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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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시호'''
'''문충(文忠)'''
'''군호'''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1]
'''본관'''
한산 이씨
'''성명'''
이산해(李山海)
'''자'''
여수(汝受)
'''호'''
아계(鵝溪), 종남수옹(終南睡翁),
죽피옹(竹皮翁)·시촌거사(枾村居士)
'''출생'''
1539년 7월 20일 조선 한성부
'''사망'''
1609년 8월 2일 조선 한성부
1. 소개
2. 집안 내력
3. 일생
4. 평가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1. 소개


조선 중기의 문신, 정치인, 시인, 서예가.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종남수옹(綜南睡翁), 시호는 문충(文忠).
동인이었다가 북인의 당수가 되고 세 번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2. 집안 내력


고려 말 유학자인 목은 이색의 7대손이다. 이산해의 고조부이자 이색의 증손자인 이우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와 사촌 관계이다.
아버지 이지번은 청풍현감을 지냈고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이지함이 숙부이다.[2]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의 장인이다. 이산해의 둘째 딸이 이덕형의 부인이었고 임진왜란 중에 절개를 지키기 위해 죽었다.
동갑의 사촌 형제인 이산보는 이산해와 달리 서인이었는데 이이와 친구였기 때문.

3. 일생


전설에 의하면 명나라외교관으로 파견된 그의 부친이 산해관에서 그를 잉태하는 태몽을 꾸어 이름을 산해라 지었다고 한다. 이산해의 모친이 남편이 사신으로 파견된 동안 임신을 해버려서 집안에서는 불륜을 했다고 난리가 났는데 그녀는 계속해서 어느날 남편과 동침하는 꿈을 꾼 뒤 태기가 생겼다며 거듭 부인했다. 명나라에서 돌아온 이산해의 부친은 아내가 꿈에서 자신과 동침한 이야기를 듣자 자신도 그 날 산해관에서 아내와 동침하는 꿈을 꾸었다며 놀랐고 부인은 누명을 벗었다. 이산해의 부친이 귀국하기 전까지 집안에서 유일하게 이산해의 모친을 옹호해준 것이 숙부 이지함이었다.[3]
어려서 글씨에 능했으며 이산해의 총명함이 궁궐에 전해져 명종의 귀에까지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5살 때에 시를 지었고 6살 때에는 장문의 글을 지어 신동으로 알려졌다.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그의 집안이 화를 입게 되자 고향인 충청도 보령으로 이주하였다.[4] 숙부 이지함이 직접 글을 가르치다가 남명 조식에게 보내고 이어 이황의 서원에도 출입하여 제자가 되었다.
그 뒤 초시를 거쳐 성균관에 입학해 학문을 배우고 1561년(명종 16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이량이감의 탄핵을 받았으나 극적으로 기사회생하여 여러 관직을 지냈다.
동서 분당 때 동인에 가담하고 대사간과 이조참의를 반복해서 역임하다가 1578년 서인인 윤두수, 윤근수와 그의 조카 등 등의 죄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이후 병조참판, 이조참판, 이조판서를 지내고 형조판서가 되었다. 그 뒤 다시 이조판서가 됐으나 서인들의 반발로 순탄치 않은 관직 생활을 하면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대제학, 판의금부사 등을 겸직하였다. 우찬성, 좌찬성, 대제학을 거쳐 1588년 우의정에 올랐고 1590년 영의정에 올라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 공신에 책록되었다.
1591년 1월에 정철류성룡과 더불어 세자 책봉을 건의하려 했으나, 이때 이산해는 병을 핑계로 회의에 나오지 않았다. 때문에 세자 책봉 건의안을 올리는게 자꾸 늦어졌는데, 갑자기 1월 29일에 건의안을 올리기로 했던 부제학 이성중이 충청 감사로 전임되었고 이 바람에 세자 책봉 건의안은 공중 분해가 되어버린다[5]. 더불어 정철 또한 좌의정 지위에서 물러나고 영돈녕부사로 체직되었다가 파당을 만들어 명경, 사대부들을 모함한 죄로 유배당한다. 급작스럽게 전개된 이 사건을 보면 정철이 자행한 기축 옥사로 피해를 입은 동인들이 이산해를 중심으로 치밀한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서인 세력이 몰락하고 동인이 집권했는데 서인 세력 처리 과정에서 온건파였던 류성룡 등과는 달리 이산해는 강경한 태도를 보여 이로 인해 결국 동인은 온건파인 남인과 강경파인 북인으로 분당된다.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낸 뒤 영돈녕부사, 영중추부사, 대제학을 지냈다. 조선 시대 서예의 8대가의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오성과 한음 중 한 명인 이덕형을 사위로 두었다.[6]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한양이 함락되자 좌의정 류성룡, 우의정 이양원과 함께 파직되었으며 본인은 평해로 유배보내졌다. 영의정은 최흥원, 좌의정은 윤두수, 우의정은 유홍이 임명되었다. 이후 다시 복귀한다.
1609년 (광해군 1년) 병이 들어 광해군이 이이첨을 문병보내기도 하고 어의까지 내려줬으나 그해 8월에 사망했다.
하루는 조정에서 큰 연회가 있어서 모든 대신들이 다 간 일이 있었는데, 이산해는 다른 일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하고 시를 지어 보냈다. 그리고 끝에 자기 호인 '아계'를 변형해서 '아옹(鵝翁)'이라고 호를 적었는데, 이를 본 정철이 "이산해가 오늘은 제대로 자기 소리를 냈군!"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옹'의 읽는 음이 고양이 우는 소리와 비슷한 것에서 이산해를 고양이 같은 사람이라고 디스한 것이다. 이를 들은 이산해도 정철에게 크게 유감을 품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4. 평가


