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익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최규하 정부'''
'''전두환 정부'''
2대
이경식

''' 초대
김재익 '''

2대
사공일
<colcolor=#333> '''이름'''
<colcolor=#333>김재익 (金在益)
'''본관'''
구 안동 김씨[1]
'''출생'''
1938년 11월 26일
서울특별시[2]
'''사망'''
1983년 10월 9일 (향년 44세)
미얀마 양곤[3]
'''학력'''
고졸검정고시 (합격)
서울대학교 (외교학 / 학사·석사)
스탠퍼드 대학교 (경제학 / 석사·박사)
'''약력'''
한국은행 조사역[4]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강사
경제기획원장관 비서실장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관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장
경제기획원 경제협력차관보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1. 개요
2. 생애
3. 비판
4. 기타
5.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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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각하, 제가 제안하는 경제정책은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여러 말 할 거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전두환이 김재익을 경제수석으로 임명하면서 오간 대화

대한민국정치학경제학자이자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등을 역임했던 관료. 고시 출신은 아니지만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경제 관료로 평가된다. 당시 '경제 대통령'이라고 불릴 정도로 능력이 있었고, 80년대 한국 경제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금융실명제 추진에 대해서는 많은 정치인들의 반발에 떠밀려 뜻을 이루지 못했고, 점차 영향력이 줄어들다가 이후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으로 사망하고 만다.
박정희 정권에 대입해보면 당시 경제 참모였던 오원철, 김용환과 비서실장 김정렴과 비슷하다. 즉 전두환 시대 테크노크라트의 대표격 인물. 후술한 항목에도 있겠지만, 이 사람이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죽지 않았다면 IMF 외환위기가 일어나지 않았고 현재의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경제적 고질병 상당수가 없었을 것으로 보는 시각과, 일개 개인이 아무리 영향력이 있더라도 시대의 흐름을 너무 앞서나간 정책으로 인해 부작용을 양산했을 것이라는 시각으로 갈라진다.[5]
부인의 이름이 '''이순자'''[6] [7]이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이다.

2. 생애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아버지 김응묵과 어머니 강병주 슬하 6남 3녀[8]막내아들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안동 김씨이며, 본적은 선친의 고향인 충청남도 연기군이다.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고등학교(53회)에 입학했다가 검정고시로 대입자격을 취득한 뒤 195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외교학 전공으로 입학하여 1960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9]를 졸업했다. 1965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한국은행 입행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해 사회에 진출했고, 1968~1973년에 걸쳐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때 '한국의 천재'로 불리며 중동과 북유럽 국가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까지 했다고 한다.
학위취득 이후, 귀국한 김재익은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으로 일했지만, 그가 1970년대부터 주장한 안정노선은 정부로부터 환영받지 못했고, 그는 1979년에 경제기획원을 사직하고 한국개발연구원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전두환12.12 군사반란5.17 비상계엄를 거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경제과학분과 상임위원장, 국가보위입법회의 경제분과위원장이 되어 권력의 핵심에 선 뒤, 김재익은 전두환에게 발탁되어 그의 경제 과외 선생 역할을 했다. 경제학은 커녕 경제 자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설명하는 김재익의 능력에 감탄한 전두환이 집권 직전 김재익을 불러 청와대 경제수석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자신이 단지 얼굴 마담격으로만 이용될 것을 우려한 김재익은 조건을 달았다.

