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산
1898년생 정치인-김산(1898)
1958년생 정치인-김산(1958)
터닝메카드 캐릭터-김산(터닝메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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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에 신흥무관학교에서 활동한 항일운동가였고, 중국 공산당에서 공산주의 활동에 앞장섰다. 이외에 시인으로도 활동하였다.
2. 생애
2.1. 출생과 가출, 3.1 운동, 그리고 일본으로
평안북도 용천군 북중면 하장동 출신으로 본명은 장지락(張志樂) 또는 장지학(張志鶴)이다. 11세 때인 1916년 가출하여 친구 친척네 집에서 지내며 공부를 하다가 중학교 입학 시험을 쳤으나 불합격했다. 그런데 길을 가다 먼저 가출했던 둘째 형을 만나 형네 집에 가서 얹혀 지내며 살았다. 이후 중학교 입학 시험을 다시 보아 합격했다. 1917년 개신교 계열 중학교에 진학, 1919년 중학교 시절 3.1 운동에 참가하다 체포되어 3일간 구류되었다. 이 3.1운동을 계기로 김산은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2] 3.1운동 이후 김산은 일본에서 공부하기로 마음먹는다.
2.2. 일본에서의 유학, 학살
김산은 둘째 형이 준 돈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김산은 친구 한 명과 방을 빌려 매일 아침 신문을 배달하는 일자리를 구하면서 도쿄제국대학에 응시할 준비를 한다. 김산은 학교가 끝나면 매일 4시에 일을 했고, 일본인들의 집을 방문하여 헌 책을 사기도 했다. 일본에 있는 부유한 한국인 유학생들은 김산과 같은 힘들게 일하는 부류의 유학생들을 '룸펜 프롤레타리아'[3] 라고 부르면서 놀렸지만, 김산과 그의 친구들은 오히려 부유한 한국인 유학생들을 '달걀 껍데기'[4] 라고 부르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김산은 일본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제국주의 일본의 군인과 경찰과는 달리 글로벌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놀랐다.
이후 그는 열심히 공부하면서 일본에서 청춘을 보내고 있었는데, 4년 뒤, 일본에서 입에 담지 못할 끔찍한 행동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는다. 이 때 당시 많은 한국인 유학생들이 일본 대신 중국으로 갔는데, 김산도 이들 중 하나였다. 김산은 일본 유학을 포기하고 소련으로 가 새로운 사상을 공부할 준비를 했다.[5]
2.3.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로
그 해 겨울에는 상하이에 도착,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하는 독립신문 교정과 식자로 활동하였다. 이듬해 1921년 일본을 거쳐 잠시 지내다 곧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쑨원이 세운 황포 군관학교와 중산 대학 경제학과에서 수학하였다.
2.4. 중국에서 공산주의 활동
1922년 김성숙을 만나 마르크스주의를 배운 것을 계기로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베이징 지부에 입당한다.(김산은 이전에 개신교 신자였다.)
1925년 7월 광저우로 가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공산 청년 동맹에 가입해 공산주의 잡지 《혁명》을 간행하고 1925년 중국 대혁명에 참가, 다음해 조선 혁명 청년 동맹 조직 위원회의 기관지 《혁명동맹》 부주필을 맡아 선언문을 작성하고, 동양 민족 연맹을 결성하였다.
1927년에는 황푸 군관학교에서 교관을 맡는다.
1929년 중국공산당의 요청으로 북경시위원회 조직부장으로 있으면서 8월의 조선혁명청년연맹 대표대회에 참가하는 등, 적극적으로 만주와 화북 지방 한인들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켰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홍콩, 상하이, 베이징 등지에서 활동하다 베이징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진 뒤 조선에서 심문을 받다 다음해 4월 풀려났다.
