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희정

 

'''주희정의 수상 및 영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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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L 챔피언결정전 우승 반지'''
'''2001'''












'''KBL 월간 MVP (3회)
1998년 11월, 2007년 12월, 2008년 12월
'''


'''KBL 베스트 5 (4회)
2000-01, 2006-07, 2007-08, 2008-09
'''


'''KBL 수비 5걸상 (3회)
1997-98, 1998-99, 1999-2000
'''



'''고려대학교 농구부 감독'''
'''KOREA UNIVERSITY BASKETBALL TEAM'''
'''주희정
朱熙正 | Joo Hei-Jung'''
<colbgcolor=#872434> ''' 출생 '''
1977년 2월 14일 (47세)
[image] 부산광역시 서구
''' 국적 '''
[image] 대한민국
''' 신체 '''
181cm|체중 79kg
''' 직업 '''
농구선수(포인트 가드 / 은퇴)
농구감독
''' 종교 '''
불교
''' 학력 '''
부산대신초등학교 (졸업)
경남중학교(졸업)
동아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1] (졸업)
''' 프로입단 '''
1997년 원주 나래 블루버드
''' 현역시절 등번호 '''
15[2], 10[3], 30[4], '''9[5]''', 25[6][7]
''' 소속 '''
<colbgcolor=#872434> ''' 선수 '''
[image] 원주 나래 블루버드 (1997~1998)
'''[image] 서울 삼성 썬더스 (1998~2005)
[image] 안양 KT&G 카이츠 (2005~2009)
[image] 서울 SK 나이츠 (2009~2015)
[image] 서울 삼성 썬더스 (2015~2017)'''
'''감독'''
[image] 고려대학교 (2019 / 대행)[8]
[image] 고려대학교 (2020~)
'''코치'''
[image] 고려대학교 (2018)
''' 등장곡 '''
YG 패밀리- 멋쟁이 신사[9]
Apink - Mr.Chu [10]
티아라 - 넘버나인 [11]
1. 개요
2. 선수 생활
2.1. KBL 데뷔 이전
2.2. 나래에서의 데뷔
2.3. 삼성 시절
2.4. KT&G 시절
2.5. SK 나이츠 시절
2.6. 삼성 2기
3. 지도자 경력
3.1. 고려대학교 코치 → 감독대행 → 감독
4. 3대3 농구 선수 경력
5. 플레이 스타일
6. 기타 사항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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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프로농구 역사상 최초의 20시즌, 1000경기 출장 선수[12][13]
前 프로농구 선수이자 現 고려대 감독. 한국 농구계의 전설적인 포인트 가드다. 정통 포인트가드는 아니지만, KBL 통산 최다 경기 출장, 통산 최다 어시스트, 통산 최다 스틸, 통산 최다 반칙(?)을 기록한 KBL의 전설이다.

2. 선수 생활


[image]
[image]
'''삼성의 첫 우승을 이끌고 플레이오프에서 MVP를 받았던 시절.'''
'''2008~2009 시즌 KT&G에서 KBL 최초 플레이오프 탈락팀에서의
정규리그 MVP 수상.'''
[image]
'''KBL 최초 1000경기 출장을 달성하던 날.'''
[image]
'''1000경기 출전 당시 공개된 주희정의 역대 프로필 사진 모습.'''[14]

2.1. KBL 데뷔 이전


조모 슬하에서 어렵게 자랐다. 어머니는 집을 나가 연락이 끊겼고, 아버지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다. 매번 얼굴을 잊어버릴 때쯤 하면, 다시 집으로 오고 그랬다고.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할머니의 보살핌 속에 어려움을 이겨내고 농구 선수로 성장했다.
동아고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 진학했으나 당시 고려대에 신기성, 김병철, 김승민 등 좋은 가드 자원이 많아 일찍 빛을 보지 못하였다. 결국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2학년을 중퇴하고[15] 일찍 프로의 문을 두드린 끝에 원주 나래 블루버드에 연습생으로 입단했다.

