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길(조선)
1. 개요
인조 시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대변되는 혼란의 시기에 주화파(主和派)[5] 를 대표했던 인물. 호는 지천(遲川), 본관은 전주(全州), 시호는 문충(文忠).[6] 호란을 어떻게든 수습하고 조선을 끝까지 지탱한 말 그대로 문관의 충무공. 문신으로서 외교에 끼친 영향력이 임진왜란 때 전시재상(戰時宰相)으로서 조선을 지탱했던 류성룡에 버금간다며 사관이 논했을 정도이다. 사관들은 최명길을 깎아내렸는데 주화파의 간판급 인물인데다가 포로로 잡혀갔던 여인들과 이혼하는 것을 금하게 해달라고 청하는 등 주류 인물들의 생각과 매우 달라서였다. 그런 그들도 최명길이 외교로 나라와 종묘사직을 구한 일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특히 주화론을 호란 시작부터 끝까지 격렬하게 깎아내린 사관들이 최명길의 졸기에서는 그의 자질과 행보를 칭찬해주며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으니 더이상 설명이 필요가 없다. 최명길의 활약이 없었다면 조선이 진짜로 더욱 불리한 조건을 받아들여서 인조가 더 극악의 방법으로 개고생해야 했을지도 모른다.[7] 가히 고려의 서희와 함께 '''한국사 최고의 외교관'''이라고 불릴 만한 인물이다.“그대 마음 굳은 바위 같아 끝까지 바뀌지 않거니와, '''나의 도는 둥근 고리 같아 믿는 바에 따르네'''.[4]
君心如石終難轉, 吾道如環信所隨.
이긍익(李肯翊, 1736년 ~ 1806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6, 「심양옥에 갇힌 사람들[瀋獄諸囚]」
2. 일생
2.1. 야인 시절부터 인조반정까지
명재상 백사(白沙) 이항복,[8] 신흠[9] 밑에서 수학했으며, '''조선 시대 유일하게 한 해(1605년)에 생원시, 진사시, 문과에 모두 급제한 인물.''' 이후 광해군 때에 병조 좌랑을 맡고 있었다가 1614년 명나라 차관으로 인한 사건이 발생하여 파직당하고 만다. 당시 서학 유생 이홍임이란 사람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중국인이 어디서 왔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포도청 군사들이 이홍임을 체포하여 무고를 해서 상을 타고자 했다. 최명길이 이 일을 조사해 이홍임의 죄가 없음을 알고 석방하였는데, 당시 집권당 대북의 실권자 이이첨이 이것을 꼬투리로 최명길을 잡아오게 했던 것이다. 이때의 부당한 파직에다가 부친상을 당하고 스승 이항복이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귀양가서 죽는 등 여러 불우한 일들이 겹치면서 최명길은 지금의 북한강가 대성리 부근으로 내려가 10년 가까이 야인으로 지낸다. 이때 「주역」(朱歷)을 천 번 이상 읽었다고 한다.
이후 반정을 꿈꾸는 서인 강경파인 이귀와 접촉하여 거사를 성공시키는데, 이것이 바로 '''인조반정'''이다. 참고로 이귀의 아들 이시백과는 같은 이항복 문하의 친구였다. 반정의 상당수 계획은 비상한 두뇌를 가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한다.[10] 광해군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정원군의 맏아들인 능양군(인조)를 옹립한 이후 최명길은 이귀, 김류, 김자점과 함께 반정 1등 공신 중 한 명으로써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지고 출세 가도를 달렸다. 이조 좌랑부터 시작해 1년 만에 이조 참판까지 올라갔으며, 반정공신 중 가장 똑똑하다는 평을 받는 인물이었기에 인조 치세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대신이 되었다.
2.2. 혼란에 빠진 조선을 지탱하다
인조반정 후 채 1년이 안 되어 핵심 공신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다. 최명길은 이괄이 인조반정의 대의에 공감해 참여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영달을 위해 참여한 것이라고 생각해 인조가 이괄을 군사적 요충지인 평안도에 보내는 것을 반대했다. 최명길은 이괄을 굉장히 위험한 인물로 판단하고 있었고 결국 그 예측이 맞아 떨어진다. 인조와 조정 중신들이 공주로 파천을 떠난 와중에 최명길은 총독부사(摠督副使)직을 맡아 관군에 합류하여 사기를 고무하고 도원수 장만과 계책을 논의하였다.[11] 관군이 안현 전투에서 대승하고 도망쳤던 이괄이 부하들의 손에 목이 잘리면서 이괄의 난은 마무리되었고, 최명길은 한양으로 들어가 유언비어 확산을 막고 민심 수습에 앞장섰다.
