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망명 사건
1. 개요
1997년 북한에서 조선로동당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등 고위공직을 지내왔던 정치인 황장엽과 수행원 김덕홍이 대한민국에 망명하고자 중국 베이징 한국영사관을 거쳐 필리핀을 경유, 같은 해 4월 20일 김포공항에 도착한 사건.
2. 발단 및 전개
1996년 5월 10일, 북한 관영지 <로동신문>은 당 내에 수령을 받드는 척하며 음모를 꾸미는 야심가가 있다는 기사를 내놓았다. 이는 숙청을 암시하는 기사였다. 다시 7월 김정일은 황장엽에게 사상비판을 가했다. 이미 황장엽은 북한 내부에서 김정일의 권력 기반 장악을 위한 타겟이 된 상태였다.
황장엽은 1997년 1월 30일에 김정일의 지시로 북일수교 및 경제원조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나리타 공항을 통해 방일했다. 일본에서 조총련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지만 기자들에게 신경질을 내는 등 심상찮은 조짐을 보였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사회주의의 실패 운운하는 발언을 했고, 일본의 야마자키 자민당 정책위원장과의 면담을 요청하며 식량 원조, 북일 수교 문제를 논하려 했지만 미국의 압력을 받은 일본이 황장엽과의 면담을 거부해서[1] 13일 간의 일본 체류에서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쓸쓸하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는 수행원 김덕홍과 함께 2월 12일 바로 중국의 북한 대사관으로 갔다가 다시 한국 총영사관으로 가서 전격적으로 '''탈북'''의 뜻을 전달하였다.
북한은 황장엽의 망명을 저지하기 위해 남한이 선물 사러 외출한 황장엽을 납치한 것이라고 주장하다가[2] 2월 18일에 그 주장을 접었다. 이후 북한은 대규모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하여 압박을 가했고, 황장엽 망명과 관련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황장엽의 망명 요청 불과 4일 후인 2월 16일에 이미 80년대 초반에 망명했던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에게 총격을 가해 끝내 숨지게 만들었다.[3] 황장엽이 망명한 때는 중국 덩샤오핑의 사망, 한국의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파동, 한보사태 및 이한영 피살이 겹친 혼란한 와중이었다. 이후 미국, 중국, 한국, 북한, 일본이 모두 개입된 치열한 외교전 끝에 망명의 뜻을 밝힌지 67일만인 4월 20일에 중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는 귀순하자마자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외쳤고 "처음으로 유서 깊은 역사의 도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본 심정은 참으로 감개무량합니다"란 소감을 발표했다. 그의 수행원 김덕홍은 "설레이는 마음 진정할 수 없고 남녘형제들과 만나게 된 이 기쁨과 감격은 그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그의 동창인 유창순 전 국무총리와[4] 제자이자 먼저 귀순한 현성일, 최세웅, 신형희 등과 오랜만에 해후했다.
망명한 황장엽은 1997년 7월 10일 기자회견에서 "이미 북한 내부에서 핵무기 보유는 상식화되어 있다"고 폭로해 전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조사 과정에서 "지난 85년 소련 측이 핵개발을 문제 삼자 김일성 부자가 이를 무시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혀, 북한의 핵 개발계획이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음을 알렸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핵 관련 시설을 직접 본 적은 없으나 92년 국제 원자력 기구의 특별 사찰을 피하기 위해 핵 확산 방지조약에서 탈퇴하는 것을 보면서 조선로동당의 비서들은 모두 핵 보유를 믿게 됐다고 한다. 이미 북한이 핵무기까지 보유했다는 것(1997년 당시)으로 북한에서는 모두들 이렇게 알고 (믿고) 있다는 것. (KBS, MBC,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1985년 당시 소련측이 북한의 핵개발을 문제삼은 이 내용은 지난 1994년 러시아 관계자들에게도 나온 이야기였다. 1994년 러시아 국가안보 연구소 블라디미르 쿠마초프 고문에 의하면 "북한은 그들 미사일의 사정거리를 늘리기 위해 독자적으로 완성한 발사 차량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주의 체제 하의 다른 특정한 아프리카 국가들도 북한이 그러한 핵실험을 행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에 더해 "소련도 85년부터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시작했음을 알았고 그로 인해서 북한에 있던 핵전문가들을 본국으로 송환했다"고 밝혔다. (조선일보, 경향신문, 한겨레)
90년대 후반에만 해도 북한 내의 사정이 잘 알려지지 않았기에 황장엽이 세계의 이목을 끌기 위해 과장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부정적인 비판이 주를 이루었으나.... 결과적으로 이 소재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를 증언한 것으로 밝혀지고 말았다.
귀순 이후 김대중 대통령 때 활동제한을 당하였으나 # 이명박 대통령 때 해제되었다.
황장엽 정도의 고위급 인사가 (그것도 70대의 늘그막에) 망명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도 큰 화제가 되었다. 북한 내부에서도 그 충격이 꽤 컸던 모양인지 로동신문 등 관영 언론에서까지 "배신자여, 갈 테면 가라"라고 하여 황장엽을 비난했으며,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황장엽과 아무 상관도 없는 멀고 먼 친척들까지 모조리 다 정치범수용소에 가두었다고 한다. 이후 황장엽은 북한이 봉건주의 국가라고 맹비난하면서 반북/반김정일 운동 활동을 전개하였다.
3. 남한에 온 이유는?
