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당

 

1. 개요
2. 1930년에 상해에서 창당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
3. 1930년에 창당된 만주 혁신의회의 여당
4. 1935년에 만들어진 조소앙의 독립운동 단체
4.1.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1937)와 전국연합진선협회(1939)
5. 1940년에 창당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
5.1. 관련 정치단체
6. 1963년에 창당된 정당
6.1. 관련 문서
7. 기타
8. 관련 문서


1. 개요



한국독립당은 일제강점기에 처음 만들어진 독립운동 단체 겸 민족주의 정당이다.
다른 당들에 비해 역사가 복잡한데, 같은 해에 상해와 만주라는 다른 두 지역에서 같은 이름의 정당이 탄생하였고, 합당과 탈당 등 일련의 사건을 거쳐 상해 쪽 한국독립당이 재건되었으며, 그로부터 몇 해 뒤에는 상해와 만주의 한국독립당이 하나의 이름으로 다시 합쳐졌다. 해방 후에도 같은 이름의 당이 두번 등장하는데, 이 문서에서는 당들이 만들어진 순서에 따라 서술한다.

2. 1930년에 상해에서 창당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


1930년 1월 25일에 이동녕, 안창호, 김구 등 26인이 독립투쟁전선 통일과 지방파벌 청산이란 목적 하에 상해에서 결성한 당. 설립할 당시 조소앙삼균주의를 당의 정의 및 강령으로 채택하였고, 덕분에 한국독립당은 주의와 정강을 갖춘 정당으로서 반일적 민족운동과 무력적 파괴운동을 투쟁방식으로 하는 혁명적 정당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한 이들 중 대부분이 임시정부에서 요직을 맡고 있었는데, 당시의 임시정부는 성과가 미비하여 해체를 하냐 마냐 하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었다. 이 당은 서로 대립하는 인사들을 민족주의 통일이라는 하나의 목표 아래 결집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한국독립당은 설립 당시에는 조직, 선전, 훈련 등의 반일운동을 광범위하게 벌이기로 결정했으나, 실제로는 당세 확장을 위한 조직 활동과 기관지 발행을 통한 선전 활동에 치중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로 인해 일제의 검색이 강화됨에 따라 상해를 떠나 항주로 근거지를 옮겼고, 그 이후에는 당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재무부, 내무부, 총무부 등의 부서를 설치했다. 또한 김철, 조소앙 등의 주도 하에 기관지 <진광>을 창간하고 각종 선언서와 유인물을 배포하는 등 선전 활동을 계속하였다.
한국독립당의 외곽 단체로는 상해한인청년당, 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 상해한인소년동맹 등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상해한인청년당이 기관지 발행 등의 선전 활동을 가장 활발하게 수행하였다.

3. 1930년에 창당된 만주 혁신의회의 여당


1920년대 초 만주의 무장 독립운동 세력은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로 나뉘어 있었다. 1920년대 중후반 민족유일당 운동의 영향으로 만주 지역에서도 3부 통합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통합 방법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인해 하나의 단체로 완전히 통합하지 못하고 북만주 지역의 혁신의회(1928)와 남만주 지역의 국민부(1929) 둘로 나뉘게 되었다. 그 둘 중 김좌진이 주도하고 있었던 혁신의회는 1년 뒤인 1929년에 한족총연합회로 개편되었다.
1930년에 김좌진이 암살당한 뒤, 지청천이 남은 이들을 수습하여 한족총연합회를 한국독립당으로 개편하였다. 1933년 한국독립당은 활동 근거지를 만주에서 중국 본토로 옮기고 한중연합군을 구성하여 쏠쏠한 전과를 올렸으나 중국공산당의 압력으로 얼마 안 가 해산되고 말았다.
한국독립당은 1934년 한국혁명당과 합당하여 신한독립당을 창당하였고, 신한독립당은 1935년 5당 합당에 참여하여 민족혁명당을 창당하였으나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해 얼마 안 가 조소앙의 재건 한국독립당이 출범하면서 신한독립당 계열도 같이 탈당하였다. 이후 지청천이 1937년에 탈당하여 조선혁명당을 창당하였고, 조선혁명당은 이후 1940년에 한국국민당 및 한국독립당과 합당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4. 1935년에 만들어진 조소앙의 독립운동 단체