조정이 안정되자 최명길은 법제, 관제, 전제, 병제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안을 제출하는데, 내용을 보면 조선의 각종 병폐들을 상당히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개혁을 촉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국대전이 만들어진 지 오래되어 현실과 맞지 않은 부분이 많고 법이 수탈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으니 법을 정비해야 한다던지, 비변사가 정국의 중심이 되면서 행정의 전문성이 사라지고 책임 소지가 불명확해지니 이를 개선해야 한다든지. 뿐만 아니라 양전 실시, 면세지 철폐,[12] 군적 시스템 재정비 등을 주장하였다. 다만 대동법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이었고, 호패법을 주장하여 실시하였으나 큰 성과를 보지는 못하였다.[13]
또한 광해군의 중립 외교, 양면 화친을 비판하는 인조반정을 성공으로 이끈 핵심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정묘호란, 병자호란 당시에는 주화파의 선두주자였다. 인조 5년 정묘호란이 터지자 의주성, 안주성 등의 핵심 요충지가 맥없이 함락되고 국왕이 강화도로 몽진한 상황에서 후금과의 강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소장파들은 오랑캐와의 협상 자체를 반대하고 중신들은 협상에 나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는데[14] 최명길은 이귀, 강홍립[15] 과 함께 인조에게 강화가 불가피하다고 역설하여 결국 후금과의 강화를 성사시킨다. 이로 인해 조선은 후금의 동생이 되었지만, 그나마 피해를 줄이고 전쟁을 일단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강화를 주도하고 특히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칭신(稱臣)도 가능하다고 한 것 때문에 전후 척화파들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어 엄청난 비난을 받는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이 청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자처하면서 조선과의 외교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는데, 조선 내부에서도 국왕부터 관료,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오랑캐와 한번 붙어보자는 척화론이 지배하게 된다. 이때도 유일하게 "압록강이 얼면 큰 화가 닥칠 것이니 신은 매우 통탄스럽습니다"라고 현실을 직시하는 상소를 올렸다.[16] 이로 인해 윤집, 오달제 등의 척화파 신하들에게 오랑캐와 내통하는 간신이라고 갖은 욕을 먹었으나 그의 말대로 병자년(인조 14년) 겨울 청나라는 12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조선을 침입한다.[17]
빠른 기동 작전으로 청군이 불광동까지 몰려온 상황에서 최명길은 사신을 자청해 청군을 찾아가서 시간을 끌어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몽진할 시간을 벌었고, 그 후 남한산성이 청군에 포위된 상태에서 항복을 하느냐? 계속 전쟁을 하느냐? 를 놓고 척화파의 대표였던 김상헌으로 대표되는 척화파 대신들과 극렬히 대립했다.[18] 그러나 당시 조선이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남한산성에는 전략 물자가 터무니없이 부족했고, 각지에서 올라온 근왕군은 지리절멸하여 맥없이 무너졌으며, 그나마 정예군이었던 북방군은 군 통수권을 쥐고 있던 도원수 김자점이 눈치만 보고 전혀 움직이지 않아 유명무실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명길은 뭇 사대부의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굴욕적인 항복 문서를 직접 작성했고 죽음을 무릅쓰고 청군의 진영에 찾아가 협상을 주도했다. 급한 상황에서 대간들이 이게 다 최명길 때문이다! 를 외치면서 딴지를 계속 걸자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는지 "잘났으면 니들이 청군 물리쳐보든가"라면서 상당히 까칠하게 나오기 시작한다. 관료들이 항서 내용이 굴욕적이니 지금 보내지 말자고 주장하자 "야,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건 네놈들이 자그마한 곡절을 두고 맨날 지랄했기 때문이고 니들은 그냥 닥치고 신이란 글자의 가부만 논하면 돼! 글을 언제 보낼진 내 책임이지 니들 알 바가 아니란 말이야, 알겠어?" 라고 일갈하여 데꿀멍시키기도 했다. 척화파들이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인조의 국서에 스스로를 臣이라 일컫는 부분 등 항복 형식과 관련되어 열을 내는 사이, 그는 최악의 상황에서 모든 오명과 비방을 무릅쓰고 '''청나라와의 협상을 조금이라도 조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가기 위해서''' 동분서주하였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인조의 항복이 결정되자 김상헌은 자살을 시도하는데, 최명길은 나름 쌓인게 많았는지 "가족들이 다 보는 데서 하면 죽을 수나 있겠냐''면서 그 진실성을 의심하기도 했다.[19]
2.3. 혼란의 수습과 목숨을 바친 외교
병자호란의 치욕적 패배 이후, 최명길은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오른다. 이후 국정을 주도하며 전란 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대청 외교를 전담하여 사은사로 청나라로 가서 조선인 포로들을 데려오고 복잡한 외교적 문제를 처리하였으며, 특히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환향녀들에 대해 정조를 잃은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고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조정의 잘못이므로 이혼을 허락해서는 안된다고 반대하였다.[20] 그리고 역시나 입만 살아있는 사대부들한테 자결도 못하고 돌아온 더러워진 환향녀를 옹호한다고 대차게 까였다. [22] 여기에 대해 인조실록의 사관은 "삼한을 오랑캐로 만든 자는 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가 없도다"라고 극딜하는데, 덕분에 오늘날 이 구절은 사대부들의 무책임과 뻔뻔함, 그리고 그 와중에 빛나는 최명길의 실리주의와 인간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가 되어주고 있다.
