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학부/법과대학
1. 개요
1905년 보성전문학교 법률학전문과로 설립되었고 2009년 이후 신입생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되기까지 고려대학교의 간판으로 군림하였던 단과대학.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 등 주요 법조계 요직에 있어 엄청난 아웃풋을 자랑한다.
예를 들어, 법조계에서 고대 법대의 위상을 알게 하는 것으로, 2017년 박근혜에게 4연킬을 먹인 법관들, 즉 탄핵을 결정한 이정미 헌재소장 대행, 이재용을 구속한 한정석 판사, 박근혜를 구속한 강부영 판사, 이재용에게 실형을 내린 김진동 부장판사 등)이 모두 고대 법대 출신이라는 것을 들 수 있다.
줄여서 '고대 법대', 아주 줄여서 '고법'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로스쿨 전환으로 법대 학부는 2018년 2월부로 완전 폐지되었고, 기존 법대 수료생(4학년을 마친 졸업유예자)들은 영어성적제출 등과 같은 졸업여건과 상관없이 2018년 2월부로 '''강제 졸업처리''' 되었다.
1.1. 대법관
법원에서는 7명의 대법관을 배출했는데, 김중서, 이정우, 이준승, 유지담, 김창석, 박정화, 이동원 대법관이 그들이다. 이동원, 박정화 대법관은 2018년 현재 현직이다.
1.2. 헌법재판소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는 한병채, 정경식, 주선회 재판관과 이정미 재판관이 고대 출신이고, 그중 한병채 재판관을 제외하면 모두 고법 출신이었다.
1.3. 검찰총장
지금까지 검찰총장은 9명을 배출했고, 美 군정기 검사총장을 지낸 이종성을 포함하면 10명이다.
1.4. 법무부장관
고대 출신 법무부 장관 10명 중 8명(나머지 둘은 상학과 출신의 이종원 장관, 정외과 출신의 김정길 장관.)이 고법 출신이다. MB정권의 이귀남 법무부 장관과 문재인 정권의 문무일 검찰총장이 현재까지 마지막 고법 출신이다.
1.5. 로펌
로펌 대표변호사도 항상 일정 비율은 고법 출신이다. 2014년 기준으로 로펌 대표변호사의 숫자는 설법 42명, 고법 8명, 설경 2명, 성법 1명, 한법 1명이다.
1.6. 정계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의 수장을 모두 한 명 이상씩 배출하였다. 임채정 국회의장, 정세균 국회의장, 허정 과도정부 수반, 김용무 대법원장, 이정우 대법원장 권한대행, 김병로 대법원장이 그들이다. 현재 법조계에서 고려대 출신은 전체 검사 중 18.6%, 전체 판사 중 15.8%인데 이 중 대부분이 법대 출신이다.
2. 역사
2.1. 연혁
1905년 충숙공 이용익 선생이 수업연한 2년의 보성전문학교 법률학전문과 설립
1907년 01월 법률학전문과를 법률과로 개칭하고 수업연한을 3년으로 연장
1915년 일제에 의해 사립보성법률상업학교 법률과로 격하됨
1922년 보성전문학교 법과로 복원됨
1932년 중앙학원 보성전문학교 인수
1934년 안암동 교사로 이전
1944년 일제에 의해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 법률과로 강제 개명됨
1945년 해방, 보성전문학교 법과로 다시 환원됨
1946년 종합대학교인 고려대학교 내의 4년제 정법대학 법률학과로 승격됨
1951년 대구 임시교사 개교
1953년 안암동 교사 재개교
1955년 정법대학을 법과대학과 정경대학으로 분리, 입학정원 각 80명 법과대학 법학과·행정학과 신설
1981년 행정학과의 정경대학 이전으로 법학과 단일학과 단과대학으로 전환
1984년 법학관 준공
2005년 법과대학 설립 100주년
2007년 03월 국내 최대 법학도서관인 해송법학도서관 개원
2009년 법학전문대학원으로 전환됨 (학부 신입생 모집 종료)
2018년 학부생 운영 폐지
2.2. 국내 최고(最古)의 법과대학
1905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법과대학이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전신인 법관양성소가 1895년에 세워져 연도가 더 빠르다고는 하나, 1년제의 국가관리 양성기관으로서 학문적 독립성을 갖춘 교육기관이라 보기 어렵기 때문에(오늘날의 사법연수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법과대학의 효시는 고대 법대가 맞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근대적 법학 교육의 시작'이라는 측면에서 법관양성소보다 늦을 수밖에 없고, '대학'이라는 구체적 실체를 놓고 보더라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비교하면 보성전문학교는 '대학'이 아닌 전문학교에 불과하기 때문에, 고대 법대는 그냥 어중간한 위치를 점할 뿐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다만 법관양성소의 역사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의 적통을 과연 서울법대가 계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시설만 잠시 물려받았을 뿐이지, 교수진은 아예 전체가 바뀌었고, 학교운영제도 역시 미국식 학제로 바뀌었으며, 경성제대 법문학부 출신 학자 가운데 주력은 서울법대 교수보다 오히려 고대법대 교수로 더 많이 부임하였기 때문.
