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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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 라는 농담이 있었을 정도로 60~70년대를 풍미했던 한국의 소울가수다.'''한국 최초의 섹시소울 여가수'''
엠넷 레전드 아티스트 100에서의 소개문구
2. 데뷔 전
1951년 춘천에서 5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시절부터 어른들이 부르는 판소리를 그대로 따라 부를 만큼 노래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춘천여중, 춘천여고를 진학하면서 외모, 활동적인 성격으로 다방면으로 두드러지는 모습을 나타내어 당시 뭇 춘천의 남고생들에게는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는 미대를 갈 생각으로 미술을 준비했고, 원하는 대학에 시험을 쳤지만 실기는 합격했으나 필기에서 떨어져 당시 후기대학인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로 진학했다. 본인의 말로는 비슷한 예술 분야라서 연극영화과를 선택했다고 한다.
3. 데뷔 및 활동
그렇게 대학교에 진학하였으나 입학과 동시에 신중현의 눈에 띄어 1969년 늦기 전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등의 곡을 수록한 1집을 발표하여 가수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신중현의 매니저와 김추자의 형부가 친한 사이었는데, 형부가 다리를 놔줘서 신중현의 사무실에 찾아가게 되었고, 노래를 들어본 신중현이 곡을 하나 던져주는데, 그게 바로 데뷔곡인 '늦기 전에'. 신중현 씨의 회고에는 당시 스타 가수였던 김상희의 녹음을 봐주느라 정신이 없는데도 며칠을 하루종일 와서 기다려서, 한번 테스트를 해보고 의외로 쓸만한 재목이겠다 싶어서 늦기 전에를 주었다고 한다. 이후 님은 먼 곳에 (1970), 거짓말이야 (1971) 등 히트곡을 내놓으며 김추자는 센세이셔널한 인기를 누리게 된다. 큰 키에 육감적인 몸매, 화려한 무대, 그리고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몸에 쫙 달라붙는 옷을 입고 공연을 하던 그녀의 모습은 많은 남성들을 매혹하게 만들기 충분했으며, 당시 유행했던 담배인 청자와 더불어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말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김추자는 데뷔 이후 동양방송, 문화방송, KBS 등 당시 방송 3사에 전부 출연하며 얼굴을 알렸다. 당시 선우영아, 김상희, 이미자, 정훈희, 문정선, 최희준, 배호, 나훈아 등과 출연하여 음악의 자웅을 겨루기도 했다. 당시 취입한 님은 먼 곳에는 충무로에서 모든 영화감독이 타이틀로 넣으려고 경매입찰까지 일어났고, 당시 음반 타이틀 매매로는 사상 최고가인 50만원을 달성하기도 했다.[2] 살인적인 전국 스케줄에 방송을 여러번 빼먹은 탓에 KBS와 가수협회로터 출연정지 징계를 받기도 했고, 하기한 소주병 테러로 얼굴이 찢어지기도 했으나 재기에 성공했고, 1972년 MBC 10대가수가요제에서 특별상 수상을 받기도 했다. MBC에서 수상한 뒤에는 MBC에 주로 출연했고, 데뷔한 지 3년만에 김추자 단독 방송까지 편성되는 등 인기의 절정을 누렸다.
1973년부터는 TBC에 다시 출연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최정상급 프로그램인 쇼쇼쇼에 자주 나오게 된다. 이 당시 김추자는 이미 자신만의 색을 철저하게 구축하는 데 완성했고, 무대와 연출 등 다른 가수들과는 차별화된 모습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당시 음악방송은 가수가 가운데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모서리에는 지휘자의 지휘 아래 방송악단이 반주를 하는 일률적인 모습이었는데, 김추자는 넓은 세트장을 자유자재로 쓸 줄 아는 사람이었고, 당시 가장 우수한 방송 인력들이 모인 TBC와 시너지를 일으켜 방송이 아닌 하나의 공연이자 연극을 기획하기에 이른다.
