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
1. 직종
內侍
임금을 곁에서 모시는 직위. 내시의 侍(시)는 일본의 사무라이와도 의미가 통하는데[1] , 원래는 임금의 근처에서 경호나 잡일을 해 주는 역할이었다.
1.1. 자세한 의미
내시는 실권자의 옆에서 부리는 시종 의미를 가졌으며, 중국에서는 이 의미가 확장되어 내시라고 하면 정식으로 관직을 받았거나 황제의 명을 직접적으로 받드는 중신이 아니라 실권자의 심복 정도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2]
그 특성상 높은 품계를 받긴 어려웠으나 실권자와 친밀하여 권력이 강할 수도 있었고, 내시 생활을 끝내며 중신으로 옮겨오는 사례도 많았다.
1.2. 한국사
1.2.1. 고려시대
보통 사람들이 '내시'라고 하면 왕이 들어오기 전에 "주우상저어언하아 납씨이오오", "즈언하~ 수라를 들이겠사옵니다."라고 소리지르는 늙은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나라 고려시대에는 명문가 출신으로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문관들 중에서 선발되었다. 즉, 현대인들이 "내시 = 환관"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고려시대의 내시는 환관이 아니었다.
고려 내시는 여러 관청기관을 원래 소속으로 하고 국왕에 의해 선발되어 '내시원(內侍院)'에 근무했다. 내시원 근무 신하는 본래 관직명 앞에 '내시(內侍)'를 붙였다. 고려 내시들은 왕의 행차에 동행하는가 하면, 왕명의 초안 작성, 유교 경전의 강의, 왕실재정 관리 전반을 담당했으며, 때로는 국왕을 대신하여 궐 밖의 민정을 살피기도 했다. 내시는 권설직(權設職)[3] 이며 특별 봉급으로 별사미를 받았다. 때문에 고려 내시 관료는 선망 대상이었으며, 내시 출신 중 재상에 오른 자가 무려 22명이었다. 과거 합격자가 아니더라도 실무 능력을 인정받아 내시가 되기도 하고, 의술, 점술, 잡기 등으로 내시에 발탁되기도 했으며, 무신정권 시대에는 무신이 내시가 되기도 했다. 왕을 보좌하는 직업이기에 무술시험도 봤다. 이후 공민왕 대에 내시부가 만들어진 후에는 관료들이 담당하던 내시원은 군 복무 대신으로 하는 궁궐 숙위 성중관(成衆官)으로 역할이 위축되었으며, 조선 초 세조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궁궐 숙위의 기능만을 담당했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환관이 곧 내시부를 담당했던 조선시대의 영향 때문에 환관과 내시를 너무 쉽게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고려시대의 내시직은 엄연히 당대의 고위가문 자제들만이나 들어갈 수 있는 엘리트직인데도, 이를 환관으로 착각하곤 한다. 예컨데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내시 한뢰가 정중부에게 "개도 안 물어갈 환관 놈"라고 욕을 먹는 이상한 장면이 나오고, 오히려 진짜 환관이었던 왕광취는 멀쩡히 수염 달린 관료로 묘사된다. 이후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이를 신경쓰려다가 진짜 환관이었던 최만생 조차 수염을 기른 관료로 묘사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1.2.2.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들어서 환관들이 내시부를 맡게 되면서 내시가 곧 환관이라는 의미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환관들은 고자였기 때문에 내시라는 말에 고자라는 의미를 포함하게 되었다. - 이렇게 된 이유는 태조 시대에 세자빈 유씨가 내시(고려시대의 개념으로 거세하지 않았다) 이만과 간통한 사건으로 이만은 처형되고 세자빈은 폐출된 것에서 시작되어, 이후부터는 거세한 사람들만 내시가 되게 함으로서 내시와 환관의 차이가 없어졌다.