2.2. 나래에서의 데뷔


[image]
지독한 연습량으로 연습생 신화를 써내려 갔다. 나래 시절 최명룡 감독은 주희정에 대하여 "밥먹고 잠자는 시간 빼고 운동만 하길래 오히려 내가 말릴 지경이었다" 고 회고했으며, 본인도 농담 삼아 '농구에도 더블 헤더 경기가 있으면 좋겠다' 말한 바가 있다. 대학 중퇴하고 들어온 선수가 데뷔 시즌에 놀라운 활약을 보이며 일약 스타로 부상하는데 성공했다.
본인의 데뷔 시즌인 1997~98 시즌에 신인왕, 스틸상, 수비5걸상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나래의 주전 포인트가드로 맹활약하면서 전년도에 이어 나래가 6강 PO에 안착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마침 신인상에 있어서 가급적 농구대잔치 출신 선수들을 배제하기로 결정된 상황이라[16] 프로농구 초대 신인왕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시즌 성적은 12.7 득점, 4.1 리바운드, 4.2 어시스트, 2.9 스틸.
그러나 대학 시절 그의 앞 길을 가로막던 신기성이 또 다시 드래프트에서 지명되면서 그의 앞길이 다시 꼬이기 시작했다. 신기성과 완벽하게 겹치기 때문에 공존은 거의 불가능했고, 결국 당시 최명룡 나래 감독은 기회 보장 측면에서 주희정과 강병수를 삼성으로 보내고, 양경민, 김승기를 받는 2:2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

2.3. 삼성 시절


[image]
주희정은 삼성에서 팀을 이끌며 대활약을 시작했다. 정통파 센터는 없지만, 포워드와 가드 위주로 팀을 꾸려가던 2000년대 초반 삼성에게 주희정의 가세는 안정적인 리딩을 할 수 있는 화룡점정의 순간이었다. 삼성에서 꾸준히 활약하면서 삼성의 부활을 이끈 주희정은 결국 2000~01 시즌에는 챔피언결정전 MVP를 받으며 이규섭, 아티머스 맥클래리, 문경은 등과 함께 삼성 썬더스의 우승을 견인한다. 챔피언 결정전에서 10.8득점에 11.8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공격을 진두지휘한 것.
그러나 우승 직후 시즌 주희정은 극심한 슬럼프에 시달리며 우승하던 시즌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결정적으로 2001~02 시즌이 끝난 후 삼성은 서장훈을 영입했는데, 주희정은 플레이 스타일상 서장훈과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했다. 속공과 가드 & 포워드 중심의 빠른 농구에 익숙했던 주희정은 서장훈의 영입 이후, 세트 오펜스 상황에서 위력을 보이지 못하면서 팀 컬러에서 겉돌기 시작했다. 그래도 평균 10득점과 어시스트도 준수하게 찍어주면서 이상민, 신기성, 김승현의 속칭 '3대 가드' 보다 조금 아래의 위치를 유지했다.
결국 2004~05 시즌이 끝나고 팀이 서장훈을 선택하면서 안양 SBS의 이정석과 트레이드된다.[17]

