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사이드
1. 집단 살해
集團殺害 | Genocide
폴란드계 유대인이자 국제변호사였던 라파엘 렘킨(Raphael Lemkin)에 의해 20세기 중반에 정립된 개념이다. 그리스어로 인종을 뜻하는 Genos와 살해를 뜻하는 라틴어 동사 Caedo, Caedare[1] 의 합성어로써 주로 '집단 살해'라고 번역된다. 1944년 처음 사용되었고, 이후 1948년에 일반적인 학살과는 구분되는 일종의 범죄로서 정립되었다. 다만 학계나 교육계 등에서 세계적으로 일반적인 용어로 확산된 것은 1970년대 전반이다.
주로 특정 국민적[2] , 인종적[3] , 민족적[4] 또는 종교적 집단의 전체 혹은 일부를 파괴하기 위한 '''의도적''' 행동을 가리킨다. 그 주체는 정부나 정규군일 수도 있으나(예: 홀로코스트) 민병대와 같은 자생적인 점조직에 의해 수행되는 경우도 많다(예: 르완다 내전).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의도로, 행위와 상관 없이 의도가 없으면 법적으로 제노사이드가 설립되지 않으며, 의도가 있다면 집단의 '점멸' 이외에도 '민족적 거세'라는 제한 목표를 설정하여 성폭행을 조직적, 계획적으로 실시하는 경우나(예: 보스니아 내전), 혹은 문화적 탄압 행위(예: 위구르 재교육 수용소) 등도 제노사이드로 판단될 수 있다.
고대에서도 아주 없었던 일은 아니다. 예를 들어 로마가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뒤 카르타고가 재기하지 못하도록 철저한 파괴, 학살을 자행했던 것이 대표적. 그러나 20세기 들어 극단적인 민족주의의 횡행, 고도의 산업력과 행정력을 가진 국민 국가(Nation State)의 등장, 그리고 과학 기술과 무기의 발달로 인해 집단 살해가 더 자주, 더 대규모로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 중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이 벌인 홀로코스트가 악명 높아 제노사이드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는데, 약 1000만 명이 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희생자 수[5] 와, 인류가 여태까지 자부하던 과학 기술이 철두철미하게 특정 부류의 인간을 철저히 말살한다는 발상에 쓰였다는 사실이 전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어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사조에 영향을 주고 지금까지도 역사적 반면교사로 남고 있다.
그 결과 종전 후 집단살해 범죄를 정의하고 방지하기 위해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onvention on the Prevention and Punishment of the Crime of Genocide, CPPCG)'이 만들어졌다. 대한민국도 1950년에 이 조약에 가입했으며, 1995년에 제정된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라, 이러한 종류의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나 단체에게는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
단, 위에서 언급한 국민적, 인종적, 민족적, 종교적 집단을 제외한 집단의 학살은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에 의해 처벌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저 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죄 없는 사람들을 죽여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해당 협약의 범주를 굳이 저 4개 집단으로 한정짓지 말자는 소수 학설도 존재하고, 국제사회에는 꼭 제노사이드가 아니라도 대량 학살, 대규모 인권 탄압, 전쟁범죄 등을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수없이 많다.
1.1. 제노사이드의 사례
본문에서도 다뤘듯이 제노사이드라는 개념 자체가 20세기 중반에 정립했고, 여러 여건이 20세기에서야 나타난 데다 고대의 학살사례를 제노사이드로 꼽자면 끝이 없으니 여기서는 최소한 산업혁명 이후의 사례를 위주로 나열했다. 국제적으로 제노사이드로 인정되는 것은 굵은 글씨로 서술하였다.
- 1931년 평양화교 학살 - 일제강점기 평양에서 일어난 학살극
-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 관동 대지진 이후 조선인들에 대한 악성 유언비어로 인해 일어난 학살.
- 일본 제국
- 다르푸르 학살 - 수단 내전의 주요 원인이 인종 및 종교분쟁인 만큼 수많이 일어난 인종청소 사건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수단 주도의 학살.
