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환(1957)
1. 개요
1975년 결승전에서 보인 활약 덕분에 대통령배가 낳은 최고의 스타로 뽑히는 인물. 하지만 대학야구와 프로에서의 활약은 고질적인 허리부상과 노쇠화로 인해 인상적인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미남형 얼굴로 유명했다.
2. 선수 생활
2.1. 프로 이전
그가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1975년 제9회 대통령배 대회. 결승전 상대는 작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경북고였는데 김윤환은 여기서 성낙수를 상대로 3연타석 홈런을 쏘아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대회 최초는 물론 고교야구 사상 최초의 기록. 이 해 대회에서 김윤환은 수훈상, 타격상, 최다 안타상, 최다 타점상 등 4관왕을 차지하고 후에 일암야구상도 수상한다. 이후의 봉황기에서는 타점상도 수상.
이 우승은 1949년 청룡기 대회에서 광주일고가 우승한 이후 26년만에 차지한 우승으로 광주일고 기사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의 억압통치에 억눌러 있던 호남인들이었기에 더 뜻 깊은 우승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광주일고 야구단은 군용 지프차에 타서 카퍼레이드도 했다! 덕분에 일약 스타가 된 김윤환은 미남형 얼굴도 있어서 학교로 들어오는 팬레터가 너무 많아 김윤환에게 가기도 전에 폐기될 정도였다. 늘어난 인지도만큼 루머도 따라왔는데 우승 공로를 따지다가 집단 패싸움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그것. 김윤환이 회상하는 바에 따르면 당시 강만식은 혹사, 김윤환은 스파이크에 부상, 정윤택은 피칭머신에 힛바이피치, 이현극은 딱밤 피하다가 문기둥에 충돌하는 등의 사고가 모두 15일 이내에 터졌기 때문.
졸업 후 롯데가 실업야구팀에 끌어들이려고 노력했지만 김윤환은 결국 대학행을 선택. 고려대에 입학한다. 그 후 고등학교 시절부터 문제로 뽑히던 3루수 수비 문제가 다시 불거지며 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한다. 고등학교 시절에 비하면 디지털 타자마냥 홈런밖에 없는 선수라 평가받았으나 79년엔 갑자기 성적이 좋아지며 한미대학야구선수권 대회에 출장하기까지 한다.
대학 졸업후에는 한국화장품에 입단 82년에는 0.357을 기록하는 등 활약했다. 하지만 정작 프로야구가 창설될 때 군대 문제를 뒤늦게 해결하느라 계속 실업야구에서 뛰었어야 했다. 당시 그런 그에게 '동료가 다 떠나간 실업야구를 홀로 지키는'라는 설명이 기사에 자주 붙었을 정도. 거기다 이때 생긴 허리부상은 김윤환을 두고두고 괴롭히게 된다. 83년 시즌이 끝난 뒤에야 군대문제가 해결되며 해태 타이거즈에 1차지명으로 입단하게 된다.
2.2. 프로야구 시절
입단 당시에는 호남의 스타인 그를 고교시절에 보던 내야로 컨버전을 시켜 해태의 부족한 내야를 보충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허리부상이 재발, 김윤환은 입단 후 해태에서 단 한 번도 1군 무대를 밟지 못하며 바로 방출 당한다. 그렇게 2년을 재활에만 힘쓰다 86년 다시 해태에 입단하나 또 다시 바로 방출 당하는 쓰라림을 겪게 된다. 86년 6월에 청보 핀토스 구단주 신현철씨의 도움으로 청보 핀토스에 입단. 계약금은 없고 연봉은 9백만원이라는 엄청난 계약이었다.
이런 열정페이 수준의 계약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훈련으로 1987년 1군 무대에 데뷔, 폭 넓은 수비와 훌륭한 타격으로 맹활약한다. 8월에는 5할의 맹타를 휘둘렀으며 그 해 신인왕으로 언급됐을 정도. 시즌이 끝난 뒤 타율은 0.283으로 규정타석 에서 50타석 가량 미달이지만 팀내 최고 타율, 스탯티즈 기준의 wRC+로는 마찬가지로 규타 미달인 정현발의 134.9에 조금 딸리는 132.2로 2위. 부상으로 얼룩진 30살 노장의 눈물겹고도 성공적인 복귀식이었다. 이 해 청보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현금 트레이드 된 이해창, 트레이드로 삼성에서 온 정현발 등 외부수혈로만 외야를 채웠다.
그 후 88년도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나 89년에는 폭망, 0.222 60타석을 더 채웠으면 같은 팀내 이선웅울 누르고 최저타율 타이틀을 차지할 뻔 했다. 평범했던 90년을 지나 91년에는 수비 도중 팔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게 되고[1] 시즌이 끝난 후 세대교체를 이유로 방출되어 은퇴하게 된다.
3. 은퇴 후
94년에는 부산에서 목욕탕을 운영하던 근황이 기사로 나왔다.
2001년 주엽고등학교 야구부가 신성될 때 초대 감독이었으나 2007년엔 야구부가 해체된다.
동대문야구장이 철거될 당시인 2007년. 대통령배 출신 최고 인기스타인 김윤환이 다시 주목을 받았는데 이때는 부산에서 자재사업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75년 김동엽이 해설했던 라디오 해설을 아직도 녹음하고 다니면서 아들과 딸에게 내가 왕년에 이렇게 대단했다 하면서 들려준다 한다.
2011년부터 2015년까지는 울산제일중학교, 2016년엔 한중대학교, 2017~2018엔 호원대학교, 2019년부터 현재까지는 단월중학교에서 야구 지도자로 활동 중.
4. 트리비아
국내의 최초 여성심판이었던 최경임이 중학시절 김윤환의 팬이었다고 한다.
1987년 김우근 꽈당사태 때 홈으로 송구한 야수가 김윤환이다.
[1] 개막전이라는 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