건저 문제 유발 등 선조 대의 당쟁이라는 불에 기름을 부은 간신이라는 평가가 있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1] '아성'과 호인 '아계' 모두 본관인 충청도 한산(현 충남 서천군 한산면)의 별칭이다.[2] 토정비결은 이지함의 이름을 빌어 다른 누군가가 지은 것으로 본다. 야담에는 이지번과 이지함의 부친이 죽고 묏자리를 알아보던 중 지관이 말하기를 '이 자리는 장남 이지번의 후손은 부귀영화를 누리나 이지함의 후손은 단명하고 끊긴다'는 얘기를 했다. 이때 이지함이 나서서 자기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으니 그대로 강행했다. 훗날 이지번의 아들 이산해는 정승까지 올라 영달했으나 이지함의 아들들은 요절하거나 호환으로 죽고 유일하게 오래 산 아들 이산겸도 왜란 중 모함을 받아 죽었다. 토정비결의 저자라면 어떻게든 위험을 피하려 했을 것이지만 묏자리 잘못 써서 그렇단 것은 투탕카멘의 저주 같이 과장된 것이다.[3] 해동총화에서는 이지함이 형수와 불륜을 해서 이산해를 낳았다는 암시를 남긴다.[4] 윤원형이 그의 재주를 알아보고 사위삼으려 했으나 정난정의 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아버지 이지번이 거절했다.[5] 송강연보 등의 문집에는 정철선조 앞에서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노여움을 샀다고 나오는데, 정작 실록에는 이런 말이 없다. 더구나 정철이 탄핵당한 죄목 중에도 세자 책봉과 관련된 말은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6] 일화에 따르면 숙부 이지함이 한양에 온 이덕형을 보고 판서이던 조카를 찾아가 불문곡직 사위로 맞아들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숙부가 지인지감이 있는 것을 아는 이산해로서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물론 실제로도 인재라 장인인 이산해도 만족했겠지만, 이덕형은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분당할 때 북인의 영수인 장인과는 달리 남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