흔히 내시는 죽을 때까지 궁 안에서 사는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어느 쪽이든 고령이 되면 진상품 관리 등의 파견명목으로 궁 밖에 나가 말년을 보냈다. 경상북도 청도군 임당리에 있는 7동짜리 한옥이 그중 하나로 내시들의 양로원 같은 역할을 하던 장소다. 집안이 부유하거나 돌봐줄 수 있는 가족이 있으면 귀가해서 살 수도 있었다. 이는 궁녀도 마찬가지다. 이는 왕과 왕족만이 궁궐 안에서 죽을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시들은 환관이 되기 위해 잘라낸 자신의 고환을 잘 말린 후 '양물단지'에 보관했다. 죽은 후 고환을 다시 몸에 접합시켜 관에 넣어야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속설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시들은 자신의 고환이 담긴 양물단지를 보물처럼 아꼈다고 한다.#
사극에서 묘사되는 조선시대 내시들은 뿔이 없는 사모를 쓰고 흉배가 없는 녹색 단령을 입는 것으로 나오는데, 고증 오류이다. 조선시대 때 그려진 내시들의 초상화를 보면 일반 관료들처럼 뿔이 있는 사모를 쓰고 품계에 따른 흉배가 달린 관복을 입었다. 조선시대 내시 복장에 관해서는 다음 블로그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1.3. 중국사
내시 직종의 원조인 중국 왕조들의 경우 아주 오래 전인 춘추전국시대부터 내시가 곧 환관인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인구의 차이[4] 및 내명부로 대표되는 궁궐 내 분위기의 차이로 보인다. 춘추전국시대 제환공의 말년을 끝장낸 수초가 환관인 내시였다.
역사서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환관 내시로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죄인으로 몰려 형벌(궁형)로 거세된 것일 뿐 사마천이 환관이나 내시였던 적은 전혀 없다. 하지만 궁형 이후에는 환관으로 일했다.
2. 영화
2.1. 내시
신상옥 감독의 영화. 1968년작.
1968년작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노출이 없다뿐이지) 노골적인 성적 묘사와 잔혹한 폭력 묘사가 일품으로, 지금 기준으로 봐도 상당한 수준이다.
주인공 정호(강신성일[5] )는 원래 내시가 아니었으나, 명종(남궁원)의 후궁으로 간택될 자옥(윤정희)과 서로 사랑해서 검열삭제한 것 때문에 자옥의 아버지 김참판이 환관으로 만들어 버린다(...).
명종은 대비(윤인자. 운명의 손의 그 배우)의 간섭에 불만을 품고[6] , 주색잡기에 빠져 지내다가 자옥의 몸종까지도 후궁으로 들인다. (잘못은 아니다. 왕이면 그래도 된다) 여기서는 후궁들이 승은을 입는 것도 고통스럽게 묘사된다. 그러던 중 명종은 자옥의 애인이 정호인 것을 알고 일부러 '''정호 앞에서 자옥을 NTR하는''' 일도 벌인다. 그러던 중 후궁으로 들어온 자옥의 몸종은 회임을 하게 되고, 자옥의 경쟁자랑 싸우다가 유산(...). 자옥의 경쟁자는 도모지 형으로 죽고, 몸종은 유폐된다.
그러던 중 대비와 알고 지내던 스님[7] 이 대비전을 출입하며 통정하다가, 그만 대비가 임신을 하게 된다. 대비는 아이를 유산 시키려고 하다가 사망(...). 하지만 죽기 전에 모든 비밀을 왕에게 털어놓고, 왕은 대비의 추문과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처리한다.
한편 이렇게 처리될 운명인 약방내시[8] (허장강)의 자결 장면을 본 내시감(박노식 분)은 자옥과 정호를 죽이려는 왕실 근위대와 싸우면서 그 두 연인을 탈출시키는데... 탈출해서 오두막에서 살게 된 두 연인은 사랑하지만 육체적으로 맺어릴 수 없다는 문제 로 괴로워하다가 다시 왕의 근위대에게 잡혀간다.
결국 명종은 정호를 죽여버리고, 자옥과 검열삭제를 하며 황홀해다가 자옥이 숨겨온 비수로 살해되고, 자옥 역시 자살한다. 명종의 죽음은 그냥 병사로 처리되고, 자옥의 시체는 버려진다(...).
상궁(도금봉)의 동성애 묘사도 나오고, 내시감과 약방내시와의 장면은 웬만한 퀴어 영화의 남자 연인의 그것 이상으로 장엄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영화, '''1968년'''에 만들어졌다. [9] [10] 노골적으로 당대의 높으신 분들을 빗대었다는 평이 있다.