또한 이 시기의 그는 자신이 '''친청파가 아니라 진정한 현실주의자'''임을 보여주는데, 우선 청나라가 명을 치기 위한 병력을 요구하자 최명길은 영의정으로서 극렬히 반대한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버릴 수 없고 나라가 피폐해졌다는 것이 명분. 중요한 건 이걸 청나라로 찾아가서 '''청 태종에게 직접 말했다'''는 것이다.[23] 청 태종은 처음에는 진노했으나 최명길이 의리가 있다면서 결국 풀어주었다.[24]
그리고 최명길은 한선(명나라 배)과 접촉해 외교 문서를 주고받고 청나라에 항복한 조선의 상황을 해명한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군신관계를 맺었지만, 아직도 중원에는 명나라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고 중원의 상황이 어찌될지는 당시만 하더라도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는 것은 의리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위험한 선택이 될 수 있었기에 비공식적으로나마 외교관계를 유지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홍승주가 청나라에 항복하면서 조선과 내통한 것을 실토하고, 이어 명나라 상선과 거래하다 청나라에 걸린 선천부사 이계가 자기 한 목숨 살기 위해 조선이 명나라와 비밀리에 연락한 것을 용골대(잉굴다이)에게 고자질해 버린다. 여담으로 이계는 청나라의 신하가 되겠다고 애걸했으나, 용골대는 이계를 국가와 왕을 배반하는 자로 판단하며 조선에서 알아서 처분하라며 이계를 돌려보내 버렸다. 이계는 국경을 넘자마자 '나라와 정승을 팔아넘긴 놈!'이라며 분노한 백성들에게 두들겨 맞았고,[25] 법을 집행하러 간 관료들이 백성들한테 사정하다시피 해서 죽기 직전의 이계를 간신히 인수받아 참수형에 처한다. 그리고 청나라는 여기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26]
이것을 이른바 '횡의' 사건이라 하는데, 이 때문에 최명길은 "나와 임경업이 벌인 일이다."라고 말하며 심양에 끌려가 고초를 겪게 된다. 이때 청나라 관리들이 누구 소행이냐고 심문하자 "'''간첩은 필요한 거 아니냐.[27] 근데 우리 임금은 그런 거 싫어해서 내가 혼자 한 거고 신하들도 모른다. 임경업도 내 말만 들은 거다. 모든 책임은 내게 있으니 벌을 줄거면 내게만 달라.'''" 라고 말해서 청나라 사람들도 모두 그 기개에 감탄했다고 한다.[28] 그리고 비록 야사이기는 하지만 이때 북경의 감옥에서 김상헌과 그동안 서로 간에 갖고 있던 불충이라는 오해를 풀고 서로를 이해했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청 태종이 "청나라에도 없는 저런 충신이 조선같이 작은 나라에 있다는 것이 부럽다."고 하며 그들을 풀어줬다는 일화는 유명하다.[29]
이후 1645년에 풀려나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후에는 국가의 원로로서 정사에 참여했으나, 이 시기는 인조가 급격히 막장화될 때라... 인조가 소현세자의 장례를 약식으로 치르려 하자 반대하였으나 왕이 듣지 아니하였고, 강빈이 사사될 때에도 목숨만은 살려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역시 인조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1647년 5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1세였으며 인조는 "최상(崔相)은 재주가 많고 진심으로 국사를 보필했는데 불행하게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애석하다."고 탄식하며 특히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3. 성품
\완성 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이 졸하였다.
