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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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메이저 대회를 모두 우승한 팀이자, 호남 야구의 산파 역할을 해낸 강호[5] . 1972년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 보여준 기적적인 대 역전승으로 인해 일약 '''역전의 명수'''라는 별칭이 붙은 팀이다.
2. 연혁
2.1. '역전의 명수'의 탄생
1968년 훗날 프로야구 탄생에 큰 기여를 한 이용일이 사업 기반이 있던 군산 지역에 야구붐을 일으키고 싶어서 만든 팀이 군산상고였다. 단순히 고교팀만 덜렁 만든 것이 아니라,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팜 시스템 형태로 제대로 구축한 팀이었다. 당시 국가대표 출신으로 선수에서 막 은퇴한 최관수[6] 감독을 영입하면서 1971년에는 신생팀으로 무려 대통령배 4강에 오르면서 돌풍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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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가 최관수 감독.
하지만 그 무렵 선수들이 대형사고를 치는데, 당시 고교생이었던 김준환, 김봉연 등이 술을 먹고 거리에서 시비가 붙어 싸움을 벌이다가 적발된 것이었다. 자칫 선수들의 퇴단과 야구부의 존폐가 위험해 질 수 있던 상황에서 최관수 감독은 아이들을 잘못 가르친 자신의 책임이라면서 선수들의 퇴단을 말리고, 선수들을 불러놓고 '''"너희들을 잘못 가르친 내 잘못이 크니, 나를 때리라."'''는 말을 한다.[7] 그리고 실제로 못 때리겠다는 사람들에게는 손수 이렇게 때리라는 시범을 보였다고(...) 그렇게 탈선으로 인한 문제는 수습되었다.
명장 밑에 약졸 없다고, 이 일 이후 군산상고는 확실히 더욱 강력해졌다. 그리고 고교야구가 지속되는 한 계속 회자되는 명승부가 1972년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일어났다. 부산고와 결승에서 만난 군산상고는 9회말 시작 전까지 1:4로 뒤지면서 끌려갔다. 그러나 9회말 공격에서 연속 안타와 상대의 주루 방해를 묶어 극적으로 4점을 내면서 기적적인 대역전승을 이뤄내며 창단 첫 우승에 성공했다. 이 역전승 이후로 군산상고의 별명은 역전의 명수가 되었다. 기적과도 같았던 이 역전 드라마는 훗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1977년에 개봉한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야'라는 영화가 군산상고의 대역전 스토리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그 뒤 최관수 감독의 지도 아래 1976년에는 대통령배 우승을 차지하는 등, 강호로 부상했지만 1979년 최관수 감독이 파킨스씨 병으로 은퇴[8] 하면서 군산상고의 태동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2.2. 화려한 19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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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군산상고는 지역 출신의 우완 에이스 조계현이 등장하면서 활력을 찾았다. 1981년 고교 1학년의 신분으로 에이스 자리를 차지하면서 대통령배 우승, 이듬해인 1982년에는 청룡기와 봉황대기 2관왕을 달성하는데 큰 기여를 하면서 팀의 전성 시대를 활짝 열었다. 그러나 이 세 번의 우승은 강속구를 가진 조계현의 팔을 희생시키면서 얻은 대가였고, 조계현은 팔색조로 불리는 기교파로 프로 무대를 풍미할지언정, 고교 무대에서 보여줬던 속구의 위력은 사라지게 되었다.
조계현이 졸업한 후, 이 번에는 이광우가 등장하면서 다시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광우, 정명원, 최해식이 뛰던 1984년의 군산상고는 청룡기 우승에 성공하면서 다시금 정상 정복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 들이 졸업한 후에는 이 번에는 왼손 에이스 조규제가 등장했다. 조규제를 필두로 한 군산상고의 선수들은 대통령배와 황금사자기를 석권하며, 1986년 고교야구를 군산상고의 해로 만들었다.
1986년에는 대통령배에서 경남고를 상대로 연장 11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2:1 역전승을 거두며 역전의 명수라는 별명을 다시금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그렇게 군산상고는 1980년대 6번의 우승을 차지하면서 명문으로 이름을 높일 수 있었다.
