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김철호
金哲鎬'''

[image][1]
'''호'''
국한(國汗)
'''본관'''
김해 김씨
'''생몰'''
1901년 12월 17일 ~ 1950년 8월 14일
'''출생지'''
경상남도 고성군 춘원면 동문동
(현 경상남도 통영시 태평동)[2][3]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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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국토통일원 장관을 지낸 김용식은 그의 조카이다.[4][5]

2. 생애


김철호는 1901년 12월 17일 경상남도 고성군 춘원면 동문동(현 통영시 태평동)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용남공립보통학교(현 통영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찍이 상경하여 1925년 경기도 경성부에서 협성학교 고등과를 졸업하였고, 그해 중국으로 유학, 광둥성 소재 중산대학(中山大學)에 입학하여 김산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그는 중산대학 재학 중에 김원봉·오성륜(吳成崙)의 권유로 1926년 8월 의열단에 가입하여 선전출판부의 책임을 맡았으며, 동시에 당시 의열단이 본부를 상하이에서 광동 지역으로 옮기면서 민족전선의 통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이끌던 유오한국혁명동지회(留奧韓國革命同志會)에 가입하여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10월 상부로부터 일제침략 원흉 처단과 주요 건물을 파괴할 지하조직을 국내에 결성하라는 '국내활동'의 임무를 부여받아 귀국하였으며, 1927년 신간회 통영지회에 가입하여 총무간사와 서무부의 일을 맡아 표면활동을 벌이는 한편 비밀리에 동지를 포섭하면서 의열투쟁의 계획을 추진해 갔다.
그러던 중 1928년 6월 중국에서 의열단 중앙집행위원 서응호(徐應浩)가 귀국하자 1929년 11월 열리게 될 조선박람회를 기회로 삼아 일대 거사를 계획하다가 서응호·윤충식(尹忠植) 등과 함께 1929년 10월에 체포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1929년 12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이튿날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충신과 열사를 기념하는 사업을 구상하던 그는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되자, 같은 해 2월 경상남도 조사부 부위원장 겸 조사관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당시 권총을 휴대하고 경상남도 부산시에 은거하던 친일반민족행위자 서병두(徐炳斗)[6]를 찾아가 체포하려 했으나, 책상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차마 왜놈들을 거역하지 못했다, 친구야, 처자식을 생각해 한번만 살려줘'라는 말에 그를 체포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후 경찰서장 직위를 제의받았으나 "해방이 됐는데 왜 내가 조선사람들을 잡아 가두는 일을 해야 하느냐"며 거절하기도 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후 어느 날, 그는 서병두를 비롯한 통영 지역의 친일파들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모종의 세력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강제 연행되었으며#, 같은 해 8월 14일경 고향 통영군에서 민간인 학살에 희생당했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중국 중산대학 재학 시절, 의열단 동료 서응호(徐應浩)와 함께 찍은 사진. 우측 의자에 앉은 사람이 바로 김철호이다.#[2] 인근의 도천동·동호동·명정동·문화동·북신동·서호동·정량동·중앙동·항남동과 함께 김해 김씨 집성촌이다.[3] 출생지인 태평동 22번지에 김용식·김용익기념관이 위치해 있다.#[4] 김용식 전 장관의 회고록인 『새벽의 약속』(김용식, 김영사, 1993) 27쪽을 보면, '내(김용식)가 중학교 4년 때 나의 숙부가 중국 관동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는 것이 발각되어 서울지방법원 형사법정 제4호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는 구절이 언급되며, 김철호의 딸 김경자씨는 집안 친척이 김용식 전 외무장관이 펴낸 회고록 <새벽의 약속>(김영사, 1993)을 통해 부친이 항일투쟁 활동을 한 사실을 알고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보훈처에 포상신청을 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김용식 전 장관이 언급한 숙부는 곧 김철호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5] 아이러니하게도 조카 김용식은 1940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해방 전 청진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하는 등 친일협력 경력이 있다.[6] 창씨명 : 大山炳斗. 전직 국회의원 서 아무개의 부친으로 김철호와는 용남공립보통학교 동기동창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때 통영읍회 의원 및 경찰서 고문을 지냈으며, 지원병 모집에 큰 열의를 보였다. 대서소를 경영하기도 했는데, 해방 후에 부산으로 도피하여 은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