'''제가 원하는 대로 일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 일하겠습니다. 또한 저한테 정치자금에 대해서는 일절 얘기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러자 전두환은 '''"좋소! 이제 대한민국 경제에 대해서만큼은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며 흔쾌히 승낙. 실제로 전두환 정권 출범 후 경제에 대해서만큼은 모든 권한을 맡겨서 마음대로 일할 수 있게 해줬다고 하며, 이 시점에서 1980년대 경제개혁이 막을 올렸다.[10]
그에게서 시작한 시책들을 보면 물가안정화[11], 정보화, OECD가입, 수입자유화, 금융실명제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물가 안정화 분야가 매우 성공적이었는데, 1980년에 소비자 물가 상승율이 28%였던 것을 1982년에 '''7%'''로 줄여버리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1983년부터는 아예 3.5%를 넘기지 않을 정도로 성공적으로 이를 유지하게 된다. 이리하여 8.15 해방이래 40여년간 지속된 "高 인플레이션"을 마감한다. 경제 성장율 역시 80년에 -1.7% 였던 것을 1981년에 7.2%, 1983년에 12%대로 올린 것을 기점으로, 이후 평균 10%대의 성장율을 기록한다.[12]
2021년인 현재 기준으로 봤을 때 그가 미래를 위해서 추진했던 사업들 중에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은 바로 정보화산업에 대한 투자로,[13] 다른 것은 몰라도 금융실명제와 정보화라는 개념은 시대를 앞서나간 생각이었던 것은 분명하고, 이후 한국의 성장동력 중 하나에 시동을 걸었다는 점은 높게 평가할만 하다.
그러나 이 와중에 금융실명제처럼 금융계의 고질적인 부패를 척결하고 지하경제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정책을 시도하다가 전두환의 측근들한테 단단히 찍혔다.[14] 특히 금융실명제의 경우, 전두환이 최종적으로 승인을 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의 측근을 비롯한 여러 정치인들의 비자금 조성에 크게 방해가 되자 측근들이 난리를 쳤고, 결국 전두환이 생각을 바꾸면서 시행에는 실패했다.
정작 전두환은 금융실명제에 대하여 깊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이 발생하여 여론이 악화되고, 정권이 불안해지자 금융사기를 방지할 방법 중 하나로 금융실명제를 시행하려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측근들이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면 정치자금도 못 주고 받게 된다"는 식으로 설득하자 그제서야 전두환은 "아 그런가?" 정도의 반응을 보이며 결국 포기한 것. 그나마 시행 직전까지 간 것도 실은 전두환을 설득했던 측근들이 당시 전두환에게 밉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일부러 더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 면이 있었다. 만약 측근들이 밉보이지 않았더라면 바로 취소했을 것이다. 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실명제 시행 무기한 연기 이후 허화평, 허삼수 비서관들은 모두 자리에서 축출되어 모든 권력을 잃었음을 감안하면 사실상 김재익에 대한 전두환의 신뢰는 대단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금융실명제는 1990년대 문민정부 때 시행되었다.