4. 시련
당대 탑스타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던 만큼 여러가지 소문들과 사건사고도 그녀를 따랐는데, 대표적인 소문은 바로 간첩설이었다. 1971년 거짓말이야로 활동을 하고 있을 당시 그녀가 노래와 함께 지르는 손짓이 북한과의 교신을 의미하는 것 아니냐고 하여 실제로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후에 김추자가 밝힌바에 따르면 박정희의 초대를 거절한 것이 간첩설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1971년 여름께 김추자가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방송계의 구태를 더이상 참을 수 없고 관행처럼 내려오는 적폐를 묵과할 수 없음이 원인이라고 밝힌 그에 대해 가수협회는 1년 방송활동정지라는 중징계를 내린다. 그전에는 KBS에서 촬영무단불참 등을 이유로 1개월 출연정지 처분을 내렸었다. 김추자는 당시 급부상하던 신인 가수로 방송활동은 물론 전국 순회 공연 일정이 빡빡했는데, 지금이야 교통편이 발달해 전국 행사를 하루에 두세 개씩 뛸 수 있지만, 고속도로가 막 뚫리기 시작했었고 고속철도는 꿈에도 꿀 수 없는 당시에는 한번 지방공연을 가면 적어도 하루는 지내야 했다. 당시 김세레나와 배호 등과 부산 공연을 갔던 김추자는 자신만 징계를 받았다며 부당함을 호소했고, 이를 버릇없는 행위로 본 업계가 중징계를 내린 것이다.
그러나 김추자도 할 말은 많았다. 당시 가뜩이나 연예인을 딴따라로 지칭하며 사회적 대우도 낮았었고, 게다가 신인의 경우 아무리 출연제의가 많이 들어와도 실질적인 출연료 수입은 적었다. 게다가 세금도 꼬박꼬박 냈어야 했으니 방송을 많이 하면 인지도만 오를 뿐 실질 수익은 기대하기 어렵고, 오프라인 무대를 돌며 수익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김추자는 이러한 신인 연예인에 대한 불평등을 고발했다. 가수협회도 찔린 게 있었는지 3개월만인 가을께 징계가 해제되고 김추자는 12월에 컴백 무대를 준비한다.
하지만 김추자가 겪은 가장 큰 사고는 아무래도 1971년 12월 5일 오전 11시, 김추자의 매니저인 소윤석이 자신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는다며 소주병을 그녀의 얼굴에 휘둘러서 얼굴이 난자당한 사건일것이다. 사건 직후 그녀는 곧바로 명동 고려병원에 긴급 후송되어 응급수술을 받았고, 이 사건으로 그녀는 총 6번에 걸친 성형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사고가 난 지 4일 만인 9일 서울시민회관에 등장해 예정되었던 컴백쇼를 화려하게 마무리했다. 물론 얼굴에 붕대를 감은 채 무대 위에 올랐고 여론의 관심이 뜨거웠다. 이후 무인도 (1974) 등의 히트곡들을 내놓으며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한다.
하지만 1975년 12월 한국 음악계를 얼어붙게 만든 가요계 정화운동과 대마초 사건에서 그녀도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신중현의 사무실에서 한두 번 펴봤으며 자신의 것이라고 지목당한 대마초에는 죄다 곰팡이가 슬은 등, 그녀의 혐의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상당히 많지만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가요계를 떠나게 된다. 이후 3년 후 1978년 다시 리사이틀을 열고 재기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으며, 이후 1981년 당시 동아대 정치학과 교수인 박경수씨와 결혼하면서 연예계를 완전히 떠나게 된다. 참고로 김추자가 한창 활동하고 있을 70년대 박경수 씨는 네브라스카 대학교에 유학을 가 있었던지라, 처음 김추자를 봤을 때 누군지 몰랐다고 한다.
5. 그 후, 그리고...
이후 1녀를 두고 시어머니를 모시며 철저하게 가정주부로 살며, 언론의 인터뷰도 피하고 1988년까지 가끔 무대에 서다 연예계를 완전히 떠났다. 그 후 2000년 컴백을 알리지만 이는 김추자의 유명세를 이용한 일련의 사기였으며, 그녀는 다시 10여년을 가정주부로 지내게 된다. 하지만 가정주부로 지내는 도중에도 체중관리를 하고 있었던 점으로 보았을때 그녀도 언젠가는 가요계에 복귀할 꿈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드디어 지난 2014년 3월 14일 컴백을 발표했다. 이전의 수록곡들과 이번에 새로 작곡한 곡들이 포함된 앨범을 발표한다고 하며 5월 16, 17일 양일간 콘서트도 개최한다고 한다. 6월 28일 콘서트를 개최한다.
그리고 33년만에 앨범을 발표했다. 2019년 현재에는 고향인 춘천 인근에서 남편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있어 주변 지인들이 많이 걱정하고 있다.
6. 대표곡
7. 여담
- LG 트윈스의 응원가로 '거짓말이야' 가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