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경(1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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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한글학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김윤경은 1894년 6월 9일 경기도 광주부 오포면 고잠리(현 광주시 오포읍 고산리 고잠동)에서 아버지 김정민(金正民)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강의법학교(西江懿法學校) 고등과를 수료하고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연희전문학교 문과, 일본 릿쿄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4세 때 상경하여 서강의법학교 고등과를 수료하고 상동청년학원에 입학하여 졸업한다. 이때 주시경으로부터 한글을 배워 국어 연구에 많은 동기부여가 되었다. 이후 4년여간 마산 창신학교 고등과 교사로 재직하였고 1917년 다시 상경하여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직전인 1921년 이병기 등과 함께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하여 국문 연구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1922년에는 수양동우회의 전신인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 창립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2년여간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교무주임과 훈육주임을 맡았다가 1926년 일본 릿쿄 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 졸업하였다. 귀국 후 배화여고보로 돌아가 계속 근무하는 한편 한글 연구에도 매진하였다.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 1년여간 옥고를 치르고 이듬해 7월 보석으로 출옥하였다. 이때문에 5년간 실직하여 1938년 1월『조선문자급어학사』를 출판하는 등 조용히 국문 연구에만 매진하였고 1942년 성신가정여학교의 교사로 가까스로 복귀하였으나 그해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다시 홍원경찰서에 검거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8.15 광복 후 조선어학회 상무간사와 국어부활강사를 역임하는 한편, 연희전문학교 접수위원·이사직을 맡았고, 그해 10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한 이래 문학부장과 총장대리를 역임하였다.
1949년 그의 저작인 『조선문자급어학사』가 4대명저의 하나로 표창받았다. 1952년부터는 문교부 사상지도원 전문위원·국사편찬위원, 6.25 전쟁으로 인한 교사복구추진위원, 대한교육심의위원, 교수요목개정심의회 국어위원, 문교부 교과용도서활자개량위원, 연희대학교 대학원장, 국어심의회 위원, 교육용도서편찬심의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1955년에는 학문의 업적과 교육가 및 한글운동가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연희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학술원회원이 되었다. 1957년에는 기독교공로상·국어공로상을 받았다. 1962년에는 연세대학교 교수를 퇴임하였으나, 국어심의회 위원,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과 한양대학교의 강사를 지냈고, 학술문화발전 공헌공로상과 한글공로상을 받았다. 1963년에는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취임하고, 문화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1964년에는 전국국어국문학교수단 이사장의 일을 맡았고, 고희기념으로 『한결국어학논집』을 펴내는 등 평생을 한글 연구 및 후진 양성에 바쳤다.
이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창천동에 거주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1969년 1월 28일 부산·울산지방 산업단지 교수시찰단의 일원으로 부산시에서 여행하던 도중 2월 2일 과로로 졸도하여 부산제일병원에 입원했으나#, 하루 뒤인 2월 3일 심근경색으로 별세하였다.#
사후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현 광주시 남한산성면 광지원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3. 여담
-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에는 그의 호를 딴 '한결 하우스'가 있다.
[1] 계림군파 20세 '''경(經)''' 식(植) 항렬. 아버지 김정민(金正民)은 19세 정(正) 항렬.[2] 김윤경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서는 개국 503년(1894년) 5월 28일로 기재하였다.[3] 경주 김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