2.3. 저력은 보여준 시대(1990년대)
영광이 많았던 1980년대가 지나간 후에는 전반적으로 군산상고 야구부는 침체기에 빠졌다. 1993년 청룡기 준우승은 있었지만, 4강에 들지 못하고 초반에 짐을 싸야 했던 시절이 더 많았다. 그래도 간간히 걸출한 인재들이 등장하면서 성세를 높은 것은 위안거리였다. 1996년 언더핸드 정대현을 앞세운 군산상고는 김수경의 인천고를 누르고 봉황대기 통산 2번째 우승에 성공하면서 위용을 빛냈고, 1999년에는 초고교급 왼손 투수 이승호를 앞세워 채태인의 부산상고를 누르고 황금사자기 우승에 성공했다.
그러나 1999년 이승호의 군산상고가 황금사자기 우승을 차지하던 해는 지역 연고를 하고 있던 쌍방울 레이더스의 마지막 시즌이었고, 쌍방울이 사라지면서 지역 야구단의 공백을 메우기에는 KIA의 지원도 특별한 것이 별로 없었다.[9] 결국 이는 지역 인재들의 꾸준한 유출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채병용[10] , 오지환[11] , 김혁민[12] , 국해성[13] , 윤여운[14] , 임석진[15] , 배제성[16] , 고승민[17] , 김민준[18] [19] 이런 사례가 계속 증가하면서 군산상고는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지역 유망주의 수도권 유출은 전라북도 지역 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 소재 학교들도 공통으로 겪고 있는 어려움인데 전북이 유독 심한 듯하다.[20][21]
2.4. 암흑시대, 그리고 서광은 비출것인가
2000년대 군산상고가 과거의 위상과 비슷한 성과를 낸 것은 단 한 번. 2005년 모교 출신인 김성한 감독의 지휘 아래 차우찬, 황선일, 원종현 같은 선수들의 활약으로 대통령배 4강에 입성했을 때였다. 그 외에는 대부분 초반 탈락이 일상이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우수한 인재들이 유출이 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군산상고에게 어느 정도 서막이 보인 것은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였다. 2010년 봉황대기 준우승을 차지한 후, 2013년에는 마침내 조현명의 호투 속에 봉황대기 우승과 전국체전 우승에 성공하면서 제법 길었던 무관의 시대를 끝냈다. 다만, 인재 유출이라는 고민은 여전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연고 구단이 지역과 큰 연관이 없는 NC 다이노스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2016년 봉황대기에서 막강한 타선을 앞세워 인천고를 20:7, 개성고를 7:0, 4강에서 덕수고를 8:4로 꺽고 결승까지 진출햇으나 연장 13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휘문고에게 끝내기를 맞고 패배했다. 이날 경기에서 휘문고의 타자주자를 벤치 멤버가 태클(...)거는 바람에 휘문고의 끝내기 안타가 무효처리가 되며 일말의 희망이 피워지나 했으나 다음 타자에게 끝내기 희생플라이를 맞고 패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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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끝내기 안타 취소장면.
하지만 2016년 제 97회 전국체전 고등부 결승전에서 투수 김영중[22] 의 호투 속에 충북 세광고를 7:5로 물리치고 우승, 봉황대기에서 준우승에 그친 한을 풀었다. 2013년 이후, 4년만의 우승.
3. 출신 선수[23]
4. 관련 문서
[과거] 해태 타이거즈 (1982~1989)
쌍방울 레이더스 (1990~1999)