2.4. KT&G 시절


[image]
2005~06시즌 SBS에서 인수된 팀인 안양 KT&G에서 슬슬 삼성 우승 시의 주희정의 모습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마침 이 때의 KT&G는 속공과 포워드 중심의 농구로 팀 컬러가 변했던 상황이었고, 이는 볼 소유 시간이 길지만 그만큼의 효율을 내던 주희정에게는 딱 맞는 타입이었다. 그리고 06~07, 07~08시즌에는 팀의 플레이오프 진출에 한몫 했다.
특히 그의 진정한 진가는 2007~08시즌부터 나타났는데, 이전까지 KT&G는 단테 존스를 중심으로 한 원맨팀이라는 혹평을 자주 들었었던 반면, 이 시즌을 기점으로 KT&G는 주희정을 필두로 한 스피드 농구로 완전히 달라졌고, 그 중심에는 단연 주희정이 있었다. 특히 마퀸 챈들러를 필두로 한 2대2 플레이는 이 당시 단테 존스와 양희승의 이적으로 약체로까지 지목됐던 KT&G를 정규시즌 성적 30승 24패, 플레이오프 4강으로 이끌었다.
2008~09시즌에는 마퀸 챈들러와 화려한 2대2 플레이, 스몰라인업 런앤건을 선보이며 정규시즌 2위까지 오르기도 했으나 캘빈 워너의 대마초 흡입 사건으로 곧 순위는 곤두박질, 승패가 동률이었던 LG, 전자랜드에 상대전적에서 밀려 7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럼에도 시즌 내내 굉장한 활약을 보인 주희정은 결국 MVP를 수상했다(다소 논란이 있긴 했지만 국내 농구 커뮤니티 등에서도 그래도 주희정이 받아야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플레이오프 탈락팀에서 MVP 수상자를 배출한 것은 KBL 역사상 최초.
08-09시즌 주희정은 평균 15.1득점, 8.3 어시스트, 2.3 스틸을 기록했으며 올스타전에는 그의 MVP 수상을 지지하는 팬들이 '정규시즌 MVP에 팀 성적이 반영되면 안된다'는 피켓을 든 적이 있다. 결국 주희정은 김주성을 누르고 MVP를 수상했다.
한편 08-09시즌 KT&G는 시즌 시작 전 유도훈 감독이 프런트와의 마찰로 도중 물러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는데[18] 주희정은 한창 플레이오프 경쟁이 치열할 때에 리빌딩을 준비하는 구단에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는 인터뷰를 몇차례 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시즌을 마치고 김태술[19], 김종학과 맞트레이드 되어 SK로 이적했다.

2.5. SK 나이츠 시절


[image]
SK 이적 후 SK는 방성윤의 팀이며 좋은 조언자가 되겠다는 인터뷰를 했다. 화려한 멤버를 자랑하며 우승 후보 소리 들으면서도 플레이오프도 제대로 못 나가던 SK와 김진 감독의 승부수였으나, MVP 받고 온 주희정조차도 09~10, 10~11 시즌 SK나이츠를 플레이오프로 이끄는 데는 실패했다. 오히려 주희정 본인도 팀과 같이 몰락(...)하면서 트레이드를 야심차게 추진한 김진 감독은 시즌 중도 사퇴의 쓴잔을 들이켜야 했으며, 리그 전체 어시스트 부분 1위를 고수하긴 했어도 이때 이후로 평균 득점을 포함한 스탯도 급격히 저하되기 시작했다.
10-11시즌 개막 전에 김승현과 트레이드 오퍼가 있었다는 말이 있었다. 자세한 것은 정지욱 기자 블로그 참조 그러나 트레이드는 이뤄지지 않았고, 팀의 에이스 자리는 2011-12 시즌에 혜성처럼 등장한 김선형에게 넘어갔다. 나이도 분명 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기량 저하긴 하지만, 갑작스런 몰락이 안타깝다는 반응을 보이는 팬들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준 '''36'''의 나이에 KCC전에서 트리플더블을 달성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2012-13 시즌에는 주전을 완전히 김선형에게 내주고, 벤치에서 뛰고 있다. 전반적으로 뛰어난 활약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예 없으면 김선형의 체력이 방전되므로 있는 것이 낫기는 하다. 2012년 11월 4일 KGC와의 경기에서 통산 4,900어시스트를 돌파하면서 최초의 5,000 어시스트 돌파를 눈 앞에 두게 되었다. 그리고 2013년 11월 7일 KGC와의 경기에서 '''통산 5,000 어시스트'''를 돌파했다. 현역선수 중 어시스트 2위는 3175개의 김승현, 3위 2122개 임재현, 4위 1913개 양동근인데 모두 주희정이 넘사벽이다. 전체적으로 평균 어시스트 수치가 감소한 현재, 평균 5.7개로 KBL 어시스트 1위를 달리고 있는 가드 김시래라고 해도 5000 어시스트까지는 20년이란 시간이 더 필요하다.
SK시절 내내 볼을 들고 코트를 한바퀴 돌면서 공격 시간을 다 소비했기 때문에 동네 한바퀴 돈다는 소리를 박수교 해설위원에게 듣기 시작했다. 팬들 역시 주렁쇠, 주봉사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또한 공헌도에 비해서 과한 연봉을 받았기 때문에 먹튀라는 소리도 나오기 시작했다.
2013-14 시즌을 기점으로 나아졌고 그 결과, 생애 첫 식스맨 상을 받기도 하였다. 본인도 프로 데뷔 이후 처음으로 주전에서 밀려 다소 심적으로 힘든 부분이 있었으나, 벤치에서 있는 시간 동안 농구를 더 넓게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이로써 KBL 출범 이후 처음으로 받을 수 있는 모든 상을 다 받은 선수가 되었다.
2014-15 시즌에 9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2위인 추승균이 738경기, 3위인 임재현이 651경기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기록이다. 2015년 시즌을 앞두고 식스맨 가드 신재호와 묶여 이정석, 이동준과의 2:2 트레이드로 친정인 서울 삼성 썬더스로 컴백했다.[20] 그리고 두 팀의 결과는...

