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방어전

 

'''강화도 방어전'''
江華島防禦戰

'''시기'''
1637년 2월 16일 (음력 1월 22일)
'''장소'''
강화도 갑곶진, 강화성
'''원인'''
청군의 강화도 침공
'''교전국'''
[image] 조선
[image] 청나라
'''지휘관'''
강진흔
김경징
김상용
이덕인
이민구
임선백
장신
정백형
<^|1>호쇼이 예친왕 도르곤
아하니칸
'''병력'''
2,000여 명[1]
4,950명
'''피해'''
전멸
불명
'''결과'''
강화도 함락, '''조선의 항복'''
1. 개요
2. 전투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청군
3.2. 조선군
4. 전투 진행과정
4.1. 청군의 도하, 조선군의 대응
4.2. 청군의 상륙, 패주하는 조선군
4.3. 강화성 전투
4.4. 조선군의 항복
5. 전투 이후
6. 패전의 원인
6.1. 현격한 전력 차이
6.2. 조석 차를 이용한 청군의 뛰어난 전략
6.3. 지휘관의 무능
6.3.1. 김경징의 책임은 없다
6.3.2. 김경징도 책임이 있다
6.3.2.1. 업무 태만 & 내분 조장
6.3.2.2. 병정기사와 답정판서서
6.3.2.3. 군사적 무능
6.3.2.4. 김경징 책임론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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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침공이 임박했음을 감지하고도 정묘호란 때의 경험에 기대어 입도(入鳥)를 즉시 실행하지 않은 점은 그렇다고 치자. 그래도 강화도 방어를 위한 충분한 식량과 병력(동원 체계) 그리고 무기 정도는 현지에 충분히 갖춰 놓는 것이 상식 아닐까? …… 그렇다면 염해수로는 어떻게 방어하였는가? 청군의 도하 당일 작전 현장에 서 조선 수군의 유효 전력은 도합 34척이었다. … 그런데 이들 전선은 모두 판옥선으로 규모가 제법 커서 염하수로같이 물살이 세고 수심이 얕은 곳에 서는 적을 막는 데 유용하지 않았다. … 이런게 무능이요 인재가 아니라면, 우리는 과연 역사에서 어떻게 패해야 비로소 인재라 부를 수 있을까? '''이순신 장군이 너무 어이가 없어 지하에서 통곡할 정도의 대인재(大人災) 아닌가?'''

계승범(2020), "1637년 청나라의 조선 정복 전쟁 - 구범진,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까치, 2019)에 대한 서평", 《동북아역사논총》 69, p. 335~336

병자호란이 한창이던 1637년 2월 16일(음력 1월 22일), 청군이 '''단 하루만에''' 강화도를 함락한 전투. 이 전투에서 조선군의 졸전으로 세자빈과 원손, 그리고 봉림대군이 포로가 되면서 남한산성의 인조 정권은 전의를 상실하고 출성했다.

2. 전투 배경


강화도는 원래 고구려의 혈구군으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경덕왕이 명칭을 '해구'로 변경했고 원성왕 때는 이곳에 혈구진을 설치해 군사적 요지로 삼았다. 고려 초에는 이 섬의 명칭을 강화로 고치고 현으로 삼았다. 그후 1232년 최우는 몽골군의 침입에 맞서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이곳에서 30여 년에걸쳐 항쟁했다. 1260년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한 후, 강화도는 한때 인주(인천)에 통합되었으나 곧 분리되었고 1377년에 부로 개편되었다가 1413년에 도호부로 개칭되었다. 1618년에 다시 부로 개편되었다가 1627년 2월 정묘호란인조가 이곳에 피난한 것을 계기로 군사적 중요성이 증대되어 유수부가 설치되었고 섬의 지위도 도로 승격되었다.
강화도는 폭 300여 m 가량인 염하를 경계로 하여 육지와 격리되어 있지만 예성강, 임진강, 한강 등 3강의 어귀에 위치해서 군사적으로 이들 수로를 이용할 수 있는 이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서해 해로를 통해 호남의 풍부한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어서 고려 시대부터 유사시에 장기전을 수행할 수 있는 최적지로 인식되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수도 한성의 방어가 어려울 경우 국왕은 강화도로 파천하고 세자는 남부 지방으로 내려가 항쟁을 전개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정묘호란 후에 꾸준히 방비 태세를 강화했다. 조정은 강화도에서 버티면서 청의 침략을 저지하고 각도에서 근왕병이 집결해 반격을 개시해 적을 섬멸하는 작전을 구상했다.
1636년 12월 13일 청군이 국경을 넘었다는 급보를 접한 조정은 기존 방침대로 강화도 파천을 결정했다. 12월 14일에 한성부 판윤 김경징을 강화도 검찰사, 부제학 이민구를 부검찰사, 수찬 홍명일을 종사관으로 임명해 세자빈, 왕손, 봉림대군, 종실 및 백관의 가족을 호위해 강화도에 먼저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 강화유수 장신에게 주사대장을 겸임시켜 강화도에 소속된 수군을 정돈해 강화도와 육지와의 해상 통로를 봉쇄하게 했다. 한편 각도 수사에게는 관할 지역의 수군을 동원해 강화도에 깁결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청군 선봉 300기의 기습으로 강화도행이 저지되자, 인조는 어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파천해 농성해야 했다. 이후 청태종은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고사 작전에 들어갔으나 천연두라는 변수로 이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강화도를 공략하여 남한산성의 저항 의지를 꺽고자 도르곤을 필두로 한 우익군에게 강화도 공략을 명령했다.

3. 양측의 전력



3.1. 청군


12월 28일, 예친왕 도르곤은 숙친왕 호오거, 회순왕 경중명 등 우익군 16,000명을 이끌고 문산에 당도했다. 그후 그는 12월 30일에 강화도 맞은 편의 보구곶, 성내, 포내, 원포 일대에 포진을 완료하고 강화도를 공략할 준비 태세를 갖췄다. 강화도와 김포 사이를 가로질러 흐르는 염하는 엄동설한에도 결빙이 되지 않는 하천이었으므로 배가 없이는 도하가 불가능했다. 이에 청군은 이듬해 1월 21일까지 20여 일 동안 예성강, 임진강, 한강 하류 일대에 산재되어있었는 배들을 모아 이를 수리하는 한편 주변 지역의 민가를 헐어 송화강과 흑룡강에서 탈 수 있는 형식의 선박과 뗏목 100여 척을 건조했다. 여기에 수레 수백대를 제작해 육지에서 건조한 다수의 배와 뗏목을 염하로 운반했다.

3.2. 조선군


청군이 도하 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 조선군은 병력을 배치해 청군의 도하를 저지하려 했다. 당시 조선 수군은 약 40여척이고 병력은 1140여 명 정도였다. 강화도 유수 겸 주사대장 장신 휘하의 강화수군 33척 940명은 광성진에 주둔해 신덕포 방면으로부터 도하할 것으로 예상되는 청군을 방어하고 광성진에서 갑곷까지의 해안을 경비했다. 또한 충청수사 강진흔이 이끄는 총청수군 7척 200명은 갑곶진에 주둔해 보구곶, 성내, 포내 방면으로부터 도하할 것으로 예상되는 청군을 방어하고 가리산으로부터 월곶까지의 해안을 경비했다.
한편 육군은 강화성과 강화나루를 수비했다. 강화성 수비군은 총합 700명이었다. 적의 침공에 대한 보고가 들어왔을 당시, 누군가가 뿔피리를 불어 병력을 집결해야 한다고 했지만, 강도검찰사 김경징은 사람들이 동요할 것이라며 그 의견을 묵살했다. 김경징은 성에서 7,80명의 무사들만을 이끌고 진해루로 이동했다. 적보 승지 한흥일, 장령 정백형, 호조좌랑 임선백은 강화성 수비병 200명과 피난 관료의 노비 100명을 거느리고 강화성 남문을 수비했다. 그리고 회은군 이덕인은 종친의 노비 및 강화 수비병 200명을 거느리고 강화성 동문을 수비했다. 또한 종료명 민광훈과 봉사 여이홍은 피난 관료의 노비와 강화수비병 200명을 거느리고 강화성 서문을 수비했다.
또한 강화도 해안지대엔 3,000명 가량의 병력이 배치되었다. 해숭위 윤신지는 강화 수비병 500명을 거느리고 용진포에 포진해 청군의 상륙을 저지했고 전창군 유정량은 역시 강화 수비병 500명을 거느리고 불은 일대에 포진해 청군의 상륙을 저지했다. 전 장령 이경은 강화 수비병 500명을 거느리고 가리산 일대에 포진했고 전 승지 유성증도 500명을 거느리고 장령 일대에 포진했다. 그러나 청군이 갑곶을 주 목표로 하여 공격력을 집중할 거라는 정보가 입수되자, 장신은 배치의 일부를 변경했다. 즉, 개성유수 한인과 도사 홍정이 거느린 병력 500명이 갑곶 후방의 연미정 북쪽 일대에 배치되었고 연미정 남쪽에는 장령 일대에 주둔했던 유성증이 이동 배치되었다. 그리고 유정량의 500명도 선원 일대에 이동했고 윤신지의 500명도 광선진과 독진동 사이의 해안선에 이동 배치되었다.

4. 전투 진행과정



4.1. 청군의 도하, 조선군의 대응


강화도 공략 준비를 완료한 청군은 마침내 1637년 1월 22일 새벽에 전격적으로 도하 작전을 개시했다. 청군은 선박과 뗏목 100여 척에 각각 50~60여 명의 병력을 분산 배치한 후 아하니칸(ahanikan)을 선봉으로 하여 갑곶 연안으로 진격했다. 이때 청군은 홍이포를 이용해 조선군에 위협을 가하며 돌진했다. 강진흔이 이끄는 전선 7척과 수군 200여 명은 청군의 공격에 맞서 사력을 다해 싸워 청군의 전선 3척을 침몰시키고 많은 청군을 살상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밀렸다.
강화도에서도 야습을 인식하고 봉림대군과 여러 재신들이 분비국에 모였다. 이민구는 봉림대군의 명령을 받고 적정을 살피기 위해 갑곶 도청으로 이동, 그곳에서 자신이 파악한 정보를 정리하여 보고했다. 사시(巳時)를 조금 지났을 때, 봉림대군과 김경징을 비롯한 재신들이 뒤이어 갑곶에 도착했다. 처음 보고가 들어왔을 당시, 누군가 "뿔피리를 불어 군사를 집결시키자." 하였지만, 김경징은 "사람들이 동요할 것이다."라며 그 의견을 묵살하고, 성 안의 무사들 7~80명만을 동원했다. 한편 광성진에 있던 황선신 역시 육군 100여 명을 이끌고 갑곶 나루로 이동했다.
청군의 홍이포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퍼지자, 김경징과 이민구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겁에 질려 넋을 잃은 채로 창고의 처마 아래 주저앉았다. 얼마 뒤 김경징은 "나는 성을 굳게 지킬 계획을 세우겠다."고 말하고 강화성으로 돌아가려 했다. 임선백은 "대장이 물러나면 병사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장강(長江)은 천험(天險)의 요새이니, 성의 사람들을 모두 동원하여 이곳 진해루에서 적을 막아야 한다."며 극력반대했다. 봉림대군은 임선백의 의견이 옳다고 여겼고, 병력을 이끌고 오기 위해 직접 강화성으로 말을 달렸다.[2][3]

(전략)이때 칸[汗]이 남한산성이 견고하게 수비되기 때문에 강도(江都)를 함락하여 산성을 교란시키려고 팔기(八旗)로 하여금 작은 배 80척을 만들게 하고 다이곤(多爾袞)에게 명하여 수레에 실어 육지를 통하여 끌고 가게 하였다. 갑곶진(甲串津)에 이르러 홍이포(紅夷砲)를 쏘니, 포성이 산과 바다를 흔들었고, 포탄을 맞는 물건은 곧바로 꺾이고 무너졌다. 김경징(金慶徵)과 이민구(李敏求)는 겁을 먹고 어찌 할 바를 모른 채 물러나서 부성(府城)을 지키려 하였다. 호조 좌랑 임선백(任善伯)이 방료(放料)하러 진창(津倉)에 이르렀다가 대군(大君)에게 말하기를, “장강(長江)은 천험(天險)의 요새이니,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대장이 한 번 물러나면 제군(諸軍)들이 반드시 흩어질 것이니, 부성 중의 노약자를 모두 동원하여 진해루(鎭海樓) 아래에 배치시키고 포와 화살을 벌여 놓아 저들을 건너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최선책일 것입니다.” 하니, 대군이 그 계책을 좋게 여기고 김경징을 돌아보며 힘껏 권면했으나 김경징은 대답하지 않고 이민구와 함께 달아나 창사(倉舍)에 숨었다. 대군이 말하기를, “일이 급하게 되었다. 검찰사(檢察使)의 절제(節制)를 믿을 수 없으니, 내가 마땅히 부성에 들어가서 거느리고 오겠다.” 하고, 이어 임선백으로 하여금 김경징에게 알리게 하니, 김경징이 “예예”라고 대답하였다. 대군이 즉시 말을 채찍질하여 성으로 들어갔는데, 얼마 있지 않아 적의 작은 배가 방패를 끼고 노를 저으며 중류로 내려왔다. 충청 수사(忠淸水使) 강진흔(姜晉昕)이 수군을 거느리고 연미정(燕尾亭) 아래에 정박하여 적을 맞아 몇 척을 격파시켰고 기계(器械)를 빼앗은 것이 매우 많았으나 강진흔의 배 또한 적의 포 수십 발을 맞았고 화살과 탄환도 떨어졌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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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집 연보(문간공 동계 선생 연보)中

(전략)

○ 적병이 나루터에 주둔하여 홍이대포(紅夷大砲)를 쏘니 포환이 강을 넘어서 육지 몇 리 밖에 떨어졌다.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파괴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경징과 민구는 겁에 질려서 정신을 잃고 창고 밑으로 피하니 온 군사가 요란하여 항렬을 이루지 못하였다. 경징이 대신에게 말하기를, “나는 성으로 돌아가서 굳게 지킬 계책을 세우겠다.” 하였다.

