS 대학개그제 공채 동기인 남희석, 김용만 등이 한때 김미화 후임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17] 여담으로 주병진 역은 야인시대에서 이정재의 부하 김형사로 나왔던 단역배우 김동석이 맡았다. 강민지 역은 부부 클리닉 사랑과 전쟁에서 불륜녀 역할로 자주 나오는 것으로 유명한 배우 민지영이 맡았다.[18]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덧붙이자면 친고죄에서 돈을 받고 고소를 취소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심지어 친고죄가 아니더라도 양형을 고려해 피해자와 합의하는 일도 많다.[19] 친고죄의 고소취소는 법원의 판단 전인 1심판결 전까지만 가능하다. 비친고죄로 기소되었지만 이재만 변호사는 어쨌든 미리 유효한 고소취하를 받아냈던 것이고 이는 나중에 천운이 된다.[20] 하지만 밝혀진 정황상 강간이 아니었을(정확히는 주병진이 꽃뱀에 속아넘어갔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21] 더군다나 최양락의 깐족은 이미 예전부터 상당히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22] 이걸 보면 당시 개그맨들의 선후배관계나 최양락의 개인적인 잘못을 감안하더라도 심한 일이기는 했던 모양이다.[23] 최양락과 친분이 강한 임하룡전유성이 말려서 그나마 사태가 진정되었다고 한다.[24] 자신이 뇌졸중 증세로 병원에 실려갔을 당시의 일화를 덧붙히면서 아플 때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크게 다가온다는 첨언을 남긴 것은 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