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은
[clearfix]
1. 개요
서울 삼성 썬더스 -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 서울 SK 나이츠에서 뛰었던 농구선수이자 감독. 등번호는 14번(삼성) - 10번(SK 빅스 - 전자랜드 - SK 나이츠)
서울 삼성 썬더스의 레전드지만 서울 SK 나이츠의 레전드 출신의 최고 슈터.
13시즌 동안 프로무대에서 활약하며 '람보슈터'라는 별명과 함께 수려한 용모로 많은 인기를 끌었던 스타였으며, 프로 통산 610경기에 나서 9347점을 기록하여 1위 서장훈, 2위 김주성, 3위 추승균에 이어서 통산 득점 4위에 올랐다. 하지만 서장훈이 13,000점대라는 넘사벽 기록과 추승균도 10,000점을 넘어간 것과는 달리 문경은은 끝내 10,000점을 넘어가지 못했다. 전공인 3점슛은 1669개로 프로통산 최다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통산 3점슛 성공률은 39.5%.
2011-12 시즌 SK 나이츠의 감독대행을 맡았으며, 시즌 후 SK 나이츠의 정식 감독으로 승격했다. 계약기간은 총 3년. 12-13 시즌에는 팀의 첫 정규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14-15 시즌까지 팀을 3년 연속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시키면서 2015년 3년 재계약에 성공했다. 그리고 2017-18 시즌에 결국엔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도 시키면서 재계약을 더 길게 하게 되었다.
본인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국 스포츠계 감독을 통틀어서도 특정 선수에게 지나치게 의존적인 커리어를 보낸 감독이다. 이른바 '''애런빨 감독'''. 19-20시즌까지는 어느 정도 평가가 오락가락했으나 20-21시즌에 헤인즈가 나가자마자 1위에서 8위로 DTD를 하면서 이젠 변명의 여지가 없어졌다. '''10년 동안 애런 헤인즈가 없는 시즌에 문경은은 단 한 번도 플레이오프에 가지 못했다'''.
2. 선수 생활
2.1. 프로 이전
원래는 센터로서 플레이하던 선수였다. 하지만 고교 시절 190cm에서 더 이상 키가 크지 않자 스몰 포워드로 전향한다.
스몰 포워드 전향 후 연세대에 입학[2] , 연세대 재학 시절 1993-94 농구대잔치에서 이상민, 서장훈, 우지원, 김훈 등과 함께 연세대를 농구대잔치 사상 첫 대학교 우승팀으로 이끌었다.
문경은이 센터 출신이고 장신인 점을 활용해서 공격했다는 오해가 있는데, 문경은의 동시대 선수이자, 고교시절 센터하다가 신장의 문제로 대학 진학후 포워드로 변신한 선수는 양경민,김영만,우지원등[3] 적지 않았다. 또한 이때부터 성인농구계 평균 신장이 빠르게 상향세를 타서, 불과 몇년 전까지 183cm 이충희가 포워드로 뛰던 시절에서 진화해 대학농구 스몰 포워드 중 일급선수는 왠만하면 190을 넘겼기에 신장이 특별히 강점이 된 선수도 아니다.[4] 이렇게 당대의 라이벌들에 비해 신장으로 압도한 게 아니라, 후배 우지원과 비슷하게 정확한 슛팅력과 3점슛, 강심장을 바탕으로 한 클러치 득점력으로 스타가 되었다. 한편 당시 인기 탤런트이던 손창민과 닮았다며 오빠부대를 이끌고 다니는 스타로 군림한다. 다만, 중대 양경민,김영만처럼 올라운드 포워드로 완전히 갈아타진 못해서, 저 둘과의 매치업에선 수비열세를 드러냈다.
실업농구팀인 삼성전자와 현대전자의 치열한 스카우트 전쟁 속에서 유형 무형의 엄청난 대우 끝에 알려진 계약금만 5억원을 받고 삼성전자로 진로를 택했다. 삼성전자에 입단한 이유는 문경은 이전 최고의 슛터 김현준이 있기도 해서였다. 삼성전자 입단 후 김현준과 쌍포를 이루며 팀을 농구대잔치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때 문경은은 총득점 1위에 올랐고 이 시즌을 끝으르 전무후무한 6천 득점의 대기록을 작성하고 은퇴한 김현준은 자신의 기록을 깰 선수로 문경은을 지목하기도 했다. 한편 이 농구대잔치 8강전에서 삼성전자는 연세대와 경기를 했는데 서장훈에 대한 테러 수준의 몸싸움에도 한 몫을 거들어서 욕도 들어먹었다.
그후 상무에 입대, 대학 1년 후배인 이상민과 재회하고 조성원과 쌍포를 이루면서 상무를 1996-97 농구대잔치 우승 문턱까지 이끄는데 성공하나, 이름값에 못 미치는 활약으로 까이는 일도 자주 있었다.
2.2. 프로 시절
[image]
이충희 ㅡ 김현준 ㅡ 문경은 으로 이어지는 슛터계보
상무 제대 후 1997-98 시즌에 프로화된 삼성에 복귀, 평균 25점에 이르는 득점력을 과시하며 역시 문경은이란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팀은 플레이오프도 나가지 못한다.
다음 시즌에도 평균 21점에 이르는 득점력을 선보였으나, 1999-2000 시즌에는 평균적인 외국인 선수들의 능력 향상에다 자기 관리 문제인지 뭔지 날렵하던 몸에 군살이 꽤나 붙은 모습까지 되면서 평균 득점은 17점 정도를 기록한다. 하지만 주희정의 활약이 팀에 더해지면서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는다.
[image]
2000-01 시즌, 빛을 발하는 주희정과 그 시즌 최고의 외국인 선수인 아티머스 맥클래리, 거기에 이규섭의 공수가 더해전 썬더스에서 평균 18점에 이르는 공격을 더하면서 문경은은 팀의 첫 우승의 주축이 되었다.