2.3. 학문적 전통
일제 시절에 당대 최고의 조선인 변호사였던 허헌과 가인 김병로, 해공 신익희, 법철학자 안호상, 헌법학자 유진오, 법철학자 최용달, 상법학자 최태영, 민법학자 진승록, 형법학자 이건호 등 저명한 학자들이 보성전문 법과의 교수진에 포진하고 있었다. 경성제국대학 법학과의 교수진이 전원 일본인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보전 법과의 교수진은 국내 법학자들 가운데 최고의 인물들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이후에는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 총장의 리더십 아래 민법학자 현승종, 국제법학자 박재섭, 법철학자 이항녕, 형법학자 남흥우, 상법학자 차낙훈 등이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의 학맥을 이어나갔다.
1980년대 이후에는 민법에서 김형배, 조규창, 형법에서 김일수, 배종대, 상법에서 이기수, 헌법에서 계희열 등 독일유학파 출신들이 고려대학교의 학풍을 주도하면서, 주로 일본 번역 법학에 의존하던 분위기에 맞서는 대항마 역할을 담당하였다.
1990년대에는 김일수, 배종대, 이상돈 등 고려대학교 형법 교수들의 학문적 역량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1]
1990년대 중후반에는 당시 고대 법대에 임용된 상법 김정호, 행정법 류지태, 민법 김제완 교수 등의 강의력이 워낙 좋아, 고대 법대생들의 실력이 급상승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에는 고대 법대의 학문적 위상이 다소 떨어진다는 평가가 있기도 했다. 고대법대 학-석사 졸업, 독일 법대 박사 졸업이라는 이른바 고법 성골라인을 밟은 교수들의 실력이 옛 스승의 실력만 못하지 않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
같은 기간 동안 서울대 법대가 양창수, 윤진수와 같은 탁월한 실력자들을 교수로 초빙하여 학문적으로 급성장한 것과 대조된다.
물론 우리나라 법학도 이제는 많이 발전했고, 각 전공별로 세분화가 상당히 이루어짐으로써, 옛날 1980년대와 같이 한 전공에 도미넌트한 법학자가 나오기는 어차피 어려워졌다는 분석도 있다.
예를 들어 형법이라면 예전처럼 형총-형각-형소로만 나뉘는 게 아니라, 경제형법, 환경형법, 사이버형법, 보건형법, 마약형법, 조세형법, 교통형법, 정보형법, 양형법, 군형법 등으로 나뉘고 있고, 민법이라면 예전처럼 계약-물권-불법행위-친족-상속으로만 나뉘는 게 아니라, 매매-도급-금전채권-토지법-동산담보물권법-신탁법-성년후견법-시효법-집합건물법-소비자법-제조물책임법-주택임대차법-상가임대차법-여행계약법-의료법-손해배상법-부부재산법-이혼법-친자법-입양법-유증법-법정상속법-유류분법 등으로 수십 갈래씩 나뉘는데, 예전처럼 대학자가 나올 수 있겠느냐는 것. 그리고 옛 스승들의 그늘이 너무 커서 후진들이 햇빛 보기 어렵다는 말도 있다.
2.4. 학생운동의 전통
일제 강점기 초부터 남형우, 김립, 윤해, 이춘숙 등 보전 법과의 졸업생들 가운데 다수가 항일운동을 펼쳤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그 외에도 서상일 등 숱한 졸업생들이 만주와 대구 등지에서 독립운동가로 활약하는 등 보전 법과생들은 국내 그 어느 학교 어느 학과 학생들보다도 더 민족 독립에 헌신한 사람들의 비율이 높은 편이었다.
3.1 운동 당시에는 실질적으로 만세 시위를 주도한 학생대표가 바로 보전 법과 재학생인 강기덕이었다. 그 후에도 보전 법과는 전통적으로 데모 기질 충만한 민족독립운동, 사회주의운동의 투사들을 무수히 길러낸 학교로 명성이 높았다. 일제시대 최고의 민족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가장 유명한 조선인 출신 변호사였던 허헌도 보전 법과 출신이었는데, 해방 이후 월북한 허헌은 김일성대학교 초대 총장으로 임명되었을 정도로 조선 지식인 사회에서 무게 있는 인물로 인정 받고 있었다.
해방 이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으로 개칭된 이후에도 엘리트 좌파 학생들이 엄청 많은 걸로 유명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서도 "서울의 ㄱ대학 법과는 사상적으로 중무장되고 행동적으로 과격한 그야말로 골수 사회주의자들의 집합소였다."라고 묘사되고 있을 정도이다.[2] 한국의 체 게바라로 불리던 이현상 남부군 총사령관과 이호제 강동정치학원 원장도 보전 법과, 즉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출신이었다.