1931년에 일본이 벌인 만주사변은 한인 독립운동 세력에게 기회가 되었다. 중국인들의 항일 구호가 높아지면서 한중 연합이 급속하게 진전된 것이다. 이러한 정세에 따라 독립운동단체들의 역량을 집중하여 대일통일전선을 형성시키자는 의견이 나와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출범하였고, 한국독립당은 의열단, 신한독립당과 합당하여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이하 민족혁명당)을 창당하였다. 5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족혁명당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계열 세력에 의해 주도되자 조소앙1935년 7월에 탈당하여 1935년 9월 25일 조소앙·박창세 등은 민족혁명당을 이탈하여 한국독립당의 재건을 선언했고 창당하였다. 합당을 반대했던 김구 또한 합당 중에 빠져나와 1935년 11월 항주에서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1]
이후에는 민족혁명당은 협동전선으로 출발했지만 결집한 이들의 성향과 노선 등의 차이로 인해 점차 분열되었다. 조소앙 역시 당의 노선 변화에 불만을 품고 당을 나와 재건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재건 한국독립당은 이후 독자적으로 활동하였으나 재정적 문제로 인해 활발하게 활동하지는 못했다.
김구한국국민당(1935년), 지청천의 조선혁명당(1937년)과 함께 한국독립당(1940년)으로 합당하였다.

4.1.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1937)와 전국연합진선협회(1939)


1937년 4월 이후, 중국 관내의 반(反) 민족혁명당 세력은 김구의 한국국민당, 조소앙의 재건 한국독립당, 지청천의 조선혁명당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분리된 상태에서는 효과적으로 활동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들은 당 연합을 시도하게 된다. 조소앙은 재건선언 당시 정치상 견해가 부합되는 세력과의 결합을 천명했고, 민족혁명당을 탈당한 뒤 조선혁명당을 결성한 지청천 역시 일본과 대립하는 모든 세력을 연결한다는 정강을 채택하여 당이 연합할 가능성을 암시했다. 그리하여 1937년 8월, 각 당의 대표들이 난징에 모여 회담한 끝에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약칭 광복진선)가 결성되었다.
그 후의 중국 관내의 민족해방운동은 김구가 이끄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양립하는 양상을 보였는데, 두 단체는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한다는 점에서는 목적이 같았으나, 투쟁 방략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다. 결국 민족통일전선운동은 김구와 김원봉을 중심으로 하는 양대 진영의 대립만 키우면서 항일독립운동전선의 대동단결은 난관에 직면하게 되었다.
중일전쟁이 절정에 이르자 중국 국민당 총재 장제스는 둘의 합작을 권유하였는데, 마침 항일독립전선운동을 통일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기에 김구김원봉은 1939년 5월 「동지동포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발표하여 양 진영의 연합전선 형성을 구체화하게 되었고, 이후 한국국민당, 재건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민족혁명당, 조선혁명자연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청년전위동맹 등 총 7개 단체가 모여 7단체회의를 거쳐 전국연합진선협회가 발족하였지만 몇몇 단체들 의 이탈로 인해 세력이 급속히 위축되면서 얼마 안 가 소멸하고 말았다.

