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생

 

金生[1]
711년[2] ~ 807년[3]
1. 개요
2. 생애
3. 글씨
4. 기타


1. 개요


'''해동서성(海東書聖)'''
남북국 시대 신라의 명필.
요극일과 함께 한국의 전설적인 서예가로 후대에도 기록에 남아 삼국사기에 열전이 실렸으며, 고려의 문인 이규보는 그를 신품사현(神品四賢)의 한 사람으로 꼽기도 했다. 나머지 세 사람은 고려 문종 때 류신(柳伸)과 인종 때 탄연, 고종최우가 있다.

2. 생애


기록에는 집안이 한미해서 그의 가계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김생이 두타행(頭陀行)[4]을 닦았고 《오주연문장전산고》는 김생이 불교를 좋아하여 재소(齋素)[5]의 계율을 지켰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일찌기 승려로서 출가했던 듯 하다. 김생은 충주의 북진애(北津崖)라는 곳에서 살았으며, 지금 충주에는 김생사터라는 절터도 남아 있다.
다섯 살 때 바람 풍(風)과 달 월(月)이라는 두 글자를 싸리나무로 땅 위에 쓰면서 처음으로 글씨를 익혔고, 6, 7세 때는 불경 두 권을 사경하면서 글씨를 배웠고 평생토록 다른 기능은 배운 것이 없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그 시대의 글자 오덕이었던 셈. 그리고 스무 살 때 자신의 글씨체를 완성했는데, 신라에 와있던 일본 승려 혜담(惠曇)에게서 왕희지가 강북(江北)에 있을 때 썼던 친필을 얻은 뒤에는 왕희지의 글씨를 배우는데 힘썼다고 한다. 삼국사기 열전의 표현대로는 예서, 행서초서가 모두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밤에는 큰 글자를 쓰고 낮에는 작은 글자를 썼으며,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김생이 나이 먹어 노인이 되었을 때도 글씨체에는 변함이 없었고, 손발이 여자처럼 가늘고 작았다고 한다. 아흔이 넘어서는 오히려 눈빛은 번갯불처럼 빛났다고.

3. 글씨


崇寧中, 學士洪灌隨進奉使入宋, 館於汴京, 時翰林待詔楊球 · 李革, 奉帝勅至館, 書圖蔟. 洪灌以金生行草一卷, 示之, 二人大駭曰 “不圖今日得見王右軍手書!” 洪灌曰 “非是. 此乃新羅人金生所書也.” 二人笑曰 “天下除右軍, 焉有妙筆如此哉?” 洪灌屢言之, 終不信.

숭녕(崇寧) 연간에[6]

(고려의) 학사(學士) 홍관(洪灌)이 진봉사(進奉使)를 따라 송에 가서 변경(汴京)에 묵고 있었는데, 그때 한림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황제의 조칙을 받들고 (고려 사신의) 숙소에 와서 그림 족자에 글씨를 썼다. 홍관이 김생이 쓴 행서와 초서 글씨 한 권을 보여주니 두 사람이 크게 놀라서

“뜻하지 않게 오늘 왕 우군(王右軍)[7]

의 친필을 볼 수 있게 되었구나!”

하자 홍관이 말하였다.

“아니다. 이는 신라 사람 김생이 쓴 것이다.”

두 사람은 웃으면서 말했다.

“천하에 우군을 제외하고 어찌 이와 같은 신묘한 글씨가 있을 수 있겠는가?”

홍관이 여러 번 말하여도 끝내 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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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제48, 열전제8, 김생