물론 고대 법대에는 좌파 학생들만 가득했던 것은 아니며, 이철승 같은 우파 학생운동 지도자도 고대 법대 소속이었다.
자유당 정권 말기 4.18. 의거의 주역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학생들이었다.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 시절은 물론이고 서슬 퍼런 유신 시절에도 전국에서 가장 극렬하게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던 학생들은 바로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학생들이었다.
예를 들어 1971년 광주 대단지 사건이 일어났을 때, 고려대 지하신문 '한맥'을 통해서 이를 폭로하고 그 실상을 전세계에 알린 사람은 법학과 70학번 조상호였다. 그로 인해 조상호는 경찰에 체포되고 강제징집되어 최전방에서 근무해야 했다. 후에 조상호는 나남출판사라는 사회과학 전문 출판사를 설립하여 출판운동을 통해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기여하였다.
박정희가 죽고 짧은 서울의 봄이 찾아왔을 때,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은 법과대학 74학번 신계륜이었는데, 그때 신계륜의 주장대로 서울역 앞에서 학생들이 계속 버티며 투쟁했다면 광주의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3]
그 후 전두환-노태우 정권기에도 전국적인 대규모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것은 고대 법대생들이었다. 특히 85학번 오영식은 제2기 전대협 의장이었고[4] , 91학번 정태흥은 제3기 한총련 의장이었다.
물론 민주화 이후 고대 법대의 학생운동은 급격히 쇠퇴하였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 고대 법대가 대한민국 학생운동계에서 차지했던 위상은 실로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5. 법과대학 행정학과
1955년 만들어져 1981년까지 존속한 법과대학 행정학과는 이름과 달리 행정학을 가르치는 학과였다고 보기 어렵다. 당시 단과대의 소속 학과 수에 따라 지원에 차등이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지원을 받기 위해 법과대학 내에 행정학과를 증설하였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1981년 행정학과가 정경대학으로 이전하면서,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은 법학과 단일학과 단과대로 전환되었다. 1980년까지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다녔던 학생들은 스스로를 '고대 법대생'으로 생각했지, '행정학과생'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으며, 지금도 행정학과 교우회가 아니라 법과대학 교우회에 참석한다.
하지만 2015년에 정경대학 행정학과에서 주최한 '행정학과 설립 60주년 기념 행사'에는 과거 법과대학 행정학과 졸업생을 초청하여 교류하는 모습을 보였다.
2.6. 입시 성적에 있어서 시련기와 부흥기
1970년대 유신 시절에 박정희 정권에 고려대학교가 가장 앞장서서 저항하였기 때문에, 그 여파로 고대 법대의 수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특히 1975년과 1976년에는 박정희의 강제 휴교에 의해 고려대학교 전체의 입시 성적이 폭락하였고, 당연히 법학과의 입시 성적도 죽을 쑤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 입학정원제가 실시되고 1981년부터 입학 정원이 크게 늘어나면서 1982년 법과대학 건물의 신축 계획이 발표되고 1984년 5월 29일, 비로소 연면적 1200평 규모의 법과대학 건물이 완공됨으로써 고대 법대는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특히 사법시험 합격 인원이 300명으로 늘어나면서 고대 법대 출신의 사시 합격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1980년대 후반부터는 고대 법대가 문과 분야에서 비서울대 학과들 가운데 최고봉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1994년에는 특차 전형이 생기면서 고대 법대에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내신에서 핸디캡이 있었던 외고 출신 인재들이 서울대 대신 특차로 고대 법대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1995년의 경우 고법 특차 합격생이면 설법까지 올킬할 실력이라는 게 대입 수험가에서 정설로 통할 정도였다.
2.7. 사법시험 성적
1981~1985년의 통계에 따르면, 서울대가 821명의 사시 합격자를 배출할 동안, 고대는 205명의 사시 합격자를 배출했다. 서울대에 비하면 상당히 합격자 숫자가 적었다. 같은 기간 성균관대가 68명, 연세대가 62명, 한양대가 59명을 합격시킨 것과 비교할 때, 성대+연대+한대를 다 합쳐도 고대 합격자에 전혀 못 미쳤음이 확인된다.
1986~1990년의 통계에 따르면, 서울대가 661명의 사시 합격차를 배출할 동안, 고대는 251명의 사시 합격자를 배출했다. 서울대와의 격차를 좁히는 데는 성공했지만, 같은 기간 연대가 110명, 한대가 103명, 성대가 80명을 합격시켰던 것과 비교하면, 연대, 한대, 성대와 고대 간의 격차도 줄었음이 확인된다.