5. 1940년에 창당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


전국연합진선협회가 무산된 뒤 1940년 3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했던 세 당이 한국독립당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다. 이후 1940년 5월 8일 3당이 해체를 선언하면서 새로운 한국독립당이 3.1 운동의 정맥을 계승한 민족운동의 중심적 대표 정당임을 천명하였고, 그 다음부터는 자유민주주의의 정치 체제로 운영되는 국가 수립을 지향하는 활동을 벌였다. 상해의 한국독립당과 만주의 한국독립당은 같은 이름의 당으로 합쳐지는 것으로 명맥을 잇게 되었다.
당의 군대로 1939년 한국독립당 당군을 결성했고, 이는 한국 광복군의 전신이 되었다. 1931년 무렵 활발히 활동한 '한국독립군'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 군대는 지청천 등의 주도로 만주에서 결성된 또다른 한국독립당의 당군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국 정부로 인정받지 못하자 1945년 11월 국내에 당으로 공식 등록하고 활동했다. 반탁 운동으로 미군정과 갈등을 겪으면서 활로를 찾기 위해 한국민주당을 비롯해 안재홍이 이끄는 국민당, 이갑성이 이끄는 신한민족당 등에 통합을 제안했다. 그러나 김구와 한국독립당이 내건 조건은 모욕적인 것이었는데, 통합 정당의 강령은 임시정부의 삼균주의를 계승하고 총재와 당명 역시 한국독립당이 정하도록 했다. 한국민주당의 경우는 이승만이 중간에서 갈등을 부추긴 탓에 특히 큰 저항을 보였다. 결국 우익정당 통합운동은 한국민주당이 불참한 상태에서 한국독립당과 국민당, 신한민족당이 통합되며 끝났다. 우익 최대 정파인 한국민주당이 빠진 통합의 효과는 한국독립당이 당초 생각했던 것만큼 크지 않았다.
이후 김구가 남북 협상에 참여하면서 우익 측 지지자가 이탈하고, 총선에도 불참하면서 몰락했다. 단 김선 등 일부 당원들은 무소속으로 5.10 단독선거에 출마했다. 그 후 지청천, 신익희는 대한국민당으로, 이시영은 자유당을 거쳐 민주국민당으로, 이범석은 자유당으로 가는 등 뿔뿔이 흩어졌다. 임시정부의 정통 계승자였던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힘으로 당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김구의 지지 세력이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 우익 계열에게 흡수되면서 점점 어려운 상황에 처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구가 암살되면서 사실상 정당으로서의 생명을 잃었다.
1949년 6월 전향자들을 교화시키려는 목적으로 결성된 관제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이 결성 되었을 때, 한국독립당 계열 인사들도 반강제적으로 가입되곤 했었는데 대표적인 인사가 문학가 정지용 같은 경우가 있다.

5.1. 관련 정치단체


  • 동인회[2]

6. 1963년에 창당된 정당



한국사회당

'''한국독립당'''

신민당
과거에 한국독립당에 소속되어 있었던 대한민국 초기의 군인, 정치인이었던 김홍일제6대 국회의원 선거 직전에 재건한 당. 한국독립당의 역사를 감안한 작명이었으나 누가 봐도 이름을 팔아 선거용으로 내세운 것이 자명했으므로 단 한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1965년 보궐선거에서야 간신히 한 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여 미약하나마 원내정당이 되었는데...그 국회의원의 이름이 바로 '''김두한'''. 김두한은 그 유명한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을 저질러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을 자기 손으로 마무리해버렸다. 결국 이후의 선거에서는 당선자를 못 내고 군소 정당으로 연명하다가 결국 1970년 1월 25일 야당통합이란 명목으로 신민당에 흡수, 합당되었다.

6.1. 관련 문서




7. 기타


이후로도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21세기한독당이라는 군소정당이 또다시 등장했다. 당명 그대로 자신들의 당은 한국독립당을 계승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사실상의 연관성도 없을 뿐더러 이 시점에서 한국독립당은 일반 대중에게 완전히 잊혀진 상태였기에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소멸했다.

8. 관련 문서



[1] 당시 김구는 일제에 의해 수배중이었기 때문에 대외적인 활동을 할 수 없어서, 부득이 가흥을 오가는 선박 위에서 임시정부 국무회의를 열어 한국국민당을 창당했다 . [2] 신성균 의원을 비롯해서 한독당계 출신들이 무소속으로서 만든 원내 정치 단체이다. 이들은 이후 김약수가 이끄는 성인회와 일부 대동계와 합쳐서 동성회를 만들었으나 1949년 9월 최종 교섭단체 결성시 원내교섭단체의 의석수에는 미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