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버나드 쇼

 


'''George Bernard Shaw'''
[image]''' '''192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본명'''
조지 버나드 쇼 (George Bernard Shaw)
'''국적'''
아일랜드 [image] / 영국 [image]
'''출생'''
1856년 7월 26일, 영국 아일랜드 섬 더블린 포토벨로
'''사망'''
1950년 11월 2일 (94세), 영국 아욧 세인트 로렌스
'''직업'''
극작가, 소설가, 수필가, 비평가, 화가, 웅변가
'''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image]
'''각색상'''
''' 제10회
(1937년) '''

''' 제11회
(1938년) '''

''' 제12회
(1939년) '''
노만 라일리 레인, 하인즈 헤럴드, 게자 헤르첵
(에밀 졸라의 생애)

'''조지 버나드 쇼''', 이안 달림플, 세실 아서 루이스, W. P. 립스콤
('''피그말리온''')

시드니 하워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1. 개요
2. 명언 제조기
2.1. 사례
3. 흑역사


1. 개요


아일랜드[1]의 극작가 겸 소설가이자 비평가, 사회주의자.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중산층이었으나, 훗날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운다. 심약한 아버지는 하루하루 술로 버티다 결국 갱생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고, 아버지와 달리 성격있는 어머니는 누나들과 집을 나와서 자신의 음악 가정교사와 동거를 하게된다. 곧 쇼도 집을 나와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는데, 실제 사이는 크게 나쁘지 않았지만 가정교사가 아버지도 아니면서 아버지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몹시 싫어했다. 얼마나 싫어했냐면, 이 남자의 이름 역시 '조지'여서 사람들이 자꾸 부자(父子)지간이라고 생각하자, 그 뒤로 자신의 이름을 쓸 때면 'G. 버나드 쇼' 혹은 '버나드 쇼'를 더 자주 사용할 정도.
가난한 나머지 학력은 고작 초등학교 졸업에 그쳤지만, 사환으로 일하면서 음악과 그림을 배웠으며 소설도 썼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크게 감동받아, 1884년 페이비언 협회를 설립하는 등 사회주의자로서 크게 활약하였다. 연극·미술·음악 등의 비평도 하고, 스스로도 많은 극을 써서 연극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풍자와 기지로 가득 찬 신랄한 작품을 쓰기로 유명하다. 최대 걸작인 '인간과 초인'을 써서 세계적인 극작가가 되었다. 1925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인간과 초인', '성녀 조앤'[2], '시저와 클레오파트라', '피그말리온'(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의 원작) 등이 있다.[3]

2. 명언 제조기


20세기 위인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의 명언 제조기이자 독설가. 골 때리는 명언을 즉석에서 쏟아내곤 했다. 개중에는 부조리한 사회 현상을 꼬집는 명언도 있다.

2.1. 사례


'''"내 언젠가 이 꼴 날 줄 알았지.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버나드 쇼의 묘비명으로 세간에 알려진 문장. 한국에서는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의역된 문장으로 '''일단은''' 알려져 있다. 이 묘비명은 이기호의 단편집 제목으로 재활용되기도 하였다. 정확한 이기호 소설집의 제목(동시에 소설집에 실린 단편의 제목)은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리고 뿌리깊은 나무의 이방지가 18화에서 무휼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이 대사를 쳤다. 성철 스님은 이것을 최고의 묘비명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올바른 번역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우물쭈물'의 번역은 2006년 당시 KTFSHOW를 런칭하면서 진행한 바이럴 캠페인에서 처음 등장하고 그것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이만큼 오래 살았으면 이렇게 되는(=죽는) 게 당연하지"로 번역하여 '''죽음이 별 거 있냐'''라는 의미에서 고인이 자신의 죽음마저도 풍자했다는 의미를 나타냈다고 한다. 또한, 모든 배경을 무시하고 문장을 기계적으로 번역한다면 "내가 충분히 오래 지냈다면 이런 식의 일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정도에 가깝다. 어느 쪽이 맞든 간에 좌우지간 원문에는 '우물쭈물'에 해당하는 뉘앙스가 없는 것은 사실.[4] 우물쭈물 안 하고 열심히 산다고 해서 안 죽는 것이 아니기에 의미도 맞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언젠가 이런 꼴이 될 줄 알았지' 정도가 가장 원 뜻에 가까운 번역이라 할 수 있을 듯.
그런데 버나드 쇼는 사후 화장되어 그 재가 자신이 살던 집 '쇼스 코너(Shaw's Corner)' 정원 구석구석에 뿌려졌다. 따라서 따로 묘비를 남기지 않았고, 그나마 묘석이라 할 만한 거라고는 집 근처에 세워진 성녀 잔 다르크의 동상이 전부다. 즉 묘비명 따위를 남길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버나드 쇼의 묘비 사진이라고 떠도는 것 역시 'MUST HAVE' 광고 당시 나왔던 이미지 달랑 하나만 있고, 그 이미지 하나만 곳곳에서 복사 붙여넣기 되고 있을 뿐이다. 그 외 다른 사람들이 찍은 사진은 단 한 장도 없다. 따라서 광고 제작자가 임의로 만들어 낸 묘비 이미지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영미권에서도 이 묘비명은 버나드 쇼의 것으로 널리 알려져 여기저기에 떠돌고 있으니 더더욱 수수께끼이다.