1991~1995년의 통계에 따르면, 서울대가 780명의 사시 합격자를 배출할 동안, 고대는 225명의 사시 합격자를 배출했다. 서울대와의 격차가 다시 벌어졌는데, 이는 1990년대부터 서울대 비법이 사시에 대거 뛰어든 때문으로 보인다. 같은 기간 한대는 89명, 연대는 86명, 성대는 63명 합격했으니, 한대, 연대, 성대 합격자를 다 합친 숫자와 고대 합격자 숫자가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1996~2000년의 통계에 따르면, 서울대가 1217명의 사시 합격자를 배출할 동안, 고대는 548명의 사시 합격자를 배출했다. 300명 정원의 사시 합격자 수가 500~700명으로 늘어나면서, 고대 법대 90년대 초반 학번들이 거의 미친 듯한 아웃풋을 선보이던 시절이다. 같은 시기 연대는 311명의 합격자를 배출하여 대단히 약진했고, 한대는 193명, 성대는 158명이 합격하여 연대가 한대, 성대를 따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1~2005년에는 서울대가 1711명의 사시 합격자를 배출할 동안, 고대는 808명의 사시 합격자를 배출했다. 같은 시기 연대는 465명이 합격했고, 한대는 261명, 성대는 214명이 합격했다. 실제로 2002년에는 사시 1차 합격자 숫자에서 고대 법대 출신의 인원수(379명)가 서울 법대 출신의 인원수(365명)를 앞지르는 일이 일어났다.[5]
2007년에는 사법시험 합격자가 156명을 기록하였고, 2008년에는 고대 법대 출신 사시 합격자 숫자(151명)가 서울법대 출신 사시 합격자 숫자(143명)를 크게 앞지르기에 이르렀다.[6]
2000년대부터는 몇 년에 한번씩 사법시험 수석합격자와 최연소합격자[7] 를 배출하였다. 사법연수원에서도 상위권 졸업생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예를 들어 2011년과 2012년에는 사법연수원 수석을 고대 법대 출신이 차지하였고,[8][9] 2008년 1월에는 사법연수원 졸업식에서 2등과 4등을 고대 법대 출신이 차지하기도 하였다.[10]
2009년에도 사법시험 2차 합격자 1009명 중 고려대 법대 출신 합격자가 155명으로 가장 많은 인원을 차지했다. 서울대 법대 출신은 153명으로 고려대 법대에 이어 근소한 차이로 2위에 올랐다. 그 뒤로 연세대 법대(101명), 한양대 법대(68명), 성균관대 법대(66명), 이화여대 법대(43명) 등의 순이었다. 이에 대해 정상조 서울대 법대 교수는 "서울대 법대 정원이 고려대 법대의 정원보다 적을 뿐더러 서울대가 내신 성적을 우선해서 입학생을 뽑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온 것 같다"며 "로스쿨이 이미 생긴 상황에서 출신 학교별로 합격률을 따지는 건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 강조했지만, 당시 고려대와 서울대 법대 정원은 2008년 기준 각각 223명, 205명으로 고려대가 서울대보다 겨우 18명 가량 많은 수준이었다.[11][12]
2.8. 법학전문대학원 도입 이후
2007년 7월 3일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법안이 국회를 갑자기 통과하면서, 로스쿨 제도의 도입에 거의 대처를 못하고 있던 고대 법대의 추락이 시작되었다.
로스쿨 인가 당시 성균관대 법대, 연세대 법대보다도 순위가 더 낮은 4위에 랭크되었으며, 로스쿨 정원 배정도 성대 법대, 연대 법대와 같은 숫자인 120명을 배정 받았다.
고대가 성대보다 역대 사법시험에서 두 배 이상의 합격자를 냈는데도 성대와 같은 정원을 배정받은 까닭은 불성실한 자료 때문이다. 서울 시내 한 대학 관계자는 “고대는 이행계획서를 제출할 때 각 부문 평가요소 커트라인에 딱맞게 맞춰서 준비를 해, 서류를 충실히 준비해온 성대 등 다른 대학에 비해 점수를 박하게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고려대는 66개 항목의 정량평가에서 8, 9위로 밀린 것으로 알려졌다. 여성교수 비율에서 4점, 실무 교수 충원에서 무려 7점, 연구 업적에서 4점, 재정에서 무려 9점이 깎였다는 것이다. 정량평가 1위는 서울대, 2위는 성균관대, 3위는 서울시립대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충격을 받은 고려대는 2008년 2월 경 로스쿨 예비 인가 반납을 심도 있게 검토하였다. 배정된 120명으로는 로스쿨 본래 취지에 맞게 운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차라리 현행 법과대학 체제를 유지하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때 사법시험 준비생 등 구체제의 지속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은 고려대가 강단 있게 로스쿨 예비인가 반납 결정을 해주기를 애타게 기다렸으나, 결국 고대 법대는 슬그머니 반납 의사를 철회해버리고 말았다.