그의 망명에 대해선 권력 암투설을 비롯해 숙청설, 대일 쌀협상 실패설, 심지어 그가 운영했던 주체사상연구소에서 금전사고가 났다는 설까지 수없이 제기됐지만, 김일성의 사망 이후 김정일 체제가 성립되면서 서서히 권력에서 소외된 것이 원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김정일에 비해 김일성에 대한 비판이 약하다는 의견이 존재하나 '어둠의 편이 된 햇볕은 어둠을 밝힐 수 없다'라는 책에서 김일성을 자기 아들의 권력 앞에 아부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마지막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정권을 아들에게 넘겨줌으로써 김정일과 함께 수치스러운 길을 걷게 되었으며, 그의 한 생의 전반부까지도 다 망쳐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며 비판했다. 다만 그의 생 전반부나 후반부의 사건들에 대해서 김정일에 비해 우호적인 표현으로 정당화 하고 있는건 사실이다. 김일성의 무수한 과오 중에서도 김정일에게 아부하고 정권을 넘겨준 것에 초점을 맞추고, 그를 통하여 생의 전반부까지 망쳐버렸다고 평했다는 것은, 황장엽이 언제나 주장하듯 현재 북한 사회가 가진 문제의 본질적 책임이 김정일에게 있다는 주장의 연장선상에서 그런 김정일에게 권력을 물려준 것에 대해 김일성을 비판하는 것이지, 문제의 본질적 원인 제공자로써의 김일성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주체사상을 창시하면서 김일성 앞잡이로 수십여 년을 호강하며 살았다. 그러다 김정일 밑에서는 권력이 줄어들고 봉급을 받지 못하게 되자, 남한을 임시 거처 삼아서 망명했다. 그런 주제에 자신이 반공 투사라고 하면서 애국자 행세를 했다. 게다가 그는 단지 반 김정일주의자일 뿐, 그 자신이 창시해 수령 절대주의의 이념적 바탕이 된 주체사상을 철회하지 않았다. 오용당했다고 죽기 전까지 계속해서 이야기 했을 뿐이다. 실제로 직접 주체사상을 가르치려고 했고, 이 때문에 그와 같이 탈북한 김덕홍도 이에 대해 비판하고 그와의 인연을 끊었다.
그래도 북한 권력 정상급에 있었기에 고위층에 대한 정보력이 높아 쓸만하다는 평도 있었다. 거꾸로 생각하면 북에서도 불과 13년 때문에 4배가 넘는 동안 자기들에게 봉사한 사람을 그렇게 대해도 되는지 모르겠으나 많은 공산국가에서 아무리 공신이라고 해도 이용가치가 없어지거나 충돌이 벌어지면 가차없이 제거, 숙청하는 건 흔하다. 그 본보기로 북한과 마찬가지로 2대째 권력을 누리는 시리아의 아사드 일가를 봐도 다를 게 없다. 현 독재자인 바샤르 알 아사드는 아버지 하페즈 알 아사드 휘하에 있던 노대신(?)들을 대거 숙청해 이들은 이란이나 여러 곳을 거쳐 미국 및 서구로 망명해서 이들은 지금은 신나게 시리아, 현 아사드 정권을 까고 있다. 물론 정권 싸움 (숙부인 레하트 아사드를 숙청했다) 탓도 컸지만 세습 독재자라고 아버지 때의 가신들에게 잘 봐줄 것이라 믿었으나 돌아온 결과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장엽의 망명은 대한민국 국가 안보, 대북 정책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으며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는 견해도 있었다. 그는 2월 12일 망명 후 주중한국영사관에서 쓴 자술서에서 망명 동기를 "우리 민족을 불행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문제를 좀더 넓은 범위에서 협의하고 싶은 심정"에서 망명을 결심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남북간 화해와 통일에 도움을 주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황장엽은 2월 12일에 쓴 자술서 외에도 이미 1996년 11월과 1997년 1월 2일에 썼다는 또 다른 서신이 2월 13일부터 다음날까지 조선일보에 공개되었다. 특히 2월 13일자 신문에 공개된 서신에선 베이징 영사관에서 쓴 자술서완 전혀 딴판이었다.
여기선 한국의 노동자 파업[5] 을 비난하고 안기부와 군대의 강화, 강력한 여당 등을 주장했다. 마치 안기부나 정부 여당을 편들기 위해 조작된 게 아닐까 생각될 만큼 한국 사회에 대해 엉뚱한 훈수를 두었다. 이로서 황장엽의 망명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남북관계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한국 내에서도 보수세력과 레임덕에 빠진 김영삼 대통령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될 소지도 안고 있었다.
그러나 황장엽 망명 사건의 경우 신동아 1998년 5월호에서 박성원 기자가 쓴 기사에 따르면 그의 망명은 1996년부터 이미 준비되어 있었고, 여기엔 안기부는 물론이요 중국에서 활동 중이었던 이연길(1927~2009)[6] 휘하의 사설공작단체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 및 김현철 라인 인사들이 개입되어 있었다.
이에 따르면 원래 황장엽은 1997년 4월 인도 방문 계획이 잡혀 있었고, 그 때 망명하기로 했으나 정보가 새고 있다는 불안감에 중국에서 조기 망명하였다.
4. 미국으로 재망명 시도
한국에 망명온지 4년 되던 2001년 7월, 미국으로 다시 망명해 북한 망명정부를 만드려고 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5. 출처
- 대한민국 50년사(2권) - 임영태 저. 들녘. 1999. p409~412
- 대한민국사: 1945~2008 - 저자/출판사 동일. 2008. p7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