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
1. 개요
일제강점기의 목포에서 활동한 작가로, 시 50편과 희곡 3편 등을 발표하였으며 1926년에 대한해협(현해탄)에 몸을 던져 윤심덕과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2. 생애
1897년 9월 19일에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면의 장성 관아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김성규(金星圭)는 장성군수였다. 태어난지 몇여년 만에 부친인 김성규가 조정 권신들의 모함으로 인하여, 파직되어 가족들 전체가 당시 개항장이었던 목포부로 이사하였으며, 여기서부터 김우진이 자라기 시작하여 죽기전 까지 자리잡게 된다. 목포공립보통학교(목포북교초등학교)와 당시 일본인 학교였던 목포공립심상고등소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농업을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명에 의하여 현립 구마모토농업학교를 진학하여 인문계 과목에 뛰어난 성적을 보였으며, 이때 즈음에 하동 정씨 정봉현(鄭鳳鉉)의 딸[10] 정점효와 혼인하게 된다.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와세다대학 예과에 진학하게 된다. 이후에 영어영문학과로 전과하여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곧바로 목포로 와서 상성합명회사의 사장으로 취임하여 사업가를 겸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죽기 몇 달 전까지 목포에 계속 머물면서 정오, 이영녀, 난파, 산돼지 같은 작품들을 내놓았다. 1926년에 일본으로 가는 부관연락선에서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라는 설이 있다.
3. 작품 세계
한국 문학사에서 '''한국 연극의 개척자'''이다. 서구의 연극을 연구한 덕에 근대적 극을 창조하였으며, 신파극이 주류였던 조선의 연극 및 극계에 파장을 일으켰다고 평가받는다.
김우진의 '시'는 당시 주류 시적 사상이었던 낭만주의와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 또는 투쟁에 관한 시가 아니라 '''표현적 자유와 표현의 창조'''를 강조하면서, 다른 길을 걸었다. 한 개인의 삶 속 절망적인 내면적 상황을 낭만적이게 노래하는 듯이 표현하였다.
희곡은 조지 버나드 쇼에게 강력하게 영향을 받아 표현주의 기법을 굉장히 많이, 잘 사용하였다. 특히 대표 작품인 '산돼지'나 '난파'는 한국문학사에서 표현주의 문학론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김우진의 희곡은 '''사실주의, 상징주의, 표현주의''' 이 3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4. 사상
김우진의 사상은 자유주의로 구별될 수 있다. 특히 표현의 자유를 계속해서 주장하고 작품 내부에 포함시킴으로서, 문화적 자유주의에 대하여 강력한 신념을 가졌으며, 이로 인하여 작품내에서 보수적인 유교 가족관에 대하여 거부감을 표했으며[난파에서] , 실제로 가족과 깊히 충돌하기도 했다.
러시아 혁명이후에는 사회주의사상에도 어느 정도 공감을 가지게 된다.그의 주류적인 사상은 니체에 의한 것이었다.
5. 정사?
김우진이 자살했던 날에 윤심덕도 함께 사라지면서, 둘의 자살설이 신빙성 있게 제기되어 지금도 많이 알려져 있다. (일명 조선 최초 정사 사건)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김우진과 윤심덕의 정사설이 점점 부정되고 있는데, 당시에도 김우진의 죽마고우였던, 조명희는 풍문이라며 강력히 부정했다. 특히 정사가 아닌 근거로는 김우진이 출가하기 전에 아들 김방한(金芳漢)[11] 을 굉장히 아끼고 좋아했다는 점과 윤심덕과 김우진이 만난 적은 있지만, 사랑했다는 증거도 없을 뿐더러, 당시의 이혼이라는 제도가 분명히 있다는 점으로 비춰 보아 정사가 아닌 김우진의 자살 혹은 사고사로 생각될 수 있다.
참고로 승선명부에는 김수산이라고 적혀있는 김우진과 거주지와 나이가 똑같은 이름이 있는데, 수산은 김우진의 '호'일수도 있다. 목포에서 본 딴 호가 바로 수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