○ 이때 경징이 도로 부성(府城)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두 대군과 김상용(金尙容)ㆍ박동선(朴東善)ㆍ조익(趙翼)도 함께 들어가려고 하였다. 임선백은 호조 낭관으로서 군사의 요미(料米)를 맡고 있었는데 (중략) 나루 창고에 들어가 대군에게 나아가 말하기를, “어찌 천연으로 된 요새지인 장강을 버리고 허물어진 성안에 들어가 지키려고 합니까. 국가의 존망(存亡)이 이번 한 싸움에 달려 있으니, 대장된 몸으로서 결코 물러나 위축되어 군사들의 마음을 꺾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대군도 그렇게 여겨 경징을 굳게 말리자, 경징은 당황하여 넋을 잃어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나서 창고 담장 아래에 앉았다.선백이 또 대군에게 고하기를, “적선은 빠르기가 나는 것 같고, 우리 배는 썰물 때는 움직이기가 어려우므로 수군만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으니, 진해루 아래에 진을 펴서 지세가 좁고 험함 곳을 끼고 총과 활을 크게 배치하여 혈전(血戰)을 기약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또 성을 지키는 것은 아이들의 장난과 같으니 성안에 있는 군사를 몰아내어 모두 체찰부의 군기를 사용하여 오로지 나루터에서 힘을 쓰도록 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대군이 말하기를, “그렇다. 내가 마땅히 말을 달려 성에 들어가서 군정(軍丁)과 군기를 직접 거느리고 오겠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적선이 날아오듯이 건너왔다.

○ 그때 장신(張紳)은 주사대장으로서 갑자기 광진을 출발하여 갑곶을 향해 강을 거슬러 올라갔으나, 이때는 아직도 조금[潮減]이라 조수가 매우 적어서 밤을 새우며 배를 저었으나 이날 22일 새벽에 겨우 갑곶에서 5리 가량 되는 곳에 이르렀다. 그때 강진흔(姜晉昕)은 배 7척을 거느리고 갑곶에 머물고 있다가 적과 힘껏 싸워 적선 2, 3척을 침몰시켰으나, 진흔의 배도 역시 대포에 맞아 죽은 군졸이 수십 명이나 되었다. 진흔도 적의 화살에 맞았으나 적의 화살과 그 밖의 전구(戰具)를 빼앗은 것이 또한 많았다. 그런데 진흔이 거느리고 있는 배는 매우 적었고(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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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中

(전략)정월 21일에 이르러 오랑캐들이 뭍으로부터 배를 끌고 강화도 동쪽 해안에 도착하니 온 섬 안에 사람의 기색이 다 사라졌습니다. 장신이 광성진에 있었기에 수군과 육군을 다 모았으므로 부중(府中)에는 한 명의 군사도 없었습니다. 금상(今上)께서 당시 봉림대군(鳳林大君)이셨는데 외사(外司)에 나와 여러 재신(宰臣)들에게 이르시기를 “공들 가운데 한 사람이 먼저 가서 적정(賊情)을 살펴보라.”라고 하셨는데 좌우의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으니 제(이민구)가 속으로 비루하게 여겼습니다. 제가 대답하기를 “제가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다만 수하에 병사가 없으니 적의 실태를 살필 수는 있겠으나 적을 막는 일은 어찌한단 말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대군(大君)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공에게 적을 공격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니 다만 가서 살펴보고 보고하라. 내가 마땅히 병사들을 모아 뒤따라 달려갈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곧바로 일어나 하직 인사를 하고 가는 길에 임시 거처를 지나게 되었지만 들어가지 않은 채 갑곶 도청(甲串都廳)으로 달려갔습니다. 당시 시각이 이경(二更)에 가까웠고 칠흑(漆黑)처럼 어두웠는데 적진의 불빛이 물 너머에서 깜빡이는 것을 보고는 작은 종이에 제가 본 것을 직접 써서 보고하였습니다.

동이 틀 무렵에 살펴보니 적들의 털 장막 대여섯 줄이 문수산(文殊山) 아래에 설치되어 있었고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났습니다. 사시(巳時) 쯤 되었을 때 적들이 대포를 이용해 서쪽 해안을 연이어 폭격하니 흙과 돌이 부서졌습니다. 작은 배 수십 척이 앞 바다에 떠서 장차 건너오려는 형세였습니다. 조금 있다가 대군께서 도착하셨고, 재상 김상용(金尙容)과 판서 이상길(李尙吉)과 판서 조익(趙翼)과 동지 여이징(呂爾徵)과 참의 유성증(兪省曾)과 헌납 이일상(李一相)과 전적 이행진(李行進) 등 10여 명도 이어서 도착하였습니다.(중략)

이때에 본부의 중군 황선신(黃善身)이 광성진에서 비로소 육군 113명을 이끌고 와서 개펄에서 저지하며 멀리 돌아서 왔습니다. 막 봉우리의 정상에 올라서서 미처 진을 펼치지 못했는데 적선(賊船)이 이미 중류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대군께서 저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공은 여기에 머물러 있으라. 내가 군사들을 더 모아서 오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가시면서 또 저를 돌아보고 거듭 신신당부하고는 말을 달려 부중(府中)으로 돌아가셨고, 여러 재신(宰臣)들도 따라 흩어졌습니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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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정판서서中

(전략)남양의 전쟁에서 패하자, 문효공(조익)은 강도(江都)에 들어갔다. 적(賊)이 갑진(甲津)을 건너니, 공(조복양)[4]

이 급히 가서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과 유수(留守) 장신(張紳)을 만나 깨우치기를,

“적이 작은 배로 군사를 건네주니 그 수가 많지 않습니다. 지금 공들이 급히 배를 저어 가로막아서 적으로 하여금 다시 건너지 못하게 한 다음 격분한 군사를 보내 그 어지러운 틈을 타고 공격하도록 한다면, 패배를 전환시켜 승리하는 일이 이 한때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늦으면 성(城)은 함락되어 어찌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충청 수사(忠淸水使) 강진흔(姜晉昕)이 검찰소(檢察所)에 있었는데, 공이 또 강진흔에게 말하기를,

“뒷날 조정에서 전쟁에서 패한 죄를 논하면 모두 당신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하니, 강진흔이 탄식하기를,

“검찰사들은 젖먹이일 뿐이라 나에게 의지하여 오직 잠시라도 떨어질까 두려워하니, 어찌할 수 없다.”

하자, 두 사람은 울기만 할 뿐이었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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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판서(吏曹判書) 송곡(松谷) 조공(趙公) 행장 中

(전략)21일 주인의 집에 묵고 있었는데 밤이 반도 지나지 않았을 때에 놀라며 동요하는 소리가 홀연히 들려오기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하인에게 물어보게 하였더니 적보(敵報)가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즉시 분비국(分備局)에 들어갔더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이미 모여 있었다. 이때 군관 중에서 내가 데리고 온 사람은 단지 4, 5인뿐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오직 박늑(朴玏)과 차중철(車仲轍)만 나를 따라서 강화부(江華府)로 왔고, 나머지 사람들은 덕포(德浦)에 있었으며, 박늑은 또 장신(張紳)의 진중(陣中)으로 갔기 때문에, 단지 차중철과 아들 몽양(夢陽)ㆍ진양(進陽)이 내 옆에 있었다.

이때 한흥일(韓興一)이 수성(守城)할 계책을 세우면서 성 안에 있는 사람은 조관(朝官)과 사인(士人)을 막론하고 남자라면 모두 남문(南門)에 모이도록 하였기 때문에, 나의 두 아들도 모두 그곳으로 갔다. 이른 아침에 김경징(金慶徵)이 군병을 이끌고 갑곶(甲串)으로 나가기에, 내가 “나도 가겠다.”라고 하면서 차중철만을 데리고 따라 나갔다. 그런데 남문에 이르렀을 때 차중철이 “대감께서 일단 전소(戰所)로 가시게 된 마당에는 부자(父子)가 함께 가지 않을 수 없으니 아드님 두 분을 불러와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기에, 즉시 성문으로 올라가서 한흥일에게 말하고는 두 아들을 데리고 왔다.

성을 나와 1, 2리쯤 지났을 적에 포성(炮聲)이 진동하는 것이 들렸다. 갑곶에 이를 무렵에 주먹만 한 크기의 포환(砲丸)이 계속해서 날아오자 사람들 모두가 풀이 죽었다. 갑곶의 둔덕 위에 이르러서 바라다보니, 나루의 동편에는 모여 있는 적의 무리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고개 위에 주둔한 병력은 많은 것 같았다. 그리고 작은 배들이 마치 우반(隅盤)의 모양과 같았으며 크기도 우반을 겨우 능가할 정도였는데, 깃발을 달고서 나룻가에 떠 있는 배들의 숫자도 겨우 30여 척 정도에 불과하였다. 한편 나루의 북쪽을 바라다보니, 아군의 전선(戰船) 4, 5척이 정박해 있었다.(중략)

변보(變報)를 처음 들었을 때에 어떤 이가 뿔피리를 불어서 군사들을 집결시켜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김경징은 그렇게 할 경우에 인심을 경동(驚動)시킬 것이라고 말하고는, 단지 성 안의 무사들만을 모아서 데리고 가려고 하였다. 그 숫자는 겨우 7, 8십 명에 불과하였는데, 그들에게 갑옷을 입고 나룻가로 내려가도록 하였으므로, 나도 차중철에게 함께 가서 군사들과 공동으로 사격하도록 하였다. 이때 검찰(檢察) 등 여러 사람들은 모두 창고의 처마 아래에 앉아 있었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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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정기사中


4.2. 청군의 상륙, 패주하는 조선군


이보다 전인 1월 21일 밤, 장신은 광성진에 주둔한 수군 33척과 940명을 이끌고 갑진으로 이동했으나 이때 마침 조수가 가장 낮은 시기를 앞둔 때였으므로 수위가 낮아 선단의 이동속도가 크게 지연되어 22일 새벽에 이르러서야 겨우 갑곶 남방 5리 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신은 정포만호 정연과 덕포첨사 조종선을 선봉으로 내세워 청군 선단의 배후를 치게 했다. 정연과 조종선의 선단이 청군의 전함 수척을 격침시키자, 청군은 선단 일부를 선회시켜 반격 태세로 전환했다. 강진흔의 수군 부대는 이틈을 타 청군의 포위망을 벗어나 활로를 찾는 듯했다.
강진흔은 북을 치고 깃발을 흔들면서 장신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김경징 등도 언덕 위에서 깃발을 흔들며 출동을 재촉했다. 그런데...
'''장신의 선단은 조금도 나아가지 않고 지켜만 보다가, 승산이 없다 여겼는지 징을 울려 정연과 조종선에게 후퇴를 명한 다음, 선단을 수습해 광선진으로 퇴각했다.'''[5]
강진흔은 그걸 보고 크게 노해 큰소리로 장신을 꾸짖었다.
"네가 나라의 후은을 입고서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단 말이냐! 내 반드시 살아서 너를 죽이겠다!"
이때 장관(將官) 구원일이 장신을 죽이고 군사를 몰아 상륙한 뒤 결전을 벌이려 했으나 장신이 막자 통곡하며 바다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결국 장신의 수군 선단이 강진흔을 방치하고 광성진으로 후퇴해버린 뒤, 강진흔의 수군은 청군의 공격을 받고 궤멸되었다. 강진흔을 비롯한 수십명의 장졸들만이 간신히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월곶 방면으로 후퇴할 수 있었다.