이어 공산당 북부 지구 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중 결혼해 잠시 철도 노동자로 일했고, 1936년 7월에는 상하이에서 조선 민족 해방 동맹을 창설하고, 8월에는 조선 혁명가 대표로 선발되었다. 1937년에는 항일 군정 대학에서 물리학,화학, 수학, 일본어, 한국어를 강의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해인 1938년, 캉성(康生)의 지시로 트로츠키주의자이자 일본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여기엔 민생단 사건도 영향을 주었다. 해당 문서 참조. 훗날 김산의 아들이 아버지 김산의 명예 회복을 요청한 재심의 요구하였고, 1983년 1월에 중국 공산당 중앙 위원회 조직국에서 김산이 일본의 간첩임과 사상 변절자라는 근거가 없고 올곧은 인물이었음을 인정받아 사후 45년만에 공식적으로 명예가 회복되었다.
3. 《아리랑》
그의 삶이 이렇게 자세히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은 1937년 말, 미국인 작가 님 웨일스(Nym Wales)를 만나 3개월 동안 20여 회에 걸친 구술을 통해 그의 혁명적 생애를 다룬 《아리랑의 노래 Song of Ariran》의 초고가 완성되어 책으로 출간된 덕분이다.
1941년 뉴욕에서 《아리랑》이 출판되었고, 한국을 포함해 세계 곳곳에서도 출간되었다. 웨일스는 그를 '''"현대의 지성을 소유한 실천적 지성"'''이라고 격찬하였다.
4. 여담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에 김산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고, 200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60주년 기념식 때 중국에 사는 그의 외아들 고영광[6] 을 초청하였다. 그리고 2018년 8월 15일에는 중국 베이징에 있는 주중한국대사관에서 열린 제73주년 광복절 경축식에 참여했다.
또한 캉성이 한국인들에게 평가가 안좋은 이유중 하나다.
김산의 생애와 명예 회복 과정을 팟캐스트 방송 이이제이에서 100회 특집으로 다루었다.
[1] 인근의 북현동, 동양동, 동송동, 원송동, 추정동, 진흥동, 수봉동, 가성동과 함께 인동 장씨 집성촌이다.[2] 그러나 정작 김산 본인은 3.1운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1919년 어느 가을날, 조국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조국을 원망했다. 그리고 울음소리가 투쟁의 함성으로 바뀔 때까지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조선은 평화를 원했으며, 그래서 평화를 얻었다. 저 평화적 시위가 피를 뿌리며 산산이 부서져버리고 난 이후에. 조선은 멍청하게도 세계열강을 향하여 국제정의의 실현과 민족자결주의의 약속 이행을 애원하고 있는 어리석은 늙은 할망구였다. 결국 우리는 그 어리석음에 배반당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조선 땅에 태어나서 수치스럽게도 이와 같이 버림받은 신세가 되어 버렸을까? 나는 분개했다. 러시아와 시베리아에서는 남자건 여자건 모두가 싸우고 있었고, 또한 이기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자유를 구걸하지 않았다. 그들은 치열한 투쟁이라는 권리를 행사하여 자유롭게 쟁취하였다. 나는 그곳에 가서 인간해방의 비책을 배우고 싶었다. 그런 후에 돌아와서 만주와 시베리아에 있는 200만의 조선 유민들을 지도하여 조국을 탈환하겠다고 생각했다." 출처: 한국 근대사 산책 6권: 사진신부에서 민족개조론까지/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3] 가난하고 일하며 공부하는 학생들이라는 뜻으로 쓰였다.[4] 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말랑말랑하다는 뜻으로, 옛 조선 노동자들이 양반계급들을 부르던 말이다.[5] 사실 김산은 일본에서 공부하면서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사실상 아나키즘을 공부하고 싶었을 것이다.[6] 아버지가 일본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써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처형당했을 때, 아들이 피해를 입을 것을 걱정한 어머니가 아들의 성을 고려에서 따온 고(高)씨로 바꾸었다. 이후 성장한 고영광은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수 년간 애를 썼는데, 그는 1979년부터 후야오방(胡耀邦) 전 공산당 총서기에게 두 차례 편지를 보낸 것을 포함해 지도자들에게 탄원서를 썼다. 이후 이루어진 수 년간의 조사 끝에 마침내 당시 처형이 잘못됐다는 발표를 이끌어냈고, 1983년 1월 27일에 중국 공산당이 김산의 혁명 공로를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