하지만 팀 내 비중 문제로 당시 삼성 썬더스의 감독이던 김동광과 갈등이 있었고, 때문에 2001-02 시즌을 앞두고 신세기 빅스(이후 SK 빅스, 현 전자랜드 엘리펀츠)의 우지원을 상대로 트레이드되어 빅스의 선수가 된다. 그리고 빅스에선 조니 맥도웰과 콤비를 이루며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 데 성공한다. 다음 시즌에는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지만, 빅스가 전자랜드에 인수된 2003-04 시즌에는 앨버트 화이트를 외곽슛으로 도와 주면서 다시 한번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킨다.
[image]
2005-06 시즌에 김일두, 임효성을 상대로 서울 SK 나이츠에 현금 트레이드되었다. 체력적인 문제로 스팟 슈터 롤을 맡았어야 했는데 방성윤이 워낙 골골대는 터라 노익장을 발휘해야 했던 경기들이 많았다. 출전시간이 길어지면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했고 수비 문제가 있긴 했지만 이름값은 톡톡히 했다.
영구결번 선정 당시는 논란이 많았지만 SK 농구단에서 가장 오래 감독생활을 하는 인물이 되었고 17-18시즌부터 성적도 호전되고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헤인즈 없이도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며 우승하면서 영구결번으로서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냈다.
2.3. 선수로서의 특징
이충희와 김현준의 뒤를 잇는 한국농구 슈터 계보를 잇는 존재로 불리며, 같은 편의 스크린을 이용해 수비수를 제친 후 노마크에서 확률 높은 슛을 쏘는 슈터의 기본기에 매우 충실했다. 특히 한번 "터졌다"고 한다면 엄청난 슛 정확도를 보여주는 일도 있었다. 독특하게 자유투 시 백보드를 맞춰 넣는 방식을 구사했다.
[image]
한때는 경기 중에 백덩크를 구사할 정도의 운동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런 운동능력을 이용한 돌파도 주요 무기 중 하나였던 때가 있었다. 센터 출신이라 포스트업 기술도 있었고, 상당히 괜찮은 패싱 센스도 있었다.
고교시절 센터였으나 연세대학교 진학후 190cm라는 작은 신장의 약점이 드러나고, 최희암 감독의 분업화 경향으로 인해 골밑 공간은 당시 연대의 센터라인인 구본근, 김재훈, 서장훈에게 주고 페이스업보다는 스트레치 4 플레이나 스팟업 등으로 공격 역할이 제한되어 버리면서 연세대 이후부터는 사실상 스트레치 4 전문 롤플레이어로 전환하였다. 여기에 팀내에는 이상민이라는 당대 최고의 포인트가드가 입학하면서 점차 문경은이 직접 볼터치를 주도하는 상황도 줄어들면서 좀 더 슈터성향이 강해졌다.
문경은이 이규섭과 같이 서장훈 때문에 하나 위의 포지션으로 옮기고 포제션을 뺏기면서 어정쩡한 기능성 플레이어가 되어버린 서장훈 시대의 피해자라고 평가되기도 하는데, 이건 잘못된 주장이다. 문경은은 서장훈보다 3년 선배고 둘이 같이 뛴 건 문경은의 4학년 시즌 단 1년이다. 문경은은 대학이후로 내내 스몰포워드로 슈터로 활약했으니 서장훈과는 무관하게 슈터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오히려 그나마도 일찍부터 신장에 맞는 3번으로 전환했기 때문에 연세대학교에서도 부동의 주전으로 제 역할을 할 수 있던 것.[5]
게다가 문경은이 키가 190cm인데, 한 세대 선배인 허재는 키 186에 1번 2번을 주로 맡았고, 동시대인 김영만 양경민은 193cm의 키에 고교까지는 센터를 보다가 대학 이후 스몰포워드로 전향했고 문경은과 같은 포지션이다. 또 동 포지션의 추승균은 190cm, 우지원도 191cm로 대학부터 스몰포워드로 포지션 변경을 시도했다. 즉 문경은의 키는 당대의 대학농구에서 딱 스몰포워드 신장이고, 그래서 자연스레 스몰포워드로 슈터로 활약한 것이다.
최희암 감독의 분업농구 하에서 슛만 던지는 슈터로 역할을 한 셈이지만, 그래도 실업과 프로 초창기에는 팀을 이끄는 에이스로 다양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실업농구 삼성시절에도 김현준과 쌍포로 내외곽 공격을 주도했고, 프로 신인시절 팀에서 득점을 이끄는 용병이 있음에도 여전히 발군의 득점력을 발휘하면서 평균득점 25점 정도로 국내선수 중에서 단연 탑에 이르는 득점력으로 용병급의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1999-2000 시즌 무렵 김동광 감독 부임 이후로 2명의 용병이 중심이 되는 전술로 완전히 바꾸면서 나머지 국내선수는 보조 역할만 하는 한국프로농구의 분업 시스템을 더욱 문경은에게 강요하게 되면서, 문경은은 팀 득점 에이스에서 블루워커스타일로 변신을 강요당했고, 용병 득점을 보조하는 외곽슈터로 제한한 이후로 플레이가 단조로워졌다.
게다가 자기 관리 문제인지 뭔지 급격히 몸이 가로로(...) 넓어지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운동능력도 많이 상실했다. 김동광 감독의 역할 제한이후로 출전시간까지 줄면서 급격히 고전을 하게 되었다. 결국 팀 우승 이후 신세계로 자진 트레이드 되게 된다. 이후 신세계에서 주득점원인 용병에 뒤를 이은 주축 슈터로 나름 중심역할을 하면서 선수생활 전성기 후반을 이어가게 된다.
자신보다 좀 더 큰 사이즈를 가지고 있으면서 비슷한 스피드를 가진 수비수와 매치업되면 고전하는 일이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대학 시절부터 라이벌이었던 김영만과 . 그리고 추승균 등 수비 좋은 선수와 매치업에서 밀리는 경우가 있었다.
