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심덕

 

[image]
사의 찬미 앨범에 실린 사진이다.
'''이름'''
윤심덕(尹心悳)
'''출생'''
1897년 7월 25일 조선 평안북도
'''사망'''
1926년 8월 4일 대한해협
'''장르'''
서양 고전음악, 대중가요
1. 개요
2. 생애
3. 정사? 죽음에 관한 의혹
4. 미디어화


1. 개요


尹心悳 (1897년 7월25일~1926년 8월4일). 한국 최초의 여성 성악가, 소프라노 가수로, 그녀의 대표곡인 <사의 찬미>가 유명하다. 또한 김우진과 함께 대한해협정사[1]한 사건으로도 유명하다.[2]

2. 생애


조선총독부의 관비유학생으로 발탁되어, 일본에서 성악을 공부하였다. 유학생 시절인 1921년, 동경 유학생들로 이루어진 동우회의 조선순회공연에 참가하여, <김영일의 사> 등 연극 공연에 앞서 '장미화,' '황혼의 시내' 등을 독창하였다. 이 시기 김우진과 처음 만나 친교를 가졌다. 그리고 김우진과의 관계는 연인으로 발전했지만, 김우진은 그때 이미 유부남이었다. 즉 불륜 관계.[3] 이후 1923년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같은 해 6월, 동아부인상회 3주년 창립 기념으로 열린 음악무도대회에서의 독창공연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성악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성악가만으로는 먹고 살기 힘들었기에, 학교 음악선생, 극단 토월회 배우, 대중가요 활동 등을 하였다.
그리고 1926년 일본에 음반을 취입하기 위하여 갔고[4], 여기서 그 유명한 사의 찬미를 취입한다. 이 곡은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왈츠 <다뉴브강의 잔물결>의 주선율에 별도의 가사를 덧붙인 번안곡. 하지만 <사의 찬미>는 원래 녹음하고자 했던 곡이 아니었다. 노래를 녹음하던 중에 그녀가 갑자기 이 노래를 녹음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이 노래는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어마어마한, 1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어떻게 보자면, 그녀의 죽음이 판매량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도 할 수 있다. 노래는 죽음을 찬미하는 우울한 노래이고, 그 가수는 죽었으니... 하지만 아래에 서술하겠지만, 그녀는 이 레코드판이 정식 발매되는 것을 보지 못한다.