로스쿨이 문을 연 초기에는 입학생의 수준에서 고대 로스쿨과 연대 로스쿨이 사실상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려대 로스쿨 출신들이 로클럭이나 검찰 아웃풋에서 이전의 명성을 되찾지 못했던 게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물론 대형 로펌 취업에서는 고로 출신들이 줄곧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그러나 2014년 이후 10대 로펌 합격 인원 숫자에서 고대 로스쿨 출신들이 계속 좋은 성과를 내고,# 2017년에 치러진 2018년 검찰 신규 임용에서 고려대 로스쿨 출신이 10명 합격하는 등 최근에는 고려대 로스쿨의 아웃풋이 점차 상승하는 추세이다. 로스쿨 체제에 적응해나가며 고법 시절의 위상을 회복해나가는 듯.
사실 고대 로스쿨 입장에서는 좀 억울한 게, 고대 법대는 1천 명의 사시 합격자 중 140-150명(14-15%)를 냈던 곳이고 고대 로스쿨은 전체 로스쿨 인원 2천 명 중 120명 정원밖에 배정 받지 못한 곳이다. 120명 전부를 변호사시험에 합격시켜도 한 해 변호사시험 합격자 1600-1700명 중에 120명(7%-7.5%)밖에 안 되는데 고대 법대만큼의 영광을 어떻게 되찾겠나. 사시 합격자 150-160명을 냈던 서울 법대가 없어지고 서울대 로스쿨이 150명 정원을 받았고, 사시 합격자 90명 내외를 내던 연대 법대가 없어지고 연세대 로스쿨이 120명 정원을 받았다. 로스쿨 정원이 예전 법대 시절 사시 합격자 숫자보다 적은 곳은 서울법대와 고대 법대가 유이하고 그나마도 서울 법대는 사시 합격자 숫자와 로스쿨 정원의 차이가 10명 내외로 차이나는 반면 고대 법대는 20-30명의 차이가 있는 판국이다.
2.9. 자유전공학부
고대 법대의 신입생 모집 중단으로 2009년 설립된 것이 자유전공학부이다. 실제 커리큘럼은 법학부에 준한다고 보기에 부족한 점이 있지만, 어쨌든 로스쿨 대비를 위한 커리큘럼으로 구성되어 있어 고대 법대의 전통을 잇는 학부이다. 법대 부활에 대비해서 정원을 빼놓았기 때문에, 2021년 기준 가능성은 희박해졌지만, 만에 하나 법률 개정 등으로 법과대학이 부활하면, 자유전공학부의 역사는 고대 법대의 역사에 편입될 가능성이 높다.
해당 문서 참고.
3. 출신 인물
입학년도 또는 졸업년도를 기준으로 배열한다. 행정학과가 정경대로 편입되기 이전 학번인 '법과대학 행정학과' 출신자도 여기에 당연히 포함시킨다. 누구를 빼고 누구를 넣는지에 관한 논란을 막기 위해, 별도의 문서를 갖고 있지 않은 출신자는 여기에 포함시키지 아니한다.
- 허헌 - 김일성대 초대 총장 (법과 1907년 졸업)
- 윤익선 - 일제시대 교육인 (법과 1907년 졸업)
- 변영만 - 독립운동가/변호사 (법과 1908년 졸업)
- 남형우 - 임정 법무총장 (법과 1908년 졸업)
- 서상일 - 독립운동가 (법과 1909년 졸업)
- 윤해 - 임정 국민대표회의 의장 (법과 1910년 졸업)
- 김립 - 임정 국무원 비서장 (법과 1910년 졸업)
- 장도빈 - 대한매일신보 논설주필 (법과 1911년 졸업)
- 차상찬 - 한국 잡지언론의 개척자 (법과 1913년 졸업)
- 이종성 - 독립운동가/국회의원/검찰총장(법과 1914년 졸업)
- 이병도 - 대한민국 역사학계 태두 (법과 1915년 졸업)
- 김용무 - 대법원장, 국회의원 (법과 1915년 졸업)
- 이춘숙 - 임정 학무차장 (법과 1916년 졸업)
- 김기전 - 독립운동가/사회운동가 (법과 1917년 졸업)
- 한기악 - 동아일보/조선일보 편집국장 (법과 1917년 졸업)
- 엄항섭 - 독립운동가/임정 외무위원장 (법과 1919년 졸업)
- 강기덕 - 3.1.운동 학생대표 (법과 1919년 졸업)
- 방정환 - 어린이운동가 (법과 1918년 입학)
- 최규옥 - 농림부 장관, 국회의원 (법과 1923년 졸업)
- 권병노 - 국회의원 (법과 1925년 졸업)
- 김정렬 - 2선 의원/ 변호사 (법과 1926년 입학)
- 이현상 - 빨치산 사령관 (법과 1927년 입학)
- 김용식 - 조선의 축구영웅 (법과 1930년 입학)
- 이원홍 - 제헌의원 (법과 1931년 졸업)
