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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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별명은 낙화유수. 제1공화국 시절 이정재가 이끌던 동대문파 소속의 조직폭력배.
2. 생애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경동중학교[1] 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52학번으로 입학[2] 하였다. 낙화유수라는 별명도 이 때 생긴 것이라고.
전쟁이 끝나자 서울로 올라가 동대문파에 입단하여 행동대장으로 활동하였고, 유지광의 휘하에 있으면서 자유당 정권의 비호 하에 여러 정치폭력 사건에 참가하였다. 대표적으로 고대생 습격 사건이 있으며, 이 때 주요 용의자로 활동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다 4.19 혁명으로 동대문파가 몰락하고 5.16 군사정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주최 하에 혁명재판이 열리자, 이정재를 포함한 동대문파가 검거되었고 김태련 역시 붙잡혀서 재판을 받았으나 곧 석방되었다.
이 때를 두고 김태련이 증언하기를, 대학 시절 그와 친했던 당시 혁명재판부 양준모 판사가 재판장에 선 그를 보고 "김태련, 아니 자네가 외교관이 된 줄 알았는데 어떻게 여기에 서 있느냐"며 기가 막혀 했다고 한다.[3] 이렇게 대학 동기들이 그의 석방을 위해 여러모로 힘을 써주어서 큰 처벌 없이 곧 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혁명정부에서 전라북도 군산시장과 전국구 국회의원 자리를 제안했는데 본인이 거절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진실은 저 너머에..
석방 이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4] , 유지광의 장례식에 참가했다는 사실이 신문기사에 남아있고, 예순이 넘은 나이에 다큐멘터리에 출연하여 50년대 자신의 활동상에 대해 여러 증언을 하였다. 고대생 습격사건을 회상하면서 우연한 충돌이었다고 자신을 변호하였고, 당시에는 자신이 했던 일이 옳은 것인 줄 알았다고 전했다. 말년까지도 이정재의 은혜를 강조하는 발언을 해오며 동대문파를 옹호했다.
정의사회실천모임 등 우익단체의 고문으로 재임하였고, 개인적으로도 경호회사를 운영하는 등 죽기 직전까지 여러 사회활동을 하다가 2006년 뇌출혈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원로 조폭의 사망이라 일본 야쿠자와 삼합회에서도 비밀리에 조문을 보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3. 대중매체에서
3.1. 드라마 야인시대
3.2. 소설 무풍지대
장호근의 소설 무풍지대에선 동대문에 들어가기 전 부산에서 활동했던 주먹패이자 건중친목회 부산지부 소속 조직중 하나인 신진파의 휘하 조직 소속으로 나왔는데, 같은 조직 소속인 김택근과 박기남등이 권총 살인사건으로 종신형이나 5년/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아 사실상 조직이 해체수순을 밟게 되자, 마침 다른 건으로 수배중이던 와중에 당시 부산에서 유명했던 절도범을 저먼스플렉스로 잡으면서 경찰에 자수 겸 신고를 했고 약간의 징역형을 살다 모범수로 조기석방되어 나온 뒤 서울로 올라온 직후 별동대에 들어간걸로 나온다.
[1] 현 경동고등학교. 당시에는 경동중학교로써, 중/고등학교를 통합한 6년제였다.[2] 당시 서울대는 부산에 임시캠퍼스를 개설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3] 대학생은 물론이고 고등학생만 돼도 인정받던 시기에 서울대학교 학생이었으니..[4] 물론 본인이 주장하기로는 김종필과 개인적인 친분을 이루기도 했고, 외무부 장관에게 비밀업무를 의뢰받아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여 국회오물 투척사건을 일으킨 김두한을 두들겨 패주었다는 등 여러가지 주장을 하였으나, 역시 진실은 저 너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