(전략)충청도의 전선(戰船) 7척은 급류에 정박해서 갑자기 제어할 수 없었고, 본부(本府)의 수군 27척은 광성진에서 북쪽으로 올라왔는데 조수가 밀려나가자 전진하지 못하였습니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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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정판서서中

(전략)사시(巳時)쯤 되었을 때에 판옥(板屋)의 대선(大船)이 남쪽에서 올라오는 것이 보였는데, 그 숫자가 매우 많았다. 이에 사람들 모두가 이것은 필시 남방의 전선(戰船)이 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들 크게 기뻐하였다. 그런데 그 배들이 나루를 수백 보쯤 앞에 두고서 모두 정지한 채 전진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바로 장신이 거느린 경기(京畿)의 전선들이었다.

(중략)오시(午時)쯤 되었을 적에 적의 선박이 차례로 건너오기 시작하자, 검찰 등이 언덕 위에서 깃발을 흔들며 주사(舟師)의 출동을 재촉하였으나 주사는 끝내 꼼짝도 하지 않았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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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정기사中

(전략)장신이 거느리고 있는 수군은 대단히 많았으나 장신은 적세(賊勢)가 급한 것을 보고도 전진할 생각이 없었다. 진흔이 북을 치고 기를 흔들면서 장신에게 빨리 전진하라고 재촉하였으나 장신이 끝내 나오지 않았다. 진흔이 배 위에서 외치기를, “네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고서 어찌 차마 이럴 수가 있느냐. 내가 너를 베어 죽이겠다.” 하였으나 장신은 끝내 듣지 않고 강물을 따라 내려가버렸다. 이때에 정포 만호(井浦萬戶) 정연(鄭埏)과 덕포 첨사(德浦僉使) 조종선(趙宗善)이 선봉이었는데, 정연이 적선 1척을 함몰시키고 장차 전진하려고 하였으나 장신이 징을 쳐서 퇴군시키므로 정연 등도 모두 물러갔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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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中

유수(留守) 장신(張紳)이 수군의 대장으로 큰 배에 올라 바닷가에 정박하고 있었으나 조수가 밀려가서 물이 얕다는 이유로 배를 진격시키지 않았다. 강진흔이 북을 치고 깃발을 흔들면 문득 배를 진격시켰다가 힘을 합하여 무찔러 싸우려 하면 장신이 응하지 않으니, 강진흔이 크게 호통치며 말하기를, “장신아, 너는 국가의 은혜를 받았거늘, 차마 이처럼 저버린단 말이냐. 내가 마땅히 너의 머리를 벨 것이다.” 하였으나, 장신은 듣지 못하는 척하였다. 장신의 선봉인 정포 만호(井浦萬戶) 정연(鄭埏)이 적과 싸워 한 척을 격파시키자 장신이 또한 징을 쳐서 배를 퇴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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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집 연보(문간공 동계 선생 연보)中

한편 청군은 강진흔의 조선 수군을 격파한 뒤 염하의 강심에서 대기한 채로 한동안 강화도 해안의 동정을 살피며 복병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해안에서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자, 청군은 배 1척을 전진시켰다. 조선군은 다가오는 적선을 향해 조총을 쏘았으나 닿지 않았다. 그 틈에 배가 정박하여 대여섯 명이 하선하면서 화살을 쏘기 시작했고, 흰 깃발을 흔들어 본대에 상륙 신호를 보냈다. 청군은 일제히 화포로 위협사격을 가하며 상륙을 개시했다. 갑곶 나루 맞은 편 성동리 포내 일대에 대기하고 있던 청군의 후속 부대가 뒤이어 염하를 도하했다.
청군이 상륙하자, 조선군은 순식간에 진영이 와해되었다. 김경징, 이민구를 비롯하여 모든 조선군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그러나 중군(中軍) 황선신(黃善身)과 파총 황대곤(黃大坤), 그리고 천총(千摠) 강흥업(姜興業)ㆍ구일원(具一元), 초관(哨官) 정재신(鄭再新) 등을 비롯한 100여 명의 장졸들은 청군의 상륙을 저지할 것을 굳게 다짐하고 끝까지 방어 진지에서 떠나지 않았다.
80여 척의 청군 선단에서 병사들이 쏟아져 나오자, 중군 황선신이 지휘하는 조선군은 침묵을 유지했다가 청군이 근접해오자 일제히 총포 사격을 기습적으로 가했다. 조선군의 기습 사격으로 청군의 선두 병력 수십 명이 살상되었고 청군은 한동안 멈칫거렸다. 그러나 그들은 곧 조선군이 소수라는 걸 간파하고 흩어진 대오를 정돈한 후 1,000여 명의 병력으로 돌격을 감행했다. 조선군은 백병전으로 맞섰으나 끝내 100여 명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했다.

(전략)적의 선박이 중류(中流)를 막 지나자마자 아군의 조총(鳥銃)이 일제히 불을 뿜었으나 모두 거리가 미치지 못한 채 물속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발사하지 못하는 사이에 적의 선박 한 척이 먼저 도착하여 정박하였는데, 그 배에 탄 자가 겨우 5, 6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건만 그들이 배에서 내려서 나오자 아군은 어지럽게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그 뒤에 계속해서 또 두세 척의 배가 정박하였는데, 아군이 화살에 맞아 혹 즉사(卽死)하자 모두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내(조익)가 언덕 위로 나아가 서 있다가 그런 소란의 와중에서도 장수(將帥)가 도망친다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두 아들이 나에게 말하기를 “적병이 이미 건너왔으니 피하십시오.”라고 하였으나, 나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얼마 뒤에 두 아들이 또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 모두가 벌써 떠났는데, 어떻게 혼자서 서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기에, 뒤를 돌아다보니 전후좌우에 한 사람도 남아 있는 자가 없었고, 멀리 바라다보니 제군(諸軍)이 길을 메우고 달아나고 있었다. 그래서 마침내 잡아 끄는 대로 따라서 절벽 길을 통해 내려가 물가까지 이르고 보니 두 다리에 힘이 없어서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으므로, 두 아들과 차중철이 함께 나를 끌고 갔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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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정기사中

(전략)저(이민구)는 그대로 갑곶 도청의 북쪽 언덕에 있었는데 적들이 배를 댄 곳과는 겨우 4, 5십 보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적들은 재빠르게 본부의 군사를 무찌르려고 곧장 진격하여 성으로 접근하였습니다. 갑옷을 걷어붙이고 재빨리 달려 곧장 황선신의 군대와 마주쳤는데 황선신의 군대는 패하고 말았습니다. (중략) 순식간에 언덕 위는 텅 비어 적들이 없었습니다. 멀리 성 밖을 바라보니 적들의 기마병이 내달리며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중략) 정오를 지날 무렵 문득 보니 방석만 한 작은 배가 부(府)의 남쪽 고속포(古束浦) 쪽에서 내려오는데 한 아이가 노를 잡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배를 타고 해선(海船)에 도달하여 죽을 고비를 넘기며 지금까지 목숨을 보존하고 있습니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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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정판서서中

(전략)적선(敵船)이 모두 진안(津岸)에 올라왔는데, 사방으로 둘러보아도 복병이 없자 백기(白旗)를 흔들어 후방 병사를 부르니, 북과 함성 소리가 바다를 뒤덮으며 배에서 내려왔다. 중군(中軍) 황선신(黃善身)과 천총(千摠) 강흥업(姜興業)ㆍ구일원(具一元)은 힘껏 싸우다가 죽었고, 김경징과 이민구 및 장신은 모두 달아나니, 적이 무인지경으로 들어오는 듯하였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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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집 연보(문간공 동계 선생 연보)中

(전략)적이 처음에는 복병이 있는가 의심하여 배를 출발시키지 않았는데 적의 배 1척이 홀연히 전진하여 한 손에는 방패를 쥐고 한 손으로는 노를 저으며 전선 사이를 뚫고 지나가 해안에 도착해 상륙한 자가 7명이었다. 이것을 보고 우리 관군이 총을 쏘려고 하니 화약에 습기가 차서 폭발하지 않았고 쏠 만한 화살조차 없었다. 적이 손에 칼을 들고 걸어서 해안을 빙 둘러보고 북쪽을 두루 바라보아도 사방에 복병이 없는 것을 보고 드디어 백기(白旗)를 흔들어 부르니, 적선이 바다를 뒤덮고 건너왔다. 중군(中軍) 황선신(黃善身)이 진해루 아래에서 싸워 적 3명을 사살하고, 군인이 사살한 것이 또 6명이 되었는데 선신은 힘이 다해 죽었다. 이때 강화도 초관(哨官)이 모두 장신의 배 안에 있었는데 한 사람도 육지에 내려온 자가 없었다. 천총(千摠) 강홍업(姜弘業)과 초관 정재신(鄭再新)은 전사하고, 경징과 민구는 이미 말을 버리고 물에 들어가 나룻배를 타고 장신의 배로 가서 함께 타고서 달아났다. 천총 구일원(具一元)이 장신을 꾸짖고 물에 빠져 죽었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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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中

(전략)본부 중군 황선신(자는 사수(士修)이며, 훈련 정이다.)이 주장(主將)이 방비가 해이한 것을 보고 힘써 간하니, 주장이 웃으며 말하기를, “늙은 장수가 겁이 많다.” 하고, 늙고 지친 군사, 1백여 명을 주어 선신으로 하여금 방수하게 하였다. 적병이 이름에 미쳐 선신이 우부 천총(右部千摠) 강흥업(자는 위수(渭叟)이며, 훈련 첨정이다. 젊었을 때 권필(權鞸)에게 수학하였는데 권필이 화를 당하게 되니 비분하여 붓을 던지고 무(武)에 종사하였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일이 이미 틀렸으니, 우리들이 나라에 보답하는 길은 오직 죽음뿐이다.” 하고, 드디어 진해루 밑에 나가 적 수십 명을 쏘아 죽이고 힘이 다하자 사로잡혔는데 굽히지 않고 죽었다. 흥업은 선신이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더욱 힘써 싸우며 죽을 때까지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오랑캐가 화를 내어 그 시체를 바다 속에 던지며 탄식하기를, “장하다, 두 백수장군(白首將軍)이여.” 하였다.(중략)

○ 좌부 천총(佐部千摠) 구원일(具元一)이 홀로 휘하 수십 명으로 유격대를 만들고 처자와 이별하기를, “오늘에야 나는 죽을 곳을 얻었으니, 다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말라.” 하고, 드디어 갑곶 나루로 달려갔다. 경징과 민구는 배를 빼앗아 달아나고 장신(張紳)은 강 어귀에 배를 정박한 채 싸울 뜻이 없는 것을 보고, 원일이 큰 소리로 외치기를, “적병이 장차 강을 건너려 하는데 묘사(廟社)는 어느 곳에 두며, 섬 사람이 장차 도륙당할 것인데 대장이 싸우지 않으니, 청컨대 먼저 대장을 벤 후에 싸우겠다.” 하였다. 장신이 크게 화를 내며 그 부하를 시켜 잡게 하니, 원일이 칼을 빼들고 크게 꾸짖기를, “내가 이 칼로 너를 베어 만 쪽을 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어찌 더벅머리 녀석에게 사살되겠는가.” 하고, 동쪽을 향하여 통곡하고 칼을 쥐고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 이 일이 임금께 보고되니 세 사람에게 모두 병조 참의를 증직하고 정려하였으며, 충렬사에 배향하고 표충단(表忠壇)에 아울러 배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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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中

(전략)파총 황대곤(黃大坤)이 갑곶 나루를 방수하다가 적병이 이르러 죽었는데, 특별히 공조 참의를 증직하였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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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中

(전략)오랑캐 장수 구왕(九王)[6]

이 제영(諸營)의 군사 3만을 뽑아 거느리고 삼판선(三板船) 수십 척에 실은 뒤 갑곶진(甲串津)에 진격하여 주둔하면서 잇따라 홍이포(紅夷砲)를 발사하니, 수군과 육군이 겁에 질려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적이 이 틈을 타 급히 강을 건넜는데, 장신·강진흔·김경징·이민구(李敏求) 등이 모두 멀리서 바라보고 도망쳤다. 장관(將官) 구원일(具元一)이 장신을 참(斬)하고 군사를 몰아 상륙한 뒤 결전을 벌이려 했으나 장신이 깨닫고 이를 막았으므로 구원일이 통곡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중군(中軍) 황선신(黃善身)은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룻가 뒷산에 있었는데 적을 만나 패배하여 죽었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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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5년 1월 22일 임술 8번째 기사