- 김재열 - 변호사 (법과 1932년 입학)
- 유성권 - 3선 의원 (법과 1936년 중퇴)
- 허정 - 국무총리/과도정부 수반 (법과 1936년 졸업)
- 백남억 - 5선 의원 (법과 1936년 졸업)
- 윤택중 - 3선 의원 (법과 1936년 졸업)
- 김덕열 - 국회의원 (법과 1936년 졸업)
- 조병일 - 법무부 장관 (법과 1939년 졸업)
- 강의석 - 검사/변호사 (법과 1939년 졸업)
- 백상기 - 법무부 장관 (법과 1940년 졸업)
- 정성태 - 국회부의장 (법과 1941년 졸업)
- 이진용 - 국회의원 (법과 1941년 졸업)
- 홍범희 - 국회의원 (법과 1941년 졸업)
- 허정구 - 삼양통상 회장 (법과 1937년 졸업)
- 이호제 - 사회주의 운동가 (법과 1938년 졸업)
- 김학묵 - 한국뇌성마비복지회장 (법과 1938년 졸업)
- 김중서 - 대법관/중앙선관위장 (법과 1943년 졸업)
- 장영순 - 검찰총장/법무부 장관 (법과 1944년 졸업)
- 김종경 - 검찰총장 (법과 1944년 졸업)
- 이철승 - 신민당 대표최고위원 (법과[13] 1946년 졸업)
- 김일두 - 인권변호사 (법률학과 1948년 졸업)
- 박찬 - 변호사/국회의원 (법률학과 1950년 졸업)
- 지연태 - 재선 의원 (법률학과 1952년 졸업)
- 김형배 - 모교 교수 (법학과 53학번)
- 황윤기 - 재선 의원 (법학과 53학번)
- 이상희 - 내무부/건설부 장관 (법학과 53학번)
- 유수호 - 민정당 국회의원 (법률학과 51학번)
- 이정우 - 대법원장 권한대행/대법관/법무부장관 (법학과 52학번)
- 서동권 - 검찰총장, 안기부장 (법학과 52학번)
- 이준승 - 대법관/중앙선관위장 (법학과 53학번)
- 염보현 - 서울시장 (법학과 54학번)
- 박승규 - 초대 환경청장 (법학과 54학번)
- 김진배 - 재선 의원 (법학과 54학번)
- 김형광 - 재선 의원 (법학과 54학번)
- 김경태 - MBC, TBC PD (법학과 54학번)
- 김인섭 - 법무법인 태평양 성립자 (행정학과 55학번)
- 이용만 - 재무부 장관 (행정학과 55학번)
- 김기배 - 4선 의원 (행정학과 55학번)
- 정경식 - 헌법재판관 (법학과 57학번)
- 이택석 - 3선 의원 (법학과 57학번)
- 이근영 - 금융감독원장 (법학과 57학번)
- 이동호 - 내무부 장관 (행정학과 57학번)
- 조남호 - 민선 1~3기 서초구청장 (법학과 57학번)
- 김기수 - 검찰총장 (법학과 58학번)
- 이성호 - 보건복지부 장관, 4선 의원 (행정학과 58학번)
- 김중권 - 대통령 비서실장,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행정학과 59학번)
- 황창평 - 국가보훈처장 (행정학과 59학번)
- 임채정 - 국회의장 (법학과 60학번)
- 양경자 - 재선 의원 (법학과 60학번)
- 김영준 - 재선 의원 (법학과 60학번)
- 박상범 - 청와대 경호실장/국가보훈처장 (법학과 60학번)
- 유지담 - 대법관/중앙선관위장 (법학과 61학번)
- 남궁진 - 문화관광부 장관 (법학과 61학번)
- 김충조 - 5선 의원 (법학과 61학번)
- 박재홍 - 4선 의원 (행정학과 61학번)
- 김상희 - 가수 (법학과 61학번)
- 이원성 - 국회의원 (법학과 61학번)
- 송정호 - 법무부 장관 (법학과 61학번)
- 김화남 - 경찰청장/국회의원 (행정학과 61학번)
- 김각영 - 검찰총장 (법학과 62학번)
- 이진강 - 대한변협 회장 (법학과 62학번)
- 김영기 - 한국농구연맹 총재 (법학과 55학번)
- 장덕진 - 대한민국 최초 고시3관왕 (법학과 56학번)
- 이해구 - 경기도지사, 내무부 장관, 국회의원 (법학과 56학번)
- 이종남 -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감사원장 (법학과 57학번)
- 이팔성 - 우리금융지주 회장 (법학과 63학번)
- 김정부 - 재선 의원 (법학과 63학번)
- 이남기 - 공정위 위원장 (법학과 63학번)
- 김일수 - 모교 교수 (법학과 65학번)
- 이기수 - 모교 총장 (법학과 65학번)
- 주선회 - 헌법재판관/헌재소장 권한대행 (법학과 65학번)
