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도
金良圖
? ~ 670
1. 개요
태종 무열왕~문무왕 시대 신라의 귀족, 군인, 외교관, 문장가.
2. 생애
관등은 해찬(파진찬). 삼국유사에서는 승상, 재상이라는 표현도 있다.
어린 아이일 때 큰 병에 걸렸다가 밀본이 병을 고쳐주었고, 이후 불교에 심취했다고 한다.
660년 백제 공격의 지휘관으로 편성돼 황산벌 전투, 사비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다.
이후 백제부흥운동 전선에 투입되었는데, 661년 2월 백제부흥군이 사비성을 공격했을 때 김문왕, 충상과 함께 반격에 나섰으나 패배했으며,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그러나 이후 복직해 김유신과 함께 661년 제2차 고구려-당 전쟁에서 평양성 전투에 참여했다.
668년 고구려멸망전에서 경기도, 황해도의 병마를 이끌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함락했다.
그는 중국어에 능통해 당나라에 6번이나 사신으로 파견된 베테랑 외교관이기도 했으며, 이후 나당전쟁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김흠순과 함께 당나라에 다시 한 번 파견되었다. 여기서 당나라는 신라에 책임을 물어 둘을 감금했으며, 흠순은 풀려났으나 양도는 결국 당나라 장안에서 옥사했다.
강수 열전에 의하면 당시 신라의 대표적 문장가 6명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복잡한 외교적 수사를 우리말도 아닌 한문으로 화려하게 구사해야 하는 당시 외교관으로 활동한 만큼 문장 실력이 뛰어났던 모양이나 그의 시문이나 문장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가족으로 화보(花寶)와 연보(蓮寶)라는 두 딸이 있었는데 흥륜사의 종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말 그대로의 노비가 아니라 불문(佛門)에 들어가 봉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로부터 600년 이상이 지난,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이 살고 있던 고려 후기 당시까지 이들의 후손들이 이어지고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