4.3. 강화성 전투


청군은 병력을 진휼리, 남산리, 고성동, 신당리, 승거문 일대에 분산 배치하여 강화성에 대한 포위태세를 갖춘 후 성내에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원임대신 김상용은 약 3000명의 방어 병력을 각 성문에 분산 배치한 후 "만일 성밖으로 나가는 자가 있다면 엄한 군령으로 다스리겠다."라고 엄명해 병력의 이탈을 단속했다.또한 성내의 모든 화포를 각 성문의 문루에 집중 배치하고 청군의 항복 권유를 단호히 거부했다. 청군이 강화성을 겹겹이 포위하자, 성내의 관원들은 김상용에게 권유했다.
"일단 위기를 피해 육지로 탈출하여 국왕이 농성하고 있는 남한산성으로 나아가 사후 대책을 논의하자."
그러나 김상용은 거부했다.
"나는 명색이 대신으로서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구차스럽게 살기를 도모하겠는가? 오직 이 강화성과 운명을 함께 할 뿐이다."
김상용의 결연한 의지에 감동한 성내 관원들은 모두 최후의 일각까지 목숨을 바쳐 성을 사수할 각오를 다졌다. 이렇듯 조선군이 항복하지 않자, 청군은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에 일제 공격을 감행했다. 청군은 먼저 다수의 홍이포를 동원해 강화성의 각 문루에 집중 포격을 실시했고 보병, 기병 혼성부대가 운제, 당차 등 공성 기구들을 앞세워 성벽을 향해 밀려들었다. 조선군은 총포와 궁시로 청군에 대항했다.
공방전이 하루 종일 계속되어 상호간 사상자가 늘어났다. 해가 지면서 조선군의 탄약과 화살이 바닥이 났고 청군의 포격으로 성벽이 군데군데 허물어지고 문루가 파손되어 조선군은 더이상 청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마침내 강화성 북문을 공격하던 청군의 일부가 성문을 돌파하고 성내로 돌입했고 성내 각처의 조선군은 대혼란에 빠졌다. 결국 강화성 동, 서, 남문도 돌파되어 성내에서는 청군과 조선군이 뒤엉켜 혼전 양상을 보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강화성 남문 문루에 자리잡고 있던 김상용은 화약(火藥)을 장치한 뒤 종에게 불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종이 그 뜻을 깨닫고 가지 않으려 하자, 김상용이 달랬다.
"담배를 피우려고 그러는 것 뿐이니 속히 불을 가지고 와라."
종이 곧 불을 가지고 오자, 김상용은 문루에 쌓인 화약 궤 위에 걸터앉아 곁에 있던 관원들에게 당부했다.
"나라의 치욕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늙은 몸이 더이상 살아서 무엇하겠는가? 나는 이 성과 함께 최후를 마치려니와 여러분은 어서 이 자리를 피해 후일에 국가의 치욕을 씻도록 하라."
그러자 곁에 있던 우승지 홍명형, 전 좌랑 김수남, 별좌 권순장, 생원 김익겸 등이 거부했다.
"대감께서는 어찌 혼자서만 의로운 일을 독차지하려 하십니까? 저희들도 함께 데려가주십시오."
이때 겨우 13살이었던 김상용의 손자 수전도 "저도 할아버지와 함께 따라죽겠습니다."라고 울부짖었다. 김상용이 이를 말렸으나 수전이 끝내 죽기를 청하니, 결국 김상용은 화약 상자에 불길을 당겼다. 이윽고 요란한 폭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고 강화성 남문 문루는 형체조차 남지 않고 사라졌다. 김상용과 그의 어린 손자 김수전을 비롯한 홍명형, 김수남, 권순장, 김익겸 등과 많은 관원 및 군졸들이 이때 죽었다.
또한 많은 부녀자들이 청군의 난행을 피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정절을 지켰다. 김류의 아내와 김진표의 아내, 서평부원군 한준겸의 아내, 연능부원군 이호민의 아내, 정효성의 소실 등이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특히 김상용과 함께 분사한 권순장의 아내 이씨와 처제, 열두살 난 어린 딸, 종 의남, 의례 등 온 가족이 함께 자결했다. 정효성의 일가는 정효성의 아내 뿐만 아니라 백창, 백형 등 3부자 등 9명이 한날 한시에 자결했다.

김상용(金尙容)이 막 남문루(南門樓)에 올라 승지 홍명형(洪命亨), 상원수(祥原守) 이세녕(李世寧), 형조 정랑 김수남(金秀南)과 함께 적을 막았다. 적병이 사방으로 포위하자 피할 수 없음을 알고서 화약 상자에 걸터앉아 웃옷을 벗어 종자(從者)에게 주고 돌아가 장사 지내게 하니, 서손(庶孫) 김수전(金壽全)은 13세 아이로 떠나지 않고 곁에 있다가 옷자락을 당기고 울며 말하기를, “할아버지와 함께 죽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별좌(別坐) 권순장(權順長)과 생원 김익겸(金益兼)이 말하기를, “공만 홀로 아름다운 일을 이루려 합니까.” 하고 또한 떠나지 않았는데, 드디어 불을 붙이자 사람과 누각이 모두 날아갔다. 공조 판서 이상길(李尙吉)은 성 밖에 있다가 또한 부(府)로 달려 들어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고, 돈녕부 도정 심현(沈誢)은 아내 송씨(宋氏)와 함께 손수 유소(遺疏)를 쓰고 북향(北向)하여 사배(四拜)한 뒤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필선(弼善) 윤전(尹烇), 전(前) 장령(掌令) 이시직(李時稷),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 송시영(宋時榮), 전 감사 정효성(鄭孝誠), 전 장령 정백형(鄭百亨), 병조 좌랑 이사규(李士珪), 현감 정수(鄭洙), 정자(正字) 이가상(李嘉相), 익위(翊衛) 강위빙(姜渭聘), 광흥창 수(廣興倉守) 이돈오(李惇五), 이돈오의 아우 이돈서(李惇敍) 등이 모두 죽었다. 부녀자가 순절한 것은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강도가 마침내 함락된 것은 22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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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집 연보(문간공 동계 선생 연보)中

(전략)김상용은 (중략) 원임 대신으로서 강화도에 들어갔는데, 적병이 사방을 둘러싸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왜 피하지 않는가?” 하자, 상용이 탄식하기를, “나는 대신이니 죽음이 있을 뿐이다. 어찌 구차히 살려고 하겠는가.” 하였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니, 상용이 일이 이미 틀린 것을 알고 드디어 집안 사람과 작별하고 입었던 옷을 벗어 하인에게 부탁하고 이르기를, “네가 만일 온전히 살거든 이 옷을 아이들에게 전하여 뒷날 허장(虛葬)할 도구로 쓰도록 하라.” 하고, 곧 남문으로 가서 화약 상자에 걸터앉았다. (중략) 상용이 시자(侍者)에게 말하기를, “가슴이 답답하여 담배를 피우고 싶으니 불을 가져오너라.” 하니, 시자는 공이 일찍이 담배를 피우지 않았기 때문에 가져오지 않았다. 상용이 재촉하고 이내 손을 내저어 곁에 다른 사람들을 멀리 가게 하자, 권순장(權順長)과 김익겸(金益兼)이 말하기를, “정승은 홀로 좋은 일을 하려 합니까.” 하면서 끝내 가지 않았다. 상용이 드디어 상자 속에 불을 던지니 사람들과 문루(門樓)가 모두 날아가 보이는 것이 없었다. 《난리잡기(亂離雜記)》

○ 상용의 손자 수전(壽全)은 나이 13세로 그때 곁에 있었는데 종에게 안고 가라고 명하니 아이가 옷을 잡아당기며 울면서, 가지 않고 말하기를 “할아버지를 따라 죽겠습니다.” 하였다. 종도 가지 않고 모두 죽었다. 이 일이 알려져 정려(旌閭)하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내리고, 선원 옛터에 사당을 세워 충렬사(忠烈祠)라 이름하였다. 《강화지》

(중략)

권순장의 자는 -, 본관은 안동(安東)이요, 벼슬은 빙고 별좌(氷庫別坐)이다. 지평을 추증하고 또 대사헌을 증직하였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라 정려하였다.

○ 처음에 순장이 비분강개하여 앞서 말하기를, “임금의 안위를 알 수 없으니, 나와 함께 나루터 싸움터에 나갈 자가 있는가? 이와 같은 것이 비록 반드시 승패에 유익하지 않을지라도 홀로 편안히 앉아서 밥이나 먹고 지내면서 세월을 허송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 하였다. 이에 선비들이 모여드니, 의려(義旅)라 일컫고 유성증(兪省曾)의 분사(分司)에 가서 소속하였다. 유병(儒兵)이기 때문에 행진(行陣)에는 무관하였으나 방비하기에는 넉넉하였다. 드디어 빈궁의 위사(衛士)가 되어 남성(南城)을 지켰는데, 이때에 와서 두 아우를 보내 늙은 어머니를 피난시켜 구하게 하고, 자기는 마침내 불에 타죽었다. 충렬사에 배향하였다. 《강화지》

○ 순장의 아내 이씨는 □구원(久源)의 딸로, 그때 송정촌(松亭村)에서 병난을 피하고 있다가 순장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세 딸과 두 아들을 먼저 죽이고 마침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순장의 딸은 나이 12세인데 역시 목을 매 죽었으며, 이씨의 여동생으로 출가하지 않은 자와 여러 종족의 부녀가 모두 죽고, 사내종 의남(宜男)과 계집종 의례(宜禮)도 죽어 아울러 정려하였다. 《강화지》 《강화록》의 합록

(중략)

○ 정백형의 자는 □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음관(蔭官) 감사 효성(孝成)의 아들이다. 갑자년에 문과에 올랐으며, 벼슬은 장령을 지냈다.

○ 백형은 청병(淸兵)이 성에 닥쳐왔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나는 살아서 부형의 죽음을 볼 수 없다.” 하고, 드디어 먼저 목을 매어 죽었다. 그 아버지 효성과 그 서모 및 형 백창(百昌)(현곡 감사(玄谷監司))과 아내 한씨(준겸(浚謙)의 딸)와 첩 두 사람 및 동생들과 그의 아내 등 9인이 모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동주집(東洲集)》에 있는 정효성 비문에 이르기를, “합도(闔島)가 패하니 공 역시 졸(卒)하였는데 나이는 78세이다.” 하였다. 대개 효성은 효행으로써 정려한 것이다.) 백형의 고조는 성근(誠謹)인데, 연산조에 충효로써 화를 입어 정려하였다. 아들 주신(舟臣)과 매신(梅臣), 손자 원린(元麟)과 원기(元麒) 및 원린의 아들 효성(孝成)이 모두 효행으로 정려하였는데, 이 때에 와서 일문(一門)을 정려하였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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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中

(전략)

○ 김류의(金瑬)의 아내 유씨(柳氏)ㆍ 근(根)의 딸경징의 아내 박씨ㆍ 효성(孝誠)의 딸진표(震標)의 아내 정씨 백창(百昌)의 딸 및 김류의 첩 신씨ㆍ경징의 첩 권씨가 같은 날에 목을 매어 죽었는데, 아울러 정려하였다. 《강화지》

○ 그때 경징과 장신의 어머니가 모두 성 안에 있었는데, 두 사람이 모두 자기 어머니를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그 어머니가 마침내 적중에서 죽었다. 경징의 아들 진표는 그 아내를 다그쳐 자진하게 하고, 그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적병이 이미 성 가까이 왔으니 죽지 않으면 욕을 볼 것입니다.” 하니, 두 부인이 이어서 자결하고 일가 친척의 부인으로서 같이 있던 자들도 모두 죽었는데, 진표는 홀로 죽지 않았다.

○ 일찍이 경징의 아내 박씨가 경징이 자기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자주 간하니, 경징이 노하여 말하기를, “여자가 무엇을 아느냐.” 하자, 박씨는 울면서 말하기를, “나라가 깨치고 집이 망하면 또한 여자라 하여 스스로 모면할 수 있는가.” 하더니, 과연 이때에 이르러 한 집안의 부녀가 모두 목을 매어 죽었다. 혹자는, “진표가 다그쳐 죽게 하였다.”고 일컬었다. 대개 인심이 경징에 대한 분노가 쌓여서 그 어머니와 아내의 절개까지 아울러 깎아 없애려고 한 것일 뿐이다. 정씨는 백창의 딸이니, 그 친정의 혈통을 증험해 보더라도 남에게 닥달을 받아 죽을 사람은 더욱이 아니다. 《강화지》(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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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中


4.4. 조선군의 항복


강화성이 함락되자 중관이 원손을 업고 피했으며 성에 있던 조사(朝士)도 일시에 도망해 흩어졌다. 봉림대군이 용사를 모집하여 출격하였으나 대적하지 못한 채 더러는 죽기도 하고 더러는 상처를 입고 돌아 왔다. 얼마 후 도르곤이 성 밑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쉽지만 군사를 주둔시키고 진격하지 않는 것은 조명(詔命) 때문이다. 황제가 이미 강화를 허락하였으니, 급히 관원을 보내 와서 듣도록 하라."
이에 봉림대군은 사람을 보내 진의를 확인하게 한 후 "저들이 호의를 갖고 나를 유도하는 것인지는 실로 헤아릴 수 없으나, 일찍이 듣건대 동궁(東宮)께서도 가기를 원했다고 하니, 진실로 위급함을 풀 수만 있다면 내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는가."라며 항복을 결정했다. 그후 봉림대군은 청군의 진영으로 향했고 저물녁에 도르곤과 함께 강화성에 입성했다. 도르곤은 약탈과 살육 행위를 금지하고 사로잡았던 여식들을 대신들에게 돌려주는 걸 허락한 후 세자빈과 봉림대군 등을 데리고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도르곤이 돌아가자 섬에 남겨진 몽골 병사들이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다. 이때 도제조 윤방이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성중에 뒤떨어져 머물면서 묘 아래 묻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몽골 병사들이 파헤치는 바람에 인순 왕후의 신주를 잃어버렸다. 그는 이로 인해 비난을 받았고 관직을 빼앗기기도 했다.