- 서재관 - 해양경찰청장 (법학과 65학번)
- 채이식 - 세계적인 해법학자 (행정학과 67학번)
- 이상수 - 인권변호사/국회의원 (법학과 67학번)
- 김종빈 - 검찰총장 (법학과 67학번)
- 조성준 - 재선 의원 (법학과 67학번)
- 김성호 - 법무부 장관/국정원장 (법학과 68학번)
- 송훈석 - 3선 의원 (행정학과 68학번)
- 이귀남 - 법무부 장관 (행정학과 69학번)
- 박정규 - 참여정부 민정수석 (법학과 69학번)
- 김봉수 - 키움증권 창립자 (법학과 70학번)
- 배종대 - 모교 교수 (법학과 70학번)
- 정세균 - 국무총리, 국회의장, 민주당 대표 (법학과 71학번)
- 하경효 - 모교 교수 (행정학과 71학번)
- 홍성방 - 법학자 (행정학과 71학번)
- 홍준표 - 한국당 대표, 19대 대선 후보 (행정학과 72학번)
- 송하진 - 전라북도 도지사 (법학과 72학번)
- 조상호 - 나남출판사 대표 (법학과 70학번)
- 강희락 - 경찰청장 (법학과 72학번)
- 허구연 - 야구해설가 (법학과 71학번, 체육특기자)
- 허준영 - 경찰청장 (법학과 73학번)
- 강병규 - 안전행정부 장관 (법학과 73학번)
- 신창현 - 재선 의원 (행정학과 73학번)
- 정유섭 - 제20대 의원 (행정학과 73학번)
- 염재호 - 모교 총장 (행정학과 74학번)
- 신계륜 - 4선 의원 (행정학과 74학번)
- 이춘희 - 세종시장 (행정학과 74학번)
- 임종인 - 변호사/국회의원 (법학과 74학번)
- 김태규 - 명리학자 (법학과 74학번)
- 곽대훈 - 제20대 의원 (행정학과 74학번)
- 이종배 - 제20대 의원/충주시장 (행정학과 74학번)
- 김창석 - 대법관 (법학과 75학번)
- 김용철 - 검사/삼성그룹 법무팀장 (법학과 76학번)
- 최용규 - 재선 의원 (법학과 76학번)
- 구자균 - LS산전 회장 (법학과 76학번)
- 김상도 - 검사/정치인 (행정학과 76학번)
- 조용병 - 신한금융지주 회장 (법학과 77학번)
- 한상대 - 검찰총장 (법학과 77학번)
- 류지태 - 모교 교수 (법학과 77학번)
- 박남춘 - 재선 의원 (행정학과 77학번)
- 문석호 - 재선 의원 (법학과 77학번)
- 이재갑 - 고용노동부 장관 (행정학과 77학번)
- 이욱한 - 숙명여대 교수 (법학과 77학번)
- 오세훈 - 서울시장 (법학과 79학번)
- 양운덕 - 철학자 (법학과 79학번)
- 이재현 - CJ 대표이사 (법학과 80학번)
- 이상돈 - 모교 교수 (법학과 80학번)
- 이정미 - 헌법재판관/헌재소장 권한대행 (법학과 80학번)
- 최교일 - 서울중앙지검장, 제20대 의원 (행정학과 80학번)
- 금민 - 사회당 대통령 후보 (법학과 81학번)
- 김귀옥 - 판사 (법학과 81학번)
- 조희진 - 여성 최초 검사장 (법학과 81학번)
- 전해철 - 변호사/국회의원 (법학과 81학번)
- 문무일 - 검찰총장 (법학과 81학번)
- 주광덕 - 재선 의원 (법학과 81학번)
- 정태옥 - 제20대 의원 (행정학과 81학번)
- 이원욱 - 재선 의원 (법학과 82학번)
- 김의겸 - 한겨레 논설위원 (법학과 82학번)
- 김경진 - 변호사/국회의원 (법학과 83학번)
- 박민수 - 제19대 의원 (법학과 83학번)
- 이동원 - 대법관 (법학과 83학번)
- 박정화 - 대법관 (법학과 83학번)
- 조은석 - 서울고검장 (법학과 84학번)
- 오영식 - 제2기 전대협 의장, 국회의원 (법학과 85학번)
- 박훈 - 노동문제 전문 변호사 (법학과 86학번)
- 김두식 - 경북대 교수 (법학과 86학번)
- 오인서 - 대구고등검찰청 검사장 (법학과 86학번)
- 함진규 - 19대 국회의원 (법학과 86학번)
- 김진동 - 판사 (법학과 86학번)
- 노종면 - YTN 앵커 (법학과 87학번)
- 박재영 - 판사/변호사 (법학과 87학번)
- 염경엽 - 프로야구 감독/단장 (법학과 87학번)
- 김상식 -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 (법학과 87학번)
- 박준철 - 공단기 행정법 강사 (법학과 89학번)
- 정태흥 - 민중당 정책위의장 (법학과 91학번)