- 동티모르 학살 - 1975~1999 인도네시아의 점유 기간을 뜻한다. 이 때 인도네시아가 지배를 견고히 하려고 억압하는 도중에 약 10만여 명의 희생자가 났으나, 어느 특정 집단의 점멸이라는 목적이 없었기에 제노사이드로 보지 않는 이들도 있다.
- 로힝야족 학살 - 전 미얀마인들의 증오대상이 된 채로 고립무원의 상태로 핍박당하는 중이다. 그러나 미얀마는 로힝야족 뿐만 아니라 카렌족이나 카친족, 친족 등 다른 자국내 소수민족들에게조차도 탄압과 차별, 학살을 현재 진행형으로 가하고 있다.
- 르완다 내전 - 20세기 아프리카 국가인 르완다에서 난 후투-투치인 간의 분쟁을 말한다. 특히 1990년대 후투족의 일방적인 투치족 학살은 제노사이드의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 영화 호텔 르완다의 배경이다.
- 부룬디 내전 - 르완다와 더불어 부룬디에도 나타난 후투인과 투치인들의 분쟁들. 보통 르완다 내전과 같이 언급된다.
- 발칸 반도 무슬림 대학살 - 1878년 독립된 불가리아에서 튀르크계 무슬림들을 학살한 사건. 50만에서 100만 가까이 학살당하거나 행불되었으며 이 숫자 이상 무슬림들이 오스만 제국으로 피난가야 했다. 이들은 기독교계에게 증오를 품었고 씁쓸하게도 오스만 제국이 민병대 및 군인으로 받아들이면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당시 활약했다... 불가리아는 이후로도 100년이 넘게 자국 무슬림, 튀르크계들에 대하여 온갖 박해와 홀대를 가했다. 결국 1990년대에 오면서 이슬람 차별 정책을 폐지했다.
- 보스니아 전쟁 -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가 무너지면서 민족 정체성이 가장 약했고 주변 국가들이 땅을 먹으려 했던 보스니아에서 일어났던 여러가지 인종청소 및 학살들을 뜻한다. 제일 대표적인 것이 세르비아군이 무슬림 보스니아인에게 편 스레브레니차 학살.
- 부건빌 내전 - 오세아니아 파푸아뉴기니에서 일어난 10년간 부건빌 섬에서 나타난 분쟁. 부건빌 주민들은 솔로몬 제도계에 가깝다보니 파푸아뉴기니에서는 지역차별과 인종차별 등이 나타나서 내전이 번졌다. 내전 기간 동안 부건빌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학살들이 나타났다.
- 나치 독일
- 소련의 소수민족 강제 이주 - 명백히 제노사이드가 아니지만, 이 인종청소는 결과적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게 되었다. 고려인, 홍범도 등 문서 참고.[6]
- 서아프리카 국가들의 분쟁(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 - 서아프리카에서는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의 인종 간의 내전이 악명높았다.
- 서파푸아 학살 - 인도네시아가 현재 점령 중인 서파푸아의 이리얀자야를 강압적으로 탄압하면서 저지르는 학살들.
-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 오스만 제국의 청년 튀르크당이 20세기 초반, 자국 내의 기독교 신자인 아르메니아인에게 편 제노사이드. 하지만 문서를 보면 알다시피 오스만 제국은 아시리아, 그리스 등에 역시 제노사이드를 가했다. 근대의 대표적인 제노사이드로 750,000명의 아시리아인, 900,000명의 그리스인, 1,800,000명의 아시리아인이 참으로 조직화된 목적을 가지고 학살당했다.[7]
- 아민 알 후세이니 - 팔레스타인의 정치인, 나치 독일에게 이용당한 건 물론 유대인들을 의심하여 팔레스타인 안에서의 유대인들 및 일부 아랍인들(주로 유대인들을 돕거나 아민 알 후세이니의 의견에 반대했던 사람들)에게 테러 및 학살을 하였다. 당연히 이스라엘 건국전쟁 직후에 이스라엘 정치인들이 명분을 내세우는 빌미가 되었다.