(전략)

○ 윤방이 종묘 제조로서 묘주(廟主)를 봉안한 곳에 있었는데 적이 옴에 미쳐 종묘의 위패를 개천 속으로 던져버렸다. 윤방이 거두어다가 받들어 거적에 싸서 말에 싣고 가며 혼자 말하기를, “내가 바다를 건널 때에는 마땅히 물에 빠져 죽어야 한다.” 하니, 적이 협박하여 육지에서 내리게 하였다. 또 위패를 욕을 보일까 염려하여 사내종들의 홑바지 속에 나누어 싣고 계집종으로 하여금 그 위에 타게 하였다고 한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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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中

(전략)적이 성 밖의 높은 언덕에 나누어 주둔하였다. 중관(中官)이 원손(元孫)을 업고 나가 피했으며, 성에 있던 조사(朝士)도 일시에 도망해 흩어졌다. 봉림 대군(鳳林大君)이 용사를 모집하여 출격(出擊)하였으나 대적하지 못한 채 더러는 죽기도 하고 더러는 상처를 입고 돌아 왔다. 얼마 뒤에 대병(大兵)이 성을 포위하였다. 노왕(虜王)이 사람을 보내어 성 밑에서 소리치기를,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쉽지만 군사를 주둔시키고 진격하지 않는 것은 조명(詔命) 때문이다. 황제가 이미 강화를 허락하였으니, 급히 관원을 보내 와서 듣도록 하라."

하였는데, (중략) 대군이 이르기를,

"저들이 호의를 갖고 나를 유도하는 것인지는 실로 헤아릴 수 없으나, 일찍이 듣건대 동궁(東宮)께서도 가기를 원했다고 하니, 진실로 위급함을 풀 수만 있다면 내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진문(陣門)으로 갔다. 그러자 노왕(虜王)이 역자(譯者)로 하여금 인도해 들이게 하고 경례(敬禮)를 하였다. 저물녘에 대군이 노왕과 함께 나란히 말을 타고 성으로 들어갔는데, 군사들은 성 밖에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들은 동서(東西)로 길을 나누어 피차간에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고 군병을 단속하여 살육을 못하게 하였으며, 제진(諸陣)으로 하여금 사로잡힌 사녀(士女)를 되돌려 보내도록 허락하는 동시에, 대군에게 행재소(行在所)에 글을 올려 재신(宰臣)으로 하여금 치계(馳啓)하도록 청하였다. (중략) 도제조 윤방이 종묘와 사직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성중(城中)에 뒤떨어져 머물면서 묘(廟) 아래 묻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몽병(蒙兵)이 파헤쳐 인순 왕후(仁順王后)의 신주(神主)를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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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5년 1월 22일 임술 8번째 기사


5. 전투 이후


1637년 1월 26일, 홍서봉, 최명길, 김신국이 청군 진영으로 가서 세자가 나온다는 뜻을 알렸다. 그러자 잉굴다이는 "지금은 국왕이 직접 나오지 않는 한 결단코 들어줄 수 없다."며 윤방, 한홍일의 장계와 봉림대군의 수서를 전해줬다. 이때 처음으로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한산성 사람들은 모두 통곡했다. 보고를 받은 인조는 울면서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하다가 "형세가 이미 막다른 길까지 왔으니, 차라리 자결하고 싶다. 그러나 저들이 이미 제궁(諸宮)을 거느리고 인질로 삼고 있으니, 나 또한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다."며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결국 홍 타이지의 전략대로 인조는 더이상의 항전을 포기하고 항복을 결심했고 삼전도의 굴욕이 실현되었다.

(전략)상이 이르기를,

"대군의 서찰은 확실하여 의심할 것이 없으며, 편지 내용 중에도 다른 말은 별로 없고 화친하는 일로 만나 보러 나간다고 하였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장계 가운데 김경징(金慶徵)·이민구(李敏求)의 이름이 없는데, 추측하건대 이들은 군사를 거느리고 다른 곳에 있거나 아니면 혹시 전사해서 그럴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외지에 도망하여 피했기 때문에 장계 가운데 들어 있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오늘 청원한 것은 화(禍)를 늦출 만한 것이었는데도 저들이 또 거절했으니, 장차 무슨 계책을 내겠는가."

하였다. (중략) 상이 이르기를,

"형세가 이미 막다른 길까지 왔으니, 차라리 자결하고 싶다. 그러나 저들이 이미 제궁(諸宮)을 거느리고 인질로 삼고 있으니, 나 또한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다."

하자,(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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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5년 1월 26일 병인 4번째 기사


6. 패전의 원인



6.1. 현격한 전력 차이


병자록을 비롯한 일반적으로 알려진 자료들은, 강도함몰의 원흉으로 강도유수 장신과 강도검찰사 김경징을 꼽고 있다. 그러나 패전의 이유를 지휘관에게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전략)

'''전쟁의 승패가 당대 사회, 제도, 문화, 국력의 총체적 산물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패전의 원인을 단순히 집권 세력의 의지나 군 지휘관의 과실이라는 人的 요인에서만 비롯된 것으로 판단할 수 없다.''' 그보다 兵力, 軍糧, 戰術 및 戰略, 兵器, 文化 등 다른 군사적 諸 요소의 종합적 검토를 통해 종합적으로 분석되어야 할 것이다.(중략)

나만갑의 병자록기사를 비판적 관점에서 전면적으로 재해석한 최근 연구는 '''강화도 함락의 원인이 지휘관 개인의 역량보다는 朝․淸 양국 간의 현격한 전력 차이에서 발생한''' 점을 논증하였다. 이에 따르면, 조선은 병자호란 이전부터 청군의 상륙 시도를 예상하고 강화도 방어 작전의 핵심 개념을 陸戰이 아닌 水戰에 두고서 많은 戰力을 水軍에 집중시켰다. 하지만 하천과 바다의 結氷이라는 장애를 돌파한 청군의 기발한 造船 작전, 상륙전 청군의 紅夷砲 포격, 개별 전투력이 떨어지는 조선측 육군 병력의 열세 등은 강화도를 방어하던 조선 수군과 육군의 저항을 무력화시켰다. '''이처럼 강화도의 함락은 지휘관의 역량 여부와 상관없이 초래된 측면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유배형에 그친 金自點, 沈器遠 등의 다른 敗將들과 비교해볼 때 김경징, 장신 등에 내려진 自決 처분은 매우 이례적이고 가혹한 것이었다.

청군의 상륙 당시 강도검찰사 김경징은 병자록의 기록대로 소수의 육군 병력을 지휘하면서 여러 가지 판단 착오와 실책을 저질렀지만, 軍務에 대한 기본적인 책임은 당시의 다양한 사료에서 확인되듯이 강화유수겸주사대장 장신의 몫이었다. 따라서 장신이 김경징보다 6개월이나 빨리 처벌된 것은 자연스러운 조치였다고 판단된다.(중략)

이상의 정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김경징이 끝내 처형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패전의 책임 때문이라기보다는 함락 이후 그가 보인 保身的 태도와 행적 때문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世子嬪과 元孫, 大君, 老母 등을 남겨두고 홀로 도주한 행위는 검찰사의 임무와 책임뿐만 아니라 父母에 대한 義理마저 저버린 敗逆한 행위였다. 장신 역시 도주하여 홀로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당시의 정서상 용납되기 어려웠다. 요컨대 김경징과 장신의 처벌은 군사적인 측면의 책임보다 도덕적 또는 의리적 측면의 책임을 물어 시행된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상의 논의를 기반하여 볼 때, '''국방 태세의 해이나 군 지휘관의 무능과 비겁을 병자호란의 주요 패인으로 곧바로 등치시키는 것은 다소 결과론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광해군대와 인조대를 중심으로 조선의 군사력 정비 과정을 살펴본 바 있었던 필자로서는 양 시기의 질․양적 차이를 크게 느낄 수 없었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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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子胡亂 이해의 새로운 시각과 전망 - 胡亂期 斥和論의 성격과 그에 대한 맥락적 이해(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허태구)(2014)[* 1970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국민대학교, 경인교육대학교, 동덕여자대학교 등에 출강하였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선임연구원과 학예연구사를 거쳐, 2019년 현재 가톨릭대학교 인문학부 국사학 전공의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관심 분야는 중화주의(中華主義)와 연관된 조선 후기의 정치사, 군사사, 외교사, 사상사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丁卯?丙子胡亂 전후 主和?斥和論 관련 연구의 성과와 전망」,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의 丁卯?丙子胡亂 관련 주요 연구 검토」, 「丙子胡亂 이해의 새로운 시각과 전망-胡亂期 斥和論의 성격과 그에 대한 맥락적 이해」, 「「인조교서(仁祖敎書)」와 척화(斥和)의 시대」, 「崔鳴吉의 主和論과 對明義理」 등이 있다.]

요약하면 ‘강화도 함락의 주된 원인은 조청 양국 간의 현격한 전력 차이이다.’ ‘강화도 방어전의 잘못을 지휘관의 역량 부족 탓으로만 돌리면 안 된다.’ ‘김경징과 장신이 처형당한 죄목은 도덕적이고 의리적인 측면에서의 과오(살기 위해 혼자 도망친)로 보아야 한다.’ 정도가 되겠다.
단, 이 주장은 ‘김경징과 장신이 강화도 방어전에 잘못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소의 차이가 있을 뿐, 김경징과 장신 또한 패전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군의 임전 태세를 철통같이 하는 것이 김경징의 임무였고, 전쟁에 나가 싸워 적을 막는 것이 장신의 임무였기 때문이다. 특히 장신이 교전도 해보지 않고 끌고 도망친 33척, 940여명은 은 강진흔이 지휘중이던 7척, 200여명보다 4.7배나 많은 숫자였다. 해전에서 병력 수 증가는 산술적인 증가 이상의 전력증강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이 정도로도 강화도 방어전에서 승리하는 것까지는 불가능할지 몰라도, 봉림대군 일행이 탈출하는 데 훨씬 많은 시간을 벌어줄 수 있었을 것이라는 걸 생각해볼 때 한 전투가 아닌 전쟁 전체로 보면 충분히 패전을 불러온 두 명의 역적이라고 칭할 만 하다. 물론 제일 큰 원흉은 이 둘을 저런 중책에 임명한 김류 같은 사람들이겠지만.[7]

6.2. 조석 차를 이용한 청군의 뛰어난 전략


조선은 정묘호란을 통해 후금군의 공성전과 육상전 능력이 우수하다는 것을 실감했다.[8] 강화해협은 물살이 세서 배를 다루기 어려운 곳이었다. '강화도로 대피함으로써, 청군과의 전투를 수상전으로 한정한다.'는 전략은, 조선으로서는 합리적인 발상이었다.
당시는 겨울이어서, 강화 해협의 갑곶 일대는 곳곳에 얼음이 떠다녔다. 배가 오가기 힘든 환경이었다. 아예 꽁꽁 얼어붙는 것도 아니니, 걸어서 지나가는 것도 물론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날씨가 따뜻해져서 강물이 풀리기 전까지는, 강화도로의 뱃길은 남쪽의 광성진이나 북쪽의 연미정 방면으로만 열려 있었다. 때문에 조선군은 남쪽 광성진 일대에 장신의 함대 27척을 배치하고, 북쪽 연미정 일대에 강진흔의 함대 7척을 배치하여, 청군의 도하를 경계했다.[9]
이에 청군은 염하수로를 통해 갑곶에 상륙한다는 전략을 구상했다. 청군의 배는 전함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조각배였기 때문에,[10][11] 막말로 그냥 판옥선이 갖다박기만 해도 침몰할 만큼 빈약했다. 게다가 강화도에 투입된 홍이포는 1~3문 정도여서, 함선을 타격하여 섬멸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12] 결빙 구간이라 배가 지나기 힘든 곳이라는 말은, 조선 수군이 접근하기 힘든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또한 갑곶은 나루터가 있을 정도로 그 폭이 좁고 수심도 얕아서, 상륙 루트로 최적이기도 했다.
문제는, 판옥선이 염하수로에 아예 발을 들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배가 오가기 힘들다는 건, 조선뿐 아니라 청에게도 적용되는 사항이었다. 무작정 상륙 작전을 감행한다면, 급류과 얼음으로 인해 시간만 허비하다가, 판옥선 함대에 노출되어 작전이 실패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청군은 염하수로의 만조 때가 지나는 순간에 배를 띄우기 시작했다. 염하수로처럼 폭이 좁은 지역에서 조석의 변화는 해류의 속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 또한 판옥선 같은 큰 함선은 수심이 얕아지면 좌초를 피할 수 없다. 전략은 주효했다. 판옥선단은 역류를 맞아 배를 제어하기 힘들었으며, 동시에 염하수로의 수심이 얕아지기 시작하니 섣불리 전진할 수 없게 되었다. 조선 수군은 청군의 도강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청군이 홍이포를 이용하여 위협사격을 가하자, 조선 육군도 사기가 크게 꺾여, 대여섯명의 적병이 상륙한 것만으로도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쳐버렸다.