KIA 타이거즈 (2001~2013)[1] NC 다이노스가 군산상고와 전주고를 대상으로 1차지명권을 행사하면서 지역 연고도 같이 넘어간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KBO 각 구단들은 어디까지나 도시 연고이며 제2구장 홈 경기는 1차지명권 행사와는 별개 사안이다.[2] 4대 메이저 + 협회장기[3] 2010년 우승팀으로 봉황대기가 주말리그 시행 관계로 2년간 폐지되었다가 부활함[4] 나무위키 등록 선수만. 졸업 연도 순.[5] 서울, 영남세가 강호로 위세를 떨치던 당시의 전국 야구계에 호남을 대표하는 팀으로 명성을 떨쳤다.[6] 전북 출신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인천광역시 출신이며 동산고를 졸업했다. 특히 에이스로 활약하던 1959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7] 비슷한 사례가 대구의 한 학교에서도 있었다. 선수들이 훈련에 무단불참하자 감독이 선수들에게 벌을 주는 대신 "너희들을 잘 통솔하지 못한 내 책임"이라고 말하며 선수단 전원에게 자신의 엉덩이를 1대씩 때리라고 지시했고 선수단 중 1명이 나서서 진짜 감독을 때렸다고 한다. 이 당시 감독은 훗날 삼성 라이온즈와 태평양 돌핀스 감독을 맡았던 정동진이었고 감독을 때린 학생 선수는 SK 와이번스 감독을 맡았던 이만수다.[8] 최관수는 기업은행 군산지점에서 은행원과 군산상고 야구부 감독 겸업을 하고 있었다(이용일이 기업은행 사장에게 "군산지점 실적 향상에 도움을 주겠다"라며 부탁해 데려온 케이스). 1978년에 전남북 지역 기업은행 지점 대항 축구대회가 열렸는데 이때 최관수도 참가했다가 철봉에 세게 부딪혔다. 그 후 1년후에 파킨슨병 선고를 받아서 이용일이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9] 이미 KIA의 연고지역인 광주광역시에는 광주일고, 광주동성고, 광주진흥고 등 야구 명문 학교가 줄줄이 있었기에 굳이 전라북도까지 신경을 안 쓰더라도 우수한 지역 출신 신인을 받을 수 있는 기반이 있었다. 더구나 쌍방울의 해체 이후 KBO 리그의 연고지 제도 자체가 광역연고제에서 도시연고제로 전환되면서 전북야구에 대한 KIA의 관심은 더더욱 줄어들었다. 2003년 말 전북 연고권이 다시 KIA에 환원됐고 군산에서 홈경기를 분산 개최하게 되지만 관심은 그때 뿐이었다.[10] 군산중 졸업 후 한서고 입학 → 신일고 전학[11] 서울 자양중 졸업 후 경기고 입학[12] 군산상고 입학 → 성남서고 전학[13] 군산중 입학 → 동인천중 전학(중학교 3학년때)[14] 광주 충장중 입학 → 광주일고 입학[15] 군산 신풍초등학교 졸업 → 서울 이수중학교 입학 → 서울고 입학[16] 군산 신풍초등학교 → 경기 백마초등학교 전학[17] 군산중 입학 → 서울 배명중 전학[18] 군산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온양중으로 입학 → 북일고 입학[19] 같은 지역 라이벌 전주고도 마찬가지였다. 원래대로라면 전주고로 진학해야 했던 넥센의 강지광은 중3 때 전라중에서 상인천중으로 전학했고 인천고로 진학했다.[20] 어려움의 배경 중 하나는 학교가 있는 지역에 연고팀이 있고 없고의 차이다. 부산·경남, 대구, 광주 등 다른 지역과 달리 전북에는 우선적으로 지명 받아 뛸 수 있는 연고구단이 없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고향에서 안정적으로 선수 생활을 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있다. 군산상고의 경우 NC 다이노스의 지명권역에 있다고 하지만 창원 연고팀이라는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군산상고에 초고교급 선수가 나오지 않는 이상 경남지역 학교 선수들에 관심이 우선시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연고구단이 있는 대도시, 특히 수도권으로 전학을 자주 가는 편이다.[21] 학교 동문인 오상민이 박명환야구TV에서 프로팀 스카우터들도 지방 학교들을 모두 다니면서 선수들을 관찰하고 선수 숫자가 적은 지방 학교에서 뛸 수록 출전기회가 늘어나니 눈에 띄기 좋다는 점을 이야기하면서 학부모 및 선수들의 수도권 진학 러시에 대해 우려를 나타낸 바 있다.[22] 우완 정통파 투수로 2017년도 신인지명에서 NC 다이노스에 2차 4라운드 순번으로 지명됐다.[23] 나무위키 등록 선수만. 졸업 연도 순.[24] 프로입단을 거부하고 경희대로 진학했으며 대학 진학중이던 1999년에 쌍방울 레이더스가 해체, 신생팀 SK 와이번스가 지명권을 인수했다.[25] 재학 당시 이름은 문재화[26] 학창 시절 이름은 전태현[27] 학창 시절 이름은 조현명
쌍방울 레이더스 (1990~1999)