3. 비판


사실 그도 인간인 이상 완벽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실수나 잘못 역시 존재한다. 그의 실수가 될 뻔한 정책을 몇 가지 들자면, '''중화학산업의 포기'''와 농업지원 정책 포기이다. 중화학산업 포기의 경우는 해당 물품들을 외국에서 싸게 수입하면 된다는 것이 논지였다. 그런데 이건 원유가 마구 나는 사우디아라비아나 소비 위주의 기축통화국 미국에서나 가능한 일로, 외국에서 수입하려면 우리도 다른 쪽에서 수입해야 하는데, 대안이 없으면 시행되기 힘든 정책이다.
이 때문에 현재 우리나라의 효자산업인 자동차 산업이 큰 타격을 받을 뻔 했고, 농업지원정책은 우리나라 농업은 시장성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지금은 타국과 FTA 맺을 때 조금이라도 식량 부문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지금 기준에선 실책처럼 보이지만, 김재익의 당시 주장에 대해 변호하는 의견도 있긴 있다. 일단 박정희 시절에 중화학 공업을 집중적으로 키워서 그 쪽 산업 의존도가 당시 기준에서는 쓸데없이 높아져 1차, 2차 오일쇼크 크리를 맞고 개발도상국 주제에 최초의 마이너스 성장으로 충격을 심하게 받았다. 그 당시에 중화학 공업은 적자덩어리였으며, 이때의 경제성장 악화로 인한 실업사태가 부마항쟁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출발점 중 하나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체제안정과 국민의 불만을 진정시키기 위한 경제정책 수정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70년대 경제발전은 중화학공업에 의한 밑바탕이 컸으며, 경공업 위주의 산업구조를 탈피했다는 점에서 과연 쓸데없는 것이며 오일쇼크라는 외부적인 요인이 절대적이며, 오늘날 한국경제의 중공업에 대한 비중, 그리고 70년대 이후에 추진했다면 원자재 등 가격이 더욱 비싸져 투자비용이 더욱 급등했을 것이라는 점을 들어 중공업에 대한 견해는 잘못된 것이라는 재반론도 있다.
경제불안으로 인한 체제불안정을 유신과 12.12라는 강압적 방식으로 찍어누르면서 경제불안의 실체가 감춰지고 80년대 중후반부터 중화학공업 투자의 성과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덮을 수 있었고, 어차피 자원대국이 아닌 대한민국의 중화학공업 자립도가 높을 수는 없고, 정보산업이나 첨단가공등 다른 쪽에 집중투자하여 그 의존도를 상쇄하면 그만이기는 하다. 다만 이 경우는 실업률 증가는 각오해야 한다.
농업지원정책 포기에 대해서도 수매제도 등의 지원정책이 이농현상 등의 농촌 붕괴를 상당히 막은 것은 사실이지만, 덕분에 생산물의 다양화와 시장성 개척에 실패한 것 아니냐며 농업 지원정책의 효과가 별로 훌륭치 않다는 의견이 있다. 만 미친 듯이 생산하는 탓에 다른 농산물의 수입의존도가 높아졌으며, 새삼 명품 농산물을 만들어 차별화를 하려 해도 이게 하루이틀에 되는 것도 아니다.
한편 2010년대 들어서서 두드러지는 조선업계의 불황,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중공업 분야 대기업들의 노동자 비 유연성, 그리고 중국의 업종 내 성장 등을 근거로 김재익의 중화학공업 포기 주장이 옳았다는 평가도 제기된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조선업계 등의 중화학 공업이 김재익의 주장이 나왔던 때 이후에도 약 30년 가까이 한국의 주력 산업 역할을 해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중화학 공업을 넘어서는 신종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전환, 육성이 중장기적으로 한국/경제가 선택해야 할 길임은 분명했지만, 김재익이 활동했던 1980년대에 당장 할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한국이 자동차, 조선, 석유 등의 중화학 공업에만 매달렸던 것도 아니다. 반도체, IT 기기 부문에서 한국이 투자 및 달성한 것을 생각해 봐도, 이 점은 충분히 설명이 된다.
어쨌든 김재익이 5공 인물들 중 유달리 유명해진 이유를 크게 2가지 들자면, 경제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전두환을 보필해 그나마 80년대에 경제성장과 물가안정을 이룩했다는 것이 첫째이고, 둘째는 그 뜻을 다 펴기 전에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2번째 이유 때문에 실제로는 전두환이 급브레이크를 걸어서 실수가 될 뻔한 정책 몇 가지가 멈춘 것도 있으나 실책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편. 물론 금융실명제를 실천하지 못한 건 그의 실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전두환이 방해한 것도 있지만서도, 동시에 김재익이 저렇게 정책을 펼 수 있었던 이유는 전두환이 그를 지지해 주었기 때문인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순수한 경제학자가 당시 무소불위의 독재자를 '''조종'''해서 자신의 경제적 이상을 관철시켰다는 것 때문에 경제학자나 경제학의 방법을 받아들인 학파들에서는 대단히 인기가 좋다는 것도 그가 유명한 한 가지 이유이다. 경제학에서는 정책결정과정(한마디로 정치)이나 정책결정기구는 불확실하고 변수가 많으며 정쟁때문에 시장보다 반응이 느리다며 까댈 뿐 믿지 않는다. 때문에 경제학자들 사이에선 김재익 같은 관료가 어느 정도 로망이기도 하다. 물론 경제학이 독재를 좋아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삼국지로 치면 곽가 포지션.

