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은분리법

 

1. 개요
2. 역사
2.1. 조선에서의 역사
2.2. 조선에서 일본으로
2.3. 일본에서의 역사
3. 관련 문서


1. 개요


[image]
일본 이와미 은광에서 연은분리법을 이용하는 그림.
'''연은분리법'''()은 16세기 초, 조선 연산군 대에 고안되었다고 전해지는 고전적인 회취법(灰吹法, cupellation)의 일종이다. 단천에서 많이 나는, 은이 다량 함유된 광석을 이용한 방법이라고 하여 '''단천연은법'''(端川鍊銀法)이라고도 한다. 회취법은 이 포함된 은광석에서 녹는점의 차이를 이용해서 납만을 산화시키고 은을 골라내는 기술이다. 조선에서는 특수하게 제작된 도가니를 이용해 용로(鎔爐)에 납을 얹은 후 그 위에 은을 깔고 불을 지피면 납이 먼저 녹아 재 안으로 떨어지고, 그 후에 순수한 은만을 응고시켜 추출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당대에 개발된 은 제련법 가운데서는 가장 획기적인 기술 중 하나였으며, 이후 이 기술이 전래된 일본은본위제가 세계 은 거래량에 한 몫을 한 걸 보면 숨어있는 역사의 한 획이라고 볼 수 있다.
위키백과에서는 16세기 일본에 전달된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2. 역사



2.1. 조선에서의 역사


연은분리법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은 <연산군일기>에 수록되어 있다. 1503년 6월 13일(연산 9년 5월 18일) 조에 김감불(金甘佛)과 김검동(金儉同)이라는 사람이 개발해 시연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연철을 화로에 녹여 은을 골라내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백성이 임금 앞에서 기예를 시연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일생에 한 번 있기도 힘들었으나 정사인 실록에 기록된 것을 볼 때, 연은분리법이 조정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상당한 관심을 끌었던 기술이었음이 시사된다.

良人金甘佛、掌隷院奴金儉同以鉛鐵錬銀以進曰: "鉛一斤, 錬得銀二錢。 鉛是我國所産, 銀可足用。 其錬造之法, 於水鐵鑪鍋內, 用猛灰作圈, 片截鉛鐵塡其中, 因以破陶器, 四圍覆之, 熾炭上下以鑠之。" 傳曰: "其試之。"

'''양인(良人) 김감불(金甘佛)과 장례원(掌隷院) 종 김검동(金儉同)이, 납[鉛鐵]으로 은(銀)을 불리어 바치며 아뢰기를, "납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불릴 수 있는데, 납은 우리 나라에서 나는 것이니, 은을 넉넉히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리는 법은 무쇠 화로나 남비 안에 매운재를 둘러 놓고 납을 조각조각 끊어서 그 안에 채운 다음 깨어진 질그릇으로 사방을 덮고, 숯을 위아래로 피워 녹입니다." 하니, 전교[1]

하기를, "시험해 보라." 하였다.'''

연산군일기 49권, 연산 9년(1503년) 5월 18일 계미 3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이후 연산군을 알현한 사람은 무사히 잘 돌아간 것으로 사료된다(...)[2]. "이제 은을 넉넉히 쓸 수 있게 되었다(銀可足用)."고 하는 것은 세종 대에 명나라로 은이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은광 발굴을 억제한 탓에, 조선 국내에서 사용할 은까지 부족하게 된 상황에서 납광석에 함유된 은을 추출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은 산출을 비약적으로 늘일 수 있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연은분리법이 고안되기 이전의 동아시아에서 어떻게 은을 얻었는지 살펴보면, 중국에서 구리와 은을 분리하는 방법이 개발되기는 했지만 다른 대다수의 나라에서는 광석을 태운 다음 재에서 은을 걸러내는 원시적인 방법이 주를 이뤘고, 따라서 은의 생산량은 미진한 상태였다. 연은분리법은 이전에 중국에서 사용하던 회취법보다도 더 효율적이었으며, 더 많은 은을 산출할 수 있었고, 명나라의 실용서 <천공개물> 등에 소개되면서 널리 퍼졌다.

