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장왕

 


'''시호'''
'''애장왕(哀莊王)'''
'''성씨'''
김(金)
''''''
청명(淸明) / 중희(重熙)[1]
'''왕후'''
왕후 박씨
'''부왕'''
소성왕
'''모후'''
계화부인(桂花夫人) 김씨
'''생몰연도'''
음력
788년 ~ 809년 7월 (20~21세)
'''재위기간'''
음력
800년 ~ 809년 7월 (10년)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삼국사기 기록
5. 같이보기


1. 개요


신라의 제40대 임금. 제39대 소성왕의 장남으로 신라 하대에서 얼마 안 되는 적장자 출신 임금 중 1명이다. 13세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므로 재위 초부터 숙부인 병부령 김언승섭정을 받게 되었다. 폐단들을 정리하고 개혁을 실시했으나 왕위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킨 김언승 등에게 잡혀 처형당하며 빛을 보지 못했다.[2]

2. 생애


귀족 세력을 억제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펼쳤으며 5묘제를 개편하여 원성왕계의 왕위 계승을 확립하였다. 기존의 5묘제는 신문왕 대에 태조 성한왕 - 진지왕 - 문흥왕 - 태종 무열왕 - 문무왕으로 확립되었고 혜공왕 이후 왕들은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을 불천위[3]로 모시고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애장왕 대에 이르러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은 5묘 밖에 별묘를 만들어 신위를 따로 모시고 태조 성한왕 다음에 애장왕의 고조할아버지까지 모시는 새로운 5묘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모두 숙부인 김언승과 김수종의 영향력 하에서 행해진 정책들이었다.
그러나 애장왕이 계속 숙부들에게 이용만 당했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애장왕은 10대 중후반에 들어서면서 의욕있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805년 8월 애장왕은 율령세칙 20여 조를 반포하여 율령 체제를 확고히 하는 것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삼국사기》 직관지를 보면 "혜공왕 대에 원래대로 복구되었던 관제가 애장왕 대에 이르러 경덕왕 시절의 체제로 회귀했다"는 식의 기사가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당시 애장왕이 내린 세칙에는 관제 개혁과 관련한 내용이 상당수 있었을 것이며 혜공왕 이후로 비대해진 진골 귀족들의 힘을 누르고 경덕왕이 지향했던 유교 이념 중심의 전제군주제를 목표로 삼았다는 것을 추정해볼 수 있다.
나름대로 숙부들을 견제할 생각이었는지 태종 무열왕계 왕족김헌창시중에 임명하는 모습도 보였다. 김헌창은 원성왕에게 밀려 왕위 계승에서 탈락한 김주원의 아들이었는데 김헌창을 시중에 앉힌 것은 김헌창을 대표로 하는 무열왕계 왕족들의 힘을 키워서 숙부들을 견제하고 자기 세력을 키우려는 행동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당시 규모가 커짐에 따라 폐단이 심화된 불교계에도 제동을 거는데 806년 "사원의 창건은 금지하고 수리만 허락하며 불교 행사에 화려한 사치품 사용을 금한다"는 교서를 내린다. 이는 당대에 폐단이 심각해지던 불교계에 대해 제동 조치를 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지방 행정에도 손을 대서 808년 12방면으로 사자를 파견해 여러 군읍의 경계를 획정했다. 행정 구역 획정을 어떻게 했는지 자세한 사항은 전해지지 않지만 행정 구역 개편을 위한 조치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신문왕 이후 확정되었던 지방 행정 구역이 신라 하대의 정치적 혼란으로 붕괴되자 이에 대한 개선으로 시행한 것이다. 이렇듯 성장해 가면서 당대 사회의 문제를 직시하는 등 패기있고 의욕넘치는 청년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애장왕(哀莊王) 5년 여름 5월에 일본국이 사신을 보내와 황금 300량을 바쳤다.

(五年夏五月, 日本國遣使, 進黃金三百兩.)

삼국사기 애장왕 조

일본과의 관계도 이전보다 많이 회복되었는지 서기 804년에는 일본에서 사신을 보내와 황금 300량을 신라에 바치게 된다. 꾸준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왕위 계승의 안정성을 인정받게 된다. 여러모로 왕권 강화를 위해 애쓴 흔적이 많이 엿보인다.
애장왕의 왕권 강화책은 애장왕 즉위시 섭정을 했던 숙부 김언승과 김제옹의 입장에서 보면 불편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숙부 김언승이 809년 김제옹[4]과 함께 일으킨 반란에 휘말려 처형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이때 동생인 김체명도 애장왕을 지키다가 권력에 눈이 돌아간 삼촌들에게 같이 처형당했다는 점. 결국 애장왕의 형제 중 살아남은 건 김수종과 혼인한 딸[5] 1명 뿐이다.

