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희(시인)

 

하바롭스크에 거주하던 시절(1934년~1937년)의 조명희
1. 개요
2. 생애
3. 작품
4. 가족관계
5. 기타


1. 개요


"나는 이날까지 시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를 허다히 보아왔다. 내 나라에서나, 남의 나라에서나-. 그러나 내 눈에 비친 그런 시인 중에는 포석처럼 자기자신에 대해서 준엄한 시인은 없었다."

김소운. "비규격의 떠돌이 인생(22) 포석 조명희". ''중앙일보'', 1981년 1월 30일,
http://isplus.liv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557532

"우리는 보드레르가 될 수 없으며 타골도 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남의 것만 쓸 데 없이 흉내내지 말을 것이다. 붉은 薔薇가 어떻니 당신의 레이스가 어떻니 하는 西人의 노래만 옮기려 하지 말고, 우리는 먼저 山비탈길 돌아들며 지게목발 두드리어 노래하는 樵童에게 향하여 들으라. 하늘빛은 멀리 그윽하고 얇은 햇빛 가만히 쪼이는 봄에 그 햇빛의 傷한 마음을 저 혼자 아는듯이 가는 바람이 스칠 때마다 이리저리 나부끼는 실버들 가지를 보라. 朝鮮魂의 울음소리를 거기서 들을 수 있다."

조명희. 『봄잔듸밧위에』. (춘추각, 1925년), 김명기. "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20>". ''동양일보'', 2015년 11월 8일,
http://www.d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5241

조명희(趙明熙, 1894년 8월 10일 ~ 1938년 5월 11일)는 일제강점기작가이자 시인이다. 발굴 이전에는 좌파 계열의 카프 문학가로 치부받았지만, 1988년 발표된 「월북문인의 해방이전 작품 공식해금조치」 이후에는 디아스포라 문학의 선구자이자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재평가받은 문학가이다. 본관은 양주(楊州)이며,[1] 자는 경덕(景德), 호는 '''포석'''(抱石, 돌멩이를 끌어안음), 필명은 적로(笛蘆), 목성(木星), 포석(包石), 조생이다. 키릴 문자로는 Чо Мён Хи로 표기되며 과거에는 Тё Мен Хи라 썼다.

2. 생애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숫말(수암마을)에서 4남 3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1919년 3월, 3.1 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됐다. 출소한 그해 가을에 도쿄 도요 대학 철학과에 입학한다. 일본에서의 유학생활 중 극작가였던 수산 김우진(1897년 ~ 1926년)을 만나 교류했고 아나키스트 단체인 흑도회에 가입했다. 1923년 귀국한 뒤 우리나라 최초의 희곡인 「金英一의死(김영일의 사)」와 역사극 「婆娑(파사)」를 연달아 발표했고 적로(갈대피리)라는 필명으로 시집 「봄잔듸밧위에」를 펴냈다. 1925년카프의 창설 회원으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전개하며 대표적인 단편집 「洛東江(낙동강)」을 남겼다. 1927년김기진(1903년 ~ 1985년), 김동환(1901년 ~ 1958년), 김복진(1901년 ~ 1940년), 박영희(1901년 ~ 1950년), 안석영(1901년 ~ 1950년)과 함께 경향극 단체인 '불개미극단'을 조직했다.
조명희는 반체제 문학활동으로 인한 일제의 탄압으로 1928년 7월, 소련으로 망명했다. 망명 첫해에 대표적인 저항시 작품인 「Растоптанная Корея(짓밟힌 고려)」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1934년에 알렉산드르 파데예프(Александр Фадеев, 1901년 ~ 1956년)의 권유로 소련작가동맹에 가입하였다. 신문 『Авангард(선봉)』과 잡지 『Родина трудящихся(로력자의 고향)』 편집을 담당하며 글을 기고하였다. 조명희는 망명 생활 중에 많은 고려인 후학을 양성하였는데 1930년니콜스크우수리스키 근교 푸칠롭카(Пуциловка, 혹은 육성촌-六城村)에서 거주하며 육성농민청년학교에서 근무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니콜스크우수리스키로 이사하여 고려사범전문학교에서 근무했고 1935년에는 하바롭스크에 거주하면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1937년 이오시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Депортация корейцев) 당시 니콜라이 예조프대숙청으로 1937년 9월 18일NKVD 요원들에게 체포당하여 구금당하였다. 1938년 4월 15일에 일본 스파이와 협력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아 동년 5월 11일에 총살형에 처해진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 정권기인 1956년 7월 20일, 소련 극동군관구 군법회의에 의해 복권되었다.

3. 작품


  • 『金英一의 死』 (동양서원, 1923년)
  • 『봄잔듸밧위에』 (춘추각, 1925년)
  • 『洛東江』 (백악사, 1925년)
  • 「짓밟힌 고려」 (선봉, 1928년)

4. 가족관계


  • 아버지 조병행(趙秉行)
  • 어머니 연일 정씨(延日鄭氏)
  • 첫째 부인 민식(閔植)
    • 중숙(重淑), 중남(重男), 중락(重洛), 중윤(重潤)
  • 둘째 부인 황명희·마리야(1930년 재혼, Мария Ивановна Хван) 가족사진
    • 선아·발렌티나(Валентина Менхиевна Тё), 선인·미하일(Михаил Менхиевич Тё), 블라디미르(Владимир Менхиевич Тё)

5. 기타


  • 국내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고려인 거주지에도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작가이며, 광복 이후 시기부터 해금 조치가 이뤄진 현재에 이르기까지 문학적인 성과를 널리 인정받고 있다. #.
  • 재러한인 사회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만큼 관련 기념비가 많지만 관리소홀로 잊혀지고 있는 실정이다. #.
  • 러시아에서 2남 1녀를 남겼는데 차남 블라디미르의 아들인 파벨(Павел Владимирович Тё)은 2020년 현재 러시아 부동산 기업인 카피탈 그루프(Капитал Груп)의 공동대표이다. 진천에 위치한 포석 조명희 문학관의 동상 제작에 기부를 하였다고 한다. #.
  • 연해주에 조명희 선생을 기리는 조형물이 세워졌다.#.
[1] 21세손 '희(熙)'자 항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