2.6. 삼성 2기


[image]
박재현, 이호현이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리빙 레전드의 클래스를 보여줬다. 3.54 어시스트로 팀내 1위, 전체 8위, 스틸도 0.8개로 팀내 2위를 기록했다. 전매특허인 속공 전개력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지공 상황에서의 경기 운영능력도 리그 꼴지를 달구던 삼성의 안습한 가드진과 비교했을 때 주희정이 왜 아직 현역인지를 입증하는 노련미를 보여주고 있다. [21]
4라운드 중반 이후 출전시간이 더 늘어나면서 퍼지는 거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지만, 다행히 이동엽과 이호현의 경기력이 상승하고 이관희가 제대하면서 어느 정도 관리를 받고 있다.
삼성을 3년만의 플레이오프 진출로 이끌었지만, 안양 KGC 인삼공사와의 6강 플레이오프 1, 2차전에서 상대 가드진의 활동적인 압박수비에 고전하고 극악의 슛 컨디션을 보여주면서 1차전 패배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3차전에서 극적인 한 방을 터뜨려주며 팀의 플레이오프 연패를 끊어냈고, 4차전에서도 높은 3점슛 적중률과 특유의 돌파로 팀의 리드를 이끌어오는 등 홀로 분투했으나, 종료 6초를 남기고 팀 내에서 마치 스테판 커리가 빙의한 듯한 플레이가 나타나 허무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팀은 비록 패배했지만, 주희정은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팀의 다른 모든 가드보다 가장 많이, 가장 오래 뛰었고, 그만큼 믿음직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거꾸로 말한다면 삼성 가드진이 그만큼 막장이란 의미지만.
시즌이 끝난 뒤 FA로 풀렸으나 삼성과 총액 2억 원에 1년 계약하면서 '''20번째 시즌'''을 채우게 됐다. 16~17시즌 들어서는 김태술천기범이 들어오면서 주로 백업으로 출장 중이며, 2016년 12월 23일 안양 원정 경기에서 선발 출전하면서 '''10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22][23]
2017년 1월 17일 창원 LG 세이커스 상대 원정경기에서 출전하여 4쿼터 종료를 2초 남기고 LG 김종규가 코트 밖으로 몸을 날리며 살려낸 공을 가로채기 하면서 역대 최초로 통산 '''1500스틸'''을 기록했다.[24]
6강 플레이오프에서도 전자랜드 앞선에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며 1차전 승리에 크게 공헌했다. 차라리 6강에선 김태술 안 쓰는 게 낫다고 할 정도이며 '''내년까지 1년 더 합시다'''라는 말도 나올 정도로, 시즌이 지나갈수록 은퇴를 권유받는 모 레전드와는 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
4차전에서도 가장 오랜시간을 소화하면서 팀 승리에 공헌했다. 제일 압권인 것은 4쿼터 막판 20초를 남기고 시간을 끌기 위해 아웃넘버 상황에서 레이업을 쏘지 않고 술래잡기를 시전한 것. 상대 수비진을 대놓고 농락한 주희정의 관록은 40줄을 넘긴 선수가 아직 코트에서 설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리온과의 4강전에서도 라틀리프와 함께 변함없는 활약 속에서 팀을 무려 8시즌만에 챔프전에 진출시켰다. 40분 풀타임을 밥먹듯이 뛰던 예전이 아니기에 빡빡한 일정에 따른 출전시간 조절이 필요했으나, 턴오버를 남발하는 노답 가드진에 의해 4쿼터 승부처에서는 고정 출전, 최장 출장 시간을 가져갔고, 4차전에서는 '''무려 35분을 뛰었다!'''
KGC와의 챔피언결정전에서도 정신 못 차리는 가드진 사이에서 백전노장의 관록으로 '''삼성 라틀맆스''' 내에서 국내선수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평균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었고[25] 팀은 준우승에 머물렀으나 마지막 경기가 될지도 모르는 챔피언결정전 6차전에서도 돌파에 이은 리버스 레이업, 장거리 3점 등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양희종이 '''본인 커리어에서 손에 꼽을 수 있을만큼 크레이지모드를 선보이는 바람에'''[26] 통한의 대역전패를 당해 준우승에 머무르고 말았다.
여러 추측들이 있었으나, 2017년 5월 15일 FA를 포기하고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기사
그리고 10월 29일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은퇴식이 진행되었고, 이 날 팀은 97-84로 패했다...