제 2의 허재가 될 만한 재목이 그냥 슈터로 끝났다, 라고 말하는 농구팬들도 일부 있다. 사이즈와 운동능력, 거기다 농구 센스를 겸비한 덕에 슛만이 아니라 다재다능한 득점 능력과 패스 능력을 가진 선수가 될 수 있었는데, 연세대 시절 간혹 그런 모습을 보여주나 싶다가 최희암 감독의 분업농구론에 의해 골밑이 아닌 3점 라인 밖으로 나와서 패스를 받아 슛 던지는 역할로만 계속 뛰었기 때문이다.
문경은이 제2의 허재, 이충희가 되지 못한 것에는, 농구대잔치 시절과는 다른 한국 프로농구의 변화가 큰 이유가 되었다는 분석도 많다. 프로농구 이후 용병 2명이 에이스 역할을 하게 되고, 그 결과로 한국센터의 몰락, 한국 슈터의 역할 제한, 그리고 유일하게 국내선수가 살아남은 포지션이 포인트 가드였던 것이 프로초창기의 한국프로농구의 모습이다. 그 결과 한국선수 MVP는 강 모 선수와 이상민 등 토종 포인트가드가 독식하게 된다. 서장훈 이외에 팀의 득점에이스가 몰락한 현실로.. 결국 한국 슈터의 역할 변화는 한국 대표 슈터였던 문경은의 역할까지도 제한시키게 되었다. 즉, 프로농구 이후 2명의 용병이 주득점원이 되면서, 그 전까지 에이스역할을 하던 슈터들이 더 이상 에이스가 아닌 블루워커 스타일로 변신이 강요되었고, 조공격수인 한국 선수는 '''수비 + 캐치 앤 슈팅'''으로 플레이가 제한되었고, 우지원 등 슈터들이 그런 스타일로 굳어졌다. 즉, 궂은일 잘하는 선수가 좋은 선수로 인식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애초에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던 허재, 문경은 스타일의 선수보다 보조공격수로 적당하면서 블루워커로써 궂은일도 꽤 잘하는 김영만, 추승균 스타일이 용병과 조화가 좋았다. 용병이 주득점원에 해결사 역할을 할 때 '''수비 + 캐치 앤 슈팅(보조공격수)'''로 용병보조를 잘 해내는 선수가 쓰임새가 많았고, 그런 이유로 천하의 허재마저 팀에서 신인 김영만에게 밀려났고, 트레이드를 자청하게 됐고 문경은도 트레이드를 요청하게 된다. 문경은, 허재마저 이럴 정도이니 우지원, 김훈 등 정통 슈터들도 '''수비 열심히 하고 간간히 3점 던져주는 마당쇠'''로 변신해서 겨우 살아남았다.... 하다 못해 전희철, 이규섭, 김동우 등 2m 정도 센터 출신들도 '''수비 + 캐치 앤 슈팅''' 스타일로 다들 변신할 정도이니 말할 나위가 없다.
즉, 더 이상 이충희, 허재같은 한국인 팀 에이스가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문경은이 이충희, 허재가 되지 못한 이유도 많다는 것이다. 사실상 프로 이후로 팀 주득점원으로 한두 시즌이라도 계속 활약한 선수는 문경은, 조성원, 방성윤 정도이며, 꾸준히 팀의 에이스였던 선수는 서장훈밖에 없다. 그 서장훈마저도 블루워커 노릇을 안 한다고 해서 선수 생활 내내 욕을 먹던 것이 프로이후 한국의 득점 에이스들의 현실이다.
프로 초창기 이후로 한국 선수가 다양한 득점 루트로 팀 득점을 주도하는 건 비효율적이고 이기적이라고 욕먹던 시절이다.[6]
물론 프로이전부터 문경은은 한국농구를 대표하는 슈터로 불리면서도 반쪽짜리 슈터 소리를 듣는 일도 많았다. 앞선 세대인 이충희나 김현준이 자신보다 큰 수비수를 앞에 두고도 일대일 상태에서 드리블 등으로 수비수를 제치고 풀업 점퍼를 정확하게 쏘는데 능했는데 비해 문경은은 슈터로서 풀업 점퍼가 안 되는 받아먹기 전문이었기 때문에 상대의 밀착수비에 약점을 보였다.
그러나 역할 제한을 받지 않고 에이스로 활약하던, 실업이나 프로 초창기에는 내외곽에서 자기 하고 싶은 플레이를 맘껏 하던 시절에는 내외곽에서 다양한 득점력을 구사하고 풀업점퍼 등의 다양한 플레이가 가능했다. 연세대시절이나 프로이후 차차 역할 제한이 들어가면서 캐치 앤 슈팅이라는 단조로운 스타일 외에는 버릴 수밖에 없었다. 즉, 시대가 제 2의 이충희 허재가 나올수 없던 시절이다.
그럼에도, 문경은은 국내선수로는 최고 수준의 3점 공격력을 가졌고, 다른 수비 약점을 포함해도 역대급 공격력을 가졌던 선수이다.
이후 문경은만큼 노마크 슛이라도 확률 높게 넣어주면서 슈터의 기본에 충실한 선수는 거의 없다. 국내리그에서 비슷한 급이었던 김영만 등에 비해 문경은은 확실한 3점 슛이라는 무기 덕분에 좋은 커리어를 이어갔고 '''국제용'''으로 중용받을 수 있었던 것. 이런 공격력의 장점 때문에 수비상의 약점 포함해도, 김영만, 추승균, 양경민을 제치고 국가대표 선수로 선호받았다.
그리고 2015년 스테판 커리의 MVP 이후 세계 농구 트렌드가 꽤 크게 바뀐 시점에서 되돌아본다면, 서장훈, 문경은 등은 한국 농구의 또 하나의 편견에 시달린 선수이다. 바로 '''외곽 공격은 영양가가 없다'''는 식의 시각이다.