- 세르비아인 제노사이드 -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우스타샤가 주도한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인들에게 자행한 학살.
- 유고슬라비아의 크로아티아인 학살 - 2차 세계대전 당시 우스타샤가 나타났던 크로아티아에 대한 불만과 의심, 혐오 등으로 나타난 사건.
- 유대인의 팔레스타인[8] 학살사건 - 제1차 중동전쟁을 전후로 하여 영국령 팔레스타인에서[9] 거주하던 비유대인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사건. 작전명 D, 공식 명칭 '여호수아 계획'이라는 형태로 비유대인 민간인들을 죽였다. 피의 숙청이라고 드러난 '데이르 야신 마을 학살사건'은 1개 마을에서 하루 동안에만 250여명이 죽었고[10] ,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북부 도시 하이파는 지프차를 동원해서 방송까지 하면서 학살 이후 소이탄으로 소거했다. 이런 학살이 드러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이 본격적으로 격화했다.[11] 이후 제1차 중동전쟁이 이스라엘의 승리로 기울자, 본격적으로 다시 학살했다. 축출과 파괴라는 형태로 나온 이 학살은 엄청나서, 10월 전투 중에서 다와이마 마을 학살 사건에서는 아이를 포함한 80~100명을 살해[12] , 사프사프 지역에서는 50여 명의 남자들은 우물에 던져넣고 총격해 죽이고 14세 여아를 포함한 적어도 4건의 강간살해, 사사에서는 백기를 확인하고도 1000여명이 죽고 남은 인원은 마을에서 추방, 살라하에서는 94명이 폭사... 등을 이었다.[13] 이 과정에서 1948년 한 해에만 이스라엘군이 400여개의 비유대인 마을들을 파괴하였고, 영국령 팔레스타인을 탈주한 난민의 수만 75만에 이른다. 그나마 이스라엘 진영을 변호한다면, 이런 학살 사례의 거의 전부는 이르군과 슈테른 같은 유대계 테러조직이 일으킨 것으로 하가나(이슈브(유대교도 자치정부)의 민방위군)는 가능하면 이런 행위를 막으려고 노력하기는 했다. 비인도적일 뿐 아니라 다수 인구인 비유대인 인구의 급격한 감소는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지역경제를 붕괴시키고 사회구조를 불안하게 만들 수도 있었기 때문인데, 하지만 하가나의 투쟁 방향이 테러조직 억제를 통한 비유대인에 대한 학살 억제가 아니라 영군에 대한 테러 와 아랍 연합국(아랍 연맹의 회원국들)의 침공에 대한 방어로 전환되면서 학살이 격화된다. 그리고 전쟁에 이겨버리면서는 말 그대로 헬게이트가 열려버린다. 이후에도 비유대인 마을의 주민들에게 벌인 유대인들의 학살은 꾸준했고, 이런 사실들이 드러나면서 이스라엘에의 긍정적인 여론이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완전히 뒤집혔다.(참고로 위에서 언급한 이르군을 이끌었던 메나헴 베긴은 후에 이스라엘 국가의 국무총리로 일하면서 노벨평화상도 수상한다.)
- 청나라의 준가르인 학살 - 계속된 준가르인의 저항에 청나라는 준가르인들을 학살했다. 이로 인해 준가르인 90%가 사라진 한마디로 제노사이드의 극치를 보여준 학살. 준가르가 청나라의 변방을 계속해서 약탈하였고 더 나아가 중원 침략까지 계획했던 점을 감안해도 엄청난 수준이다.