- 김정일 - 행정법 강사/변호사 (법학과 92학번)
- 강부영 - 판사 (법학과 93학번)
- 서향희 - 변호사 (법학과 93학번)
- 임은정 - 검사 (법학과 93학번)
- 홍성수 - 숙명여대 교수 (법학과 94학번)
- 정선균 - 행정법 강사 (법학과 94학번)
- 한정석 - 판사 (법학과 95학번)
- 김정철 - 형법 강사/변호사 (법학과 95학번)
- 나승철 - 서울변회 회장 (법학과 96학번)
- 손수호 - 변호사 (법학과 97학번)
- 노정태 - 자유기고가 (법학과 01학번)
- 조정식 - 메가스터디 영어 강사 (법학과 02학번)
- 천하람 - 변호사 (법학과 04학번)
- 강다솜 - MBC 아나운서 (법학과 05학번)
[1] "서울대 법대는 형법 쪽이 유독 약하다. 민법 쪽만 하더라도 곽윤직 교수라는 큰 산이 있었고 그 계보가 양창수 교수(전 대법관), 김재형 교수(현 대법관)로 면면히 이어졌다. 반면 형법 쪽은 유기천 교수가 유신 시절 미국으로 망명해 버린 후 지금까지도 변변한 교수가 없다."#(동아일보 송평인 논설위원(서울 법대 83학번)의 평). 대표적인 증거로, 유명한 형사법 교과서 저자 중에 서울대 교수는 없다. 다만, 위 시론에서 "서울대에는 단독으로 형법 교과서조차 써본 교수도 하나 없다." 부분은 명백한 허구이다. 신동운 교수가 이미 형법총론, 형법각론, 형사소송법 교과서를 모두 출간했기 때문.[2] 태백산맥의 주인공들 가운데서도 이해룡과 정하섭이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출신이다.[3] 그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의 주장대로 서울역 회군을 한 결과, 각 대학의 운동권 학생들은 각개격파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감옥 또는 군대로 끌려가 죽음을 당하였다.[4] 제1기 전대협 의장은 고대 국문과 84학번 이인영이었다.[5] 연대는 법대와 비법대를 모두 합쳐도 201명에 불과했음.[6] 고려대 전체 합격자 숫자는 183명으로 서울대 전체 합격자 숫자인 274명에 여전히 크게 뒤쳐졌음.[7] 2003년 45회 사법시험 최연소 이금진, 2008년 50회 사법시험 최연소 정우철[8] 2012년 1월 18일 열린 41기 사법연수원 수료식에서 고려대 법대 출신의 허문희(당시 27세/ 명덕외고/ 고대 법대 졸업)가 수석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연수원 성적이 4.3 만점에 4.28을 기록하였고, 1학기 전공 선택과목인 ‘헌법연구(1학점)’, 4학기 ‘형사변호사실무(2학점)’ 두 과목에서만 각각 A-, AO를 받고 모든 과목에서 A+를 받았다.[9] 2013년 1월 21일 열린 42기 사법연수원 수료식에서는 고려대 법대 출신의 장선종 씨가 수석을 했다.[10] 당시 1위는 이경민(26·명일여고·서울 법대), 2위는 박미선(27·이화여자외고·고대 법대), 3위는 이창민(26·대구오성고·서울 법대), 4위는 이인수(27·대원외고·고대 법대)가 차지하였다.[11] 이 얘기가 나왔을 당시에 고시 갤러리에서 고법 출신 갤러가 정원 드립에 반박하면서 고법과 설법 재학생 숫자 통계를 가져온 적이 있는데 설법이 훨씬 많은 수준이었다. 설법 재학생 수가 많은 건 전과 제도의 존재와 서울대 정원 축소가 01년, 05년에 있었기 때문이다. 05년에 줄인 입학 정원을 갖고 와봐야 실제론 그 이전에 입학한 학생들이 09년 당시에 아직 졸업 못 하고 바글바글했다. 게다가 이전 박원순 시장 딸의 예체능 → 설법 전과 사건에서 드러난 자료에 따르면 2000년대에 설비법에서 설법으로 전과하는 학생이 매년 30명 정도라고 한다. 전과생만 따져봐도 한해 설법 입학(?) 인원은 223명 대 235명으로 설법이 더 많다.[12] 2009년 최종 합격자 수에서는 고법이 면접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바람에 설법이 역전했다.[13] 단, 졸업은 보성전문학교 법과가 아닌 정법대학 정치학과로 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