대사헌 한여직, 대사간 김수현, 집의 채유후가 차자를 올리기를,

"(중략)장신(張紳)의 경우는 (중략) 적의 보병 수십 명이 두 개의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도 방어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이 배를 타고 도망하면서 남보다 뒤떨어질까만 염려하였습니다. (중략)"

하니, 답하기를.

"(중략)장신은 조수(潮水)가 물러감으로 인하여 배를 통제할 수 없었다고 한다. 율대로 처치하는 것은 혹 과할 듯싶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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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21일 신묘 1번째 기사

(전략)충청도의 전선(戰船) 7척은 급류에 정박해서 갑자기 제어할 수 없었고, 본부(本府)의 수군 27척은 광성진에서 북쪽으로 올라왔는데 조수가 밀려나가자 전진하지 못하였습니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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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정판서서中

(전략)성을 나와 1, 2리쯤 지났을 적에 포성(炮聲)이 진동하는 것이 들렸다. 갑곶에 이를 무렵에 주먹만 한 크기의 포환(砲丸)이 계속해서 날아오자 사람들 모두가 풀이 죽었다. (중략) 한편 나루의 북쪽을 바라다보니, 아군의 전선(戰船) 4, 5척이 정박해 있었다. 그리고 사시(巳時)쯤 되었을 때에 판옥(板屋)의 대선(大船)이 남쪽에서 올라오는 것이 보였는데, 그 숫자가 매우 많았다. 이에 사람들 모두가 이것은 필시 남방의 전선(戰船)이 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들 크게 기뻐하였다. 그런데 그 배들이 나루를 수백 보쯤 앞에 두고서 모두 정지한 채 전진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바로 장신이 거느린 경기(京畿)의 전선들이었다.

(중략)오시(午時)쯤 되었을 적에 적의 선박이 차례로 건너오기 시작하자, 검찰 등이 언덕 위에서 깃발을 흔들며 주사(舟師)의 출동을 재촉하였으나 주사는 끝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중략)적의 선박 한 척이 먼저 도착하여 정박하였는데, 그 배에 탄 자가 겨우 5, 6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건만 그들이 배에서 내려서 나오자 아군은 어지럽게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그 뒤에 계속해서 또 두세 척의 배가 정박하였는데, 아군이 화살에 맞아 혹 즉사(卽死)하자 모두 달아나기 시작하였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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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정기사中

(전략)이 연구에서는 특히 정월 22일 청군의 강화도 상륙 당시 갑곶 앞 해상의 상황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중략)흥미롭게도 조선 측의 현장 목격담을 담은 문헌 사료에서 당일 염하수로의 조석(潮汐)과 조류(潮流) 변화가 조선 수군의 기동에 중대 변수로 작용하였다는 기록이 눈길을 끈다.

(중략)이 연구에서 이용한 조석 추산 방법에 근거하여 정축년의 음력 매월 22일 오전 고조 시각을 추산해 보면, (중략) 지형 변화 이전의 염하수로에서 음력 매월 22일 오전 고조 시각의 평균값은 “사시 초”의 범위에 있었으리라는 추정도 도출된다. (중략) 당일 염하수로에서는 10시 30분대에 조류의 방향이 바뀌었을 것으로 추산되었다. (중략) 이론상 전진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았더라도, 역류가 흐르는 와중에 적정 수심의 항로를 유지하도록 배를 조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조류의 변화를 단지 장신이 비겁한 행동을 사후에 변명하려고 내세운 핑계에 불과하다고 치부하는 것도 금물이다. (중략) 그렇다면 판옥선 함대로 북상한 것 자체가 실책(失策)이었을지언정, 장신이 조류가 바뀐 이후의 어느 시점엔가 뱃머리를 남쪽으로 돌린 행위 자체는 불가피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중략) 이를 고려하면 그의 결정은 다분히 정상적인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여지도 충분하다.

(중략) 당시 남쪽에서 올라온 장신의 입장에서 갑곶 구간에서의 점점 빨라지는 역류를 무릅쓴 함대 기동은 더더욱 위험하고 무모한 행위로 여겨졌을 것이다. 또한 이민구의 말처럼, 물이 빠지면서 수심이 계속 낮아지게 되면 함대가 좌초할 수 있다고 우려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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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시기 강화도 함락 당일 염하수로의 조석과 조류 추산[13]

흥미로운 점은 청군이 강화도 토박이도 아니면서, 어떻게 염하수로의 조석을 알고 이를 이용할 생각을 했느냐는 것이다. 아마도 도중에 뱃사람을 포로로 붙잡았거나 혹은 매수하여 정보를 입수했으리라.
비록 청군의 전술이 기발하긴 했지만, 그래도 조선군이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점은 의문이다. 강화해협에서 판옥선 같은 큰 배를 운용하는 것이 힘들다면, 그보다 더 작은 크기인 병선(兵船)을 운용하는 방법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견은 광해군 때에도 제기된 바 있는 만큼, 강화도 파천을 골자로 대청 전략을 짠다면 충분히 떠올릴 수 있는 발상이었다. 무엇보다도 장신은 강화유수로서 주사를 총괄하는 자리에 있었다. 사전에 병선을 징발하여 강화도에 배치해놓고 운용했다면, 청군의 상륙 작전을 저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6.3. 지휘관의 무능



6.3.1. 김경징의 책임은 없다


세간에서는 강화도의 패전이 김경징 때문이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김경징이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며 방비를 게을리 했고 막상 적이 쳐들어오자 도망쳐버리는 바람에 강화도가 쉽게 함락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경징은 강화도 패전의 원흉이라 볼 수 없다. 그는 검찰사로서 세자빈과 원손, 종실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고 강화도 수비군의 방비 상태를 점검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실질적인 군권은 강도유수 장신에게 있었다.
또한 강화도에 피난가 있던 조익의 '포저집'에 따르면, 김경징은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서류를 결재하는 데 최선을 다했고 강화도의 방비가 허술한 점에 안타까워했고 병력을 모집하려 했지만 전 장정이 장신에게 동원되어 있어서 따로 모집할 병사가 없었다고 한다.
다만 실록에는 김경징과 강화도 유수 장신이 서로 충돌했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김상헌이 아뢰기를, "강도 유수 장신이 그의 형에게 글을 보내기를 '본부의 방비를 배가해서 엄히 단속하고 있는데 제지를 받는 일이 많다.'고 했답니다. 장신은 일처리가 빈틈없고 오래토록 직책을 수행하고 있는데, 신임 검찰사가 절제하려 한다면 과연 제지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게 무슨 말인가. 방수하는 일은 장신에게 전담시켰으니, 다른 사람은 절제하지 못하도록 전령하라."- 인조실록, 인조 14년 12월 30일자 기사.

이에 대해 부검찰사 이민구는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김경징과 장신이 많은 말로 옥신각신 다투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때 의견이 일치하지 않은 것이 어찌 문득 패망의 원인이 되겠습니까. 장신 또한 적을 바라만 보다가 일을 그르쳐 나라가 잘못되게 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다만 지나치게 사람들의 뜻을 따라 군사를 징발하는 데 신중했으니, 오랑캐들이 바다를 건너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간혹 군교들이 와서 적의 실상을 보고하고 동료들이 더욱 삼엄하게 대비해야 한다고 권하는 말을 했지만, 문득 지나친 걱정이며 쓸데없이 겁을 내는 것이라고 여긴 것은 그의 지기가 대단히 사나워 마음을 쓰지 않은 것이니, 이것도 천운입니다.-동주집

이민구의 증언에 따르면, 장신이 광선진에서 수군과 육군을 다 모아서 강화도 부중엔 한명의 군사도 없었다고 한다. 장신은 청군이 배를 띄워 강화도를 건널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강화도는 물살이 험난하고 추울 날씨에 결빙마저 생겨서 배를 띄워 건넌다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점은 지천 최명길 역시 동의한 바 있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저들이 수상선을 꾸며서 장차 강도로 향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만 저들이 어찌 감히 얼음 위로 배를 띄운단 말입니까."-승정원일기, 인조 재위 15년 1월 17일자.

오랑캐가 군사를 나누어 강도를 범하겠다고 큰소리쳤다. 당시 얼음이 녹아 강이 차단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허세로 떠벌린다고 여겼으나 제도의 주사를 징발해 유수 장신에게 통솔하도록 명했다. (...) 장신은 광성진에서 배를 정비했는데 장비를 미처 모두 싣지 못했다. - 인조실록, 인조 15년 1월 22일자.

이렇듯 조선 측은 "청군이 얼음 위로 배를 띄울 리 없다."며 방심했다. 그러나 청군은 실제로 결빙이 된 바다에 뗏목과 선박을 띄워서 건너왔고 장신은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맞붙어보지 못했다. 장신은 일단 갑곶진으로 출격하긴 했지만 적의 기세에 짓눌린 나머지 전의를 상실하고 광성진으로 달아났고 곧 김경징과 합세해 육지로 도망쳐 버렸다. 결국 강화도의 패전은 결빙이 된 바다 위로 과감하게 함선을 투입시킨 청군의 대담함과 방심하고 있다가 당한 장신의 무책임한 도피에서 비롯된 참사라 할 수 있겠다. 사실 장신의 커리어를 보면 절대 무관과는 연관이 없으므로 인사의 문제.

6.3.2. 김경징도 책임이 있다



6.3.2.1. 업무 태만 & 내분 조장

물론 강도검찰사는 싸우는 직책이 아니다. 강화도의 군권은 강화유수 장신에게 있었다. 그러나 어떤 전쟁이든 대비하고 예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김경징이 강도검찰사로서 맡은 임무였다. 그러나 여러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자신의 업무에 태만했다. 청군이 코앞에 있음에도 경계를 하기는커녕, 검찰부사 이민구 등과 어울려 술이나 마시며 허송세월했다. 주변에서 그럴 때가 아니라며 비판했지만, 그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김경징은 무슨 일이든 이민구에게 먼저 물어보았고, 그가 시키는 대로만 행동했다. 오죽하면 강화의 사람들이 이민구를 가리켜 김경징의 유모(乳母)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는 사사건건 자기가 대장인 양 행세하며, 장신과 병권을 두고 다투기까지 했다. 그 갈등이 워낙 극심해서, 인조가 “강화도의 군무는 장신에게 일임한다.”고 교지를 내려 서열을 정리해야 했을 정도였다.
김경징이 이렇게 오만방자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인 김류 덕분이었다. 김류는 가족과 당여는 적극적으로 뒤를 봐주었지만, 자신에게 맞서는 이는 참소하여 외직으로 보내버리는 등 반드시 보복을 꾀했다. 인조는 그런 김류를 항상 옹호해왔고, 때문에 사람들은 김류를 두려워했다. 김경징은 그런 부친의 권세를 믿고 마음껏 활개치고 다녔던 것이다. 그가 강도검찰사가 된 것도 김류의 천거로 인한 것이었는데, 이는 강화도가 당시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지던 곳이고 검찰사는 칼 들고 싸우는 일과는 무관한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기평군(杞平君) 유백증(兪伯曾)이 상소하기를,

"(중략)김경징이 검찰사(檢察使)가 된 것은 김류가 스스로 천거한 데에서 나왔는데, 대개 온 집안이 난리를 피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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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5년 6월 21일 무오 1번째 기사

(전략)청나라 군사가 대거 우리 나라로 들어와 신보를 들은 지 며칠 만에 이미 경기 고을에 이르렀으므로, 김류가 검찰사(檢察使) 두 사람을 내어 먼저 강도에 보내어 주사(舟師)를 정리하게 할 것을 의논하고 그 아들 김경징을 우의정 이홍주에게 힘써 천거하여 입계하게 하였는데, 이홍주의 마음은 그가 반드시 패하리라는 것을 알았으나 권세에 겁이 나 애써 따랐다.(중략)강도에 이르러서는 적병이 날아서 건널 형세가 아니라 하여 날마다 술에 취하는 것을 일삼으므로 피란한 사자(士子)들이 분통 터져 두어 줄의 글을 지어 검찰사의 막하에 보냈다. 그 글에 "옥지(玉趾)가 성을 순찰하고 유신(儒臣)이 성을 지키니 와신상담해야지 술마실 때가 아니다." 하였으나, 이민구 등은 오히려 부끄러운 줄 몰랐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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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5년 9월 21일 병술 2번째 기사