4. 기타


김재익의 아들 김한회는 독재정권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탐탁치않게 여겼기 때문에 '''"아버지는 독재자를 돕고 있어요!"'''라며 항의하자 거기에 '''"경제의 국제화는 독재정치를 어렵게 하고, 내가 시장경제를 도입하면 정치의 민주화는 당연히 따라온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15] 또 친구들이 그를 "김일성 밑에서도 일할 친구"라고 비유하며 전두환의 하수인으로 일하는 것을 비판하자 '''"만약 내가 김일성의 밑에서 일해서 그 사람의 생각을 바꿀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16] 결국,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맞는 말이 되었다.[17]
당장에 남한은 제한적이지만 꾸준히 국제화의 길을 걸으면서 지구촌의 일부가 되었으며, 경제발전으로 형성된 중산층의 의식성장으로 민주화 열망이 높아졌는데[18], 북한은 극단적인 폐쇄정책으로 점점 나락에 빠져들었다. 김재익의 주장대로 경제의 국제화는 시장 경제의 확대를 일으켰고, 이것은 전두환 정부를 무너뜨리는 간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인사청탁이 들어와도 절대 받아들이지를 않았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인사청탁을 부탁하는 편지가 들어오면 그냥 알아서 장롱 속에 넣어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람이 수석비서관일 때 그의 밑에서 과장급으로 실무를 하며 나름 유능하다는 소리를 듣던 사람이 '''강만수'''였다. 이 시기의 성과를 인정받아, 미국이 달러화를 조정해 일본에 진 빚을 절반으로 줄여버린 플라자 합의(85년) 즈음에는 정부 지원으로 미국 유학을 갔을 정도다.[19]
그리고 넥슨 창업주로 유명한 김정주는 그의 처조카이다. 김정주의 아버지 변호사인 김교창과는 손윗동서이다. 그리고, 학과 후배이자 손아랫동서 한승주는 유명한 정치학자로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절에는 외무부장관을 역임했으며,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시절에는 주미 대사를 역임하였다.
누나 김재순과 김재숙은 가톨릭 성심수녀회 수녀이다. 김재순 수녀는 성심여자중학교성심여자고등학교 교사 및 교장에 이어, 성심여자대학교 화학과 교수 및 총장을 지냈다.[20] 김재숙 수녀는 박근혜의 성심여중고 시절 은사이다.
경제학자지만 본전공이 정치외교학 아니랄까봐, 권력 게임에도 능했다고 한다. 신군부의 주역인 허화평허삼수를 청와대에서 축출한 것도 '전두환의 신임을 제대로 갖고 온 그의 작품'이라고도 한다.[21] 본래 한국은행 출신으로 재무부 관료가 아님에도 경제정책의 핵심에서 기회를 잡은 것은, 남덕우국무총리와의 인연 덕분이다.
둘은 이전에도 학술적인 교류가 있었지만 스탠포드 대학 유학 중에 남덕우 전 총리와의 만남[22]에서 남 전 총리가 김재익에게서 수학적 도움을 많이 받았고, 그의 스마트함을 눈여겨 봤다가 귀국 후 박정희 정부 경제부총리에 자리에 있을 때 그를 고시 출신이 아닌데도 경제기획국장이라는 요직에 특별히 발탁하였다. 당시에 경제기획원에서 강경식 등과 함께 경제 자율화론자로서 고군분투했다고 한다. 이후에 이 둘은 전두환 정부 초기에 각각 경제 수석과 재무부 장관으로 5공 경제의 밑그림을 그렸다.[23] 또한 재미있는 것은 남덕우는 대표적인 성장론자였다는 점이다. 박정희는 1975년 신현확을 경제기획원 장관에 임명하면서 성장과 경제안정화를 동시에 추구하려고 한다. 이때 경제안정화론과 가장 심하게 대립한 사람이 대통령 경제특보로 있던 남덕우였다. 김재익은 자신을 알아보고 발탁한 남덕우와 반대로 경제안정화시책을 강력히 추진한 인물이 되었다.
이 시기 그가 한 특별한 일 중에 하나가 부가가치세 도입이다. 이 도입과 관련하여 김종인 당시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와 함께 직접 서독을 답사하고 연구보고서를 작성하였다.[24]
여담으로, 가족사가 험난하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근현대사 이념 갈등 속에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 상당수가 해를 입었다. 그는 9남매 중 막내아들로, 맏형 김재룡은 1947년 서울대 문리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유급조교로 있다가 1949년 전임강사로 승진하면서 서울대 유일의 서양사 전임교원으로 재직했는데, 좌익 활동 혐의로 6.25 전쟁 직전 체포되었다가 전쟁 발발 직후 불법적으로 한강변에서 처형됐다. 아버지는 대전시에 있다가 북한군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도주할 때 반동이라면서 살해당했고, 위의 두 형은 인민군으로 끌려갔다가 그대로 행방불명되었다. 그리고 그 자신 역시 이념 갈등이라 할 수 있는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죽었으니...