1986년 이두용 감독에 의해 동명의 제목으로 리메이크됐다. 여기서는 왕을 맡았던 남궁원이 내시감으로 나오고, 안성기와 이미숙이 주연이다. 명종이라 명시된 전작과 달리 길용우가 맡은 조선의 왕은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가상의 왕으로 설정했다.
2.2. 속 내시
같은 감독의 1969년작. 강신성일이 또 나온다(...). 이번에는 중종 시절을 배경으로, 반정 공신들에 의하여 중전 신씨가 폐위되자 중전 자리를 두고 후궁들 사이에서 암투가 벌어진다. 내시총감 송민달은 항상 천대 속에 살아가는 내시들도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중국이었다면 환관들이 왕 옆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지만...) '''동생''' 금화를 입궐시켜 후궁자리에 올린다(...). 쉽게 말해 자기 권력욕을 위해 동생을 후궁으로 넣은 것이다! 그러자 내시총감과 반정 공신들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벌어지고, 반정 공신들이 대비의 묵인 아래 내전으로 몰려가 내시들을 살해하고 금화까지 죽인다.
3. 개그콘서트 코너 감수성의 등장인물
- 내시(감수성) 문서 참고.
4. 인명
서구권의 인명 중에 Nash라는 성이 아주 흔한 것까진 아니어도 꽤 있다. Nash의 발음을 흔히 표기할 때 '''내쉬'''라는 표기를 많이 쓰지만 엄밀히 따지면 내시라고 쓰는 게 맞...긴 한데 아무래도 이보시오! 이 양반이 내시라니! 하는 반응이 충분히 예상되는지라 어쩔 수 없이 내쉬라는 표기가 많이 쓰이는 모양. 내쉬 문서 참고.
유대인의 남성 이름이기도 하다. 프로레슬러인 케빈 내시 또한 유대인이다.
[1] 한자도 같다.[2] 삼국지에서 허저가 조조의 신임을 얻게 된 사건이 있었는데, 조조가 자고 있을 때 하후돈이 막사에 들어가려 하자 그걸 제지하면서 '공은 인척에 떳떳한 중신이고 이 사람은 한낱 내시에 지나지 않으나, 일국의 승상이 잠을 청하는데 누군가가 들어가는 것을 내버려둘 수 없다'라는 말을 한 사건이다. 또한 장송이 양수에게 '중신이 되어야 할 이가 승상부의 내시를 하고 있다'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이와 같은 사례는 무수히 많다.[3] 임시 관직. 경국대전에는 대군사부, 왕자사부, 왕손교관 등으로 정이되어 있다.[4] 고대에는 경제력이 떨어져서 어느 나라에서나 국민 대다수는 가난하게 살았는데, 인구가 워낙 많은 중국이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환관이라도 되겠다고 할 정도의 절박한 사람이 많아졌다.[5] 신성일은 예명이다. 원래는 강씨에 이름이 신영이었는데, 나중에 국회의원 선거에 나간다고 이름을 아예 강신성일로 개명했다.[6] 실제 역사나 대사를 보면 문정왕후 맞다.[7] 보우 선사?, 단 여기서는 머리를 기른 주선태 씨가 열연했다.[8] 당연히 대비의 회임을 진단했으니 처단 1순위이다.[9]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집권 후 곧 3S 정책으로 국민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려 하였기에 영화를 폭력적이고 야하게 표현하는 것을 묵인했다. 60년대 말~70년대 중반의 성인 등급 영화를 지금 보면 표현 수위가 놀라운 것이 많다. 80년대 군사정권 또한 그것을 따라해서, 에로 영화가 융성했다.[10] 동성애 표현이 사회적으로 큰 거부감을 갖게 된 건 오히려 80년대 이후 에이즈의 폐해라든지 해외의 동성애 문화가 들어온 다음이다. 그 이전에는 일반인에겐 아예 정보가 없었기에 큰 거부감도 없었다. 사극이라서 과거에 우리 나라도 동성애가 있다는 것은 역사로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았기에 더 그랬던 것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