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중(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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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인물이 김양중. 오른쪽 인물은 당시 국가대표 포수였던 김영조.
1940~50년대 한국 야구를 풍미했던 야구 원로다. 해방 이후 경남중학교 출신의 장태영과 함께 한국 최고의 투수로 명성을 날렸으며, 둘의 라이벌 구도는 최동원과 선동열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
1949년 제4회 청룡기 결승전에서 장태영이 이끄는 당대의 강팀 경남중을 상대로 마운드에서는 11이닝 1실점으로 역투했으며, 9회말 2사 2루에서 장태영의 공을 받아쳐 동점을 만드는 중전 적시타를 치면서 광주서중의 11회 연장 역전승을 이끌어 일약 스타가 되었다. 청룡기 우수투수상을 수상했다. 서울대 상대 등 여러 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지만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졸업 후 바로 금융조합 야구부에 입단한다.
각종 실업야구대회에서 우수투수상을 수상했다. 그의 주무기는 직구였는데, 빠르고 묵직한데다 직구가 슈트처럼 꺾여 들어와서 상대 타자들로서는 무척 치기 힘들었다고 한다. 1954년 필리핀 마닐라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도 국가대표로 활약했으며, 1955년에는 육군 야구단에 입단하여[1] 중견수 장태영, 좌익수 박현식 등과 함께 활약했다.
1958년에는 내한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한국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벌인 경기에서 0-1로 뒤진 1회 무사 2, 3루에서 선발 배용섭을 구원해서 9이닝 7안타 2실점 4탈삼진으로 호투했다.[2] 특히 6회에는 당대의 강타자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스탠 뮤지얼을 삼진으로 잡아내기도 했다.[3][4] 거의 40년만인 1997년에 스탠 뮤지얼이 내한했을 때 김양중과 당시를 회고했다고 한다.
그 이후 1961년 현역에서 은퇴하고 1962년 기업은행 감독으로 선임되어 당시 상업은행 감독이던 장태영과 고교 졸업 이후 다시 한번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당시 기업은행의 투수로는 우리가 다들 아는 김성근 감독, 그리고 70년대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의 전국대회 6차례 석권을 이끌었던 최관수 감독 등이 있었다.
1967년에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기업은행에서 1986년까지 은행원 생활을 했으며 지점장까지 지냈다. 1982년에는 고향팀인 해태 타이거즈 감독 물망에 올랐으나 현장을 떠난지 오래였던 터라 불발되었다. 2008년에는 SK 와이번스와 두산 베어스의 한국시리즈 1차전의 시구를 맡아 올드 팬들의 향수를 자아내기도 했다.
2013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왼쪽 인물이 김양중. 오른쪽 인물은 당시 국가대표 포수였던 김영조.
1. 소개
1940~50년대 한국 야구를 풍미했던 야구 원로다. 해방 이후 경남중학교 출신의 장태영과 함께 한국 최고의 투수로 명성을 날렸으며, 둘의 라이벌 구도는 최동원과 선동열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
2. 고교야구 시절
1949년 제4회 청룡기 결승전에서 장태영이 이끄는 당대의 강팀 경남중을 상대로 마운드에서는 11이닝 1실점으로 역투했으며, 9회말 2사 2루에서 장태영의 공을 받아쳐 동점을 만드는 중전 적시타를 치면서 광주서중의 11회 연장 역전승을 이끌어 일약 스타가 되었다. 청룡기 우수투수상을 수상했다. 서울대 상대 등 여러 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지만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졸업 후 바로 금융조합 야구부에 입단한다.
3. 실업야구 시절
각종 실업야구대회에서 우수투수상을 수상했다. 그의 주무기는 직구였는데, 빠르고 묵직한데다 직구가 슈트처럼 꺾여 들어와서 상대 타자들로서는 무척 치기 힘들었다고 한다. 1954년 필리핀 마닐라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도 국가대표로 활약했으며, 1955년에는 육군 야구단에 입단하여[1] 중견수 장태영, 좌익수 박현식 등과 함께 활약했다.
1958년에는 내한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한국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벌인 경기에서 0-1로 뒤진 1회 무사 2, 3루에서 선발 배용섭을 구원해서 9이닝 7안타 2실점 4탈삼진으로 호투했다.[2] 특히 6회에는 당대의 강타자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스탠 뮤지얼을 삼진으로 잡아내기도 했다.[3][4] 거의 40년만인 1997년에 스탠 뮤지얼이 내한했을 때 김양중과 당시를 회고했다고 한다.
4. 은퇴 이후
그 이후 1961년 현역에서 은퇴하고 1962년 기업은행 감독으로 선임되어 당시 상업은행 감독이던 장태영과 고교 졸업 이후 다시 한번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당시 기업은행의 투수로는 우리가 다들 아는 김성근 감독, 그리고 70년대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의 전국대회 6차례 석권을 이끌었던 최관수 감독 등이 있었다.
1967년에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기업은행에서 1986년까지 은행원 생활을 했으며 지점장까지 지냈다. 1982년에는 고향팀인 해태 타이거즈 감독 물망에 올랐으나 현장을 떠난지 오래였던 터라 불발되었다. 2008년에는 SK 와이번스와 두산 베어스의 한국시리즈 1차전의 시구를 맡아 올드 팬들의 향수를 자아내기도 했다.
2013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1] 원래 공군으로 가기로 되어있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육군 야구단 측에서 재빨리 김양중을 채갔다고 한다.[2] 경기는 한국대표팀이 3-0으로 석패했다.[3] 스탠 뮤지얼은 메이저리그에서 22시즌 동안 .331에 475홈런 1951타점 3,630안타를 기록했으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대선수다.[4] 당시 볼카운트 투앤투에서 스트라이크에 가까운 공이 들어갔는데 심판이 잡아주지 않자, 스탠 뮤지얼이 고개를 끄덕거린 후 그 다음 아웃코스로 한참 빠지는 볼에 일부러 삼진을 먹어 관중들의 박수를 받았다. 본인의 신사적인 인품과 함께, 홈팀이자 약체였던 한국팀의 체면을 세워주는 제스처였던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