5. 가족




[1] 24세손 '''在O''' 항렬.[2] 본적지는 충남 연기군(現 세종특별자치시)이다.[3]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으로 순직[4] 한국은행 입사시험에서 수석으로 합격하였다.[5] 사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시행되지 않아서 다행인 잘못된 정책도 몇 개 있긴 하다.[6] 전두환의 처 이순자와 동명이인이다.[7] 서울대에 전 재산인 20억원을 기증했다고도 알려져있다.[8] 9남매 중 무려 6명이 서울대에 진학했다.[9] 1955년 정치학과 내에 외교학 전공이 신설되어 1959년 외교학과로 분리되었다. 55학번은 분과 전에 졸업했기 때문에 외교학과로 졸업한 것은 56학번이 최초이다.[10] 물론 김재익이 혼자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건 아니고, 항상 전두환에게 "이러이러한 정책이 어떻겠냐"고 물어서 승인을 얻는 식으로 절차를 반드시 갖췄다.[11] 3저호황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평이 있지만, 김재익이 물가를 안정시킨 시기는 3저호황이 오기 전이다.[12] 세계 경제에 상당히 민감한 한국/경제 특성상 김재익 개인의 성과라고만 보기는 힘들지만, 어느정도 영향을 준 것은 맞다. 게다가 초창기에는 세계 경제가 오히려 한국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13] 주요 투자로는 국내 전화 교환기 형식을 기존의 기계식에서 전자식으로 전면 교체하였다. 덕분에 전화망을 이용한 인터넷 회선 구축이 상당히 손쉽게 가능했고, 이를 토대로 한국의 인터넷 회선망은 세계 최고의 수준에 오르게 된다. 다만 전자식 교환기 도입은 당시 오명 체신부 장관의 강력한 의지로 시작된 사업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14] 특히 5공의 핵심 인사인 허화평, 허삼수에게 단단히 찍혔다.[15] S.M.립셋, 새뮤얼 헌팅턴 등 근대화론자들의 입장이다.[16] 생각해보면 김재익이 얼마나 대범한 성품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래에 나오는 것처럼 김재익의 아버지는 북한군에게 처형당했고 형 둘이 인민군에 끌려가 사망했으니, 저 말은 '아버지와 형들의 원수 밑에서도 일할 사람'이라는 엄청난 폭언이었다. 사실 마음만 먹었다면 전두환의 하수인으로 비유한 친구를 빨갱이로 몰아서 잡아넣을 수도 있었는데, 오히려 저런 대답을 했다.[17] 실제로 "경제가 발전하면서 민주화 세력들이 오히려 세력을 키워서 민주화를 이루어냈다"고 역사학자들도 평가했었다. 결국에는 김재익의 말대로 중산층들이 많아지면서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고 전두환 정권을 몰아냈던 것이다.[18] 1987년 6월 항쟁을 결정지은 것은 바로 넥타이부대였다.[19] 뉴욕에서 환율을 통해 자국 경제를 보호하려 하는 강대국들의 모습을 실감한 강만수는 "이때 환율의 중요성을 절감했다"는 소감을 밝혔으며, 훗날 경제부총리로 전권을 행사할 때, "나는 환율 주권론자"라 말하며 외환시장에 적극 개입한다. 하지만, 시장 이면에서 끊임없이 이뤄지는 환율 조율 방법론 측면에서 조급한 언행으로 곧잘 구설수에 올라, 좋은 정책 취지에도 불구하고, 의도했던 성과를 제대로 거두지 못하고 후유증은 예상보다 커지는 한계가 있었다.[20] 피천득의 대표적 수필 인연에 등장하는 '김 수녀님'이 바로 김재순 수녀다. 함께 언급되는 '주 수녀님'은 중국인 주매분 수녀다.[21]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당시 두 허씨가 전두환 몰래 하나회 모임을 소집하고 '대통령 친인척의 공직 사퇴' 등을 결의했기에, 이들은 이미 일종의 '반역자'로 전두환에게 찍힌 상태였다. 여기에 김재익의 건의로 도입하려던 금융실명제도 이들이 발목을 잡는 바람에 전두환이 '니들이 뭔데 나서냐'며 역정을 냈고, 직접적으로는 이들에게 물을 먹은 이원조가 전두환에게 이들의 사퇴를 건의하면서 결국 청와대에서 완전히 쫓겨나게 된다.[22] 남덕우는 당시 서강대 교수로, 스탠포드대학에는 초청교수로 와 있던 참이었다.[23] 그리고 강경식은 1997년 재경경제원 장관이 되어 IMF 외환 위기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24] 그리고 여기서 연이 되어, 당시 노총각이던 김종인 교수에게 중매를 서 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