용병 이전 전통적 한국 농구는 양궁농구라는 양날의 검을 가진 농구 스타일이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외국에 비해서 장신 센터가 골밑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오랜 컴플렉스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중국과의 국제경기에서 한국이 외곽이 밀려서 지는 경우는 적었고, 높이의 차이 골밑파워 차이로 밀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장신인 서장훈이 골밑을 버리고 중거리슛을 던진다는 이유로 겉멋 들었다며 욕을 엄청 먹었고, 3점 중심의 슈터들은 한편으론 인기도 많았지만 한편으론 영양가 없다는 비아냥에 시달렸다. 그런 이유로 장신센터인 김주성, 하승진의 경우 중거리 슛 센스가 생각보다 좋았음에도 감독들이 의도적으로 중거리슛, 외곽슛을 멀리하게 교육했고, 그 결과로 김주성은 충분히 성공한 선수가 되긴했지만 수비와 팀플레이 중심의 선수로의 한계를 가지게 된다. 김주성이 초창기 골밑 플레이가 막히면 공격에서 막힐 수밖에 없지만, 어차피 공격은 2명이나 되는 용병에게 맡기면 되니까 그게 한계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김주성이 슛팅 능력이 없는 선수가 아닌 것이, 선수생활 후반에 3점슛을 개발한 이후로 선수생활 연장이 가능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김주성이 더 일찍 전성기 시절 미들슛과 3점을 장착한 선수였다면 더욱 무서운 선수가 되었을 수도 있다. 사실 김주성이 한국 역대 최고의 선수 중의 하나이지만 역대 No. 1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선수는 아니고, 또 중국 등 국제경기에서 훌륭하게 활약했지만 그렇다고 압도한 것은 아니기에... 스스로 골밑이라는 영역 제한을 두고 자신의 선수능력치를 제한하지 않았으면 더 뛰어난 선수가 되었을 수 있다는 아쉬움인 것이다.[7] 이런 의미로 서장훈이 정확한 슛이 없었으면 서장훈의 가치는 훨씬 낮아졌을 것이다. 슛이 좋다는 이유로 평가절하받는 게 억울한 셈이다.
센터의 중거리 슛과, 슈터의 3점 공격이 영양가 없다며 평가절하당하던 시절이라 서장훈과 문경은의 가치가 더욱 낮아진 것도 있다는 시각이 있는 것이다.
문경은의 은퇴 이후 꽤 세월이 흘렀지만 문경은급의 슈터가 나타나지 않으면서 최근 재평가를 받고 있다. 문경은의 말년기때의 평균득점을 따라가는 슈터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2.4. 국제 대회
아시아선수권 등에서 일본 정도까지의 상대들과 대결할 때는 매서운 활약을 보여주는데, 중국전에서 자신보다 크면서 스피드도 비슷한 상대와 매치업되면 버로우란 표현의 예시라고 해도 될 만한 모습들만 보여줬다.
그런 이유로 기존 나무위키 내용에는 양민학살용이란 평가가 있었는데, 이 말이 참 무색한 것이 국내선수 중 중국전에 제대로 활약한 선수가 아예 없다. 물론 간간히는 활약한 선수는 있다. [8]
하지만, 서장훈, 허재, 이충희 등 한국 역대 베스트5 급 선수들 모두 포함해도 중국전에 간간히 활약을 하긴 했지만, 결국 중국에 밀려서 패배하는 게 보통이었다.[9] 허재, 이충희가 국제 경기에 그나마 가끔 대활약했을 뿐, 상당수의 경우 국제전에 벅찬 상대를 만나면 허재, 이충희도 잠잠한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허재, 이충희, 방성윤, 문태종등 역대 최고의 슈터조차도 국제대회에 중국전에 훌륭한 활약을 한 것도 아니다.
94년 세계대회에 출전했을 당시 평균 19점에 70퍼센트의 2점 야투율을 기록하고 37퍼센트의 3점슛 성공률로 전체 출전 선수 중 3점 성공률 1위를 찍는 등 좋은 활약을 했다. 이집트를 상대로 한 두 번의 경기에선 30점과 33점을 기록하기까지 했다.
이렇듯 국제 경기에서 미친 듯한 3점 슛으로 경기의 흐름을 한순간에 돌릴 실력을 가진 역대 몇 안 되는 슈터였다.[10]
3. 지도자 생활
4. 지도자 스타일
감독대행이었던 2011-12 시즌을 제외하면 4번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고 3번의 시즌은 그야말로 멸망했다.
서울 SK 나이츠 역사상 최장 기간 재임 감독이지만 득과 실이 엄청 컸던 감독. 18년만의 우승을 가져와주기도 했지만 3번의 대멸망 시즌을 만들어내는 등 아직도 지도자로서의 역량에는 의문부호가 달려있다.
농구 스타일은 부임 당시 SK에 풍부했던 포워드 자원들을 활용하는 공격적인 포워드 농구, 그리고 김선형과 애런 헤인즈를 축으로 하는 속공 농구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 덕인지 SK의 팀 평균 득점은 리그 내에서도 상위권이었던 적이 많았다. 본인이 슈터 출신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공격 전술에는 나름 일가견이 있는 편이다.
그러나 자신이 선수 시절 KBL 최고의 슈터 중 하나로 평가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선수들에게 외곽슛을 못 가르치는 편이다. 실제로 경기에서 선수들이 3점을 쏘면 운수 좋은날 아니면 죄다 팅팅팅인지라 보는 팬들 입장에서는 혈압이 오를 지경(...) 그러다 보니 과거 슈팅 가드였던 변기훈의 심각한 기량 저하와 포워드가 주류인 팀 특성상 2번에 배치할 만한 마땅한 전문 외곽슈터가 없고, 그 결과 득점력이 떨어지며 어이없는 역전패를 종종 당하는 점은 옥의 티.