- 캄보디아 제노사이드 - 킬링필드로 유명한 크메르 루주 공산정권 치하에서 일어난 제노사이드. 다만 이것은 모든 학살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소수민족에게 펼친 강제동화 정책들만 제노사이드로 취급된다.[14]
- 코소보 전쟁 - 알바니아인이 다수인 코소보 지역이 세르비아에게서 독립하려 하자 일어난 여러가지 학살들. 다만 서방의 뒤늦은 개입과 외교적 오판으로 수많은 보스니아인들의 살육을 초반부터 저지하지 못했던 보스니아와 달리 이 쪽은 NATO가 신속하게 개입하여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았다.
- 타지키스탄 내전 - 내전 당시 동부의 파미르인들을 대상으로 한 인종학살이 있었다. 동부지역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많았는데 파미르인들 역시 다수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었다. 또한 중부의 가름(gharm) 지역 주민(가름인이라고도 부르며, 타지크계지만 약간 부족 내지 씨족 개념으로 보기도 한다)들조차 가름에서 이슬람 근본주의 조직이 나타난 곳이었다는 이유로 파미르인들처럼 무차별 약탈, 학살을 당했다.
- 태평천국 운동과 신해혁명 당시 태평군과 혁명군의 만주족 학살 - 전자는 완전히 진압되었으며 그로 인해 청나라가 멸망의 위기에서 겨우 벗어났지만 후자는 위안스카이가 혁명군에 투항하는 바람에 끝내 진압에 실패하여 청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만주어가 사멸위기에 처한 이유에 대해서는 만주족이 점차 한족 문화에 동화됨에 따라 자신들의 모어였던 만주어를 잊어버리는 상황에서 그나마 만주어를 할 줄 알던 만주족도 해당 사건들로 인해 거의 씨가 말랐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 호잘리 대학살 - 1992년에 아르메니아군이 아제르바이잔을 침공하여 호잘리의 아제르바이잔인들을 학살한 사건.
- IS - 케리 미국무 "IS의 소수계 학살은 '제노사이드'" 공식 규정[15]
- KKK - 드러난 양상이 민족 말살은 아니지만, 그 취지에 있어선 명백한 제노사이드이다. 실제로 일반적인 제노사이드에서 나오는 다양한 민족 말살 기법을 활용했다.[16]
2. 1을 소재로 한 소설
3. 이민족, 이종족 학살
위와 거의 비슷하지만 이쪽은 Xenocide라고 표기한다. 이원복 만화 <가로세로 세계사> 등지에선 '인종청소'라 하기도 한다.
4. 비트매니아 IIDX 11 IIDX RED의 수록곡
5. 일본의 ZOOM에서 개발한 X68000용 액션게임
1편
2편 (부제: 마스터 오브 다크 커뮤니션)
1989년 ZOOM[17] 사에서 발매한 메카닉 액션게임이며 2편의 경우 1991년에 발매하였다.
주인공이자 파일럿으로서는 '''류가사키 켄'''이며 기체는 트레이서[18] 검술을 이용하며 싸운다. 반면 '''베티'''라는 트레이서를 보조하는 원격조작병기가 있으며
이를 이용해 베티를 부메랑처럼 날려서 원거리 공격을 할수있다.[19]
다만 1편의 경우에는 그래픽이 당시것에 비해 볼품없는데다 난이도가 어려운편이라[20] 그저그런 B급 액션게임이나 이후 2편의 경우에서는 난이도 조절 옵션추가및 아이템종류가 늘어났으며 조작과 그래픽 역시 전작보다 깔끔미려해졌다. 또한 기체역시 전작보다 샤프한편.
타기종 이식으로는 FM TOWNS으로 제노사이드 스퀘어라는 이름으로 1,2편 합본 이식되었으며 그외도 캠코[21] 에서 슈퍼패미컴용으로 이식되었으나 일부 배경음악및 1스테이지 삭제 각스테이지들이 뒤바뀌어있다. 반면 국내회사인 만트라에서는 FM타운 기반으로 2편을 MS-DOS로 이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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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의 기체인 트레이서 0식(TYP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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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의 기체인 트레이서 184식(TYPE-184)
이미지 출처
5.1. 스토리
"서기 2121년, 인류의 고뇌는 정점에 달해 있었다. 태양계의 별을 몇번씩 파괴하고도 남을 만큼 폭발물은 불어났으며, 인구는 계속 늘어만 갔고, 빈번하게 국제적 테러가 발생하였으며, 국가간의 빈부의 차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그러한 문제들은 결국 모종의 계획을 실현시켰다."