명길은 사람됨이 기민하고 권모 술수가 많았는데, 자기의 재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일찍부터 세상일을 담당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광해 때에 배척을 받아 쓰이지 않다가 반정할 때에 대계(大計)를 협찬하였는데 명길의 공이 많아 드디어 정사 원훈(靖社元勳)에 녹훈되었고, 몇 년이 안 되어 차서를 뛰어 넘어 경상(卿相)의 지위에 이르렀다. 그러나 추숭(追崇)과 화의론을 힘써 주장함으로써 청의(淸議)에 버림을 받았다. 남한 산성의 변란 때에는 척화(斥和)를 주장한 대신을 협박하여 보냄으로써 사감(私感)을 풀었고 환도한 뒤에는 그른 사람들을 등용하여 사류와 알력이 생겼는데 모두들 소인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여 미칠 사람이 없었으니,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 하겠다. 졸하자 상이 조회에 나와 탄식하기를 "최상(崔相)은 재주가 많고 진심으로 국사를 보필했는데 불행하게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애석하다." 하였다.
키가 작고 인물이 볼품없었던 데다가 몸이 약했으나[30][31] 집안사람들도 그를 무서워해서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으며, 영민해서 자기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높았다고 한다. "이귀는 큰 의논 내기를 좋아하지만 작은 일에는 엉성하고, 김류는 신중하지만 큰 식견은 없다. 밖의 사람들의 말로는 ‘성덕은 지극한데 신하들이 제대로 받들어 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대체로 전하께서 보좌할 신하를 얻지 못한 까닭에 치도가 확립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고 한 기록이 실록에 나와 있다. 즉, 자신이야말로 큰 일과 작은 일 둘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말이다.
사관은 그의 졸기에서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여 미칠 사람이 없었으니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 하겠다"고 적고 있다.[32] 척화파가 칭송받으며 그가 까이는 면이 있지만 그래도 '''김상헌이 (굴복하지 않고) 남문으로 나왔지만 그것도 최명길이 열어준 문으로 나온 거다'''는 등 칭찬하는 부분도 많다.
4. 능력
실록에서는 상당히 똑똑한 모습을 보여주고, 생원시, 진사시, 문과를 단 한번에 모두 통과한 천재였지만, 정작 최명길의 문집인 지천유사를 보면 '''의외로 엉뚱하고 4차원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조카가 당나귀를 타고 온 것을 보고 '''"네 말의 귀는 왜 그리 기냐?"'''라고 물었는데 조카가 어이가 없었는지 웃으면서 "이거 말이 아니라 당나귀인데요."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고,[33] 호조 판서 시절에는 관청에서 기와 5백 장을 주문했는데, "5백 장은 너무 많으니까 '''한 우리'''를 줄 것"이라고 결재를 냈다. 헌데 문제는 여기서 '한 우리'는 '''기와 2천 장'''을 뜻하는 말이라는 것. 최명길은 한 우리를 기와 백 장으로 착각하고 결재를 잘못해서 망신을 당했다. 오늘날로 말하면 '''장관이 도량형도 제대로 알지 못해서''' 결재를 엉뚱하게 하고 개쪽을 당한 격이다.
명나라에서 송의 성리학을 비판하며 유행했던 왕양명의 양명학을 독학했던 인물이기도 하다.[34] 그래서인지 추상적인 명분에 사로잡힌 사대부들이 많았던 시대에 현실주의적인 행보를 보였는지도 모른다. 이후 그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양명학을 연구하는 학통이 있었다고는 하는데, 조선 중후기가 서인이든 남인이든 성리학을 더 강화하고[35] 양명학을 비판하는 기조였기에 표면화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의 후손들은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나뉠 때 온건파인 소론 계열의 입장을 취했다. 그의 손자가 숙종 때 영의정을 아홉 번 했던 최석정과 경종 때 좌의정을 지낸 최석항이다. 이들 역시 현실주의적 입장을 많이 취했던 인물이며, 특히 최석정은 마방진을 연구한 수학자로도 유명하다.
군사 쪽으로도 관심을 가졌는데, 이괄을 토벌한 무신 정충신과도 친분이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이항복의 제자였으며,[36] 정충신이 이괄을 토벌하고 관직 생활을 할 당시 한직에 붙잡혀서 서인들의 감시를 받는 그와 비슷한 입장에 섰다. 정충신은 대표적인 주화파 무신이었으며, 최명길과의 군사 대담을 싣은 '만운집'은 당시 주화파들의 입장에서 조선군의 정세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사료이다. 또한, 두 사람은 각각 '''문충공'''과 '''충무공'''으로서, 문신과 무신으로서 제각기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시호를 받았다.