"당신은 아주 낡고 오래된 골동품처럼 내 생명을 보전시키려고 하지만 나는 이제 글렀어. 마지막이오. 나는 죽습니다"

'''진짜 유언#s-1'''.

"애국심이란 단지 이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이 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 우월하다고 믿는 신념이다."

'''"다 들통났음. 빨리 도망쳐라."'''

영국 정재계에 계신 높으신 분들에게 마구잡이로 보낸 전보 내용. 그런데 정말로 상당수가 잠적해버리는 바람에 영국 사회가 일순간 아수라장이 됐다고 한다. 자세히 읽어 보면 아무 근거 없이 들통났다고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데도, 도둑이 제 발 저렸는지(…) 저 사달이 난 것이다. 한편 쇼가 살면서 1차대전과 2차대전을 모두 겪은 것을 감안하면 당시에 수많은 첩보전이 벌어졌다는 반증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가능한 일찍 결혼하는 건 여자의 비즈니스, 가능한 늦게 결혼하는 건 남자의 비즈니스."

여자는 젊을 때(리즈 시절) 얼른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하고 싶어하고, 남자는 본인 인생 즐기다 천천히 책임을 져야하는 결혼을 하고 싶어한단 뜻. 당연하지만 사람에 따라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니 그냥 농담이다.

"불행한 결혼생활을 보내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다."

Q. 금요일에 결혼한 사람은 평생 불행하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 당연한 말이죠. '''금요일이라고 예외겠습니까?''' [5]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6]

"남들이 오만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정도의 자신감은 쓸모 없다."

가장 유명한 소설가 12명을 적어달라는 요청에 자기 이름을 12번 적으며 한 얘기. 그것도 그냥 '조지 버나드 쇼, 조지 버나드 쇼…', 이렇게 쓴 게 아니라 'G. 버나드 쇼', 'G. B. 쇼', '조지 쇼', '쇼, 조지 버나드' 이런 식으로 썼다.[7]

"아니오, 내 얼굴과 당신의 머리를 물려 받은 아이가 탄생할 수도 있겠지요."

세계적인 발레 스타 이사도라 던컨[8]이 '내 얼굴과 당신의 머리를 물려 받은 아이가 태어나면 근사하겠지요'라는 말에 대한 대답. '그 얼굴로 그런 소리를 하다니 당신 멍청한데다 나 닮아서 못생김'이라고 동시에 에둘러서 까는 것이다. 다만 쇼를 20년 이상 옆에서 지켜본 헤스캐드 피어슨이 쓴 평전에 따르면 그냥 좀 정신이 이상한 어떤 여성이 한 말이며 이사도라 던컨과는 무관하다고 한다. 오히려 이 쪽이

"가장 어리석은 유인원에게 말이 통하기라도 할까? 해 줄 말은 없다"

YMCA를 만들어 퇴폐적인 저질문학 반대운동을 벌이던 목사인 앤소니 컴스톡(1844~1915)이 쇼의 책들을 저질이고 문제가 많다고 비난하자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깐 말. 이 말에 컴스톡은 노발대발했다. 하긴 당연히 창조설 믿던 사람에게 이런 말로 대꾸하고 무시하니… 컴스톡을 비난하던 작가, 예술가들은 엄청 많았는데 오죽하면 저질인 범죄자로 (알몸인 아기#s-1를 낳은) 임신부를 꼽는다고 시사만화로 까임을 받을 정도였다.

"실수하며 보낸 인생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인생보다 존경스러울 뿐 아니라 더 유용하다."

