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식
1. 소개
대한민국의 야구인.
고향이 북한 평안도 남포다. 일곱 살 때 인천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의 형제 모두 야구인으로 명성이 높은데, 큰 형인 박현명은 오사카 타이거스에 입단, 한국인 최초로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한 선수다. 뒷날 6.25 전쟁 중에 납북되어 북한 야구에 관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둘째 형인 박현덕은 전인천군(全仁川軍) 야구팀을 이끌면서 인천 야구에 큰 기여를 했고 지금의 동산고등학교 야구부를 창설하고 초대 감독을 역임한 인물이다. 박현식은 바로 둘째 형을 따라 동산고(당시 동산중) 야구부에 들어간다. 한 마디로 류현진의 대선배되겠다.
1940년대 중학야구에서[3] 장태영, 김양중과 함께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투수로 활동한 그는 한국실업야구/역사실업야구 진출 후에는 완전히 타자로 전향했다. 실업 무대에서 최고의 타자로서 명성을 떨치면서 타자 1인자로 군림한다. 홈런이 드물던 시대, 유일하게 홈런을 쳐내던 타자였고, 이영민의 뒤를 잇는 강타자였다. 실업 무대에서 20년간 112개의 홈런을 쳤다고 전해진다.[4]
2. 대표팀 성적
그의 별명은 '''아시아의 철인'''이다. 이는 1954년 1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부터 1965년 6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까지 모두 참가해서 아시아 야구연맹이 특별히 그에게 준 공로상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1963년 서울에서 열린 제 5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결승 1차전 동점 홈런을 치면서 한국의 사상 첫 우승에 큰 기여를 했다.[5]
3. 선수 은퇴, 그리고 감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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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감독 시절의 모습.
그 뒤 실업야구 미창 야구단 - 제일은행 야구단에서 뛰다가 은퇴, 잠시 감독을 지내다가 은행원으로 평범한 삶을 살았다. 지점장까지 오르면서 야구계에서 완전히 멀어지는 듯 싶었는데, 1982년 전격적으로 삼미 슈퍼스타즈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한다. 이미 현역을 떠난지 오래된 그가 다시 복귀하게 된 이유에는 여러 추측이 있다.
- 삼미의 전력이 너무 약해서 인천 지역의 유명 지도자들[6] 이 거부하면서 그에게 돌아갔다는 설.
- 막역한 친구인 이용일 KBO 초대 사무총장[7] 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다는 설.
- 삼미그룹 김현철 회장이 적극적으로 영입하려고 노력했고[8] , 여기에 주 거래은행인 제일은행 은행장의 요청[9] (이라고 쓰고 명령이라고 읽는)이 있었다는 설.
프리배팅 시간이었다. 배팅볼 투수가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해 아까운 시간만 흘러갔다.
“에잉, 그렇게 컨트롤이 없어서야 어떡하누. 이리 내놔봐.”
박감독은 스스로 마운드에 올라가 프리배팅 볼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몇 개 던지다보니 이번에는 타자 뒤에 쪼그리고 앉은 포수의 플레이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잉, 미트질을 그 따위로 하면 어떡해? 이리 줘봐.”
이번에는 주섬주섬 포수 도구를 챙겨 입고는 포수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몇 개를 받으며 살펴보니 이번에는 타자의 스윙 자세가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다.
“아니, 그런 식으로 휘두르면 어떡하냔 말이야. 이리 줘봐.”
ㅡ 이종남, <인천야구이야기> 중에서
4. 13경기만의 해고
그러나 그렇게 모셔 온 감독을 삼미 슈퍼스타즈는 불과 13경기 만에 해임한다. 회장이 보는 앞에서 8:0으로 앞서던 경기가 11:12으로 뒤집히는 8점차 대역전패가 해임의 빌미가 되었다.[10] 그 뒤 1983년 '심판위원장 이단 옆차기 사건' 때문에 구속된 김진영 감독을 대신해 잠시 20경기 정도 감독대행으로 팀을 이끈 적은 있었지만,[11] 그것으로 프로 감독과의 인연은 끝났다.
5. 이후
KBO 심판위원장과 규칙위원장을 지냈고, 1991년 LG 트윈스의 2군 감독을 끝으로 완전히 야구계에서 은퇴했다. 그 뒤 암으로 투병, 2005년 병마를 안고 KBO 올스타전 시구를 한 것이 생전에 대중들에게 비추었던 마지막 모습으로 남아 있다. 올스타전이 있고 나서 한 달 뒤에 타계했으며,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청정리 소재 한국전쟁 참전 유공자 묘역인 국립영천호국원에 안장됐다.
6. 기타
그를 기리기 위해 SK 와이번스는 초중고 야구 유망주를 대상으로 박현식 타격상을 수상하고 있다.[12]
[1] 우측 사진은 1959년 필리핀 리잘 야구장에서 열린 국제군인야구선수권대회에서 아시아인으로는 첫 번째 장외홈런을 날렸고, 그 기록은 구장 담장에 새겨진 기념으로 찍은 것.[2] 現 농협[3] 당시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학제 분리되기 전이었다.[4] 실업야구 통산 100홈런 이상을 기록한 네 명의 선수 중 하나다. 나머지 셋은 김응용, 박영길, 김우열.[5] 이 때 기념으로 국내 최초로 동대문야구장에 야간 조명이 설치되었다. 즉 이전까지는 무조건 주간경기만 했다는 이야기. 겨우 야구를 할려고 소중한 전기를 쓸 수 없다던 시대이다.[6] 사실상 그 다음 감독인 김진영.[7] 전 KBO 총재 대행[8] 그런데 김현철 회장은 김진영을 감독후보 1순위로 꼽았었다고 한다.[9] 이필선 당시 제일은행장은 그의 국민학교 동기였고, 사석에서는 서로 반말하면서 담배 피우는 사이였다고 한다.[10] 이는 2003년 현대가 KIA 상대로 9점을 뒤집기 전까지 프로 역사상 최다 기록이었다. 그리고 2013년, 희대의 10점차 역전 드라마가 나오면서 이 기록은 또다시 깨진다.[11] 자세한 사연은 김진영 참조.[12] 투수는 류완식 투수상이다. 류완식은 박현덕과 함께 전인천군을 이끌던 1940년대 에이스 투수였다. 1939년부터 1944년까지 일본 프로야구 한큐(現 한큐 브레이브스-오릭스 프랜차이즈)에서 활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