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조(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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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김녕(金寧).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2.1. 초년기
김병조는 1877년 1월 10일 평안북도 정주군 고안면 봉명동에서 김경복(金京福)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6살 때부터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고, 15세 전후에 제자백가서를 비롯해 중국의 주요 고전을 섭렵했다. 이후 1897년 고향에서 80리 떨어진 구성군 관서면 조악동에 서당을 열고 훈장을 맡았으며, 1903년 때 삼희재(三希齋) 서당 훈장으로 초빙되면서 인근 방현면 변산동으로 이사했다. 얼마 후, 그는 삼희재 주인과 상의해 이 서당을 신식 초등학교인 변산학교로 개편하고 이곳에서 민족교육을 시작했다.
1909년 9월, 김병조는 김관근 목사의 인도로 기독교의 종파들 중 하나인 장로회에 입교했다. 그리고 191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1917년 6월 졸업했고, 그해 8월 목사 안수를 받고 의주군 고관면 관리교회 목사로서 목회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1918년 8월에는 정주읍 예배당에서 정식 관리교회 전임목사가 되었으며, 11월 27일에 창립된 의산노회 소속의 의주교회를 담임 목사를 맡았다.
2.2. 3.1 운동
김병조는 선천 남교회당에서 1919년 2월 10일부터 열린 사경회(査經會)에 참석하기 위해 의산노회 소속 유여대, 장덕로, 김승만 목사 등과 함께 선천을 방문했다. 회의를 마친 후 양천백 목사 집을 방문했던 그는 그곳에서 이승훈을 만났다. 이떄 이승훈은 3.1운동 거사 계획을 설명했고, 그 자리에 있던 이명룡, 유여대, 양전백, 그리고 김병조 등 4인은 민족대표로 동참할 것을 약속했다. 그는 김승만과 함께 비밀결사 조직 책임을 맡고 3월 1일 당일에 평안북도 도내 여러 지방을 비밀리에 다니면서 만세 시위 전파와 확산을 위해 노력했다. 이 때문에 그는 3월 1일 당일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는 조선인들의 3.1 만세시위 동참을 촉구하기 위해 '격고아한동포문(檄告我韓同胞文)'을 제작해 살포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또한 그는 3월 7일에 일제에게 빌붙은 부일배들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경고관헌문(警告官憲文)'을 만들어 배포했다. 그 내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에도 실렸는데, 그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슬프다, 우리 팔도의 동포여! 깊은 잠에 빠져 있음을 크게 뉘우칠 지어다. 하늘의 모습을 우러러 보아라, 동방의 밝은 별이 이미 밝았다. 시국의 형편을 두루 살펴보아라. 집집마다 경종이 스스로 울리니 휘날리는 태극기는 제군의 조국정신을 활발하게 하고, 열렬한 만세소리는 제군의 일체 생명의 맥박을 다시 뛰게 하도다.
이르노니 너희 조선인으로 왜놈의 관리된 자야 양심에 따라 스스로 반성하라! 의를 의지하고 일어선 2천만 민족이 모두 너희들을 쳐 죽일 생각임을 모르는가. 아니면 절개를 지키며 숨져간 30만 충령이 이미 너희를 죽이기로 한 결정을 모르는가. 위로는 하늘이 두렵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이 부끄럽지 않느냐. 너희 할애비 너희 애비의 피가 과연 네 골수에 흐르고, 충이니 의이니 하는 마음이 아직도 네 마음속에 남았거든 북을 치고 공격할 때를 기다리지 말고 힘을 내어 무기를 거꾸로 들고 돌이켜 길을 바꿈으로써 크게 후회하는데 이르지 않도록 하여라.
2.3.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병조는 격문을 살포한 뒤 일제 경찰의 수사를 피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가 상하이로 망명한 정확한 일자는 알 수 없지만 4월 중순 경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919년 4월 30일에 열린 임시의정원 제4차 회의에 참석해 손정도 등과 함께 평안도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또한 7월 7일에 열린 제5차 회의에서는 법제위원회 이사와 국제연맹회 제출 안건 작성 특별 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8월 8일에 열린 제6차 회의에서 외교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임시의정원을 맡으면서 의정활동 외에도 외교선전 및 사료편찬 작업에 관여했다. 그는 손정도, 장덕로, 김시혁, 김승만 등 11명의 기독교 목사와 장로 명의로 '한국시사진술서'를 작성했다. 이 문건은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한국대표 김규식의 활동을 지원하고 세계장로교연합회 및 미주 각 교회에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호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한국 기독교 대표들이 중국 기독교계에 고하는 글을 발표하여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 기독교계의 관심과 지원을 촉구하기도 했다.