3. 정사? 죽음에 관한 의혹


일본에서 음반취입을 하는 동안, 그녀는 당시 일본에 있었던 김우진을 만났다.[5] 갑자기 둘은 8월 3일 부산행 부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에 탑승하였다. 그리고 1926년 8월 4일 에서 사라졌다. 이는 조선 최초의 '정사' 사건이었기에 신문에서 대서특필되었다. 이렇게 당시 언론에서는 '정사'라고 대서특필했지만, 사실 이것이 '정사'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당시 분명한 사실은 다음 세 가지 뿐이다.
  • 8월 3일 김우진과 윤심덕이 일본에서 같은 배를 탔다는 것.
  • 8월 4일 새벽 대마도를 지날 무렵, 선실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고 사람은 없고 가방만 있었다는 것.
  • 이후 승객명부를 대조해서 확인해보니 김우진과 윤심덕이 없다는 것.
유언장 같은 것은 확인되지 않았으며[6], 두 사람이 자살했다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도 없다. 당연히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고...[7]
그냥 언론이 최초 사건을 접하자마자, '유서를 남기고는 두 사람이 껴안고 바다에 뛰어내렸다'라는 단정적으로 보도를 했다. 그리고 이게 지금까지 정설이 되어서 굳어져버렸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가족들은 당연히 '정사'했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물론 가문의 명예 때문일 수도 있긴 하다. 심지어 자살 자체를 부정하기도 했다.
당시 김우진은 아버지와의 불화로 집을 나와 일본에 와있었으며, 자신이 그토록 소망하던 독일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8월 1일, 자신의 희곡 <산돼지>를 잡지사에 보낼 때에도 '앞으로 자신의 작품은 여기에서 출발한다'며, 원고를 받으면 회답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윤심덕은 여동생의 미국 유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으며, 8월 5일에는 여동생이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여동생은 미국에 도착한 뒤에 언니의 죽음을 듣게 되었다. 또한 일본에 있을 당시 도쿄에 있는 친구에게 곧 도쿄에 놀러갈테니 만나자는 편지를 보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두 사람이 진짜 연인관계였는가?'라는 점이다. 사실 이들이 연인관계라고 언급하는 것은 당시 정사 이후 신문에서 보도한 것뿐이다. 윤심덕의 경우에는 당시 여러 남성들과 스캔들이 있었다. 스캔들이 너무 커져서, 한때 조선을 떠나 만주로 도피해 숨어지내던 적도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연인관계였다면, 그녀에게 있어서 김우진은 여러 남자 중 하나였다.
김우진의 경우에는 윤심덕을 사랑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냥 그의 문학작품을 통해서 이게 윤심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김우진의 친구인 조명희는 이를 풍문에 불과하다면서 그 사실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고 말했다. 설령 연인관계였다고 하더라도, 이혼하고 재혼을 했어도 될 터였다. 김우진이든 윤심덕이든 굳이 정사할 이유가 없다. 정사도 정사지만, 어째서 두 사람이 갑자기 조선행 배를 탔는가는 의문이다. 남겨놓은 유서도 없고, 조선에 가는 것과 관련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도 않았던 터라... 그래서 죽음을 가장했다는 '생존설'과 실족 등에 의한 '사고설', 나아가서 '타살설'까지 제기되었다. 당시 그들의 드라마틱한 죽음으로 인하여, 사실은 어디 외국에서 살고 있다 카더라는 설이 유행했다. 특히 김우진과 불륜관계에 포커스가 맞춰져서, 두 사람이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죽음을 가장하고 외국으로 도망갔다는 것이다. 한편, 사의 찬미의 음반 판매를 위해 레코드사와 짜고 죽음을 가장했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투신 장면을 목격한 사람도 없고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실제로 배를 탄 사람이 김우진과 윤심덕이 맞는지 확인한 사람이 없다.[8] 그냥 명부상 김수산과 윤수선이라는 남녀가 탔고, 이 사람이 김우진과 윤심덕이더라는 사실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실 두 사람은 안 죽고, 유럽으로 도피했다는 소문이 신빙성있게 돌았다. 즉, 당시 배에 탔던 선원을 매수하여서 자살했다고 꾸민 것이며,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인으로 위장하고 유럽에 갔다는 것이다. <사의 찬미>가 꾸준히 팔리는 것만큼 소문도 꾸준히 늘어만 났다. 1931년 이탈리아에서 잡화점을 하는 동양인 부부가 있는데, 이들이 김우진과 윤심덕이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간판명부터 구체적인 지명 등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이에 김우진의 동생은 당시 총독부를 통하여 주이탈리아 일본대사관에 확인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로마에는 그러한 사람이 없으며, 앞으로도 찾아보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1934년 자칭 김옥균의 손자라고 칭하는 이가 나타나서, 자신이 이탈리아에서 머물 때, 로마에서 악기상을 하는 김우진과 윤심덕 부부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다시 김우진의 동생은 총독부에 확인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이 김옥균 손자를 자칭하는 이가 거짓말을 했음이 밝혀졌다. (관련 내용은 김옥균 항목 참고) 사실 이 소문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 자살을 꾸미기 위함이었으면 본명을 쓰는 게 더 좋을 텐데 굳이 가명을 쓸 이유가 없다.
한편, 서울대학교 양승국 교수는 김우진을 연구하면서, 여러 정황상 정사의 가능성을 낮게 본다. 대신 그냥 자살설[9] 내지는 사고설에 더 무게를 둔다. 이와 달리, 음악평론가 강헌은 이에 대해서 타살설을 제기하였다. 관련 기사 그러면서 당시 윤심덕의 음반을 취입한 닛토(日東)레코드사를 유력한 용의자로 추정했다. 이 레코드사는 당시 일본 국영축음기회사인 닛지쿠의 자회사로, 1926년에 생긴 당시로썬 듣보잡회사였다.[10] 더욱이 당시 레코드 메인곡으로 내놓았던 사의 찬미는 원래 그녀가 부를 예정의 노래가 아니었다. 그리고 당시 신문에서는 그녀가 녹음을 요청하였다고 하지만, 녹음 당시 피아노 반주를 하였던 그녀의 동생은 '갑자기 추가된 곡이고 왜 그 곡이 타이틀곡이 되었는지 모르겠다.'라는 식으로 부정한 바 있다. 이에 대해서 일본국영기업이 조선 시장에 레코드와 축음기를 대량으로 팔기 위해서 계획적으로 죽인 것이 아닌가(기획살인)라는 것이다.
어쨋든 분명한 것은 1926년 8월 4일 이후 윤심덕과 김우진은 사라졌다. 여담이지만 그녀와 절친한 사이였던 극작가 이서구(1899~1982)의 회고에 의하면 이서구가 그녀가 일본으로 음반을 취입하러 갈 때 경성역으로 배웅을 나왔었는데 이 때 나누었던 대화가 참 의미심장하다.
윤심덕: 선물로 뭘 사다드릴까요?
이서구: 취입 잘 하고 돌아올 때 넥타이나 하나 사서 보내줘요.
윤심덕: '''죽어도 사와요?'''
이서구: 그래. 죽으려거든 넥타이나 사서 부치고 죽어요.
물론 이서구가 마지막에 한 말은 당연히 농담으로 한 말이었고 실제 이 대화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한 대화였는데(...). 참고로 이서구가 사달라고 했던 넥타이는 윤심덕이 죽었다는 비보가 들려온 지 며칠 후에 이서구에게 도착했고 이서구는 그 넥타이를 매고 다니지 않고 죽을 때까지 간직했다고...