2.2. 조선에서 일본으로


하지만 정작 종주국인 조선에서는 연은분리법을 제대로 써먹지 않았다. 중종은 즉위하자마자 사치풍조 척결을 내세우며 상술한 대로 은광 개발을 억제한 뒤 은 산업이 위축되었고, 민간 경제에서도 동전보다 면포로 물물교환을 할 정도로 화폐경제 발전이 늦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세종조에 은광개발 막은 이유가 은이 많이 나는 게 알려지면 명에서 은 조공하라고 닦달할게 뻔하기 때문인데 조공무역체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으니 조선 조정에서 은 생산에 열을 올릴 이유가 딱히 없었다. 이 기술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게 된 것은 일본으로 건너간 뒤였다. 연은분리법이 일본으로 전래된 정확한 경로는 미상이나, 중종 대에 이와 관련한 한 사건이 등장한다. 주인공은 종4품 판관으로 있었던 유서종(柳緖宗)이라는 사람이다. 유서종이 실록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 사간원이 왕에게 이른 내용이다.

癸巳/諫院啓曰: "義州判官柳緖宗, 一家多有悖戾之事, 朝官不合, 請改差。" 傳曰: "依啓。"

'''간원이 아뢰기를, "의주 판관(義州判官) 유서종(柳緖宗)은 일가가 패란된 일이 많아 조관에 합당치 않으니 개차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중종실록 85권, 중종 32년(1537년) 7월 16일 계사 1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사간원이 왕에게 이른 내용은 유서종 일가가 모반에 관여된 일이 있으므로 조관(朝官, 조정의 관직)에 임명하기 합당하지 않다는 내용으로, 조정에서 이 유서종이라는 사람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이어 2년 뒤 유서종이 왜인과 접선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사헌부가 유서종의 죄에 관한 첩보를 입수하여 왕에게 고한 내용이다.

憲府啓曰: "全州判官柳緖宗, 居金海時, 率私人獵于海外加德島, 被捉於東萊縣令。 金浮又引京中富商, 接主其家, 誘引倭虜, 變着我國之服, 恣行買賣, 請於兵使 金舜皋曰: ‘若給我公文, 則當入加德島捕倭, 兵使不答而止之。 其意則殺其家往來商倭, 欲爲己功, 以生邊釁。 所關非輕, 請下詔獄推考。" 答曰: "如啓。"

'''헌부가 아뢰기를, "전주 판관(全州判官) 유서종(柳緖宗)은 김해(金海)에 있을 때 사인(私人)을 거느리고 바다 밖의 가덕도(加德島)에서 수렵하다가 동래 현령(東萊縣令) 김모(金某)에게 체포된 일이 있었고 또한 서울 부상(富商)을 자기 집에 불러다가 접주(接主)시키는 한편, 왜노(倭奴)를 끌어들여 우리 나라 복장으로 갈아 입히고 매매(買賣)를 하도록 한 후에 병사(兵使) 김순고(金舜皐) 에게 청하기를, 나에게 공문(公文)을 준다면 가덕도에 들어가서 왜병을 포착해 올 수 있다고 하였으나 병사가 들어주지 않고 이를 저지하였습니다. 유서종의 계획은 자기 집에 왕래하는 왜인을 죽여 자기의 공으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변방에 말썽을 일으켰으니 이는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습니다. 조옥에 내려 추고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중종실록 91권, 중종 34년(1539년) 윤7월 1일 병신 2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유서종이라는 관리는 가덕도에서 허가받지 않은 수렵으로 동래 현령에게 걸린 전과가 있으며, 서울에서 내려 온 큰손을 접대한 적도 있는 사람인데, 이번에는 일본 사람을 위장전입시켜 거짓된 공을 쌓고자 했으니 중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라고 보고한 것이다. 정확한 사건의 전말은 알 수 없지만 끝에 일본인을 죽이려다 어떻게 이야기가 샌 모양이다. 이 사건에서 연은분리법이 관여된 것은 다음 기록에 나온다.

柳緖宗多有所失, 故不計殞命, 期於得情刑訊可也。 但倭人交通, 多貿鉛鐵, 吹鍊作銀, 使倭人傳習其術事, 以臺諫所啓推鞫。 緖宗雖武班之人, 官至判官, 不爲無識, 且吹鍊作銀, 不可人人爲之, 必有匠人, 然後乃可爲也。 其家中有匠人與否, 未可知也, 但事證無據, 不可指的, 受刑一次得病, 又加再次, 殞命可慮, 以此罪照律, 則免死爲難。