"제도가 저절로 굴러가겠지 하고 믿는 것은 정치적 게으름일 뿐이다."

"술을 마시다가 반이 남은 술병을 보고 '아, 술이 반밖에 없구나'라고 말하면 비관론자, '아, 술이 반이나 남았군!'이라고 말하면 낙관론자다"

낙관론자와 비관론자의 차이에 대해 예시를 든 말.

"제 연극의 초연 때 좌석 2개를 예약했으니 친구분과 같이 오시지요. '''친구가 하나라도 있다면 말이죠'''"

그러자 처칠은 이런 답장을 보냈다고.

"초연에는 참석이 불가능합니다. 두 번째 공연에는 참석하겠습니다. '''만약 공연이 열린다면 말이죠."'''

이 일화는 2015년 기준 고2 영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하였다. 쇼의 전보야 당연히 처칠에게 "님 친구 없잖음 ㅋ"하고 놀리는 것이고, 처칠의 답장은 "님 연극은 겁나 형편없어서 초연 하자마자 망할걸 ㅋ"이라고 받아친 것.
다만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불분명하다. 이 일화가 처음 알려졌을 때 주인공들은 버나드 쇼와 처칠이 아니라, 처칠의 아들인 란돌프 처칠과 노엘 카워드(Noel Coward)이기 때문이다. 허나, 현재로서는 어느 쪽이 맞다고 하기엔 증거가 부족하다. 자세한 건 참조.

"존경할 만한 두 시민이 공공연하게 범할 수 있는 가장 뻔뻔하고 멍청한 짓거리."

오페레타 <제인 애니 또는 선행상>를 까면서. 독설치고는 평범(?)한 듯 싶지만, 사실 이 오페레타를 만든 사람이 바로 코난 도일과, <피터팬#s-1>의 작가인 J.M. 배리이다(…).[9]
  • 그의 작품이 미국에서 무대에 공연되었는데, 사정상 그 공연을 관람할 수 없었던 쇼가 연극의 여주인공이었던 코넬리아 스키너에게 전보를 보냈다.

"정말 훌륭했소."

독설가인 쇼에게 칭찬받을 줄은 몰랐던 코넬리아가 답례로,

"뭘요, 정말 별 것 아니에요."

쇼는 답장을 보냈다.

"아니, 당신 연기 말고 내 작품 말이오."

이에 발끈한 코넬리아는 이렇게 맞받아쳤다.

'''"그러니까요."'''


  • 작가인 G.K.체스터턴[10]과 만났는데, 마른 체구였던 쇼에 비해 체스터턴은 몹시 뚱뚱했다. 체스터턴이 "쇼, 자네를 보면 영국이 심각한 기근 상태에 빠졌단 걸 알 수가 있겠군"이라며 놀리자 쇼가 받아쳤다. "그리고 자네를 보면 그 원인이 자네 때문이란 걸 알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웃긴 것은, 쇼가 체스터턴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았다. 그리고 당시 영국이 아일랜드에 가한 수탈과 탄압을 이중으로 깐 느낌도 있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대해 라이벌 의식을 느꼈었는지, 셰익스피어 숭배자들을 조롱했다. 특히 오셀로에 대해서 "피부 아래로 파고드는 인물 묘사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다"고 비평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셰익스피어는 다른 사람이 이미 쓴 내용을 뒤따라 썼을 때에만 진정으로 훌륭한 극작가"라고 비아냥댔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는 양심이 없었고, 나도 그렇다."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 중에 피그말리온, 시저와 클레오파트라, 성녀 조앤은 각각 말괄량이 길들이기, 줄리우스 시저, 헨리 6세와 대립 및 비교가 되게 만들어졌다.
  • 자신의 각본으로 만든 공연이 성황리에 끝나고 나서 쇼가 무대 인사를 하자 관객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런데 그 중 한 관객만 심한 야유를 보내고 있었다. 분위기가 싸해지는 가운데 쇼의 대답이 압권. "저도 저 신사분의 의견에 완벽히 동의합니다. 그런데 우리 의견에 반대하는 이 수많은 관객 앞에서 우리가 뭘 어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자신을 못난 관객과 함께 비하하여 에둘러 깐 것. 극장의 분위기가 반전되어 다시 업된 건 당연지사. 이 재치 넘치는 멘트는 조지 버나드 쇼를 일약 런던의 유명인으로 만들었다.