지평 심대부(沈大孚)가 아뢰기를,

“(중략)이민구(李敏求)의 명망과 재주 그리고 조정의 신임이 어찌 김경징(金慶徵)이 견줄 바이겠습니까. 그런데 ‘유모(乳母)’라고 불렸다고 들었을 뿐, 한마디 말을 해서 김경징의 행위를 바로잡으려 했으나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보면, 《춘추(春秋)》의 법으로 단죄(斷罪)할 때 이민구는 마땅히 수악(首惡)이 될 것이니, 이민구가 살아 있는 것은 김경징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입니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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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인조 16년 무인(1638) 3월 22일(을유) 맑음, 20번째 기록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중략)

"'''강도 유수(江都留守) 장신(張紳)이 그의 형에게 글을 보내기를 ‘본부의 방비를 배가해서 엄히 단속하고 있는데, 제지를 받는 일이 많다.’고 했답니다. 장신은 일처리가 빈틈없고 이미 오래도록 직책을 수행하고 있는데, 신임 검찰사가 절제하려 한다면, 과연 제지당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게 무슨 말인가. 방수(防守)하는 일은 장신에게 전담시켰으니, 다른 사람은 절제하지 못하도록 전령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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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30일 경자 3번째 기사

(전략)

검찰사 김경징(金慶徵)은 평소부터 강화 유수 장신(張紳)과 잘 지내지 못한데다가 수상(김류)의 세력을 믿고서 자주 장신과 더불어 병권을 다툰 바람에 어긋난 일이 많았으므로 남한 산성에서 두 번이나 교지를 내려 그치게 하였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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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실록 18권, 현종 11년 2월 19일 정축 4번째 기사

(전략)며칠 뒤에 무인 최상원(崔尙元)이 남한산성으로부터 밀랍으로 봉한 글을 가지고 도착하였습니다. 유지(有旨)에 이르기를 “수륙(水陸)의 방비를 모두 유수 장신(張紳)에게 위임하니 간섭하는 문제가 없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이틀 뒤에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승려가 또 남한산성으로부터 왔는데 유지의 내용은 이전과 같았습니다. 대개 행조(行朝)에서 밖의 포위망이 단단하므로 최상원이 전달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앞의 유지를 다시 내린 것이었습니다.

저희들(김경징, 이민구)은 애초에 강화도를 방어할 책임이 없었고, 조정의 뜻도 이와 같았으니 강화도의 기무(機務)에 대해서는 감히 알 수가 없습니다만 '''김경징과 장신이 많은 말로 옥신각신 다투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 때 의견이 일치하지 않은 것이 어찌 문득 패망의 원인이 되겠습니까. 장신 또한 적을 바라만 보다가 일을 그르쳐 나라가 잘못되게 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다만 지나치게 사람들의 뜻을 따라 군사를 징발하는 데 신중하였으니, 오랑캐들이 바다를 건너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간혹 군교(軍校)들이 와서 적들의 실상을 보고하고 동료들이 더욱 삼엄하게 대비해야 한다고 권하는 말을 했지만, 문득 지나친 걱정이며 쓸데없이 겁을 내는 것이라고 여긴 것은 그의 지기가 대단히 사나워 마음을 쓰지 않은 것이니, 이것도 천운(天運)입니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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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정판서서中[14]

(전략)'''19일에서부터 21일까지 3일 동안을 계속 분비국(分備局)에 가서 보니, 김경징(金慶徵)과 이민구(李敏求)가 담당하며 일 처리를 하고 있었는데, 별로 하는 일은 없고 단지 문서를 수응(酬應)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중략)

언젠가 분비국에 가서 김경징과 이민구에게 말하기를 “임진년에 왜적이 경성(京城)에까지 육박해 왔을 때에 이정암(李廷馣)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으려고 하였으나 가인(家人)이 구해서 살린 적도 있고, 옛날에 숙손소자(叔孫昭子)가 계손(季孫)이 임금을 쫓아낸 것을 통분하게 여겨 축종(祝宗)에게 죽게 해 달라고 빌게 한 고사도 있는데, 지금 나도 참으로 죽고만 싶다. 만약 내가 수백 명의 병력을 얻어서 한 방면을 담당하며 육박전을 벌일 수만 있다면, 뒤로 물러나지 않고 싸우는 자로는 내가 응당 첫째가 될 것이다.”라고 하자, 김경징이 나를 보고 슬피 울면서 손을 잡고 위로하기도 하였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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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정기사中[15]

일찍이 적이 침입하였다는 보고가 급히 들어오니 조정과 온 나라의 인심이 흉흉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檢察使)로 임명하여 강화도를 막아 지킬 계책을 세웠다. 임금이 체찰사(體察使) 김류(金瑬)에게 묻기를, “경의 아들이 이 임무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 하니, 김류가 대답하기를, “경징이 다른 재능은 없으나 적을 막고 성을 지키는 일에 어찌 감히 그 마음과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중략)

○ 경징이 혼자서 섬 안의 모든 일을 지휘하려 하자 장신이 이르기를, “나는 지휘를 받는 사람이 아니다.” 하여 서로 배척하고 알력이 심하였다. 경징은 스스로 강화도를 금성 탕지(金城湯池)로 믿고 적이 날아서 건너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태평스럽게 방종하여 날마다 술만 마셔 대며 주정을 일삼았다. 남한산성이 포위되어 소식을 들을 수 없어도 임금을 걱정하지 않았다. 대군과 대신이 간혹 말하는 일이 있으면 경징이 말하기를,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위태로운 이때를 당하여 대군이 어찌 감히 나와 말하려 하며, 피난 온 대신이 어찌 감히 나를 지휘하려고 하는가.” 하였다. (중략) 술을 지나치게 마시고 큰 소리 치기를, “아버지는 체찰사요 아들은 검찰사니 국가의 큰일을 처리할 자가 우리 집이 아니고 누구이겠느냐.” 하였다. 별좌 권순장(權順長)과 생원 김익겸(金益兼)과 진사 심희세(沈熙世)와 윤선거(尹宣擧) (《잡기(雜記)》및《병자록(丙子錄)》에는 권순장과 김익겸 두 사람으로 되어 있고,《강도록(江都錄)》에는 심희세와 윤선거로 되어 있다.) 등이 글을 올려 책망하기를, “와신상담(臥薪嘗膽)이 지금 할 일이요, 술을 마시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였더니, 경징 등이 더욱 노여움을 드러냈다.

○ 혹 전해 오는 말에 충청 감사가 적진에서 죽었다 하므로, 대신(大臣)이 임시 방편으로 이민구(李敏求)를 대신으로 임명하고, 이어 삼남(三南)의 흩어지고 도망친 군졸을 빨리 모아서 싸움을 독려하도록 명하였다. 민구는 강화도는 안전한 곳이요 호서(湖西)는 반드시 죽을 곳이라 생각하여 가려고 하지 않고, 경징도 허락하지 않았다.[16]

김상용(金尙容)이 경징을 불러서 준엄히 꾸짖기를, “너의 아버지는 임금을 받들고 남한산성에서 포위되어 위기가 코앞에 닥쳐 있는데, 네가 설령 임금의 욕됨은 걱정하지 않을지라도 홀로 너의 늙은 아버지마저 생각하지 않느냐. 삼남의 군졸을 독려하는 것이 대단히 급한 일인데 네가 어찌 차마 저지하는가. 민구가 너의 유모 노릇한 지가 오래이다. 너의 나이 지금 얼마인데 어찌 감히 이러느냐.” 하였다. 경징이 노하여 나와 도장을 땅에 던지며 말하기를,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 하였다. 민구가 부득이 출발하려 하는데, 말하기를, “추위를 막으려면 술이 없을 수 없다.” 하여, 술을 데우는 것을 핑계하여 지연시키고, 또 큰 배를 구하여 그의 처자를 태우고 가려 하였다. 상용이 말하기를, “천하에 어찌 처자를 거느리고 다니는 사신이 있는가. 한갓 각 고을에 먹이를 구하는 것뿐이니, 비록 간다 할지라도 무익할 것이다.” 하였다.

○ 이때 경징은 방비와 수비에는 마음이 없어 초관(哨官)들을 풀어주어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고 한 섬 외에는 정탐도 하지 않으니, 식자(識者)들이 한심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때 갑곶(甲串) 이하에서 연미정(燕尾亭) 이북까지의 사이에는 일찍이 몽둥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조차 하나 없었다. 충청 수사(忠淸水使) 강진흔(姜晉昕)이 밤을 도와서 들어와 원조하니, 경징이 강진흔이 거느린 배를 연미(燕尾)와 여러 곳에 나누어 배치하고 경기도 배는 모두 광진(廣津)에 두었다.

○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적군이 삼강(三江)에 모여 있으면서 가옥을 헐어 재목으로 혹은 작은 배를 만들고 혹은 동거(童車)를 만들고 있으니, 그 의도가 아마 강화도에 있는 것 같다.” 하였다. 경징은 손뼉을 치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강에 얼음이 아직 단단한데 어떻게 육지에 배가 다닐 수 있겠는가.” 하였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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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中

(전략)

○ 일찍이 경징의 아내 박씨가 경징이 자기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자주 간하니, 경징이 노하여 말하기를, “여자가 무엇을 아느냐.” 하자, 박씨는 울면서 말하기를, “나라가 깨치고 집이 망하면 또한 여자라 하여 스스로 모면할 수 있는가.” 하더니,(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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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中


6.3.2.2. 병정기사와 답정판서서

조익은 병자호란이 발생했을 당시, 인조를 호종하는 임무를 내팽개치고 강화도로 도망친 인물이다.인조 15년 2월 20일 경인 4번째 기사인조 16년 7월 22일 계미 3번째 기사[17] 이 때문에 포저집(이하 병정기사)[18]은 조익이 자신의 행적을 변명하기 위해 작성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자료이다.[19] 이는 파직된 조익을 변호하기 위해 이시백이 올린 상소의 내용이 병정기사의 내용과 유사하다는 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위에서 보면 알 수 있듯, 병정기사에는 ‘김경징은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서류를 결재하는 데 최선을 다했고 강화도의 방비가 허술한 점에 안타까워했다.’는 내용이 없다. 병정기사에 따르면, 조익이 3일 내내 지켜보았지만, 김경징도 이민구도 안에 틀어박힌 채 일하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적이 코앞까지 와 있는 상황인데도. 또한 강화도의 방비가 허술한 점을 안타까워 한 것 역시 김경징이 아니라 조익이었다. 김경징은 그의 말에 맞장구친 게 전부였다. 이런 내용들은 김경징을 옹호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안에 틀어박혀 일하는 척이나 하면서 잡담 나누고 눈물이나 질질 짜는 게 검찰사의 일은 아니지 않은가.'''
이민구는 병자호란 당시 검찰 부사로 강화도에 있었는데, 청군이 상륙하여 전투가 벌어지자 도망친 인물이다. 이 때문에 병자호란 이후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로 아산에 유배되었다가 영변으로 옮겨졌다. 조정에서는 ‘그의 재능이 뛰어나니 서용(敍用)하자.’는 건의가 여러 번 있었지만, 강화도에서의 행적과 이후의 처신이 문제가 되어 번번이 취소되었다. 그는 만년에 친구 정세규의 편지에 답장을 보내는 형식으로 답정판서서(答鄭判書書)[20]를 작성하여 강화도 방어전 당시 자신의 행적을 이야기했다. 위의 항목에서 언급하고 있는 동주집(이하 답정판서서)의 기록이 바로 이 답정판서서이다.
이민구는 조정에 다시 나가기 위해 강화도의 일을 적극적으로 해명할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답정판서서는 이민구가 병자호란 당시 자신의 행적을 변호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된다. 실제로 해당 기록에서 그는 ‘검찰(강도검찰사, 검찰부사의 업무)은 싸우는 일이 아니다.’ ‘강화도의 일은 우리(김경징, 이민구) 관할이 아니라 장신의 관할이었다.’ ‘장신은 청군이 바다를 건너오지 못할 것이라 보고 경계를 소홀히 했다.’ ‘김상헌이 김상용의 행장과 비문에 적은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21]라고 주장하며, 강화도를 지키지 못한 죄를 모조리 장신에게 떠넘기고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는 등,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또한 해당 기록에 등장한 인물들은 이미 사망하여 사실 여부를 확인해줄 수 없거나, 혹은 이민구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행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때문에 병정기사와 답정판서서는 그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현장에 있던 사람의 저작이니, 전투에 대한 내용은 신뢰할 가치가 있지만, 당시 그들과 그 주변인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다른 자료와 대조하여 확인할 필요가 있다.