수비 전술에 대해서는 약점이 많다. 감독 초창기 시절 애런 헤인즈를 이용하여 3-2 드롭존을 즐겨 사용하다 못해 과도하게 사용하는 편으로, 드롭존이 파훼되었을 때 다른 전술을 따로 준비해놓지 못하다 보니 멸망 시즌엔 공격이 잘 풀려도 외곽수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 상대팀에게 3점슛을 주구장창 얻어 맞고 경기를 날려먹는 일이 다반사였다. 현재에도 드롭존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예전만큼 즐겨 쓰지는 않고 2-3를 혼용하기도 한다.
감독 초창기 전략의 부재와 더불어 작전 능력이 떨어지고 작전타임 때 하도 애런 헤인즈만 찾아서 '문애런'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의 좋은 예시가 되기도 했지만, 2017-18 시즌 우승 이후에는 그러한 비판은 많이 사그라들었으며, 디펜딩 챔피언이었던 2018-19 시즌엔 시즌 자체는 망했지만 예전과는 달리 작전 능력, 선수 운영 쪽으로 상당히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며 감독으로서의 평가는 초창기에 비하면 상당히 높아졌다.
무엇보다 2011년까지 SK는 감독들의 무덤으로 불렸을 정도로 모래알팀의 대명사였고, 이런 경향이 있는 팀은 아무리 사람을 바꾸고 바꿔도 개선시키기가 힘들기 때문에[16] 10년 가까이 장기 집권하며 팀 체질 개선에 나름대로 성공한 문경은 감독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김민수, 김선형, 최부경, 최원혁, 이현석, 최준용, 안영준 등등 지금 SK 주전 멤버들 거의 전원이 문경은 체제 하에서 함께 성장해온터라 더욱 그렇다.
잘 하는 시즌에는 그냥 쭉 잘하고, 못하는 시즌에는 그냥 쭉 못해서 '''팬들을 생업에 종사하게 해주는 스타일'''(...) 한마디로 시즌 중에 갑작스러운 DTD를 하거나 UTU를 하진 않는다. 구단 자체가 비시즌에 선수 영입이나 팀 구성을 더럽게 못하는 팀인데다가 문경은 감독도 페르소나인 애런 헤인즈 없이는 정규시즌을 잘 보낸 적이 드물기 때문에 1~2라운드 쯤되면 어느 정도 시즌의 가닥이 잡힌다. 후반 라운드 들어서 몇 번 이기거나 승수를 회복하며 주가를 올리기는 하지만 보통 그 쯤되면 이미 늦어버린 상황이 되기 때문에 6위 막차 경쟁도 거의 한 적이 없다.
헤인즈가 뛴 시즌에 정규리그 1위/3위/3위, 헤인즈 없었던 시즌에 정규리그 9위/7위, 헤인즈 다시 데려온 시즌에 정규리그 2위, 헤인즈 부상 시즌에 정규리그 9위, 헤인즈의 마지막 시즌 정규리그 1위로 문경은 감독의 지도자 커리어는 헤인즈 하나로 설명이 가능할 정도. 특정 외국인 선수 1명이 있고 없고에 따라 팀 성적의 편차가 극과 극으로 나뉘고 평균적인 성적이 없었다.
SK에서 감독 생활을 굉장히 오래하였지만 20-21 시즌 기준으로 수비 전술은 여전히 아쉬운 편이고 특정 외국인 선수 1명에 의해 크게 좌우됐던 팀 성적은 또다시 곤두박질치고 있다. 불안한 것은 이런 단점들이 개선되지 않고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
여러가지 장점과 단점에 대해 연구가 되어왔으나 애런 헤인즈 없이는 아무 결과가 없는 감독이기 때문에 과연 그 장점이 온전히 본인의 것이었는지조차 확신하기 어렵게 되었다.
4.1. 지도자로서의 단점
2017-18시즌 우승 이후 개선된 줄 알았으나... 2018-19시즌 다시 문제점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 떨어지는 임기응변과 속공 및 3점을 극대화하는 경기력
- 애런 헤인즈에 대한 집착
- 버려야 하는 선수에 대한 미련
5. 흑역사
2004년 3월 7일. 전자랜드와 TG삼보의 시즌 마지막 경기. 이 당시 문경은은 우지원과 시즌 3점슛 타이틀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었고, 마지막 경기 때까지도 3점슛 타이틀을 누가 차지할지는 안개 속에 있었다. (근데 사실 문경은이 타이틀 경쟁에서 앞서있는데 우지원 밀어주기가 먼저 시작되었다.)
그리고 펼쳐진 경기에서, 문경은이 공을 잡자 삼보의 선수들은 슛을 쏘거나 말거나 멀뚱멀뚱 쳐다보는 모습만 보여주고, 그에 보답하듯 전자랜드의 다른 선수들은 삼보의 김주성이 블록슛 적립하게 좋게 슛을 가져다 바쳐주는 훈훈한 상부상조가 이어졌다. 코트 위의 훈훈한 온기가 팬들에게 스팀을 돌게 만들든 어쨌든 이런 훈훈한 배려 속에 문경은은 3점슛 타이틀 확보하기 좋게 3점만 22개를 넣었고, 덤으로 66점으로 KBL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을 갱신한다. 그러나 같은 날 다른 경기에서 비슷한 협조 속에 우지원이 3점슛 21개를 포함, 70점을 몰아넣어, 결국 3점슛 타이틀은 우지원의 몫이 된다(…). 문경은은 이 경기 이후 인터뷰에서 "내 한경기 최다 3점슛 기록은 1998년에 기록한 12개로 기억하겠다."라는 말로 이 날을 흑역사로 인정했다.