3. 지도자 경력



3.1. 고려대학교 코치 → 감독대행 → 감독


2018년 4월 27일 자신의 모교인 고려대학교의 코치로 부임하게 되었다. 현재 주희정은 고려대학교를 중퇴한 후 21년만에 2학기때 복학했는데, 이로써 주희정은 대학 농구 최초로 재학생이 지도자를 맡게 된다. 기사 참조
성적 부진으로 강병수 감독이 계약 만료되면서 지도자 공백이 생겼고 2019 시즌은 일단 주희정이 감독대행으로 팀을 이끌게 되었다. 8월 MBC배 대학농구에서 팀을 3년 연속 우승으로 이끌었고 9월에 열린 정기전에서 4년 만에 승리를 안겼다. 그러나 대학농구리그 플레이오프 4강전에서 성균관대에 패하며 7년 만에 챔피언결정전 진출이 좌절되었다.
2020년 1월 1일 대행 꼬리표를 떼고 정식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20 대학 U 리그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1차 대학 결승전에서 연세대에 패배를 당했고 2차 예선에서는 중앙대에 패배하며 비판을 받고 있다.

4. 3대3 농구 선수 경력


[image]
2018년 5월 말에는 팀 데상트에 입단해 3대3 농구 선수로 약 1년 남짓 뛰기도 했었다.

