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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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金南柱)
(1946년 10월 16일 ~ 1994년 2월 13일).
1. 개요
대한민국의 시인. 1946년 10월 16일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서 태어났다.
2. 생애
1964년 광주제일고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자퇴하였고, 1969년 대입 검정고시를 거쳐 전남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1972년 유신 헌법이 선포되자 이강(李綱) 등과 전국 최초로 반(反)유신 지하신문인《함성》을 제작했고, 이 사실이 드러나 1973년에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감형되었는지 8개월 만에 출소했지만, 이 사건으로 전남대학교에서 제적당했다. 출소 후 해남으로 낙향하여 잠시 농업에 종사하는 중에 조금씩 시를 발표하였으며, 1975년에는 광주로 올라와 잠시 서점을 경영하기도 했으나 이듬해 폐업하였다. 1978년에 상경하여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에 가입, 활동하다가 1979년 서울에서 체포되어 구속됐다.[1]
당시 남민전에서 사상교육을 받은 김정익은 자신의 저서 '수인번호 3179'에서 김남주로부터 사상교육을 받은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는데 이를 보면 김남주가 증오를 조장하고 대학살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매우 위험한 사고를 가진 비정상적인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된 후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아 1979년부터 광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상황에서 그의 시집들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교도관의 도움이 컸다. 평소 우유갑이나 심지어 낙엽 등에 손톱 등으로 꾹꾹 눌러 시를 쓰면, 교도관이 남몰래 시인의 아내[2] 에게 전해 줬다고. 그렇게 옥중에서 쓴 그의 첫 시집인 <진혼가>가 1984년에 출간됐다."계급적인 적들을 증오하라. 철저히 증오하라. 남조선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면 최우선적으로 해야 될 일은 '''이 사회의 민족반동세력을 철저하게 죽여 없애는 것이다. 그 숫자는 2백만 정도는 될 것이다.''' 그래야만 혁명을 완전하게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광주교도소에서 전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가 1988년 12월 21일 형 집행 정지로 9년 3개월 만에 석방되었으나, 1994년 2월 13일에 췌장암으로 서울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에서 사망했다. 이후 광주 북구 망월동 5.18 묘역에 안장됐다.
3. 시
그의 시는 강렬함과 전투적인 이미지들이 주조를 이루며, 주요 작품으로는 《나의 칼 나의 피》 등이 있다. 그의 시들 중 상당수는 안치환 등에 의해서 민중가요로 만들어졌다.
교도소에 있을 때 쓴 시 중 '사랑1'라는 작품이 있는데, 위의 구절이 인상깊었던 독자가 후일 '감옥 안에서 어떻게 이런 구절을 썼느냐'고 물었다. 이에 김남주는 '사과 하나를 반으로 쪼개니 (씨방의 모양이) 하트모양이라서'라고 말했다고 한다.그리고 가실을 끝낸 들에서
사랑만이
인간의 사랑만이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사랑1」 中
4. 여담
- 슬하에 1남을 두고 있었다. 이름을 특이하게 '토일(土日)'이라 붙였는데, 성과 합치면 김(금)토일(金土日). '월화수목금토일'의 마지막 세 글자 맞다. 노동자가 금/토/일요일에는 휴일을 누려야 한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 2016년 2월 필리버스터 정국으로 주목받았다. 남민전에서 함께 활동했던 시인이자 민주화 운동 전력이 있는 국회의원 이학영이 필리버스터 발언 중 김남주의 시 '잿더미', '진혼가', '편지' 등을 낭송했기 때문이다.
- 그의 모교였었던 전남대학교에서는 2019년 신설 중인 전자도서관에 김남주기념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 2019년 7월 14일 조국 민정수석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죽창가를 올리며 다시 한번 주목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