이런 또라이짓을 본 팬들의 분노 때문에 문경은이 그 쇼를 하게 만든 그 시즌 3점슛 타이틀은 해당자 없음이 되었지만, KBL 홈페이지의 기록에는 아무 설명 없이 저 날의 문경은의 총 득점과 3점슛 기록이 공식 기록으로 등재되어 있다. 이뭐병. 궁금한 팬들을 위해 적어놓는데, 이 날 경기는 전자랜드가 승리를 거뒀으며 스코어가 무려 '''130'''[17] - 118... 이는 2009년 ''5차 연장'' 접전 끝에 동부가 삼성에게 135 - 132로 승리한 경기에 이어 단일팀 최다득점(130점)과 양팀 합산점수(248점) 2위이며 당연히 순수 40분 경기로만 따지면 1위다... 1위라고 칭하기도 더러운 경기라고 한다지만...[18][19]
- 헤인즈빨? 실력으로 증명하겠다 : 증명했다. 두 가지 의미 모두로(...). 최근에도 끝없이 성지순례가 이뤄지는 문경은 최악의 흑역사...였다가 2017-18 시즌에 헤인즈 없이 드디어 우승을 했다. 그런데 18~19 시즌은 헤인즈가 있어도 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 뒷심부족? 문경은 감독의 한계인가
6. 기타
- 선수 시절 비 오는 날에 유독 슛이 잘 들어가는 징크스가 있었다. 손끝이 촉촉하다나..
- 할리우드에 능했다. 주로 써먹던 레퍼토리는 스크린을 타는 몸싸움 과정에서 팔을 상대 선수와 엮은 다음 목을 꺾고 비명소리와 동시에 만세를 부르며 넘어지는 것이었다.
- 2010년 성탄절을 맞아 SK 나이츠 홈경기 하프타임 때 왕년의 라이벌 우지원과 3점슛 대결 이벤트를 가졌다.
- 용인시 수지구에서 치킨집을 운영하고 있다. 저녁에는 직접 주문도 받고 서빙도 하는 듯.
- 출처 : 존슨 잃은 문경은 감독 사실은 2011-12 시즌 부상으로 2월에 복귀할 때까지 장기간 아웃된 알렉산더 존슨과 관련된 내용인데 사진과 기사 제목이 뭔가 절묘하다. 한때 몇년간 자동완성에 등록된 적도 있었다.
- 2012-13 시즌 도중 오리온스와의 경기에서 경기 전에는 김종범을 이종범이라 부르더니 심지어 작전타임 때 김승원을 한국에 키 큰 애라고 말하는 개그를 선보였다. 심지어 김승원은 연세대학교 후배였다.
- TV 광고에도 몇 번 출연한 바 있다. 삼성 시절 세탁기 광고를 찍기도 하고, 듀스와 오디오 모델도 했다. 2002 월드컵 공인구였던 피버노바를 가지고 농구하는 장면으로 아디다스 광고에 나왔고, 전자랜드 시절 전자랜드 기업 홍보광고에서 김디에나와 같이 농구하 는 장면에 나오기도 했다.
- 2015년 프로농구 승부조작 사건과 관련, SBS 8시 뉴스의 단독보도 중 사용된 자료화면이 잠실학생체육관 경기라는 이유로 승부조작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불거진 바 있다. 하지만 당사자인 A감독이 언론과 연락이 되지 않고 잠적했다는 보도와는 다르게, 문경은 본인과는 무관하다는 인터뷰 기사가 신속하게 보도되면서 의혹에서 벗어났다. 해당 사건과 관련해 경찰 수사를 받고 있는 대상은 SBS 뉴스 자료화면 경기의 상대 팀 감독인 것으로 알려졌고, 추측에 의해 마음고생을 한 억울한 피해자가 되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하지만 전창진은 무혐의로 풀려나게 되었고, 문경은이 16~17 시즌 들어서 저조한 성적과 대승을 거둔 상태에서 역전패가 자주 나오자 팬들은 또 다시 조작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다.[20]
- 의외로 온라인 게임을 즐겨 한다. 현역 말년 때에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즐겨했었고 캐릭터 2개가 만렙을 찍기도 했다.
- 응답하라 1994 1화에 우지원, 김훈과 함께 본인 역으로 까메오 출연한 적이 있다. 성나정과 얽혀서 연세대 재학 시절의 모습으로 잠깐 등장했다. 그런데 여기서 성나정이 문경은을 보고
'''"근데 저 오빠 와 저리 살이 쪘노?"'''
고아라
라고 말하며 디스당한다. 0화에서 밝혀지길, 저 대사는 고아라의 애드립이었다. 이 말을 들은 문경은은 발끈하였고,
"누가 대본 썼어? '''나 저때 살 안 쪘었어!'''"
문경은
덤으로 이런 말을 하며 토라진다. 우지원이 대본에 없던 애드립이라고 말해도 분명 마이크 대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며 삐쳤다.
- 우승청부사 : 헤인즈빨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겠다라고 말하며 내보냈던 헤인즈가 오리온에서 문태종[21] 과 함께 15-16시즌 우승한 후, 16-17시즌에는 사이먼으로는 우승을 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내보냈던 사이먼이 인삼공사에서 통합우승을 하면서, '문경은이 버리는 외국인 선수를 잡으면 그 다음 시즌 우승한다'라는 뜻에서 붙은 매우 굴욕적인 별명이었다. 사이먼은 해당 시즌 우승 후 인터뷰에서 '사이먼으로는 우승할 수 없다'라는 발언을 담은 기사를 본 이후 자극을 받아 더욱 연습에 매진했다고 말하면서 "'그 사람'에게 틀렸다고 말해주고 싶었다"라고 발언했다.(점프볼 기사) 챔피언 된 사이먼 "당신이 틀렸다" 그런데 2017-18시즌에 우승을 하면서 진짜로 우승청부사가 되어서 이젠 더 이상 쓰이지 않는 별명이 되었다.