그 계획이라는 것은 지구상의 모든 국가를 하나의 컴퓨터에 접속시킨다는 대담한 발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미국의 웨시브너 박사에 의한 그 발상은 실제로 50년이라는 세월과 12만의 관계자를 소모하게 된다."
개발 책임자는 웨시브너 박사의 아들 웨시브너 주니어 박사였다. 컴퓨터의 MPU, 즉 중앙 연산장치는 형식명 JX001을 베이스로 해서 완전 구동될 때까지 JX6801까지 버전업이 행해졌다. 그리고 그 계획은 통칭 MESIA 라고 불려, 극비리에 행해졌다. 각 국가의 정치, 경제, 치안, 군사등의 대부분을 컴퓨터로 제어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만에 하나 일어날지 모르는 테러에 대한 대책에 대단히 신경질적이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드웨어의 사양부터 소프트웨어는 물론 단말기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극비였던 것이다."
2172년, 드디어 메시아는 인류의 구세주가 되기 위하여, 대형 단말 제어 장치로써 각국의 세계 통일 연합 씨큐리티 센터에 설치되었다."
메시아 시스템은 순조롭게 작동하였고, 계속적인 시스템 업그레이드가 가해졌으며, 처리 항목도 하루하루 늘어가, 2221년에는 세계 각국의 모든 정치, 경제, 사람들의 생활관리, 치안에 이르기까지 수억가지 항목을 처리하고 있었다. 당연히 국가간의 빈부의 차등은 해소되었고, 군사비 등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 시스템을 환영했던 것은 아니었다. 전 인류의 겨우 몇%정도였지만, 초기단계에서부터 반대했던 지식인도 있어 마치 20세기의 원자력 발전때의 문제와 비슷한 반대집회도 존재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자들은 사회 정세에 의해서 침묵을 지킬 수 밖엔 없었다. 지구는 그만큼 절박했었으며 전체의 80%이상이나 되는 사람들이 오직 살 수 있다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던것이다.
2202년, 세계 통일 연합 최고등법원은 웨시브너 주니어 박사이하, 제2기 메시아 시스템 개발책임자 5명을 사적인 소프트웨어 등의 변환에 의한 배임죄 등 15가지 죄목으로 기소했다. 그리고 2203년 알래스카의 처형장에서 그들은 처형되었다.
그사건을 계기로 반대자들은 메시아에 제어당해 왔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IPC라는 지하조직을 결성하고 수많은 공작활동을 시작했다.
메시아의 폭권으로 인류는 어둠으로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류는 악에 대항할 방법을 이미 잊고있었다.
2편2227년 남태평양의 섬 하나가 일순간에 소멸했다.
메시아 시스템으로부터의 명령에 대하여 이견을 제시하고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세계의 메스컴들은 하나같이 악성전염병의 방지가 그 원인이라고 보도하고 있었다. 같은 해, IPC의 브랭크스 부대는 메시아 시스템의 설치장소를 확인하고 극비에 파괴공작을 개시했다. 그러나 수많은 상황을 대비해 설계해 놓은 보안유지 시스템과 메시아 자체가 만들어낸 바이오닉 병기에 당하여 이렇다 할 성과는 보이지 못했다. 핵병기에 의한 공격도 검토되었지만 핵을 포함한 연쇄 폭발의 규모가 지구를 가루로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이 판명되어 손을 들게 되어 버렸다. 또한, 메시아 본체의 설치장소는 판명되었지만, 5개의 보조 동력장치에 보호를 받고 있어 전혀 접근이 불가능했다.
