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준(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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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농구인.
광신상고와 연세대학교 응용통계학과를 졸업하고 1983년부터 1995년까지 삼성전자(현 서울 삼성 썬더스) 소속으로 뛰면서 '''전자슈터'''라는 별명을 얻은 레전드로, 이충희와 개인간으로도 팀간으로도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1980년대 농구대잔치의 인기를 이끌었다.
2. 상세
농구대잔치 사상 최초로 개인 통산 5천 득점을 돌파했다. 당시 통산 5천 득점을 돌파했던 선수는 그가 유일하고 라이벌이었던 이충희는 4천 점대 중반까지 득점 후 은퇴하였다.
'저렇게 던져도 돼?' 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별별 기묘한 형태의 슛을 던지면서 그걸 집어넣었던 선수.
1991-92 농구대잔치 챔피언 결정전에서 만난 기아자동차(현 울산 모비스 피버스)와의 3차전에서는 심판의 판정에 항의하다 3연속으로 테크니컬 파울을 당해 5반칙으로 물러난 일도 있었다.[1] 그 덕에 기아자동차 선수들이 돌아가면서 3연속 자유투[2] 를 던진 후 공격권을 가졌다.[3]
문경은(현 서울 SK 나이츠 감독)이 연세대 3학년 때 이미 삼성전자로 진로를 결정하고 계약서에 사인했는데, 당시 문경은은 긴 말 필요없고 돈 상관하지 않고 오직 김현준만 보고 삼성행을 결심했다고 한다.[4][5][6]
문경은이 들어온 후 삼성전자가 1994-95 농구대잔치 종합 순위 8위로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하여 8강전에서 종합 순위 1위였던 연세대학교와 맞붙었는데, 이 당시 그의 화려한 은퇴를 위해 후배들이 고의에 가까운 반칙 작전으로 연세대학교 선수들을 다치게 할 정도였다.[7] 하지만 챔피언결정전에서 만난 기아자동차에게 다시 패하면서 김현준은 정든 코트를 떠나게 된다. 이때 0-2로 마지막에 몰린 3차전에서 71-72로 뒤지던 후반전 34초를 남기고 3점슛을 성공하면서 74-72로 뒤집었던 그 슛은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그렇게 화려했던 선수 생활을 마감한 후 소속 팀의 코치로 활동하던 중, 1999년 체육관으로 출근하기 위해 백궁역(현 정자역)에서 택시를 타고 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하여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향년 39세.
이후 그가 삼성전자 시절에 썼던 등번호 10번이 서울 삼성 썬더스에서 영구결번이 되었고, 당시 10번을 달고 뛰던 주희정이 30번으로 등번호를 바꿨다. 현재 서울 삼성 썬더스에서는 그를 기리기 위해 2000년부터 "김현준 농구 장학금"을 마련해 매년 우수한 고등학생 농구 유망주들을 선정해서 전달식을 열고 있다.
2012년까진 남동생인 김효준 삼성물산 상무가 시상을 맡아왔지만 하술할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그의 딸 두 명이 시상을 맡아주고 있다.
사족이지만 그의 큰딸은 2011년에 결혼해 자녀를 두었다고 한다. 만약 살아있었다면 꽤 이른 나이에 할아버지가 된 셈이다.
김현준 사후 13년 뒤인 2012년 6월 6일에는 김현준의 동생 김효준도 페루에서 발생한 헬기 사고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8]
3. 여담
동시대 라이벌이자 최고의 슈터였던 이충희는 머리도 늘 대충하고 나와 지저분해보이고 유니폼도 상의를 늘 빼서 입고 팔을 아무렇게나 걷어부치는걸로 유명했다면, 김현준은 포마드라도 바른건지 강철 가발인건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늘 한올의 흐트러짐도 없는 아주 단정한 머리스타일에다 복장도 교과서같이 단정해서 이점이 많이 비교되기도 했다.
[1] 당시 상황은 강을준이 파울을 범해 개인 파울이 생기게 되자 강을준이 항의를 하여 테크니컬 파울을 얻었고, 주장이었던 김현준이 이에 항의를 하자 심판이 김현준에게 연속으로 테크니컬 파울을 주면서 김현준은 5개의 파울을 받고 퇴장당한다.[2] 정확하게는 강을준의 개인 파울 + 강을준의 테크니컬 파울 + 김현준의 3개의 테크니컬 파울에 의한 5번 연속으로 자유투 2개를 던졌다. 그래서 기아 선수들이 던진 자유투는 모두 합하면 10개(!). 그 10개를 다 던진 후 공격권까지 가진 것이다.[3] 당시 농구 규칙은 상대 팀 선수가 테크니컬 파울을 당하게 되면 테크니컬 파울 하나 당 자유투 2개를 부여하고, 5반칙 퇴장당할 때까지 계속 테크니컬 파울을 줄 수 있었다. 5반칙 퇴장 후에도 계속된다면? 그때부터는 벤치 테크니컬 파울을 준다. 1회당 자유투 2개 + 공격권.[4] 김현준과 문경은은 광신상업고등학교(현 광신방송예술고등학교) 및 연세대학교 선후배 관계다. 그것도 있지만 당시 대학 농구 최강이던 연세대의 정책이 최강 팀을 구성하던 농구부 선수들을 한 팀에 몰아줘서 전력 불균형을 초래하기보다는 여러 팀에 골고루 분배해서 실업팀들이 공생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자는 취지이기도 했다. 물론 당시 대우증권(현재 프랜차이즈는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로 승계)처럼 신생팀 창단의 경우는 대량으로 몰아주기도 했지만. 문경은을 삼성전자로, 이상민을 현대전자로 보내면서 기아의 독주가 계속되던 실업 농구의 판도를 바꾸려 했던 것도 있다.[5] 그 외에 연세대 출신인 방열이 기아자동차의 주축 선수들에 의해 축출된 불편함 감정도 이때까지 영향을 끼쳤던 걸로 보인다.[6] 참고로 이 시절에는 실업팀 한 팀이 한 학교의 선수들을 마치 전속처럼 몰아서 받는 것이 관례였다. 중앙대는 기아자동차, 경희대는 기업은행 등. 그러면서 마치 고등학교 선수가 대학을 갈 때처럼 스타급 선수 한명에 실력이 비교적 처지는 동료 선수 몇명이 패키지처럼 딸려가는 것이다. 그 동료들은 2~3년 농구부에 있다가 그만두고 모기업의 일반 사원으로 전직하는 것이다.[7] 당시 8강전은 3전 2선승제였는데, 1차전에서는 연세대에게 76-85로 졌지만 2차전을 81-70으로 이긴 후 맞이한 3차전에서 전반 종료 1분여를 남기고 삼성의 박상관이 서장훈의 뒤통수를 강타하여 서장훈이 전치 2개월의 중상을 입었고, 연세대 포워드 구본근이 호흡곤란을 일으키면서 산소 마스크를 쓴 채로 구급차에 실려가는 등 난리도 아니었다. 서장훈이 당한 이른바 '''상관타''' 사건에 가려져서 그렇지, 2차전에서도 삼성의 김승기는 우지원의 얼굴을 두 차례나 때려 퇴장을 당하기도 했다. 서장훈 역시 삼성 선수의 팔꿈치에 눈을 맞아 부어오르기까지 했다.[8] 동생이 죽기 8개월 전인 2011년 10월 5일에 부친상을 당했다.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