'''유서종(柳緖宗)은 잘못이 많으니 죽는 것을 헤아리지 말고 실정을 얻을 때까지 형신(刑訊)하라. 다만 왜인과 서로 통하여 연철을 많이 사다가 불려서 은을 만들고 왜인에게 그 방법을 전습한 일은 대간이 아뢴 대로 국문하라. 서종은 비록 무반(武班)사람이라 해도 벼슬이 판관(判官)에 이르러 무식하지 않다. 또 불려서 은을 만드는 일은 사람마다 하는 일이 아니요, 반드시 장인(匠人)이 있은 후에라야 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집에 장인이 있고 없는 것을 알 수가 없다. 다만 일이 증거가 없으니 지적할 수는 없고 형벌을 한 번 받고 병이 났으니 또 재차 형벌을 가하면 죽을까 걱정이다.'''

중종실록 91권, 중종 34년(1539년) 8월 19일 계미 1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연은분리법은 당시로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숙련된 기술자가 필요한 고급 기술이었는데, 이를 일본에 유출한 것은 큰 문제가 됨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다만 일본의 기록(<긴잔큐키> 등)과 교차검증해 보면 이 사건이 일본으로 연은분리법이 전래된 '유일한 루트'인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는데, 일본에서 최초로 연은분리법을 시도했다는 '''이와미 은광(石見銀山)'''에 전해지는 역사를 보면 1526년 하카타 출신 상인인 '''가미야 주테이(神屋寿禎)'''가 은광을 발견했으며, 조선에서 '''경수(慶寿, 게이주)'''와 '''종단(宗丹, 소탄)'''이라는 두 기술자를 초청하여, 이들로부터 연은분리법에 관한 기술이 전래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와미 은광의 역사, 공식 홈페이지 / @아카이브) 상기 중종실록에 기록된 시기가 중종 34년(서기 1539년)인데 이와미 은광에서 회취법이 성공했다는 연도는 1533년이므로, 유서종 사건이 훨씬 이전부터 일어나고 있었거나 일본의 주장대로 연은분리법이 건너간 다른 여러가지 루트가 존재했을 확률도 있다.
'''다만 연은분리법이 있어도 정작 조선에는 써먹을 은광이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예컨데 단천은광은 조선 유일의 '채산성이 있을지도 모르는' 은광이긴 했지만, 유의미한 은광맥이 있던 건 아니었다. 단천은광은 매년 생산량이 간신히 은 천냥이 나올까 말까한 수준이었다. 이와미 은광의 산출량을 보면 그 500배 정도는 된다. 그러니까 애초에 조선에는 금광은 많아도 은광은 거의 없었고, 있다고 해도 산출량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조금의 은이라도 더 채굴하기 위해서 연은분리법이 개발된 것이다.

2.3. 일본에서의 역사


[image]
일본에서 연은분리법이 최초로 시도된 이와미 긴잔 유적의 입구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이와미 은광에서 시도된 연은분리법은 크게 성공하여, 1533년에 이미 인근의 다른 은광들에까지 기술이 전래되었다고 한다. 1562년에는 모리(毛利) 가에 의해 은광의 지배권이 확립되었다. 포르투갈 상인들을 통해 은광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갔고, 은광은 다이묘들의 전략적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암살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전국 시대를 통일하고, 일본의 관백(關白)이 되어 은광을 모리 가와 공동 관리하게 되었으며 도요토미 사후에는 자연스럽게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그 권리가 넘어갔다.
에도 시대17세기에 이르러 이와미 은광의 은 산출량은 연 수십 톤에 달했으며, 일본 내 본격적으로 은본위제도가 확립되었고 조선청나라와의 교역에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덕분에 일본은 16세기 당시 세계 3위의 은 생산국가로써 은 본위제 체제의 큰 손으로 떠올랐으며 유럽의 대항해 시대를 촉진시키는 커다란 계기를 제공하게 되었다. 연은분리법의 발달이 은본위제로 이어지고 화폐경제가 발전하여 일본이 서구열강에게 매력적인 나라로 비춰지게 되어 서구열강과 잦은 교류가 있게 되었다는 것은 꽤나 신빙성이 있는 추론이다.
'迪倫齋雜想 : 첫번째 글로벌 무역금융 네트워크 - 은(silver) 무역을 중심으로' 참고

3. 관련 문서



[1] 傳敎. 임금이 어명을 내림.[2] 연산군은 폭군으로 알려져 있지만 길게는 재위 10년까지는 그래도 멀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