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다
1. 개요
한국어의 '깨다'는 크게 보면 아래의 두 가지 뜻이 있다. 이외에 '까다'에서 파생된 피동사/사동사 등이 있지만 부수적이다.
비록 오늘날에는 3번 뜻만 '까다'에서 직접적인 연관성을 추측할 수 있지만 다른 두 뜻도 '둘러싸고 있는 무언가를 벗겨냄'이라는 의미에서 '까다'와의 연관성이 보일락말락하기는 한다. 특히 1번 뜻은 '잠에서 깨다'와 같이 주로 자동사로 쓰이기 때문에 '*잠을 까다' > '잠에서 까-이-다'로 발달했을 가능성도 있긴 하다. 오늘날에는 1번 뜻 역시 '잠을 깨다' 식으로 목적격을 많이 쓰게 되었지만. 1번의 '깨다'는 [깨ː다]로 장음이라는 사실도 접사 파생의 가능성을 눈여겨보게 한다.
현대국어에서 'ㅐ'를 어근으로 하는 동사의 특징상 연결어미 '-어-'가 붙을 때에는 표기상으로 '어'가 수의적으로 탈락할 수 있다(예: 깨다 - 깨서). 사실 '깨다[깨다]'→ '깨지다[깨ː지다]'로 장음이 되기 때문에 음운적으로는 탈락이 아니고, '깨어지다>깨애지다>깨ː지다'의 완전 순행 동화(연결어미 '-어-'가 '깨'의 'ㅐ'에 동화되어 'ㅐ'로 변화)로 볼 수 있다. 장단이 거의 사라진 오늘날에는 탈락으로 봐도 거의 무방할 듯하다. 표기상 '수의적'으로 탈락한다고 하긴 했지만 요즘 사람들 가운데 '깨어지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도 '가다>가아서'가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서 이미 준말 쪽이 우세해진 것에 비하면[1] '깨다>깨어서'는 아직도 그렇게 쓰는 사람이 있기는 있다.
1, 3번의 '깨다'는 [깨ː다]로 장음인 반면 2번은 [깨다]로 단음이다.
어근이 '깨'와 동음이의어이지만 '삶-삶다'와는 달리 '깨-깨다'를 이용한 말장난은 찾아보기 어렵다. '깨다'의 1번 의미는 유정명사에서 주로 쓰이고 2번 의미는 어느 정도 크기가 되는 물체에 쓰이기 때문에 두 의미 모두 '깨'와는 연관성을 찾기 어려워서인 듯하다. 써놓고 보니 생활의 참견에서 한 번 말장난이 등장한 적이 있긴 했다. 대장 내시경 하기 전에 환자한테 깨나 딸기같이 씨앗으로 된 건 먹지 말라고 당부를 했는데, 수면 내시경을 하던 중 간호사가 앰풀을 깨뜨리자 "깨먹지 말라고 했잖아!!" 라고 소리쳤더니 환자가 "(깨 먹어서)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를 했더라는 일화. '먹다'라는 동사가 '-어 먹다'로 보조동사로 쓰일 수 있는 데다가, '깨다'가 어근이 'ㅐ'여서 연결어미 '-어-'가 생략될 수 있는 음운 구조이기 때문에 음이 같아진 사례이다.
1.1. 깨다1
역사적으로는 'ᄭᆡ-'로 아래아를 갖고 나타난다.
대체로 자동사로 쓰이기 때문에 피동형은 없다는 것이 2번 뜻과 큰 차이. '깨지다'라고 쓴다면 대체로 2번 뜻이다.
1.1.1. 의미
1.1.1.1. 잠에서 깨다
- (-에서 / -이 / -을) 술기운 따위가 사라지고 온전한 정신 상태로 돌아오다.
- 잠에서 깨다, 잠이 깨다, 잠을 깨다
좀 더 능동적인 의미로 '잠을 깨다'라고 목적격을 쓰기도 하지만 전반적인 논항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잠이 깼다'를 '잠을 깼다'라고 한다고 해서 '내가 잠을 깼다'라고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잠이 나에게서 깨였다' 식으로 수동태를 상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자동적으로 깬 게 아니라 좀 더 의지적으로 잠에서 벗어났다'라는 뉘앙스를 주기 위해 '잠이 깼다' 대신 '잠을 깼다'라고 조사를 바꿔서 썼을 뿐이다.
사동형은 '깨우다'이다.
1.1.1.2. 생각이 계몽되다
- (-이) 생각이나 지혜 따위가 사리를 가릴 수 있게 되다.
- 생각이 깨다
그에 따라 논항 구조도 조금 바뀌었는데, '생각이 깨다'와 같은 문장은 윗 문단 식으로 생각하면 그 '생각'에서 벗어나야 할 텐데 이 문장은 그렇게 해석되지 않는다. 의미역할(theta role) 측면에서 '잠이 깨다'의 '잠'은 '잠으로부터 빠져나감'이므로 '출발지점역'(source)인 반면 '생각이 깨다'의 '생각'은 대상역(theme)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뜻은 '계몽(啓蒙)'과 단어의 구조가 비슷하다. 이 의미의 영단어는 'enlighten'으로 영어에서는 '빛'(light)을 의식해서 단어가 생겼다. '깨시민'의 '깨' 역시 이 의미의 '깨다'이다.
사동형은 아마도 '깨우치다'이다. 일반적인 '-이히리기우구추-' 파생은 아니다.
'깨닫다'는 '깨-' + '닫-'(뛰다)의 합성어이다.
1.2. 깨다2
1.2.1. 의미
1.2.1.1. 단단한 것을 무너뜨리다
한국어의 파괴 동사 중 하나. '부수다, 찢다, 깨다' 등등.