6.3.2.3. 군사적 무능

검찰사가 전쟁하는 장수는 아니지만 결국 강화도 방어전에서 김경징은 육전 지휘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전까지 대장 행세를 하며 군권을 탐낸 것이 무색할 만큼, 그의 지휘는 볼품 없었다.
청군이 바다를 건너오려 한다는 보고를 받고도, 그는 성의 무사들 7,80명 정도만을 데리고 이동했다. 병력을 집결시켜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해선 안 된다며 말을 듣지 않았다. 그 결과 갑곶에는 불과 200명이 채 되지 않는 병력만이 모였다. 이런 적은 병력으로 전장에 나섰으니 당연히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강화성에는 700여 병력이 있었고 그 외에도 해안지대를 따라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만약 김경징이 적습을 감지하자마자 병력을 모조리 집결시켜 갑곶으로 이동했다면 결과는 조금 달랐을지도 모른다.[22] 전력차가 확연한 만큼 상륙을 저지하기는 힘들었겠지만, 적어도 왕족 등 요인들이 대피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벌 수 있었을 것이다.
김경징의 잘못은 이것만이 아니다. 그는 장병들을 독려하며 임전태세를 갖추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적의 기세에 눌려 겁에 질려서는 성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그가 갑곶에서 한 것이라고는 깃발을 흔들며 장신에게 싸우라고 재촉한 것과 창고 밑에 숨어서 덜덜 떤 것이 전부였다. 사실상 육군은 대장 없이 싸워야 했던 셈이다. 지휘관이 이 모양이니, 적병 예닐곱이 뭍에 발을 디딘 것만으로도 진영이 대번에 무너져버린 것이다.
'김경징이 겁에 질려 성으로 도망치려 했다는 이야기는, 연려실기술 등 출처가 불분명한 기록이나 현장에 없었던 사람의 저작에만 있으니, 사실이 아닐 것이다.' 하고 부정하더라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당시 전장에 있었던 조익이나 이민구가 남긴 기록(병정기사, 답정판서서)에서도 김경징과 이민구가 청군이 상륙하기까지 무엇을 했다는 어떤 구체적인 내용은 없기 때문이다. 기껏해봐야 '김경징 등은 창고 처마 아래 쭈그리고 있다가, 깃발만 열심히 흔들었다.'(병정기사), '적병이 상륙하자 장수와 병졸 모두 도망갔다'(병정기사), '나(이민구)는 강화도 방어의 책임이 없고, 내가 간다고 전황이 달라질 것도 아니어서, 그냥 도망쳤다.'(답정판서서) 정도가 전부다. 이 기록들 어디에 김경징을 두둔할 내용이 있는가.

6.3.2.4. 김경징 책임론 정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김경징은 강도검찰사로서 강화도의 방어 태세를 견고하게 유지하여 전쟁을 대비할 책무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직무를 전혀 수행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충고를 하고 조언을 해도 듣는 척도 하지 않았으며, 이민구 등과 어울려 놀기에만 바빴다. 그것도 모자라 대장 행세를 하면서 지휘관인 장신과 대립하며 내분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오죽하면 남한산성에 있던 인조가 두 번이나 교지를 내려 서열을 정리해줘야 했을 정도였다.
이는 병력을 충원하고자 급히 강화성으로 말을 달린 봉림대군이나, 불리한 전황 속에서도 고군분투하며 최선을 다해 싸운 강진흔, 죽을 것을 알고도 물러서지 않고 청군과 맞서싸운 황선신 등의 장수들, 성이 포위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병사들을 독려하며 분전하다 스스로 폭사하여 순절한 김상용 등의 행적과는 천지차이이다.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인력으로는 전황을 뒤집는 것이 불가능했다.’라는 말은, 이처럼 전쟁에서 열심히 싸웠으나 장렬하게 패배한 사람에게 어울리는 서사이다. 한 것도 없이 구석에 쳐박혀 있다가 적을 앞에 두고 도망친 장수들에게 붙일 말이 아니다.
  • 옹호론에서는 병정기사와 답정판서서의 내용을 근거로 김경징을 변호하고 있다. 그러나 병정기사에는 옹호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김경징은 불리한 전황을 걱정하고 눈물지으며 열심히 일했다.'는 기록이 없다.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라곤, ‘김경징과 이민구를 3일 내내 살펴봤는데, 안에 틀어박혀서 일하는 시늉만 하고 있더라.’, ‘나랏일이 걱정된다 말하니 맞장구치면서 울어줬다.’, ‘창고 아래 쭈그려 앉아 전투를 지켜만 보다가 깃발을 흔들어댔다.’, ‘적이 상륙하자 모두 도망쳤다.’ 정도가 전부이다. 저자인 조익이 인조 호종의 임무를 내던지고 도망친 인물이라 내용의 신빙성이 의심되지만, 이를 제외하면 남는 것은 ‘김경징은 강화도에서 술판이나 벌이며 놀고 있었다.’, ‘김경징은 포성에 혼비백산하여 성을 지킬 계획을 세우겠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치려 했다.’ 같은 부정적인 기록뿐이다. 그나마 김경징에게 유리한 기록이 병정기사다.(...)
답정판서서 역시 저자인 이민구가 본인의 서용(敍用)을 위해 강화도 방어전 당시 자신의 행적을 변호한 것이란 의혹이 있어, 내용의 신빙성이 의심된다. 전투에 대한 기록은 몰라도, 저자 본인과 주변인의 행적은 이 자료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 전력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에 지휘관의 역량만으로는 강화도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김경징이 자신의 소임에 충실했다면, 전투가 벌어졌을 때 최선을 다해 싸웠다면, 하다못해 패전 이후에라도 자신의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 분발했다면, 이런 이유로 변호를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기록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김경징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없느니만 못했다.
  • 그러므로 김경징은 강화도가 함락된 원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1] 구성: 육군 1,000여 명, 수군 1,000여 명, 대선 30척[2] '김경징과 이민구가 겁을 먹고 강화성으로 물러나려 했다.'는 기록이나, 임선백이 "진해루에서 적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 기록은, 연려실기술과 정온의 동계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복양의 행장에서도 강진흔이 "검찰사들이 겁을 집어먹고 옴짝달싹도 하지 않는다."며 푸념하는 내용이 있다.[3] 연려실기술의 기록은 출처가 불분명하거나(난리잡기, 강도록) 혹은 남한산성에 있었던 나만갑이 저술한 병자록에서 비롯된 것이고, 동계집의 저자 정온 역시 당시 남한산성에 있었다. 때문에 해당 내용의 정확성에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강화도에 있었던 이민구의 답정판서서나 조복양의 행장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는 점, 이 당시 김경징과 이민구의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해당 서술은 신빙성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4] 조익의 아들.[5] 후술하겠지만, 단순히 겁을 먹고 도망친 것은 아닌 듯하다. 조류의 흐름으로 인해 수심이 낮아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무모하게 나아가다간 배가 전부 좌초될 위험이 있어 전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6] 예친왕(睿親王)[7] 김경징을 강도검찰사로 천거한 것이 바로 김류이다.[8]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은 불과 보름만에 의주성, 정주성, 안주성을 함락하고 평양성에 도착했다.[9] 왜 남쪽에 더 많은 전함을 배치했는지는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강화군 관광 안내도 글씨가 희미해서 잘 안 보일 텐데, 파란 색으로 표시된 경로는 강화대교를 통해 들어가는 길을 표시한 것이다.(남쪽의 다리는 강화초지대교이다.) 지도를 자세히 보면, 강화대교 바로 아래에 갑곶 돈대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말인즉슨, 갑곶은 강화해협의 북쪽에 위치하므로, 청군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데 필요한 인원도 북쪽 연미정보다 남쪽 광성진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10] 청군의 함선에 대한 설명은 조익의 병정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작은 배들이 마치 우반(隅盤)의 모양과 같았으며 크기도 우반을 겨우 능가할 정도였는데 ...)[11] 우반(隅盤)은 소반을 말한다. 쉽게 말해 밥상 같은 것을 생각하면 된다.[12] 강화도에 동원된 홍이포의 수량이 1~3문이라는 주장은, 구범진 교수가 청실록을 토대로 한 추산이다. 실제로 강화도 방어전에서 홍이포에 의한 피해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각종 사서를 살펴보아도, 포성이 요란했다는 기록은 많으나, 대포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은 강진흔의 전함 1척뿐이다. 처음부터 위협만을 목적으로 소수의 홍이포를 동원했음을 알 수 있다.[13] 간단히 말하자면, 몇몇 기록에서 언급되는 조수(潮水)는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현상이었을 것이란 주장이다. 이 연구에 따르면, 당시 강화해협의 고조가 끝나고 조류의 방향이 바뀌는 순간은, 오전 10시 30분 즉 오시(午時, 11시 ~ 13시)가 시작되기 30분 전이었다. 병정기사에 따르면 청군의 도하 순간은 오시였는데, 이는 청군이 강화해협의 조석 차를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14] 다른 기록에서는 사람들이 비판한 대상이 김경징과 이민구인데, 이 기록만 대상이 장신이다. 답정판서서가 이민구의 저작이라는 점, 군무 검찰은 검찰사의 소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삼엄하게 대비해야 한다.'는 충고를 받은 인물은, 장신이 아니라 김경징과 이민구였음을 알 수 있다.[15] 조익이 3일 내내 지켜보았지만, 김경징과 이민구가 하는 거라곤 종이를 만지작거리는 게 전부였다. 해당 기록에는 조익이 나랏일을 걱정하는 말을 직접 김경징에게 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다른 기록에서 보이는 '사람들이 김경징과 이민구에게 경계를 삼엄하게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는 내용의 주체 중 하나가 조익임을 알 수 있다.[16] 김상헌은 자신의 친형인 김상용의 신도비명을 썼는데, 여기에도 '김상용이 검찰부사 이민구에게 호서로 가서 의병을 모으라고 하자 이민구가 거절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민구는 답정판서서를 통해 '김상헌이 쓴 신도비명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항변했다.[17] 여담이지만, 이러한 죄로 인해 조익은 호란이 끝난 뒤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된다. 그러나 강화도로 도망친 이유가 행방불명된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였다는 점,(아들 진양으로 하여금 자신의 아버지를 강화로 모시게 했는데 도중에 아버지가 실종되었다.) 아버지를 도피시킨 뒤 윤계, 심지원 등과 함께 경기 지역의 패잔병들을 모아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는 적을 공격하며 입성하고자 노력했다는 점 등이 참작되어 석방되었다. 3년 뒤에 원손보양관으로 제수되었으나 늙은 아버지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그 뒤로도 여러 관직이 내려졌으나 사양하다가, 아버지가 죽고 상복을 벗은 후에야 좌참찬으로 조정에 나갔다.(1648) 이러한 점을 볼 때, 조익은 제 목숨 아까워서 꽁무니를 뺀 김경징 같은 부류와 동급으로 칠 만한 인물은 아니다.[18] 포저집은 조익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692년에 간행한 시문집이다.(손자들인 조지항, 조지정 등이 발간한 것으로 보인다.) 병자호란 전후의 체험을 서술한 것은, 포저집에 수록된 기록 중에서 병정기사에 해당한다.[19] 김경징에게 불리한 내용은 일부러 적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시 조익은 인조를 호종할 임무를 포기한 채 강화도로 도망쳐 왔기에 떳떳한 입장이 아니었고, 반정공신 김류는 인조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김경징은 그의 아들이었다. 조익은 보신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고, 권신의 아들에 대해 나쁜 기록을 남기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행위였다.[20] 직역하면 '판서 정세규에게 보내는 답장' 정도가 되겠다.[21] 청음 김상헌이 쓴 김상용의 신도비명에 “공(김상용)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이르기를 ‘행재소가 포위된 지 오래 되었다.……강화도에 검찰사는 한 사람이면 충분하니 부검찰사(이민구)가 마땅히 호서로 가서 흩어진 병사들을 모으고 의병들을 모으며, 호남의 군사들 가운데 후방에 있는 이들을 독려하여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는 군부에게 달려가야 한다. 이 일은 지체할 수 없다.’라고 하셨는데 이민구가 눈물을 흘리며 가지 않았다.(公奮謂行在受圍日久.……江都檢察一人足了, 副使宜往湖西, 收散卒糾義旅, 督湖南兵在後者, 以赴君父之急, 機不可緩, 敏求涕泣不行)”라고 하였다. 《淸陰集 卷26 伯氏議政府右議政仙源先生神道碑銘 幷序》[22] 군권을 장신이 쥐고 있으니 힘들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 장신에게 대들면서 머리 노릇하려고 든 게 김경징이다. 이미 육군은 김경징의 지휘 하에 있었고, 평소의 행동거지를 생각한다면 다른 곳의 병력도 그의 이름으로 충분히 끌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고작 7,80명 정도만을 이끌고 간 건, 권한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본인이 잘못 판단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