최명길은 주역에 매우 능해서 인조반정의 거사일을 점을쳐서 정했다고 한다. 벼슬에서 물러났을 때와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도 주역을 공부하는데 힘썼다고 한다.[37]
5. 묘사
현대 창작물의 경우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그는 동시대의 인물들보다 시대의 병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이것을 치유하려 애썼다"고 표현하고 있다. 작가가 작 내에서 인조와 인조 정권 내 실세들, 그리고 사대부 전체 집단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한다. 박시백이 가장 싫어하는 왕들 중 하나가 인조라고 한다. 그래서 인조는 뭐 해보려고 했지만 제대로 못하고 하려고만 한 것뿐이고, 실세들은 대북과 그 밥에 그 나물에 제대로 대응도 못했다는 식으로, 사대부 집단도 김상헌을 통해 은근히 책임지지 못하는 절개나 지켰다고 비판했고, 환향녀 문제에서도 대차게 비판했다. 그런데 유일하게 비판을 안 하고 옹호한 인물이기도 하다.
고우영 일지매에선 후반부에 조연으로 등장한다. 청렴하고 유능한 인물로 나온다. 청의 침략에 대비해 화약 개발을 하라는 밀지를 받고, 마침 이를 읽은 일지매의 도움으로 비밀 화약 제조장을 만들 수 있게 된다.
'''많은 사안에 관해 딱딱하고 감성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김상헌이 자살 미수를 벌이는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생쑈'''라고 의심했다든지,[38] 인조의 추숭 행위를 두고 그깟 왕위 따위 아무나 받으면 된다고 선비들의 불만을 무시했다든지, 이괄이 역모에 연류되자 이귀만큼 추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여 바로 현실 대책부터 논의했던 점을 보면 최명길은 현실주의자 특유의 각박한 심리도 지니고 있었다. 물론, 환향녀 문제와[39] 기득권 철폐[40] 등에서 보여준 '''약자 보호'''의 마음까지 본다면, 최명길은 패도와 정의의 양립을 추구했던 인물[41] 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당대에 드물었던 진정한 의미의 현실주의자였던 셈.
6. 창작물
난세의 영웅이라 불릴 만한 엄청난 활약에 비해 대중매체에서 다뤄지는 비중은 '''상당히 안습하다.''' 아무래도 최명길의 활약상과 시대상을 영상화하기엔 전쟁씬에 들어가는 막대한 제작비와 스토리의 암울함이 발목을 잡는다.
- KBS 대하드라마 대명[42] - 김성원
- 조선왕조 오백년 남한산성 - 변희봉
- 서궁 - 선동혁
- 왕의 여자 - 김효원
- 돌아온 일지매 - 정동환
-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 - 김하균
- 삼총사 - 전노민
- 화정 - 임호
7. 영화
- 영화 남한산성에서는 이병헌이 최명길을 연기했다. 홀로 오명과 모함이라는 짐을 짊어지면서도 임금과 백성들과 나라의 구원과 생존과 미래를 위해, 전쟁보다는 타협을 중시하고 절체절명의 조선을 구하는 충신으로 나온다. 병자호란으로 온 나라 전체가 위기에 빠지고, 백성들의 시체와 피가 인산인해를 이루어도 관심조차 주지 않고 제 몸의 안위에만 혈안이 되어있던 사대부들은 형식적인 명예만 중히 여기며 오랑캐인 청나라에 무릎 꿇는 것을 반대했다. 그런 와중에 현실적으로 조선이 청나라와 전쟁을 해서 이길 힘이 없다는 현실을 인지하고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은 그들로부터 왕따와 집중포화를 받고 역적취급까지 당했지만 결론적으로 나라와 임금, 백성을 구한 진정한 충신이다. 여담으로 중간에 인조에게 자신의 목을 베어서 청나라에게 바치면 화친을 요구하면 성사된다고 상소문을 올리는데 김류는 마냥 좋다고 빨리 그렇게 하자고 주장한다. 그러자 인조가 하는 말이 가관인데 "상소문에 영상의 목도 베라는 문구도 있었다" 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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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가 황창배: (1947년生 - 1991년 卒)[2] 진짜는 아니고 후손들의 얼굴을 참고해서 그린 상상의 초상화이다.[3] 문열공계 경절공파[4] 이거 하나만으로 김상헌과 최명길의 차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둘 다 나라를 위했고 책임있는 원칙을 보여줬다는데서 어찌 보면 극과 극은 통한다의 긍정적인 사례라 할 수 있겠다.[5] 당시 무능한 조정으로 인해 죄없는 백성들이 죽거나 다치고 청에 인질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서는 청(후금)과 화친을 해야한다는 파벌. 이와 반대되는 건 나라가 망해도 결사 항전해야 한다는 척화파.