3. 기타


  •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서 숙부들의 섭정을 받았다는 점에서 뒷날 고려헌종이나 조선단종과 비슷한 유형의 왕으로 볼 수 있겠지만[6]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성년 때까지도 보위에 있었고 성년이 되어서 뚜렷한 정치적 목표를 가지고 과감한 개혁 정책을 펼치다가 결국 숙부에게 목숨을 잃어버린 비운의 청년 군주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미완의 명군. 애장왕을 죽이고 집권한 헌덕왕 때는 김헌창의 난과 같은 내란을 겪었고 연이은 천재지변도적떼까지 창궐하며 민심이 흉흉해진다. 더군다나 이를 극복해야 하는 헌덕왕은 불혹의 나이를 지난 노신, 거문고를 타고 놀거나 연회를 벌이는 등 군주로서 자격 미달인 행적을 보인 탓에 신라의 혼란과 쇠락은 이후 신무왕이 정리하기 전까지는 더욱 가속화되어 간다.
  • 최치원의 《석순응전》과 《석이정전》에 의하면 애장왕 3년인 802년 10월 16일에 옛 대가야 왕실의 후예인 승려 순응과 이정을 지원해 해인사를 창건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왕비(당시에는 후궁) 박씨가 등창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순응과 이정이 낫게 해준 것에 대한 답례로 애장왕이 절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해인사가 위치한 가야산은 옛 대가야의 영역으로 대가야 왕족을 통해 해인사를 창건하도록 한 건 대가야계 유민에 대한 유화책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다만 기록 자체가 신화적인 요소가 강해 모든 부분이 사실인지는 알 수가 없다.[7]

4. 삼국사기 기록


一年夏六月 애장왕의 가계와 즉위
一年 당나라가 소성왕을 책봉하다
一年秋七月 왕이 이름을 중희로 바꾸다
一年秋八月 양열을 두힐현 소수에 임명하다
양열이 제수된 이유
二年春二月 시조 묘를 배알하다
二年春二月 오묘를 정리하다
二年春二月 언승을 상대등으로 삼다
二年春二月 대사면을 하다
二年夏五月一日 일식이 예정되었으나 일어나지 않다
二年秋九月 형혹이 달에 들어가고 별이 비처럼 쏟아지다
二年秋九月 무진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다
二年秋九月 우두주에서 흰 꿩을 진상하다
二年冬十月 큰 추위가 있어 소나무와 대나무가 모두 죽다
二年冬十月 탐라국에서 조공을 보내다
三年春一月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지내다
三年夏四月 김주벽의 딸을 후궁으로 들이다
三年秋七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年秋八月 가야산 해인사를 창건하다
三年秋八月 삽량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다
三年冬十二月 균정을 인질로 보내려 하나 사양하다
四年夏四月 왕이 남교에 가서 보리 농사를 살피다
四年秋七月 일본과 우호를 맺다
四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五年春一月 수승을 시중으로 삼다
五年夏五月 일본이 사신을 파견해 황금을 바치다
五年秋七月 알천 가에서 열병하다
五年秋七月 삽량주에서 흰 까치를 진상하다
五年秋七月 임해전을 중수하고 동궁 만수방을 새로 짓다
五年秋七月 우두주에서 돌이 일어서다
五年秋七月 웅천주에서 물이 핏빛으로 변하다
五年秋九月 망덕사의 두 탑이 부딪치다
六年春一月 왕이 어머니와 왕비를 봉하다
六年 당 덕종이 돌아가 순종이 즉위하기, 순종이 왕과 대비, 왕비를 책봉하다
六年秋八月 공식 20여 조를 반포하다
六年冬十一月 지진이 일어나다
七年春三月 일본 사신이 와서 만나다
七年春三月 사찰 창건과 불사에 대한 금령을 제정하다
七年春三月 김헌충이 당에서 귀국하다
七年秋八月 사신을 보내 입당 조공하다
八年春一月 김헌창시중으로 삼다
八年春二月 왕이 숭례전에서 주악을 감상하다
八年秋八月 큰 눈이 내리다
九年春二月 일본에서 사신이 오다
九年春二月 김력기가 당에서 소성왕의 책서를 받아오다
九年春二月 군읍의 경계를 나누어 정하다
九年秋七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年春一月 달이 필성을 범하다
十年夏六月 서형 산성의 소금 창고가 소 울음 소리를 내다
十年夏六月 벽사의 두꺼비가 뱀을 잡아먹다
十年秋七月 김육진을 당에 보내 사은을 하고 방물을 바치다
十年秋七月 크게 가물다
十年秋七月 언승과 제옹이 왕을 시해하다

5. 같이보기



[1] "거듭 빛나는 이"라는 뜻이며 원래 이름은 청명이었으나 800년 7월에 이름을 중희로 바꾸었다고 한다.[2] 시호에 '슬플 애(哀)'가 들어가는데 그의 비극적인 삶을 나타내준 셈.[3] 종묘에서 옮기지 않는 자리. 원성왕이 사실은 내물왕계라기보다는 무열왕 여계이므로 5묘에서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을 옮기지 않았다는 주장도 불천위 론으로 어느 정도 극복이 가능하다.[4] 김제옹은 훗날 희강왕이 되는 김제륭의 다른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5] 장화부인으로 사후 정목왕후.[6] 고려의 헌종은 조선의 이방석에 비슷해서 애장왕하고 비슷하다고 보기는 힘들다.[7] 등창을 낫게 해준 이야기부터가 신화적 요소가 강하다. 두 스님이 선정에 들자 붉은 빛이 스님의 이마에서 뿜어져 나와 하늘로 치솟았다. 이로 인해 왕궁에까지 소문이 퍼지자 치료법을 알려주었는데 궁궐 뜰 앞의 배나무에 실 한쪽 끝을 매고 나머지 한쪽 끝은 왕비의 등창에 가져다 대라는 주술적인 처방이었다. 시킨대로 했더니 과연 배나무가 말라죽고 왕비의 등창이 나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