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기(국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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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국문학자, 시인, 교육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이병기는 1891년 3월 5일 전라도 여산도호부 천서면 진사리(현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진사마을)에서 변호사 이채(李倸)[3] 의 12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다가 1910년 전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사범학교 재학 중이던 1912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배웠다.
졸업 후 1913년 경기도 남양공립보통학교 훈도에 발령된 것을 시작으로 1914년~1917년 전주제2공립보통학교(현 전주완산초등학교) 훈도, 1918년~1919년 여산공립보통학교 훈도 등 교사생활을 하였다. 이때부터 국어국문학 및 국사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는 한편,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을 연구, 창작하였다. 당시 수집한 책들은 나중에 서울대학교에 기증하여 중앙도서관에 '가람문고'가 설치되는 계기가 된다.
1921년 12월 서울 휘문의숙에서 김윤경·최현배·최두선 등 16명의 유지와 함께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하고 간사가 되었다. 1922년부터는 동광고등보통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이때부터 시조 연구에 주력했다.
1930년 조선어철자법 제정위원이 되었고, 연희전문학교·보성전문학교의 강사를 겸하면서 조선문학을 강의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8.15 광복 후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 및 각 대학 강사로 재직했다. 6.25 전쟁 당시에는 전라북도 전시연합대학 교수를 지내기도 했으며, 이후 전북대학교 문리대학장을 지내다 1956년 정년퇴임하였다.
그러다가 1957년 10월 9일 한글날 기념식에 참여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인근에서 뇌일혈로 갑작스럽게 쓰러졌고#, 이후 10여 년 간 투병생활을 지속하다가 1968년 11월 29일 전라북도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평생을 시조 혁신을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으로 수필도 많이 남겼다. 그의 시조를 이수인이 가곡하여 노래로 만든 별이 있는데 현재까지도 교과서에 실리는 등 인기가 있는 가곡이다.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1] 소부감판사공파 25세 영(榮) '''병(秉)''' 항렬. 아버지 이채(李倸)는 24세 승(承) '''人변(외자)''' 항렬.[2] 출생지인 원수리 573번지에 그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3] 대한제국·일제강점기 초기에 활동한 여산 지역의 유지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1909년 1월 호남학회 전북지회 여산 임원으로 찬성회에서 학회 후원 및 전북 지방 교육문제에 대한 연설회를 가졌으며, 같은 해 2월 전라북도 시찰위원으로 각 학교 시찰 및 의연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1922년 6월 여산금융조합(礪山金融組合) 감사로 선출되어 취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