고형은 'ᄢᅢ다'이다. ㅄ계 합용병서. 위의 '깨다'와는 달리 처음부터 윗아(ㅏ)였다.
피동형은 '깨지다'이며 강세형으로는 '깨뜨리다(깨트리다)'가 있다. 파괴 동사의 특성상 사동형은 상정하기 어렵다.
'부수다'가 덩어리진 물건을 가루로 만든다는 점에, '찢다'가 얇은 걸 갈기갈기 조각낸다는 점에 포인트를 둔다면 '깨다'는 단단한 것의 형체를 무너뜨리는 이미지를 가진다. 대부분의 경우 '깨는 행위'는 일단 어떤 충격이 가해지면 그 다음부터는 알아서 산산조각이 난다. 유리컵을 바닥에 떨어뜨리면 충격이 간 부분만 떨어져나가는 게 아니라 균열이 여기저기로 이어지면서 유리컵 전체가 산산조각이 나는 식. 그렇기 때문에 '서서히' 부서질 수 있는 '부수다'와는 달리 깨지는 건 '서서히' 깨질 수는 없고, '부서지다'가 점차적으로 바스라지는 것도 포함한다면 '깨지다'는 순식간에 무너져내리는 이미지를 준다.
대상이 되는 재질(?)은 주로 '''유리'''이다. 깨진다는 말을 들으면 다들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는' 장면을 연상할 것이다. 그래서 잘 깨지는 걸 갖다가 '유리OO'라고 하기도 한다. '유리몸, 유리멘탈' 등.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인지 '깨진 유리창 이론, 깨진 유리창의 역설'의 비유처럼 '파괴된 상태'의 비유로 '깨진 유리창'을 든 사례도 있을 정도. 그밖에도 도자기 그릇 같은 것도 깨지는 대상이 될 수 있다.
완전히 부서지지 않더라도 약간 금이 간 것도 '깨졌다'라고 표현한다. 좀 더 이 현상만을 지칭할 땐 '금(이) 갔다'라고 한다. 여기서의 '금'은 '금을 긋다'의 '금'과 동일한 듯하다.
한국어에서 된소리로 시작하는 단어들인 '깨다', '찢다', '빻다'에서 파괴하는 의미가 많이 들어가있는 건 꽤 재밌는 현상인 듯.
이처럼 단단한 것을 무너뜨린다는 이미지 때문에 물질이 아닌 것에도 자주 쓰인다.
- 글자가 깨지다
- 멘탈이 깨지다 (부서진다고도 씀)
- 커플이 깨지다
1.2.1.2. 생각이나 기대 또는 예상을 뒤엎다
근래에 추가적인 논항 없이 '깬다'라고 쓰면 그 전까지 갖고 있던 환상이나 좋은 이미지가 깨져서 실망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아직 이 의미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리지 않았다. 'A의 행동 때문에 A에 대한 이미지가 깨졌다' > 'A가 내 이미지를 깼다' > 'A가 깬다 (이미지를 깨고 있는 상태)' 식으로 된 것 같기도 하다. 논항이 줄어들어버려서 1번의 '깨다' 같아보이기도 하고. 'ㄴ다' 식으로 현재형을 쓸 수 있는 건 위의 일반적인 '깨다'하고도 좀 달라진 부분이다. 위의 '깨다'는 파괴 동사라서 습관적인 행동이나 상태로서 잘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1.2.2. 다른 언어에서
1번 뜻과 2번 뜻은 한국어에서도 동음이의어 관계이므로 외국어 가운데 두 뜻을 모두 지니는 경우는 드물다.
일본어로는 '割る(わる)'가 이런 식으로 튼튼한 걸 무너뜨리는 의미에 맞닿아있다. 한자 '割'은 깬다는 뜻이 별로 없는데 특이한 부분. 破る(やぶる)도 유리에다 쓸 수 있긴 한데 이 단어는 부수는 걸 전반적으로 다 지칭할 수 있는 단어로, 심지어 종이 같은 걸 '찢는' 것도 표현할 수 있다. 반대로 종이에다가 '割る'를 쓰는 건 조금 무리니 '割る'가 좀 더 특화된 단어인 셈.
영어로는 'break'가 '부수다', '깨다'를 모두 담당한다. 이 'break'는 살짝 끊는다고 해서 '휴식'이라는 뜻도 된다. 약간 금이 간 것은 따로 'crack'이라고 부르는데 이 '크랙'은 컴퓨터 쪽에서 프로그램의 틈을 파고 든다는 뜻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1.3. 깨다3
- 알에서 깬 병아리
'까다'의 2번 뜻이 '병아리를 까다'와 같이, 유정명사 [새끼]를 목적어로 꽤 특이하게 쓸 수 있기 때문에 이 '깨다' 역시 [새끼]를 주어로 쓸 수 있게 되었다. 특히나 병아리 같은 난생 동물은 '알'이라는 탈격(벗어남) 논항도 있어서 더 적격이다. 같은 '까다'로 묶여있어도 '마늘을 까다' 같은 것은 '마늘'이 무정명사이기 때문에 '마늘이 깨다' 식으로 써봤자 이런 문장을 상정할 상황이 없다.
하지만 '병아리를 까다'라는 문장 자체가 등장 빈도가 꽤 낮은 편이기 때문에 1번의 '까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태어나는 것도 잠들어있다가 깨는 것과 비슷하다면 비슷하지 않을까(?).
[1] 제55항: 홀소리로 끝난 어간의 밑에 ‘이 아 어’가 와서 어우를적에는 준대로 적을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