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호

 

'''배호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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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대상 대상'''[10]
최희준
김상희
-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
(1967년)

'''배호'''
이미자
'''돌아가는 삼각지'''
섬마을 선생님
'''(1968년)'''

남진
이미자
'''가슴 아프게
여자의 일생'''
(1969년)


<colbgcolor=#C60C30><colcolor=#FFFFFF> '''배호
裵湖
'''
'''본명'''
배만금[1]
'''출생'''
1942년 4월 24일
산둥성 지난시
'''사망'''
1971년 11월 8일 (향년 29세)
서울특별시 성북구[2]
'''국적'''

'''학위'''
삼성중학교 (중퇴)
'''종교'''
개신교
'''데뷔'''
1963년 "굿바이"[3]
'''활동'''
1963년 ~ 1971년
1. 개요
2. 생애
3. 주요곡
4. 가족
5. 여담
6. 남아있는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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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개속에 가버린 사람'''

- 배호의 히트곡 중 하나. 그의 인생을 단편적으로 설명해 주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혼으로 노래한 보컬리스트'''

엠넷 레전드 아티스트 100에서의 소개문구


2. 생애


중화민국 산둥 성에 거주하다가 3살 때 대한민국의 광복으로 독립운동가 출신의 부모를 따라 귀국했다. 어릴 적부터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1955년 과음으로 인한 간경화로 사망하고 그 이후 부산에 있는 이모의 집에 내려가 살다가 집안 사정이 더욱 어려워지자 부산 삼성중학교를 중퇴하고 어머니의 권유로 서울에 있는 삼촌 김광빈의 집으로 상경하였다. 참고로 "배호"라는 예명도 이 때 김광빈이 지어주었다.
1958년부터 1964년까지 삼촌 김광수와 김광빈의 악단, 미군부대, 캬바레, MBC 악단, 김인배 악단 등에서 드럼을 연주하며 음악활동을 시작했으며, 6~7인조 캄보 밴드인 <배호와 그 악단> 을 결성해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이후 김광빈에게서 받은 <굿바이>, <두메산골> 등의 곡을 취입하지만 별다른 히트를 치지 못했고 여전히 가수를 부업으로 하는 드러머 생활을 이어갔다.
그가 부른 초기의 곡들은 트로트가 아닌 재즈나 라틴음악 등이 섞인 스탠더드 계열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1967년 배상태가 작곡한 노래 <돌아가는 삼각지>가 대히트하였고 그는 곧 1960년대 최고의 인기 가수로 자리잡았다.
그 이후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누가 울어>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10대 가수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1966년부터 앓아온 신장염으로 투병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건강이 회복될 틈도 없는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며 몸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그러다 1971년 라디오 출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맞는데 저체온증으로 감기 몸살에 걸리고, 투병생활로 면역력이 약해 몸살이 악화되면서 끝내는 졸도, 여기에 복막염까지 합병증으로 겹쳐 1971년 11월 7일, 어머니와 여동생, 그의 최고의 동반자인 작곡가 배상태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29세라는 짧은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대구 공연에서 만난 여성 팬과 약혼까지 했는데, 그를 계속 간호했다고 한다. 결국 배호가 모진 말을 해서라도 임종 직전에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당대의 사회상을 고려하면 팬의 미래(= 새로운 짝을 찾는 것)를 위해서 한 일이었다고 할 수있다. 그의 장례식에서는 최희준, 현인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참석하고 소복을 입은 여인들이 길게 늘어섰으며 장례식에서는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낀 장충단공원> 등 고인을 대표하는 히트곡과 함께 유족들과 동료들, 스승들의 서글픈 흐느낌만이 울려퍼젔다.[4]
경기도 양주시 신세계 공원묘지에 안장되었으며 여기에 어머니와 동생의 묘소까지 함께 있다.[5]
1981년 MBC에서 특집으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수' 1위에 선정되었고 2005년엔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은 국민가수 10인'으로 선정되기도 하는 등 요절한 후에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배호와 함께 일한 음악인이 훗날 흡사한 목소리를 가진 가수를 발굴하고자 했지만, 음악 실력 및 목소리 활용 능력 측면에서 차이가 있어 포기했다는 일화도 있다. 신장염에 + 복막염까지 앓는 중에도 박자, 음성에 흐트러짐 없이 정확한 음정을 선보인 고인의 그것에 비해 손색이 있었기 때문.[6]
배호의 특집 다큐멘터리에서 프랑스에서 재즈바를 운영하는 프랑스인이 소개되었는데, 그가 배호의 곡을 라이브에서 연주하며 배호를 알게 된 외국인들이 늘어났다고 한다.
또한 2003년 10월 20일에 대한민국 가요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옥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으며 2003년부터 배호 가요제가 열리고 있다. 2005년 5월 20일에는 소담출판사에서 '''배호 평전'''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삼각지의 한 거리가 '''배호 길'''로 명명되었다.