다음해, IPC의 기술자들은 모든 힘을 동원해서 유인 전투 머신을 완셩시켰다. 이 머신은 탑승자의 동작을 따라서 동작하기 때문에 '트레이서'라고 불렀다. 지금까지 확인되어져 있는 보안시스템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연쇄폭발의 위험성이 없는 무기를 탑재하였으며 적과 같은 바이오닉을 동력원으로 하고있다. 거기에 더해서 첫 시도로써 트레이서의 내부에 뉴로 컴퓨터 LANDY를 탑재, 그리고 파일럿에는 브랭크스의 젊은 에이스 류가사키 켄이 선출되었다. 인류 최강의 적 메시아 시스템을 부수고 세계의 자유를 되찾는 것은
오직 이 젊은 파일럿 손에 달려있다."
메시아 전쟁으로부터 50년.
각지에서 일어나던 소규모의 전쟁은 멈추어 가고, 파괴된 자연환경은 되살아나기 시작했으며 남아 있는 자원과 인간들의 노력으로 세계는 안정을 찾아갔다. 그런 노력속에서 전쟁 전부터 관절공학, 유전공학 등의 고 수준의 기술로 급속한 발전을 이룩한 기업이 있었다.
'CONEX' 이 기업은 메시아 시스템 프로젝트에도 일부 참가하고 있었던 것 뿐만이 아니라, 트레이서 병기, 바이오닉 전사의 생산 등, 군사 방면에서도 눈부신 활약을 하여 실제 트레이서 병기의 세계시장의 과반수 이상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프 백하우드. CONEX 병기 부문 개발 주임인 그는 세계의 혼란을 틈타 동측 대국이 침투시킨 공작원으로 인간이 아닌 CONEX제의 바이오닉 전사였다. 그는 시작단계에서 빼돌려진 시험용 바이오닉로이드로 50년 전 메시아 전투 당시 누군가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던 개발코드 MB002라는 모델이 그 정체였다. 그는 그 나라에서 연구되어 여러가지 조정과 개조를 받고 12년 전 공작원으로써 침투하였다. 그의 임무는 기술적 정보의 수집이었으나 그는 근래 수년간 그 임무와 관계없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 자신의 사고블럭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메시아 전쟁 후 생산을 중지시키고 있었던 바이오닉 전사를 사용하여 그의 섹션 내에 사설군대를 구성하였고, 사내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상층부를 완전히 날려버리고, 회사 전체를 컨트롤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행동을 막으려 했던 자들은 전부 바이오닉 전사와 백 하운드의 손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그의 의식은 강대한 힘으로 세계를 제압하겠다고 하는 파괴적 사상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상을 알아차린 동측 대국은 그와의 계약을 취소했다. 그리고 원거리 조작으로 자기를 소멸하도록 세트를 한것이다. 백하우드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행동에 박차를 가하는 결과가 되어 버렸다. 그는 CONEX 병기 섹션에서 대형 병기를 제조하고 있었다. '골리앗'이라고 불리는 그 대형 병기의 중심부는 백하우드의 신체와 직접 연결하는 것에 의해 동작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 정보는 현재도 지하조직으로써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IPC에 전해졌다. 그들은 CONEX의 움직임에서 세계적 위기를 느꼈고, 바로 파멸작전을 전개하기 위한 행동을 개시했다.
각 스토리 번역 출처: 1편,2편그는 인류의 운명을 등에 지고 어디로 향하려 하는 것인가?
6. 용자지령 다그온의 등장 캐릭터
7. 사이렌: New Translation 의 엔딩 곡
사이렌: New Translation의 엔딩 곡 'Genocide' 가수는 KD-S.
사이렌의 리부트 게임답게 스다 쿄야의 학살 엔딩처럼 진행된다.
노래의 제목에 맞게 주인공이 양 어깨에 총 을 매고 일본도를 든 채로 메테오를 날리며 썰어가는 모습. 겁에 질린 시인들이 노래에 맞게 춤을 추듯이 발버둥 치는 장면이 코믹하기도 하다. 마지막에 사이렌이 울리며 게임이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