- 2018년 6월 3일 인천 SK 행복드림구장에서 열린 kt wiz vs SK 와이번스 경기에 프로농구 우승팀 감독으로 같은 회사 야구단이 초청해 김선형 선수가 시투를 그리고 문경은 감독은 시타를 했다. 영상 하지만 SK가 kt에게 지고 말았다(...). 한국 스포츠 구단들은 같은 지역 연고팀보다는 같은 기업 산하 구단에 시구/시타를 가는 일이 많은데, 이상하게도 이런 경기에서는 상당히 높은 확률로 진다. KIA 타이거즈는 같은 현대차그룹의 수원 현대건설의 황연주의 시구 이후로 멸망해 '타어강'을 찍었고 창원 LG의 현주엽이 시구를 온 날 LG 트윈스는 졌지만 오히려 형제구단간의 협력이 잘된다. 뭐 그래도 이 때 기운을 받기는 받은건지 이 시즌 코시 우승을 하기는 했다.
- 이것 말고도 농구 SK 팬들에게 이번 시구가 미묘한 평가를 받는 것은 전자랜드팬들이 비시즌마다 김선형이 고향(인천)팀인 전자랜드로 올 것이라고 계속해서 루머를 퍼뜨리고 있기 때문인 것도 있다(...). 전자랜드 팬들은 대부분이 인천 연고이다 보니 와이번스 팬이기도 하다.
- SK 팬들에게는 여러 별명으로 불리는데, 가장 잘할때는 문명장, 문띵(장)으로 불리고 가장 못할 때는 삼전드(삼성전자 레전드) ,에 이어 또는 문호구 및 삼성으로 돌아가라는 소리를 듣는다(...).
- S-더비 이벤트 때 삼성의 이상민과의 3점슛 대결에서 현역 시절 못지않은 날카로운 슛감을 선보였는데 2019 NBA 올스타전에서 델 커리, 레이 알렌 등 왕년의 3점 레전드들이 슛감이 다 없어진 모습을 보이면서 (레이 알렌은 성공 0개) 은퇴 이후에도 3점 슛감을 유지하고 있는 문경은이 갑자기 칭송받는 일도 있었다. 은퇴한지 10년이 다되어가는 데도 저런 감각을 유지하는 걸 보면 현역 시절 슛에 대해 정말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이 보인다. 2019-20시즌 올스타전에서 10개 팀 감독들이 슈팅 대결을 벌였는데도 깔끔한 폼으로 전부 성공시키면서 클래스를 보여주었다. 뒤이어 이어진 현역 선수들의 3점슛 콘테스트가 성공률이 엉망이었기에[22] 몸 만들어서 당장 복귀하라는 말까지 나왔다.
- 최준용의 증언에 따르면, 문경은은 현재도 가끔씩 선수들과 3점슛 내기를 하는데, 선수들이 문경은을 거의 이기지 못해 선수들이 진 빚만 자그마치 48억은 될 것이라 말했다. 문경은의 타고난 슈팅 재능이 어느정도인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
- 출생연도는 1년 빠르지만 김승기 감독이 생일이 빨라 학교를 조기 입학해 90학번 동갑내기로 지내는 김승기 감독한테 승률이 낮다. 상대전적은 10승 20패 0.333이다. 정규리그에서만 맞붙었는데 2015~2016시즌부터 5시즌 연속 KGC 상대 우세인적이 없었다. 심지어 우승한 시즌에서도 우세를 가져가지 못했다. 19-20 시즌 코로나 19로 조기 종료되어 4번 맞붙었는데 2승 2패로 동률이었고 홈과 원정에서 1승1패씩 나눠 가져갔다.[23] 이 두팀은 플레이오프에서 맞붙어본적이 없는데 특히 2017~2018시즌 SK 2위 KGC 5위 2018~2019시즌 KGC 7위 SK 9위 시즌을 마쳤기에 플레이오프에서 동반 진출과 탈락을 같이 했어도 마주칠 수 없었다. 대결할 때 승률이 어떻게 될지 기대를 모은다. 연세대 2년 선배인 이상범 감독한테는 정규시즌에는 밀릴지언정 플레이오프에서는 12-13 4강 PO에서 3승 1패로 승리하고 17-18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는 4승 2패로 이겨 우승을 차지해 주는 등 우위를 보이지만 삼성에서 같이 뛰어서인지 몰라도 KGC 김승기 감독한테는 약한면을 보이고 있다. 역대 시즌을 통틀어 양팀이 챔피언결정전에서 맞붙어 본적은 없고 2007-08시즌 6강 플레이오프에서 만나 주희정이 4쿼터 종료 직전 손지창슛으로 불리는 3점 버저비터로 연장으로 끌고 가 1차전을 잡아 기선제압을 한 뒤 2차전에서 마퀸 챈들러의 41득점 12리바운드 10어시스트 트리플더블 활약을 바탕으로 2승을 만들어 4강에 올라간 것[24] 과 12-13 시즌 4강 플레이오프에서 맞붙어 SK가 3승 1패로 챔프전에 진출한 것이 맞대결 결과의 전부이다. 이후 두 팀이 포스트시즌에서 대결할 때 승률이 어떻게 될지 기대를 모은다.