5. 플레이 스타일


KBL 역사상 가장 빠른 선수 중 한 명, 전성기 시절 리그 최고의 스피드를 지녔었다. 엄청난 스피드와 지치지 않는 체력에 바탕을 두어 상대방이 지칠 때까지 따라가는 수비력도 우수했다. 전성기 시절 스피드를 바탕으로 한 속공 전개는 그의 주무기였다. 하지만 볼호그 기질이 강했기 때문에, 세트 오펜스에서 비교적 약점이 있었다. 비록 포인트가드지만 종종 과도한 리딩을 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실제로 리딩 중 샷클락을 과도하게 많이 사용하다가 오히려 팀의 유기적인 볼 흐름까지 방해하는 플레이들이 나오곤 했었다. 부상과 노쇠화로 스피드가 어느 정도 죽은 뒤에는 이러한 단점이 더 두드러졌다.
데뷔 초 외곽슛이 거의 없는 선수로 평가받았다. 그래서 중요한 승부처에 노마크로 방치하는 일이 잦았는데, 실제로 3점을 쏴도 안들어가서 본인도 자신감을 잃고 안으로 들어오다가 막히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과장 하나 없이 신명호는 놔두라고의 상황이 그대로 벌어졌다! 하지만 본인의 피나는 노력으로 개선한 몇 안되는 선수이다. 삼성 썬더스를 우승으로 이끈 시즌에는 이전에 하던대로 노마크로 버리는 수비를 하는 상대팀에게 결정적인 3점슛을 여러 차례 터뜨리며 제대로 뒤통수 치는 모습을 종종 보여주었다. 00-01 시즌 결승 상대였던 창원 LG 세이커스가 이런 뜬금 3점에 제대로 당한 케이스. 안양으로 이적한 뒤에는 특유의 부단한 노력으로 3점슛도 안정궤도에 올라 전성기를 맞이한다. 본래 3점이 없이도 정상급 가드였던 선수가 3점마저 장착하니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 한편 본인에게 특화된, 상당히 특이한 슛폼을 갖고 있다. 세트슛에 가까운 상당히 엉거주춤한 폼으로 슛을 올라간다.
세트 오펜스 상황에서의 지공은 속공 전개 시 보여주는 능력에 비해 많이 부족하다. 사실 슛이나 돌파에서 다른 정상급 가드들에 비해 특출난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는 아니였다. 시야가 넓은 편은 아니였고, 따라서 빈 공간을 노려서 킬패스를 넣어누는 능력은 부족했다. 따라서 투맨게임을 해주는 빅맨이 존재하면 세트 오펜스 상황에서도 좋은 위력을 보여주나, 같이 움직여주는 선수가 없으면 아쉬운 모습을 보여줬다. SK에서 부진을 면치 못하는 것도 본인의 기량 감퇴도 있겠으나 지공 위주의 선수 구성을 가진 SK에서 본인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삼성 2기에는 속공에 최적화된 라틀리프가 있어 위력이 급상승했다.
점프가 높은 건 아니지만 공이 떨어질 위치를 잘 파악하여 포인트 가드임에도 불구하고 리바운드 능력이 상당히 좋은편이였다. 김주성 데뷔 전에는 KBL에서 한국인 선수 중 리바운드 순위를 꼽으면 서장훈 다음에 위치한 일도 자주 있었다. 이런 리바운드 능력으로 트리플더블을 기록하는 일도 종종 볼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KBL 국내선수중 통산 트리플더블 8번으로 현재 전체 1위에 위치해 있다. 디시 농갤, NBA 매니아, I LOVE NBA 등 국내 주요 농구 커뮤니티에선 NBA 레전드 제이슨 키드를 따 '주키드'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허나 반대로 부진했던 시기에는 시야가 좁고 리딩이 부족하여 주봉사라는 별명이 있다.
KBL을 대표하는 엄청난 금강불괴로 체력과 내구성도 뛰어나서 전성기에는 35분 이상을 출장하면서도 다치는 일 없이 거의 모든 경기를 소화했다. 전성기였던 07-08 시즌부터 12-13시즌까지 단 한 경기도 결장한 경기가 없다. 거기다 본인에겐 아쉬운 일이지만 국대에 뽑힌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경기 출장에 관하여 손해를 본 것도 거의 없다. 가끔 크거나 작은 부상이 있으면 참다가 비시즌에 해결한 점도 작용했고, 커리어 전체로 따져도 '''15경기 밖에 결장하지 않았다.'''
[image]
커리어 마지막 경기였던 KGC와의 챔피언결정전 6차전 모습.
그리고 이 항목의 움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순간적인 센스가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매치업 수비를 바보로 만드는 창의적인 플레이에도 능하다. 윗 움짤은 주희정의 전매특허 시그니처 기술이다. 드리블 중 베이스 라인을 타고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척을 하면서 훅에 가까운 리버스 레이업을 시도하는 것이다. 윗 장면은 실제로 자주 나왔고, 상당히 효과적인 기술이었다. 애초에 레이업을 시도하지 않는 것처럼 하여 빅맨의 방심을 유도한 뒤 기습적으로 시도했기 때문에 블락을 당하는 일도 많지 않았다.