김생의 글씨 가운데 친필은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생의 시대로부터 수백 년이 지나 삼국사기가 편찬된 고려 중기까지는 김생의 글씨가 고려 땅에 많이 남아있었고 고려의 학자들이 그 글씨를 보배로 여긴다고 했는데, 남긴 건 많았지만 이후 고려와 조선의 전란을 거치며 많이 소실된 듯 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김생이 썼다는 전유암산가서 글씨가 전시되어 있는데 후대에 김생의 글씨를 본떠 모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6년이화여대 중문과 정재서 교수가 집안 대대로 소장하고 있던 서책 몇 권을 공개했는데, 서울대 기초과학교육연구공동기기원이 지난해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법으로 조사한 결과 '''서기 720년에서 840년 사이에 만든 것'''임이 확인되었다. 정재서 교수의 9대조로 영조 때 청도군수를 지냈던 정창유에게 바친 것인데, 당시 김생이 머물렀던 절이 불이 나면서 불복장 유물 속에서 이 글씨를 발견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이걸 정창유에게 가져다 바쳤고, 그 9대에 걸쳐 보관하고 있었다고.#[8] 현전하는 작품 대부분은 그의 글씨를 모사하거나 비석에 새긴 것이다. 16세기에 제작된 해동명적이라는 금석문 탁본 모음집에 김생이 쓴 '送賀賓客歸越'[9]이라는 글씨가 실려 있고, 이 밖에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의 문헌에 김생이 썼다고 전하는 사찰 현판에 대한 일화나 금석문 글씨에 대한 호평이 많다.
  • 안양사의 편액을 썼는데 몇 년 뒤에 그 편액을 건 건물이 갑자기 남쪽으로 기울어지자 김생을 다시 불러다 북쪽에 글씨를 쓰게 했더니 건물이 다시 반듯해졌다.
  • 청룡사[10]의 편액을 썼는데 그 편액 주위에는 항상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껴 있었다.
  •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김생에게 찾아와서 《제석경(帝釋經)》을 써달라고 청했는데, 김생이 써주고 나서 그 사람에게 당신은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그 사람은 “나는 제석(帝釋)의 사자다. 나에게 명하여 글씨를 받아오라고 해서 온 것이다.” 하고는 갑자기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 나주 객사(客舍)에 있는 ‘유색루(柳色樓)’라는 현판은 김생의 글씨를 모아 만든 집자현판이었는데, 옛날에는 도깨비들이 그 누각 안에서 소란을 피워서 사람들이 들어가 지낼 수가 없다가 그 편액을 써서 건 뒤로는 도깨비들이 나오지 않게 되었고, 사람들은 "김생의 필력(筆力)이 부정한 것을 물리친 것"이라고 했다.
  • 지금 경주에서 월정교 복원이 진행중인데 남쪽 현판이 김생선생 글씨체이고 북쪽 현판이 최치원선생 글씨체이다. 김생 최치원 글씨들은 전부다 집자현판에서 인용해서 만든거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해금강에 사는 용왕의 아들이 김생에게 와서 글씨를 배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금석문으로는 고려 시대의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11]가 김생의 글씨를 집자하여 세운 것이라 전하고 있다. 조선 시대의 성대중은 이 비석의 글씨를 두고 "마치 3만 근의 활을 당겨서 한발에 가히 수많은 군사를 쓰러뜨릴 것 같다."고 그 힘을 칭찬했다.


4. 기타


2019년 경북 김천의 청암사 도선국사비에서 김생의 친필로 추정되는 발견이 있었다. 다만 금석문에 새긴 글자 위에 창주도선국사라는 글자를 새겨버린데다가 풍화가 심해서 해독된 글자가 별로 없다는 듯.#
[1] ~~생(生)이라고 불리는 경우 대개 이름을 빼고 성씨만 붙여서 부른다. 김생이라는 말은 풀이하면 '김씨'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 이름이 본명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성이 김씨였던 것은 분명하다.[2]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연대로 당예종 경운(景雲) 2년, 신라 성덕왕(聖德王) 10년이다.[3] 당헌종 원화(元和) 2년, 신라 애장왕 10년이다.[4] 불교에서 승려들이 걸식하면서 수행하는 것. 일종의 탁발.[5] 고기와 파ㆍ마늘 따위를 먹지 않는 것.[6] 북송 휘종의 연호로 서기로는 1102년에서 1106년 사이.[7] 왕희지의 관직이 우군대장군이었기 때문에 으레 왕 우군으로 불린다.[8] 조선 시대까지 드문드문 김생의 친필로 전하는 글씨를 내가 봤다고 적은 문헌들이 종종 보인다.[9] 당나라의 시인 이백이 강남으로 돌아가는 하지장(賀知章)을 위해 지어 주었다는 칠언시.[10] 안동 청량산에 아직도 있는 절. 경내에는 최치원이 바둑 두던 곳이라고 전하는 난가대라는 곳도 있다.[11] 원래는 경복궁 안에 있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