"도대체 프랑스 사람들은 얼마나 이상한 사람들인가. 세상에서 가장 높은 탑이 있고 아무나 올라갈 수 있는데, 개방한 지 몇 주가 지났는데도 아직 아무도 자살하지 않다니. 만약 에펠탑이 런던에 있었으면 개시 첫 주에 사람들이 줄지어 떨어졌을 텐데."[11]

- 영국인의 고지식함과 실용성, 낮은 유머감각을 풍자하며

"침묵은 경멸을 표현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이다."

  • 버나드 쇼는 생전에 노벨상 수령을 거부했었다. 그러나 그는 상만 받고 상금 수령을 거부했다가, 결국 상금까지 수령한 희귀한 경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노벨상을 수상하자 도움을 요청하는 수천 통의 편지들이 쇄도했기 때문이었는데, 그 당시 그는 친구인 어거스틴 해먼에게 이렇게 털어 놓았다. "수상 거부 소식이 보도된 뒤에는 상금을 거부할 정도로 부자라면 자신의 아이를 입양해 달라, 집 담보금을 갚아 달라 등등의 편지들이 날아오더라. 그나마 가장 합리적인 것은 자기를 가정부로 써 달라는 두 여성의 편지였다." 그 직후 그는 상금을 수령했는데 그에게 날아온 편지들의 금액을 다 합쳐보니 상금 총액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사건을 겪은 후에 노벨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알프레드 노벨이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건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탈을 쓴 악마만이 노벨상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 1914년 1월 7일 찰스 디킨스의 팬덤인 디킨스 펠로우십 회원을 방청객으로 소설 에드윈 드루드의 비밀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존 재스퍼의 재판이 열리는데, 이 때 배심원단장을 맡았다.
  • 미국의 前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버나드 쇼를 영국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이때 케네디는 버나드 쇼에게 "미국이 장차 세계를 주름잡을 수 있을까요? "란 질문을 했는데, 거기에 대한 버나드 쇼의 대답은 이러했다.

"그럼요, 미국인들이 영어를 제대로 한다면 말입니다."

“목젖까지 공산주의에 몸을 던지세요. 만약 여러분이 스무 살에 혁명가가 되고자 하지 않는다면 쉰이 넘어서는 가장 극한의 미친 늙다리 화석탱이가 될 것입니다. 반면 스무 살에 이미 '사회주의 혁명론자'라면 마흔이 되어서도 시류를 쫓아갈 가망이 좀 있습니다.”

[image]

인생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 하나는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다른 하나는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There are two tragedies in life. One is not to get your heart's desire. The other is to get it.)

  • 욕망에 대한 씁쓸한 고찰이다. 돌이켜보면 목표를 추구할 순간이 더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3. 흑역사


  • 사회진화론우생학이 옳다고 여겼었는지, "지금 우리 문명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우생학적 신조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물론 나치의 범죄 이전이었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우생학의 이미지가 현대와 달랐기 때문에 좌파 쪽에서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고는 하지만.
  • 1937년에 소련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가는 곳마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러시아 농민들을 보고 '소련인들 정말 똑똑하구나!'라고 감탄하였고 귀국 후에 소련을 칭송하는 글을 남겼다. 허나 사실 그 영어를 잘하고 조지 버나드 쇼의 저작에 능통한 농민들은 진짜 농민이 아니라 소련 비밀경찰 NKVD 사람들이었다(...). 사실 이건 버나드 쇼만 겪은 것은 아니고 스탈린이 1930년대에 서유럽의 유명 지식인들을 대거 초청하여 대접 잘 해주고 소련에 대한 긍정적 인상을 심어주려는 술책의 일환이었다. 더 첨언하자면 단순히 서방 세계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동구권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의 인텔리들도 초청되어 대접을 받았는데 공산권의 지도자인 소련의 위상을 인식시키고 친소파들을 양성하기 위한 이유였다. 북한도 이기영(소설가)을 비롯한 인텔리들이 소련을 방문하여 소련 기행기 등을 비롯한 저작물을 써서 북한의 초기 미디어에 소련물을 크게 들이게 된다.
  • 위에 언급된 소련 여행 이후 스탈린은 물론 히틀러에게조차 폐허에서 독일을 재건한 인물이라고 공개적으로 찬사를 보낸 적이 있다. 1930년대 중반기 당시에는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유럽과 미국에서는 경제위기에서 독일을 구해낸 인물이자 공산화를 막아낸 인물이라는 평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총리직을 지낸 처칠도 무솔리니에 대해 호평하기도 했으니 말 다한 셈. 허나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본인도 흑역사로 치부했을 듯(...). 사실 이 당시 수많은 서방 지식인들이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 등 동구권 독재자들에 대해서 정확한 실체를 알만한 정보가 없을 때라, 풍문으로 들은 소식으로 막연한 호의를 품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후일 장 폴 사르트르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문화대혁명을 찬양하는 등의 짓을 터트리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 좌파 사상가였지만 인민대중 및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주장하는 혁명사회주의자와는 크게 대립했었다. 무지한 인민 대중이 국가를 움직이면 오히려 심각한 문제를 야기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쇼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정체는 사회 엘리트에 의한 정체인 귀족정이었다. 그는 보통선거제에 대해 극도로 불신했다. 초기작부터 후기 저작까지 극단적인 엘리트주의자라고 보일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쇼가 이 같은 상위 5%의 95% 통치를 하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합리화한 것은 아니고, 헌법에서 규정된 기본권을 구체화할 수 있는 가치관을 갖고 보통선거를 통해 선출된 정치 엘리트에 의해 국가가 움직여야 한다고 보았다.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그 좋은 헌법과 정체를 가지고도 민주적 절차를 거쳐서 히틀러라는 희대의 또라이에게 권력을 주었던 것을 들었다.
  • 초반에 말했듯 페이비언 사회주의자였는데, 이 주의는 사회주의에서 수정주의 노선을 따른다. 수정주의는 식민주의를 찬성하는 쪽으로 귀결되었고, 쇼 역시 식민지 개화론을 주창했다.