6. 기타 사항


  • 동시대에 경쟁했던 이상민, 김승현에 비해 평가가 낮았으나 특유의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2010년 12월 19일 삼성전에서 통산 4500 어시스트라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통산 어시스트와 스틸#s-1.2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고 갱신할 선수는 딱히 보이지 않는다. 2013년 11월 7일 안양 KGC전에서 통산 5000 어시스트를 달성했다. 7일 현재 현역 선수 중 어시스트 2위는 3175개의 김승현(35·삼성), 3위는 2122의 임재현(35·오리온)이다. 2013-14시즌 어시스트 1위인 김시래의 평균 어시스트가 5.7개인 것을 보면 이 기록은 절대 깨지지 않을 기록이라 하겠다. 얼리엔트리 + 군면제[27] + 뛰어난 기량 + 뛰어난 자기 관리의 결과물로, 기록에 있어서는 서장훈과 함께 다시 없을 레전드.
  • 트리플 더블도 통산 8회를 기록하며 리온 데릭스, 크리스 윌리엄스와 함께 공동 2위를 이루고 있고[28], 국내선수로는 단연 통산 1위이며 이 또한 한 동안 깨지지 않을 전망.
  • 프로 원년부터 꾸준하게 뛰어와서 프로농구의 역사와 함께 선수생활을 했기 때문에(원년시즌부터 2016-17시즌까지 20시즌) 팬들에게는 프로농구계의 살아있는 화석이라는 말도 들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 온 동기들(조상현, 황성인, 조우현, 김성철, 강혁, 조동현 등)이 모두 은퇴하고 나서도 5~6시즌을 더 뛰었다.
  • 불우했던 어린 시절 때문인지 좋은 가정, 많은 아이들을 원한다고 한다. 그래서 자식이 슬하에 넷이다.[29]
  • 또 한가지 불운이 있다면 국내에서의 활약에 비해서 국대 활약이 전혀 없다는 거다. 선수 시절 내내 성인 국대 1군에 뽑힌 적이 단 2번밖에 없고 모두 기대에 못 미치는 저조한 활약을 펼쳐 국내용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반면 비시즌 잦은 국대 차출에 시달리지 않은 점이 선수로서의 몸 관리와 현역 생활 롱런에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30]
  • 아들 주지우군과 딸 주서우양이 JTBC 반달친구에 출연했다. 이 때문에 주희정도 잠시 출연한다.
  • 젊었을 때 M자형 탈모 기미가 보였지만 한참 후 은퇴할 때까지도 탈모가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사진만 봐도 풍성 그 자체. 관리를 잘한 건지 아니면 그냥 탈모 기미에서 멈춘건지...
  • 농구 게임 프리스타일에서 KBL 스폐셜캐릭터로 등장했었다. 이상민, 김승현과 함께 PG로 출시되었으며[31], 능력치는 달리기와 3점에 특화되었다.
  • 은퇴 후 필리핀에서 객원 코치로 있었으며, 미국에 연수를 다녀왔다. 향후 독일에서 연수를 받을 예정이였으나 모교인 고려대 코치가 되었다.
  • 대학 선수들이 얼리로 프로에 진출하는 것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시각을 밝혔다.