KIA 타이거즈 (2001~2013)[1] NC 다이노스가 군산상고와 전주고를 대상으로 1차지명권을 행사하면서 지역 연고도 같이 넘어간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KBO 각 구단들은 어디까지나 도시 연고이며 제2구장 홈 경기는 1차지명권 행사와는 별개 사안이다.[2] 4대 메이저 + 협회장기[3] 2010년 우승팀으로 봉황대기가 주말리그 시행 관계로 2년간 폐지되었다가 부활함[4] 나무위키 등록 선수만. 졸업 연도 순.[5] 서울, 영남세가 강호로 위세를 떨치던 당시의 전국 야구계에 호남을 대표하는 팀으로 명성을 떨쳤다.[6] 전북 출신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인천광역시 출신이며 동산고를 졸업했다. 특히 에이스로 활약하던 1959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7] 비슷한 사례가 대구의 한 학교에서도 있었다. 선수들이 훈련에 무단불참하자 감독이 선수들에게 벌을 주는 대신 "너희들을 잘 통솔하지 못한 내 책임"이라고 말하며 선수단 전원에게 자신의 엉덩이를 1대씩 때리라고 지시했고 선수단 중 1명이 나서서 진짜 감독을 때렸다고 한다. 이 당시 감독은 훗날 삼성 라이온즈와 태평양 돌핀스 감독을 맡았던 정동진이었고 감독을 때린 학생 선수는 SK 와이번스 감독을 맡았던 이만수다.[8] 최관수는 기업은행 군산지점에서 은행원과 군산상고 야구부 감독 겸업을 하고 있었다(이용일이 기업은행 사장에게 "군산지점 실적 향상에 도움을 주겠다"라며 부탁해 데려온 케이스). 1978년에 전남북 지역 기업은행 지점 대항 축구대회가 열렸는데 이때 최관수도 참가했다가 철봉에 세게 부딪혔다. 그 후 1년후에 파킨슨병 선고를 받아서 이용일이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9] 이미 KIA의 연고지역인 광주광역시에는 광주일고, 광주동성고, 광주진흥고 등 야구 명문 학교가 줄줄이 있었기에 굳이 전라북도까지 신경을 안 쓰더라도 우수한 지역 출신 신인을 받을 수 있는 기반이 있었다. 더구나 쌍방울의 해체 이후 KBO 리그의 연고지 제도 자체가 광역연고제에서 도시연고제로 전환되면서 전북야구에 대한 KIA의 관심은 더더욱 줄어들었다. 2003년 말 전북 연고권이 다시 KIA에 환원됐고 군산에서 홈경기를 분산 개최하게 되지만 관심은 그때 뿐이었다.[10] 군산중 졸업 후 한서고 입학 → 신일고 전학[11] 서울 자양중 졸업 후 경기고 입학[12] 군산상고 입학 → 성남서고 전학[13] 군산중 입학 → 동인천중 전학(중학교 3학년때)[14] 광주 충장중 입학 → 광주일고 입학[15] 군산 신풍초등학교 졸업 → 서울 이수중학교 입학 → 서울고 입학[16] 군산 신풍초등학교 → 경기 백마초등학교 전학[17] 군산중 입학 → 서울 배명중 전학[18] 군산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온양중으로 입학 → 북일고 입학[19] 같은 지역 라이벌 전주고도 마찬가지였다. 원래대로라면 전주고로 진학해야 했던 넥센의 강지광은 중3 때 전라중에서 상인천중으로 전학했고 인천고로 진학했다.[20] 어려움의 배경 중 하나는 학교가 있는 지역에 연고팀이 있고 없고의 차이다. 부산·경남, 대구, 광주 등 다른 지역과 달리 전북에는 우선적으로 지명 받아 뛸 수 있는 연고구단이 없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고향에서 안정적으로 선수 생활을 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있다. 군산상고의 경우 NC 다이노스의 지명권역에 있다고 하지만 창원 연고팀이라는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군산상고에 초고교급 선수가 나오지 않는 이상 경남지역 학교 선수들에 관심이 우선시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연고구단이 있는 대도시, 특히 수도권으로 전학을 자주 가는 편이다.[21] 학교 동문인 오상민이 박명환야구TV에서 프로팀 스카우터들도 지방 학교들을 모두 다니면서 선수들을 관찰하고 선수 숫자가 적은 지방 학교에서 뛸 수록 출전기회가 늘어나니 눈에 띄기 좋다는 점을 이야기하면서 학부모 및 선수들의 수도권 진학 러시에 대해 우려를 나타낸 바 있다.[22] 우완 정통파 투수로 2017년도 신인지명에서 NC 다이노스에 2차 4라운드 순번으로 지명됐다.[23] 나무위키 등록 선수만. 졸업 연도 순.[24] 프로입단을 거부하고 경희대로 진학했으며 대학 진학중이던 1999년에 쌍방울 레이더스가 해체, 신생팀 SK 와이번스가 지명권을 인수했다.[25] 재학 당시 이름은 문재화[26] 학창 시절 이름은 전태현[27] 학창 시절 이름은 조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