7. 관련 문서
[1] 착화 신장으로 맨발로는 185cm로 보인다. 188인 허재나 187인 김선형과 같이 있는 모습을 보면 이들보다 2~3cm 정도 작아 보인다.[2] 당시 광신상고의 전통에 따라 경희대에 입학할 예정이었지만 당시 연세대의 감독이었던 최희암의 러브콜을 받아 연세대에 입학하였다.[3] 고등학교에서 짱먹던 선수만 뽑아 모은 대학들이 농구대잔치에 참가했으니, 자기 고등학교에선 센터라도 대학교 팀에 모아놓고 보면 더 큰 사람도 있으니까.[4] 키가 190에서 190cm 초반 정도 밖에 안 되는 센터도 흔했고 슈터라면 보통 180cm대 키를 가지고 있던 시절에 190cm의 키를 가진 문경은은 그야말로 센터급 키를 가진 슈터나 마찬가지라는 오해가 있는데, 그건 바로 전 시대 이야기이고 1번, 2번에 자리하던 허재의 키가 188이었고, 마지막 승부 세대에선 서장훈을 제외하고도 2미터 센터, 190대 포워드는 흔했다. 당시 대학 스몰 포워드로 유명했던 김영만 양경민 추승균이 193이고, 우지원과 김훈은 문경은과 같은 190이니, 더 이상 스몰 포워드 포지션에서 문경은이 장신의 장점을 말하긴 힘들었다. 포지션은 파워 포워드지만 실질적으로 스몰 포워드 플레이를 하던 전희철이 197이었다. 그러니 '''장신을 이용한 폭발적인 득점 능력을 선보였다'''라는 식의 기존 기술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5] 키가 2m나 되는 이규섭의 경우는 고려대학 시절까지 센터였다가 삼성 썬더스 입단 이후 서장훈과 겹치면서 슈터로 변신한건 사실이지만, 어차피 당시에는 이규섭 말고도 2미터 내외의 대학시절 빅맨이었던 선수들 다수가 외국인선수들과의 매치업 문제로 3번으로 전향하는 하는게 흔했다. 그런 선수들 중에서 이규섭은 이 중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 중 하나로 꼽힌다. 당시는 자유계약으로 고액의 용병 2명이 동시 기용되었고 대부분 빅맨이었기에 한국인 빅맨들이 프로 와서 살아남기기 거의 불가능이었다. 이후 프로농구에서 용병을 한경기에 2명을 동시 기용하는 것에 여러 가지 제한을 두게 하거나 단신용병을 두거나 하는 식으로 토종 빅맨을 보호 정책을 편 이후로는 토종빅맨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6] 주 득점원이 용병 2명으로 바뀐 상황에서 에이스롤에 어울리는 허재보다는 김영만이 용병과의 조화면에서 더 적합한 상황이라, 사실상 허재의 팀 역할이 없어졌다. 만약 이충희가 프로에 왔다면 용병 2명이 설치는 프로 초창기에 팀 득점을 주도해나갈 수 있었을까?? 이충희 역시 프로에 왔으면 '''수비 +캐치 앤 슈팅'''으로 역할을 제한받는 처지가 됐을 수도 있다.[7] 사실 2015년 이후 트렌드로 보면 미국식 키로 210에 이르는 김주성이 달릴 수 있고 수비와 전술 이해력도 좋은 데다가, 3점이 가능했다면.. NBA에서도 백업이라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도 있다.[8] 97년 아시아선수권 2002년 아시안게임에서의 전희철은 운동능력을 활용한 컷인과 3점 그리고 포스트업과 페이스업을 가리지 않고 한국의 주득점원 역할을 해주었다. 이규섭 또한 93년 청소년대표 시절 왕즈즈를 상대로 좋은 모습을 보이며 아시아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2002년 아시안게임에서는 벤치를 달궜지만 2003년 아시아선수권 결승에서 문경은이 슛감 자체는 괜찮았지만 신장차이에 가로막혀 스크린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던 사이 높은 타점과 슛감을 이용 3점 5개 포함 28점을 기록한바 있으며 김승현도 임팩트 있던 2002년 아시안게임 막판뿐만 아니라 2003년 아시아선수권에서도 판빈에게 막히기 전까지 중국가드들을 밀어부친 바 있다. 중국전에 활약한 선수가 없다는 것은 농알못 인증이라고 주장하는 시각도 있다.[9]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간간히 활약한 경우는 분명히 있다. 예를 들어 전희철의 경우 국제무대에 기준으로 사이즈가 떨어지는 김영만, 추승균, 문경은에 비해 현재 기준으로도 좋은 하드웨어와 운동능력을 지니고 있고 기술도 좋은 편이라 리난 후웨이동 등의 중국 장신포워드에 맞서 꿀리지 않고 오히려 다른 국가와의 경기보다 좋은 활약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10] 후배로서 방성윤이 가끔 그런 활약을 해줬고, 귀화선수 문태종은 아시안게임 우승을 이끄는 등 대활약을 해줬다.[11] 감독대행[12] 헤인즈가 정규시즌 막판에 부상을 당하자 PO에서 6위 전자랜드에게 스윕패[13] PO에서는 테리코 화이트와 제임스 메이스로 우승[14] 헤인즈가 시즌 초반 부상으로 자리를 비우면서 대체외국인 영입 대실패[15] 코로나19로 플레이오프가 치뤄지지 않음[16] 평행이론 LG 트윈스가 30년 가까이 증명 중이다.[17] KBL 웬만한 경기의 '''6쿼터'''에 해당되는 점수이다(...).[18] 요즘 젊은 선수들의 환장할 슛 성공률을 본다면... 몰아줘도 그렇게 넣기 힘들거라는 은근한 재조명이 가끔 나오기도 한다.[19] 놀랍게도 양 팀 합산점수는 타이기록 경기가 있다! 2000년 11월 26일에 펼쳐진 LG와 SBS의 경기에서 128-120으로 LG가 승리한 경기로 합이 248점이다. 이 해 LG는 전무후무한 시즌 평균 100득점 이상을 기록한 닥공농구로, 이 날 외에도 129득점을 기록한 경기도 있다.[20] 그 과정에서 파생된 별명이 '문토토'. 못할 때 댓글창에서 아주 많이 보이는 단어다.[21] 상기했다시피 문태종 또한 문경은 감독이 거른 선수 중 한 명이다. 그리고 문태종은 13-14 시즌 LG의 정규리그 우승을 함께 했다.[22] 심지어 거기에는 본인 제자인 최준용도 있었다(...).[23] 특히 이 시즌에 두 팀의 득실차는 SK가 딱 1점 앞섰을 정도로 치열했다.[24] 이 두경기 마저도 역대급에 5점차 이내 박빙 승부였다. 1차전 94-90, 2차전 9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