1920년 3월 10일, 김병조는 지방선전부 이사를 맡아 지방 선전대원들을 국내에 파견하여 임정의 활약상을 국내 동포들에게 알리고 독립운동 정보를 수집했다. 또한 임시정부의 외곽단체인 상하이 대한교민단과 대한적십자회 간부로 활동했고, 임시정부 산하의 교육기관인 인성학교 교사를 맡아 자제들에게 민족교육을 가르쳤다. 1921년 4월에는 신익희, 여운형, 조동호, 최창식 등과 함께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창립하여 한중 관계 증진을 도모했다.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일관계사료집 편찬에 공을 들였다. 당시 3.1운동으로 한민족의 독립 의지가 세계의 주목을 받았지만 부정확한 언론보도와 일제의 왜곡이 넘쳐났다. 임시정부는 이를 바로잡아 외교 활동에 장애를 입지 않기를 희망해 반드시 한일관계사료집을 제대로 편찬해야 했다. 이에 7월 11일 회의에서 국제연맹회 제출안건 작성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특별위원으로 김병조, 오의선, 최창식, 정인과, 이춘숙 등 5인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사료집 편찬은 시일이 급박한데다 자료와 집필자 부족으로 애를 먹었다. 국제연맹회에 제출하여 세계열강들이 열람케 하기 위해서는 늦어도 9월 이전에 발송해야 했기 때문에 실제 편찬기간은 50일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자료수집의 어려움으로 당초 계획했던 분량의 10분의 1도 기술하지 못했다. 또 임시사료편찬회는 33명으로 구성되었으나 실제 자료수집과 집필에 참여한 사람은 김두봉, 김병조, 이원익 3인에 불과했다. 이러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8월 하순경 편찬 정리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10여 명이 필경(筆耕)에 참가하여 1백질을 등사하고 편찬을 마친 날짜는 9월 23일이었다.
임시정부는 한일관계사료집 편찬이 마무리되자 임시사료편찬회를 해산했다. 이후 김병조는 사료집 편찬 과정에서 수집한 사료를 토대로 <한국독립운동사략>을 집필했다. 총 17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에서부터 1920년까지의 한국근대사를 외세의 침략과 이에 대항한 한민족의 독립투쟁이라는 시각에서 정리했다. 이 책은 같은 시기에 간행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와 함께 독립투쟁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귀중한 사료로 취급되고 있다. 또한 그는 1924년 <독립혈사>를 집필했지만,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1923년 1월 3일 열린 국민대표대회에서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개조파와 임시정부를 폐지하고 국민대표회의를 중심으로 새로운 독립 연합 체제를 구축하자는 창조파의 격렬한 대립으로 인해 심각한 내부갈등을 겪었다. 이에 환멸을 느낀 김병조는 상하이를 떠나 서간도로 향했다.
2.4. 목회 활동
김병조는 집안현 화전자 교회와 패왕조 교회 담당 목사로 일하면서 목회 활동에 전념했다. 또한 1926년에 남만 노회장, 1932년에 북만 노회장으로 선출되어 한인 교회를 이끌었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으로 만주를 장악한 일제가 만주국을 세우자, 더이상 목회활동을 하기 어려워진 그는 1933년 4월 조선으로 귀국했다. 도중에 신의주 역에서 임의동행 형식으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은 그는 일본 경찰로부터 앞으로는 독립운동에 관여하지 않고 일제의 시책에 협력하겠다는 서약서를 쓰라는 강요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이후 그는 요시찰 대상자로 지목되어 '30리 이내'로 주거 제한 조치가 내려졌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내선일체를 거론하며 황민화 정책을 단행했다. 조선어 사용 금지 및 일본어 상용(常用), 신사참배, 궁성요배, 황국신민의 서사 암송 등이 강요되었다. 그러나 김병조는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고, 일제의 강압이 이어지자 목회 생활을 접고 정주군 덕연면 덕흥동 묘두산 아래로 거처를 옮겨 은둔했다. 그렇게 세상과 인연을 끊고 조용히 지내던 그는 8.15 해방을 맞이했다.
2.5. 비참한 최후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한 그는 평양의 조만식과 함께 조선 민주당을 창당해 독립 국가 건설에 착수했다. 그는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공산화 조치에 반대하며 그해 11월 청년들을 모아 광복단을 창설했다. 이후 반소, 반공, 반탁 운동을 전개하던 그는 자연히 소련 군정과 마찰을 지속적으로 빛었고, 주변인들은 그러다 큰일난다며 월남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묵살하고 소련에 계속 맞서다가 1946년 12월 24일 체포되어 신의주 감옥에 구금되었다가 1947년 2월 20일 시베리아의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이후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는데, 1993년 카자흐 공화국 알마아타에 살고 있던 이영환이 그의 최후에 대해 증언했다. 김병조와 함께 광복단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소련군에게 붙잡혀 시베리아에 보내져 8년간 수용되었다가 풀려난 그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1948년 6월 클라스노 야르스코변강 레소트구역 북방수용소 B5호 휴양소에 이감됐는데 그곳에 먼저 수용돼 있던 김병조를 만났다고 한다. 또한 김병조는 그해 8월 15일 밤 휴양소 벤치에서 이영환에게 "오늘이 해방 3주년"이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격려했다고 한다.
이영환은 김병조가 그렇게 말한 후 오른쪽 팔목에 태극기 문신을 새겨주었다면서 기자에게 그 문신을 보여줬다. 그리고 2년 후인 1950년 5월 초, 김병조는 바이칼호 부근 수용소로 이감되었다. 그리고 1952년 여름, 이영환은 바이칼호 부근 수용소에서 온 한 조선인으로부터 "김 목사가 올해 봄 숨져 바이칼 호 부근 언덕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묻혔다."고 전했다고 증언했다. 현재 김병조의 시신이 묻힌 곳이 어디인지는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다.살아서 수용소를 나가면 조선으로 돌아가지 말고 제3국으로 망명해 조국통일의 맥을 잇고 대한의 아들임을 늘 잊지 말라.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김병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