[1] 그러나 영국계 아일랜드인(Anglo-Irish people)이어서 영국 국적도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었기에 영국인으로 보기도 한다. 아일랜드(당시 아일랜드 자유국) 국적은 늘그막인 1934년에 딴 것이며, 그가 일생의 대부분을 살았고 일생을 마친 곳, 화장한 유골을 뿌린 곳까지 모두 영국이다.[2] 잔 다르크의 시성을 보고 그녀에 대해 쓴 희곡으로 노벨 문학상 수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3] 한국에 제대로 번역된 작품은 인간과 초인, 피그말리온 단 2편 뿐이다. 평생 70여편이 넘는 희곡을 집필했는데 워낙 방대해서 영어권에서조차 전집은 사후 단 한번만 나오고 절판되었다.[4] 동양권에서는 영어에서 부사적으로 쓰이는 전치사의 의미를 오독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여기서는 around를 '주변을 맴돌다' 정도로만 알고 있다가 발생한 오역일 가능성이 크다. around에는 '머무르다'의 의미도 있으며, 아무리 감안을 해 줘봐도 '별 생산적인 일도 안 하고 생각 없이 그냥 살다' 정도로밖에 번역할 수 없다(hang around, sit around등의 경우가 그렇다). 한국어의 '그냥 있어' 정도의 의미를 떠올리면 될 듯. '우물쭈물'은 아니다.[5] 그래도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내가 사망하자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정말 싫어했다면 진작에 이혼했겠지만.[6] 원문은 "Youth is wasted on the young". 비긴 어게인의 OST인 Lost stars에서 인용되기도 하였다. 쉽게 말해 '젊은이들은 젊은 게 귀중한 줄 모른다'로, 늙어서야 젊음이 중요한 줄 알게 된다며 젊음의 가치를 역설한 문장.[7] 비슷한 일화가 영국의 문학가인 서머셋 몸에게도 있다. 명작으로 꼽을만한 100편의 책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에 '9권밖에 추천할 수 없소. 난 아직 9권밖에 쓰지 못했거든.'라고 대답했다고.[8] 스페인의 배우 엘레오노라 두세가 한 이야기라는 설도 있다. 다만 이사도라 던컨 설이 더 일반적. 세간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마릴린 먼로의 이야기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9] 하지만 이 오페레타의 완성도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대중들도 버나드 쇼의 이런 독설에 동감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10] 1874~1936/유명한 문학 평론가, 종교 저술가이자 '역설의 대가'로 불린 논객이다. 일반 대중에겐 추리소설 브라운 신부 시리즈로 유명하다.[11] 에펠탑에서 첫 자살자가 발생한 것은 건설되고 나서 9년 뒤이다. 이후 실제 이 말대로 자살의 명소가 되어 프랑스에서 가장 자살자가 많은 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