[6] 류성룡도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받았다.[7]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인조 25년 5월 17일 완성부원군 최명길 졸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명길은 사람됨이 기민하고 권모술수가 많았는데 자기의 재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일찍부터 세상 일을 담당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광해군 때에 배척을 받아 쓰이지 않다가 반정할 때에 대계(大計)를 협찬하였는데 명길의 공이 많아 드디어 정사 원훈(靖社元勳)에 녹훈되었고 몇 년이 안 되어 차서를 뛰어 넘어 경상(卿相)의 지위에 이르렀다. 그러나 추숭(追崇)과 화의론을 힘써 주장함으로써 청의(淸議)에 버림을 받았다. 남한산성의 변란 때에는 척화(斥和)를 주장한 대신을 협박하여 보냄으로써 사감(私感)을 풀었고 환도한 뒤에는 그른 사람들을 등용하여 사류와 알력이 생겼는데 모두들 소인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여 미칠 사람이 없었으니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 하겠다. 졸하자 상이 조회에 나와 탄식하기를 "최상(崔相)은 재주가 많고 진심으로 국사를 보필했는데 불행하게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애석하다."하였다.[8] 선조 후반기와 광해군 초기 재상과 정승으로 활약했던 인물로 서인 계열의 인물. 이덕형과 함께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하다.[9] 1566~1628, 서인 계열의 인물, 선조 대인 1586년 별시문과에 급제했으나 1583년, 외숙부가 쓴 율곡 이이를 비판하는 글을 읽고 동인 계열의 이이를 옹호한 일이 알려져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으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그러나 청요직을 거치면서 선조에게 중용되어 선조의 유언을 받기도 했다. 광해군 때인 1613년 계축옥사(後. 폐모살제)로 파직되었다가 1616년부터 5년간 강원도 춘천으로 유배되었으며 인조반정 후 다시 중용되어 정승까지 지냈다.[10] 거사 날짜를 잡은 것도 최명길이었다. 기록에는 점을 쳐서 길일을 잡았다고 하는데, 이런 큰 일을 점을 쳐서 정했을리는 만무하고 아마 실제로는 궁궐 수비 상태나 자기 편 준비가상태 등 여러가지 사항들을 꼼꼼히 고려해서 거사를 성공시킬 수 있는 최적의 날짜를 골랐을 것이다.[11] 장만은 최명길의 장인이기도 하였다. 이괄의 난 진압 이후 공신에 봉해지고 옥성부원군이 되었다. 팔도도체찰사와 개성유수, 우찬성 등에 오르며 더욱 출세했으나 병조판서였던 1627년 정묘호란 직후 파직되고 부여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괄의 난을 진압한 공을 기억해야 한다는 청이 많아 곧 복직되었다.[12] 면세지의 상당수가 '''왕실''' 소유였다. 이 왕실 면세지 문제는 두고두고 조선 재정을 압박하는 병폐로 남는다.[13] 호패법은 제대로 시행만 되면 군역, 요역의 파악을 통하여 국가에서 필요한 노동력을 정확히 확보하고 관리들의 농간을 막는 등 국가 시스템 정비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으나, 당시 상황에서는 백성들의 불만과 행정 미비로 큰 성과를 보지는 못하였다.[14]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전쟁 중인 상황에서 상대방과의 외교 협상은 하다못해 시간 벌기 및 정보 입수를 위해서라도 필수 중의 필수이다. 그런데 협상 자체를 반대했다는 것은 당시 척화파라 불리던 신료들이 얼마나 현실 감각이 없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반면 최명길은 병자호란 때 청군이 오자 자신이 저들의 요구사항을 물어보겠다고 가서 시간을 끌었는데 그 덕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15] 사르후 전투의 패장으로 유명한 그분이다. 조명 연합군이 후금군에 괴멸당한 이후, 조선군 잔여 병력과 함께 항복하여 후금에 억류되었으며, 광해군이 쫓겨나기 전까지 그와 조정을 위해 꾸준히 서신 교환과 정보 전달의 역할을 했다.[16] 정묘호란 당시 함께 강화를 주도했던 이귀와 강홍립은 둘 다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그러나 이 상소를 받고 인조가 현실을 깨달았을 때 청나라 군대는 이미 군사를 출동할 채비를 다 마친 상태였다.[17]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싸! 청하고 붙어보자! 