4. 미디어화


  • 이 정사 사건은 연극영화로도 많이 제작 되었다.
최초의 영화화는 1969년 안현철 감독의 <윤심덕>(1969)이다. 신성일, 문희가 주연으로, 각각 김우진과 윤심덕을 맡았으며, 이순재, 백영민, 주증녀, 한은진 등이 조연으로 출현했다. 영화는 김우진과 윤심덕 두 사람의 만남에서부터 현해탄에서 뛰어내리는 장면까지를 담고 있다.
이후 1991년, 김호선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임성민, 장미희, 이경영 주연의 "사의 찬미"로 영화화되었다. 윤심덕을 맡은 장미희는 이 작품으로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김우진을 맡은 임성민은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11]
  • 뮤지컬 및 연극화는 1988년 윤대성에 의해서 사의 찬미로 희곡화 되어 극단 실험극장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90년에 뮤지컬로 재공연되었으며, 이후 2005년 공연에는 가수 바다가 윤심덕 역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2년에는 글루미데이라는 뮤지컬에서 윤심덕과 김우진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팩션을 담아내기도 하였다. 이 뮤지컬은 2015년 '사의찬미'로 이름을 바꾸어 재연되었다.
  • 2018년 11월 27일부터 SBS에서 드라마로도 방영되었다.[12] 신혜선이 윤심덕 역을, 이종석이 김우진 역을 맡았다.

[1] 사랑하는 남녀가 사랑을 이루지 못한 것을 비관하여 동반자살하는 것을 이르는 말. 情事가 아니라 情死.[2] 배에서 뛰어내려서 동반 자살했다. 명확하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후술 참고.[3] 후술하겠지만, 진짜 연인관계가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4] 여동생의 미국 유학을 위해서 돈을 모으고자 갔었다.[5] 당시 김우진은 일본에서 독일로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6] 언론에서는 있다고 보도했지만, 가족과 친구들은 그런 것이 없다고 밝혔다.[7] 물론 그 넓은 바다에서 어떻게 찾겠냐만은...[8] 다만 탑승인 명부에 적혀있는 거주지가 윤심덕과 김우진의 실제 거주지였고, 나이도 30살로 동일했기에 김우진하고 윤심덕이 배에 탄 건 사실이다.[9] 자살에 대해서 윤심덕이 유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며, 충동적으로 벌어졌으리라 추정한다.[10] 당시 콜롬비아, 폴리도어(Polydor) 등 유명 메이커 음반회사들이 많았었다. 그리고 이 회사는 1928년 사라진다.[11] 김호선 감독이 사의찬미 이후 차기작으로 다시 장미희, 임성민을 캐스팅해서 만든게 바로 한국영화계에 엄청난 파문을 몰고온 애니깽이다. 즉 사의찬미 이 작품이 1950년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충무로 인력들이 만들어낸 거의 마지막 작품이다.[12] 6부작 단막극. 하루에 2회씩 3일간 방영했으므로 3부작이 아니라 6부작이다. 11월 27일, 12월 3일, 12월 4일에 방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