3. 주요곡


  • 누가 울어
  • 돌아가는 삼각지
  • 안개 낀 장충단 공원
  • 마지막 잎새
  • 안개속에 가버린 사람
  • 영시의 이별[7]
  • 파도
  • 비내리는 명동
  • 울고싶어
  • 두메산골
  • 오늘은 고백한다
  • 막차로 떠난 여자
  • 비내리는 경부선
  • 비겁한 맹세
  • 능금빛 순정
  • 굳바이[8]
  • 비오는 남산
  • 황금의 눈
  • 황토십리길
  • 만나면 괴로워
  • 검은 나비
  • 이 순간이 지나면
  • 물방아 고향

4. 가족




5. 여담


돌아가는 삼각지의 배경인 삼각지 로터리 (현재 삼각지역 교차로) 에는 입체 교차로가 있었지만 1967년 12월 26일 개통되었다가 수도권 전철 4호선서울 지하철 6호선이 교차하는 대공사에 휘말리면서 방해물로 전락해 결국 1994년 7월 9일 철거되었다.
현재는 삼각지역 인근에 <돌아가는 삼각지> 노래비, 배호길, 배호 동상, 배호 판넬 등이 설치되어있다.
그러나 그림이나 판넬이나 동상이나 퀄리티가 영 좋지 않다. 그림은 전문가의 솜씨 같지가 않고, 동상은 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광이 번쩍번쩍 나는 게 너무 싼티가 난다. 판넬은 사진과 비슷하게 그린다고 그린 것 같은데 오히려 본인보다 못생겼고, 심지어 동상 근처의 벽에 돌아가는 삼각지를 소개하는 짤막한 안내판이 붙어 있는데 이 안내판은 맞춤법이 틀렸다(...).
그의 창법은 일반적 트로트 가수들과 달리, 스탠더드 팝의 남자가수들이 보여준 중후한 저음을 그 특유의 바이브레이션으로 강조하고 절정부에서 애절한 고음을 구사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고음이 올라가면 목소리 톤이 바뀐다. 대표적으로 돌아가는 삼각지에서 서글피 찾아왔다~ 부분.
하춘화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 배호가 죽기 사흘 전 하춘화가 그를 찾아갔을 때, 배호는 극심한 고통으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너 왔구나" 라고 말한 뒤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고.[9] 하춘화는 배호의 유족들과 살아 생전 가끔 연락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또한 지금은 영상이 남아 있지 않지만, 배호는 살아생전 하춘화와 함께 무대에 선 적도 있다고 한다.
배호의 유가족들도 평탄치 못한 삶을 살아야 했다. 배호가 가수활동 등을 통해 구입한 주택과 여러 재산이 있었지만 정신질환자였던 여동생과 심장병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어머니가 사용하면서 수입이 없지만 지출이 생기다 보니 더 가난 속에 시달려야했다.
여동생은 아주 짧은 기간동안 가정교사로 활동했었는데 오빠의 사망 뒤 조울증부터 시작되며 오랜기간 동안 여러 질병으로 투병생활을 하면서 2003년 정신질환으로 비롯된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를 마지막까지 돌보던 목사님에게 웃으며 '''"목사님 사랑해, 정말 고마워."'''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여동생도 독신이었고 따라서 남은 가족은 없다. 그나마 배호의 5촌 조카의 혈통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들 또한 생전의 배호와 달리 가요계와는 상관없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전국에 그의 노래비가 7개 세워져 있다. 그중 정식으로 4개의 비석이 있는데, 삼각지에 돌아가는 삼각지의 노래비와 그의 동상이 있고, 배호의 묘지에는 '두메산골'의 노래비가 있다. 또한 경주시와 강릉시에 각각 '마지막 잎새' 와 '파도'의 노래비가 있다.
배호와 함께했던 악단의 멤버들은 대부분 생존해 있다. 그들과 팬들에 의해 삼각지역에 세워진 동상 앞에서 정기적으로 배호가요제와 모창 대회를 개최한다.
참고로 우승자 중 조명섭처럼 컨셉을 잡으며 활동하는 가수가 있는데, 활동명은 배오 (본명 심우경)다. 영상을 보면 정말 선글라스를 낀 풍채며 창법 등이 배호와 비슷하다.

6. 남아있는 영상


활동 기간도 타 가수에 비해 길지 않았고 영상 기술이 많이 발전하지 못한 시기에 활동했다보니 안타깝게도 그가 실제로 노래를 부르는 영상은 몇 개 밖에 남지 않았다. 팬들에게는 매우 아쉬운 부분.

남정임 주연 "여군에 가다" 中 '안개 속에 가버린 사람'



[1] 사망 당시 보도된 기사 가수 裴湖(배호)씨死亡(사망) 참고[2]서울특별시 강북구 미아동[3] 당시에는 "굳바이"로 적었었다. 1986년 외래어 표기법 제정 이전이었기 때문.[4] 특히 배호가 활동할 당시 트로트는 전반적으로 슬픈 가사와 멜로디를 가진 장르였고, 당연히 장례식은 더욱더 눈물바다가 될 수 밖에 없었다.[5] 이 가족묘지에 아버지 배국민과 첫째 동생 천금은 함께하지 못하였다.[6] 나중에 중견가수인 설운도, 록가수였던 그룹 노라조가 무대에서 배호의 노래를 불렀다. 특히 노라조는 <돌아오는 삼각지> 편곡에 공을 들여 고음에 능한 이혁이 개성을 담아 소화하고자 한 모습이 호평받았지만, 이 역시 고인의 중후한 노래를 기억하는 팬분들은 못내 아쉬움을 보였다는 후문.[7] 발표 당시에 영시(오전 12시)는 통금 시간대이기 때문에 영시의 이별은 있을 수 없다는 웃기는 이유로 금지곡 처분을 받았었다.....[8] 지금은 "굿바이"지만 취입 때에는 당시의 기준 상 "굳바이"로 표기했다.[9] 참고로 그때도 그의 나이는 고작 29살이었다 물론 현재와 70년대의 평균수명은 다르지만 그당시에도 29살은 어린나이었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