라고 전쟁 분위기를 조장하던 인조는 급 현실을 깨닫고는 "최명길은 자신의 명예를 생각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몸을 돌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젖비린내나는 자들이 그를 모욕하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라고 매우 강력히 최명길을 옹호한다.[18] 김상헌은 반정을 주도한 공서 세력이 지지 세력을 늘리기 위해 끌어들인 재야의 서인 '청서'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다. 현실주의적인 면이 강하던 공서와 달리 이들은 명분 중심적이었으며, 그랬기에 비현실적인 척화의 의견을 강하게 견지했다.[19] 다만 여기서는 최명길이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김상헌은 대들보에 목매면서 가족들에게 밖에서 기다리다 숨이 끊어지면 시신을 수습하라고 했다. 나만갑이라는 관리가 김상헌한테 오다가 방 안에서 김상헌이 목을 매달고 밖에서 가족들이 곡만 하고 있는 꼴을 보자 문을 박차고 들어가 살려냈다. 이를 볼 때 자살 시도는 진짜였던 것 같다.[20] 이 문제에 대해서는 최명길의 가장 친한 벗이자 동료였던 장유조차도 의견을 달리했다. 그의 아들 장선징의 처가 돌아오자 이혼을 허락해달라고 상소를 올렸기 때문. 비록 장유 생전에는 허락되지 않았지만 장유 사후 그의 아들은 전략을 달리하여 처가 시부모를 제대로 모시지 않는다는 둥의 핑계를 대었고 결국 이혼했다.[21] 이렇게 되면 자연히 포로의 속환 값이 오르게 되어 나머지 많은 포로들의 귀국길이 막히게 된다. 이 때문에 최명길은 속환가를 한도를 정해놓고 그 이상이면 데려오지 못하게 해 달라고 청한 바 있다.[22] 김상헌은 죽음 직전에 이를지언정 기개를 버리지 않았고, 몇몇 신하들은 적에게 목숨을 내버리면서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비록 현실과 맞지 않는 말을 했을지언정 삼학사들 역시 정말로 죽음이 눈앞에 닥친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환향녀를 비방한 대부분의 사대부들 중 몇이나 이들처럼 행동했을지는 의문이다. 병조판서를 지낸 이성구는 청나라에 1500금을 주어 포로로 잡혀 간 아들을 데려와 놓고[21] 정작 환향녀에 대한 최명길의 입장에는 몸을 더럽힌 것과 같다며 반대했다고 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여인들이 "오랑캐에게 무릎 꿇고도 살아남았으니 그게 수치가 아니냐? 응? 너희 남자 놈들아!" 라며 대차게 까는 장면 추가. 이는 생각해보면 간단한게 누군가가 강자에게 뺨맞으면 더 약한 약자에게 화풀이하는 속담인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와 유사하다. 청나라에게 얻어맞은 조정 사대부들이 괜한 여자들에게 화풀이한 것.[23] 이때 자신이 살아서 오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해 장례 물품을 챙겨갔다고 한다.[24] 이후 최명길이 관직에서 물러나자 그제야 원군을 파병했는데 그걸 듣고 한탄했다고 한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나라의 강요로 총 네 차례에 걸친 출병을 해야만 했으며 규모도 적지 않았고(최소가 3천. 많게는 6천, 7천씩 보내야 했던 적도 있다) 싸우다가 항복한 명나라 장수들 중에는 조선군에 의한 저격 피해가 컸다면서 이를 간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건 청나라에서 매우 강하게 요구했기 때문에 별 수가 없었다. 소현세자도 조선 측이 병력과 물자를 보내는 게 늦다며 화내는 청 태종으로 인해 상당한 고초를 치뤄야 했을 정도다.[25] 그도 그럴 게 병자호란 끝난지 얼마 안되었으니 청나라가 미울 백성들이지만, 청나라에 자기 나라와 재상을 팔아넘긴 이계는 그야말로 죽일 만큼 미웠을 것이다.[26] 이계는 남인이었는지라 남인 측에서는 이계가 억울하게 죽었다며 원통해 하였다. 이건창의 당의통략에서도 김상헌과 이계의 일을 언급하면서 "김상헌으로 말미암아 이계가 극형을 받았으나 이는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남인 측의 입장을 그대로 서술하였다. [27] 실제로 여말선초 시기의 태조도 명나라에 간첩을 보낸 바 있다. 단, 들켜서 곤욕을 치렀다는게 문제지만.[28] 하지만 인조를 위해서 이렇게 목숨을 아끼지 않고 뛰어다녔건만 인조는 최명길을 별로 믿지 않은 모양이다. 이 사건 당시 "최명길이 '난 죄 없어요'로 일관하면서 인조와 다른 신하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 한다"는 잘못된 정보가 올라왔는데, 인조는 병자호란, 정묘호란 때 자신을 위해 목숨 걸고 뛰어다닌 신하를 조금도 믿어주지 않고 삭탈관직해버렸다(...).[29] 필담은 위 개요 부분에 간략하게 나와있다.