7. 관련 문서


[1] 1997년 빠른 프로 입단을 위해 중퇴했고 은퇴 후인 2018년 2학기 때 복학.[2] 원주 나래 시절[3] 98-99 시즌 수원 삼성 시절[4] 99-00 시즌 수원 삼성 시절, 김현준 코치의 등번호 10번을 영구결번을 시키면서 30번으로 변경했다.[5] 수원/서울 삼성 시절, 안양 KT&G 시절, 서울 SK 시절[6] 09-10 시즌 서울 SK 시절[7] 2009년 11월 5일 전주 KCC와 경기부터 25번을 달았다.[8] 당초 고려대 측은 2019 시즌을 맞아 새 감독을 선임했는데 해당 인물을 선임한게 말이 많아지자 발표를 계속 미루다 급하게 주희정에게 대행을 맡긴 것.[9] 안양 KT&G 카이츠 시절[10] 서울 SK 나이츠(2014~2015) 시절[11] 서울 삼성 썬더스(2015~2017) 시절[12] 체력이 중요한 농구에서 이 정도로 많은 경기를 출장한다는 건 철인 of 철인이다. 운이 좋게 일찍 데뷔한 것과 군대를 면제받은 것, 국가대표에 거의 발탁되지 않은 점 또한 이점으로 작용했다.[13] 더욱 대단한 것은 한국농구 최고의 선수인 허재서장훈도 농구 외적으로 구설수가 많은 편이었지만, 주희정은 농구 외적으로도 모범적인 선수고, 플레이 자체도 깨끗한 편에 속했다. 그래서 레전드급 선수 중에선 '''안티가 정말 없기로 유명하다.''' 은퇴투어를 한 레전드급 선수였던 김주성도 농구 외적으로 훌륭한 이미지에 비해서 경기 중에 주성타와 잦은 비매너로 안티가 많은 편이었다.[14] 주희정은 자기가 제일 잘 생겼다고 생각한 때가 5:5 가르마 시절이었다고 얘기했다.[15] 몸 상태가 나빠진 할머니의 약값을 대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16] 원칙적으로는 신인 자격은 이상민(...)도 주어져야 하지만, 이상민은 이미 상무에서 뛰며 농구대잔치를 통해 성인 실업 무대에 데뷔했기 때문에...[17] 그리고 정확히 10년 뒤, 이 둘은 또 트레이드에 엮이게 된다.[18] 정확히는 이적 당시 "구단이 우승할 의지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저 중간만 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듯 하다."라고 실망감을 표시했다.[19] 그 당시 맞트레이드 상대였으나, 2016-17 시즌에 삼성에서 한 솥밥을 먹게 되었다.[20] 공교롭게도 10년 전 SBS로 트레이드 당시 상대가 이정석이었다.[21] 그나마 이동엽은 신장과 돌파를 활용한 골밑 플레이가 늘어나고 있고, 16-17시즌 들어서는 이관희와 함께 우월한 피지컬을 이용한 2~3번 수비수로 많이 중용되고 있다.[22] 프로농구에서 1000경기 출장은 매우 위대한 기록이다. 적은 경기 수 때문에 그렇다. 한 시즌 144경기 체제인 프로야구의 경우 7년 정도 꾸준히 주전으로 나오면 1000경기를 채우지만 한 시즌에 54경기에 불과한 프로농구에서 1000경기를 채우려면 무려 19년이 걸린다. 주희정이 군면제인 데다가 워낙 어린 나이에 데뷔를 해서 세워진 기록이기도 하지만 체력 소모가 워낙 심한 농구라는 종목에서 20년동안 꾸준히 경기에 출장했다는 자체만으로 칭송받을 만한 일.[23] 현재로서는 이러한 주희정에게 도전할 수 있는 '''기회라도''' 있는 사람은 KCC의 고졸 루키인 '''송교창'''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24] 정작 팀은 지면서 창원 원정 9연패를 기록했다.[25] KGC 및 모든 플레이오프 진출팀 내 가드진을 통틀어도 주희정만큼 꾸준하게 활약한 이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나마 뽑자면 양동근정도. 베테랑의 품격을 보여준 두 선수와 대비되어 젊은 가드들이 이 둘의 발끝도 따라오지 못한다는 게 국농의 현실... 그나마 좋은 평가를 받는 김선형, 김시래 등은 팀이 PO 진출에 실패했다. (베테랑 김태술 의문의 1패...)[26] 3점슛만 무려 '''8개'''를 넣으면서 그야말로 인생경기를 펼친 것.[27] 가정 형편으로 인해 2004년도에 제2국민역으로 면제를 받았다.[28] 통산 1위는 앨버트 화이트의 10회.[29] 주서희(2005년생), 주서정(2007년생), 주지우, 주서우(2010년생, 쌍둥이 남매로 주지우가 오빠.)[30] 이것은 야구의 전설적인 레전드급 선수인 양준혁도 똑같다. 통산 최다타석과 타수, 최다안타 기록자인 박용택도 국대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하다. 그렇다고 박용택이나 양준혁이 국대도 못 나가본 선수라고 폄하당하는 경우는 없다.[31] 전태풍도 있었으나 전태풍은 PG, SG 모두 전직이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