[30] 실록에 외모를 셀프디스하는 부분이 기록되어있으며, 40세 전후에 이미 치아가 10개 넘게 빠져서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스승인 신흠의 글을 보면 "내 사위를 삼고 싶으나 후사를 남길 수 있을지 걱정된다"라는 대목이 있다.[31] 심지어 장모인 임씨조차도 사위가 키가 작고 병약한 것을 문제 삼았고 이후에도 사위삼은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다만 장인인 장만은 "최서방의 겉모습은 비록 다른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자손들이 사위 덕을 보게 될 일이 많을 것"이라고 늘 두둔했다고.[32] 졸기에 비난도 많이 적긴 했지만 결론은 앞에 나온 저 말이다. [33] 참고로 조선시대에는 문신은 당나귀를 타고 무신은 말을 탔다.[34] 한국에서 양명학은 퇴계 이황 이래로 성리학이 주류를 잡은 조선에서 거의 이단 취급받았고, 양명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손에 꼽을만큼 적었다. "왕씨(왕양명)의 심즉리에도 논리가 있다"며 양명학을 집안의 가학(家學)으로 전수한 인물이 정제두이고, 이후 정제두가 거주했던 강화 지역을 중심으로 양명학을 연구하는 강화 학파가 생겨났지만 한국 사상사에서 비주류였다. 다만 비주류라고는 해도 한국사에 적지 않은 흐름을 남겼다. 강화 학파의 명맥을 이은 대표적인 인물이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이기도 했던 위당 정인보.[35] 되려 이황의 주리론이 더 적극적인 강경성을 보였다.[36] 정충신은 스승이었던 백사 이항복이 인모 대비 폐비에 반대하여 유배를 갔을 때, 함께 귀양살이를 하면서 스승이 사망할 때까지 기록을 남겼다. 흠좀무. 이때 정충신이 저술한 책이 백사북천일록이다.[37] 한명기, 최명길 평전, 도서출판 보리, 2019[38] 하지만 위의 야사에 등장하는 북경의 감옥에서 나눈 시의 일화 등이 만들어졌을 정도로 화해했다. 두 사람이 정반대의 신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점을 알 수 있는 감동적인 사건이다. 실제로 현대엔 김상헌이 척화파라 까이기도 하지만, 남한산성에서 출성 항복을 거부한 이유가 '''성을 나가면 북쪽으로 끌려가는 걸 면치 못할 것'''이었는데, 실제로 출성 항복을 한다는 건 '''내 나라의 모든 것을 당신에게 맡기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그런 일이 없던 것도 아니고 청나라는 수백 년 동안 대립해온 여진족인데다가 당초 정묘호란 때 '''명나라와 단교 안 하고 형제 관계 맺읍시다.'''라고 한 후금이 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너네 우리 신하 하라능''' 하니 김상헌의 눈으로는 '''"수백 년간 우리와 대립해오고 형제 하자더니, 이제는 신하 하라 하고 출성 항복으로 나라가 망하기도 했는데 어떻게 저들을 믿고 항복하는가?"''' 였을지도 모른다. 즉 단순히 답 없는 척화파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논거를 가지고 자신의 시각으로 나라에 충성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진짜 척화 정신이 강하기도 했지만.[39] 이건 대단한 건데 사대부들은 자기들 탓임에도 환향녀들이 정조를 잃었다면서 무시해, 심지어 1500금으로 아들을 속환시킨 이성구란 사람은 "옛날에도 역적의 딸과 이혼시킨 적이 있는데 이들은 몸을 더럽혔으니 이혼시켜 주소서."라고 했는데 사실 문제는 몸을 더럽혔다는 증거도 없이 막연하게 추측만으로 한 이야기인 데다가 사대부 전체가 무시를 한 집단이라 이들을 옹호하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아주 당연하게도(?) 사관들에게 삼한을 오랑캐로 만든 자라며 거하게 까였다(...). 사실 사대부들, 적어도 벼슬하는 사람들도 이 논리대로라면 신하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으니 죽어야 했다.[40] 물론 궁방전 문제는 다른 이들도 제기했고 그 이후로도 제기한 사람이 많았다.[41] 사실 현대 시각에서야 왕도와 패도의 양립을 추구하는 게 실용적으로 보여서 뭐가 나쁘냐고 할 수 있지만 조선의 국가이념이었던 유교의 시각에서 '패도'는 전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뒷날 윤증과 송시열의 회니시비 중 윤증이 송시열에게 보낸 서신에서 '왕도와 패도를 같이 행하니 경전의 가르침과 안 맞는다'고 송시열을 디스했을 정도. 그만큼 최명길이란 인물이 비록 본질은 유학자였어도, 전통적 유교 가치관에 과도하게 사로잡힌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42] 효종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로 KBS 대하드라마의 효시격인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