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 유지
'''中 裕司 / Yuji Na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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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9월 17일에 태어난 일본 오사카 출신의 前 세가의 프로그래머이자 게임 제작자였다. 그의 이전 별명은 '''세가의 미야모토 시게루'''.[1] 오오시마 나오토, 야스하라 히로카즈와 함께 '''사상 최고의 속력을 자랑하는 고슴도치인 소닉 더 헤지혹을 창조한 사람이기도 하다.'''[2]
대표작으로는 일부 소닉 시리즈와 나이츠 시리즈, 판타시 스타 시리즈 등이 있다.
2019년 5월 크루즈 여행 둘째날에 한국 부산 관광에 다녀왔다.트위터, 페이스북
어린 시절 YMO에 빠져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있었다가 근처의 사람이 나타나 이런저런 해설과 가르침을 받으며, 신디사이저나 전자음악에 대해 흥미를 가지게 되어 PC-8001을 구입한 것을 계기로 컴퓨터에 빠져들었다. 여담으로 PC-8001을 처음 부팅했을 때 비프음이 울린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이후 고등학생 시절 독학으로 프로그래밍을 공부했고, 아르바이트로 시내에 있는 퍼스컴 업체 日本マイコン学院에서 OA용 프로그램과 게임을 제작했다. 당시는 퍼스컴 기종이 상당히 많았는데 이런 각 기종별로 똑같은 프로그램을 수십 개 포팅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후 선생님에게 넌 머리가 나쁘니 진학은 그만 두고 취직을 하라는 말을 들었고,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오사카부립 니시노다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84년 일본 도쿄에 위치해 있는 세가 엔터프라이즈에 입사하였다.[3] 신입 연수 시절 이미 '스크롤'을 제멋대로 구현할 정도였고 그런 특출난 실력으로 연수 시절 제작한 '걸즈 가든'이라는 게임은 상품화까지 된다.
이후 스페이스 해리어 기획을 전해듣고 좋아서 혼자서 멋대로 만들고 있던게 높으신 분의 눈에 띄어 프로젝트 시동. 이후 스즈키 유 아래에서 스페이스 해리어, 아웃런, 애프터 버너 2 등의 게임을 제작했다. 이때 스즈키 유로부터 프로그래밍 노하우 뿐만 아니라 플레이 감각을 만드는 방법 등에 대해 직접 전수받았다고 한다. 또한 마크3판 아웃런에 PSG음원이 만족스럽지 않아 동료들과 함께 또 멋대로 FM음원 보드를 만들어 대응시켰는데 그것이 높으신 분의 눈에 들어 또 다시 상품화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리드 프로그래머로 활약하는 동시에 북두의 권(세가 마스터 시스템)[4] , 판타시 스타 시리즈 등의 콘솔 게임기용 게임을 제작하였는데, 판타시 스타 2는 4메가비트 예정이었으나 상부에다 납기에 맞출 테니 6메가를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쇼부를 쳐서 만들어 냈다.
한편 어뮤즈먼트 게임 쇼에서 캡콤이 출품한 대마계촌을 보고 감격하여, 회사로 돌아오자마자 상사에게 '''이식하고 싶으니까 캡콤과 교섭해달라'''고 호소한 적이 있다. 그리고 1개월 정도 후에 캡콤으로부터 롬 및 그래픽 데이터, 소스 코드 등을 제공받아 진짜로 MD판 이식 프로그램의 제작에 착수했다. 이때 45메가의 대용량을 도저히 4메가에 담아내지 못했는데, 그래픽을 배제해도 프로그램만 4메가 이상이었기 때문에 결국 또 높으신 분에게 5메가 사용하게 해주세요! 했다고.
위와 같이 각종 아케이드 게임을 가정용 게임기로 이식하면서 하드웨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프로그램을 짜는 경험을 쌓아올렸다. 나카 유지 본인의 회상에 의하면 당시 세가 측은 프로그래머를 육성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고, 뛰어난 프로그래머가 되는 과정은 전부 독학이었다고 한다. 이때 특히나 이식하기 어려웠다는 작품이 대마계촌이었지만, 이때 습득한 기술 중 일부가 소닉 1에도 적용되기에 이른다.[5]
나카 유지가 직접 밝힌 대마계촌과 소닉 1의 관계
1990년에는 콘솔 게임 부서에서 일하고 있던 오오시마 나오토, 야스하라 히로카즈와 함께 세가 최초의 마스코트인 알렉스 키드에 이어서 두 번째 마스코트인 소닉 더 헤지혹을 탄생시킨다. 이 시기에 나카 유지는 소닉 1의 개발을 맡았던 '세가 AM8'의 팀장이었으며, 캐릭터가 완성될 즈음에 팀 이름이 소닉 팀으로 개명된다.
소닉의 탄생은 특히 세가 아메리카를 구원했다. 그러나 소닉의 개발 과정은 나카에게 독이 되었고 결국 나카는 이 시점에서 세가를 그만둔다. 이를 놓치지 않고 세가 미국 지사에서는 나카를 직접 세가 테크니컬 인스티튜트로 영입한다. 이 과정에서는 당시 일본 세가에 근무하고 있었던 PS4의 설계자 마크 서니도 크게 관여하였다고.
나카의 미국 시절에는 깐깐했던 일본과 달리 제약사항도 적었고 개발실은 전부 개인실로 갖춰져있어서 놀랐다고. 처음엔 소닉은 다시는 만들지 않겠다는 조건이었지만, 결국 '2인 동시 플레이를 할 수 있게'라는 조건으로 개발을 시작. 소닉 1의 한계를 뛰어넘어 더욱 고속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이때 해외의 아티스트들은 성향이 너무 달라서 그래픽의 테이스트를 전달하기가 어려웠고 그 때문에 폐기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당초 미국측에서도 이런 문화적 차이로 인해 소닉의 디자인부터 캐릭터의 네이밍까지 사사건건 충돌이 잦았다. 소닉 더 헤지혹 3의 도트 그래픽이나 BGM 등을 보면 1, 2편에 비해 미국 스타일이 반영된 흔적이 보인다.
소닉 1이 성공한 이후 나카 유지는 야스하라 히로카즈와 함께 세가 미국 지사인 세가 오브 아메리카의 세가 기술 연구소로 이동하여, 개발팀과 함께 소닉 2를 제작하여 소닉 더 헤지혹 시리즈 중 1편을 제외하면 역대 최고인 603만 장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한다. 이후 소닉 더 헤지혹 3, 소닉 & 너클즈, 소닉 스핀볼을 제작하였다. 1998년에는 소닉 어드벤처를 제작하여 성공을 하였고, 2000년 7월에는 소닉 팀을 세가로부터 독립시켜 주식회사 '소닉 팀 리미티드(Sonic Team Ltd.)'를 세우고 CEO로 취임한다.
그러나 소닉 팀은 재정 악화로 결국 2004년에 다시 세가에 통합되고, 이후 나카 유지는 판타시 스타 유니버스를 마지막으로 세가에서 떠난다. 그는 2006년에 함께 일하던 동료 10여 명을 데리고 세가를 퇴사하여, 세가 게임 크리에이터 독립 지원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 '프로페 리미티드(Prope Ltd.)'를 설립한다. 이 퇴사가 소닉 더 헤지혹(2006)의 제작 팀이 와해되는 사태를 낳았고, 그 결과 소닉 시리즈의 명성이 추락하는 데 기여해 버리고 말았다.
이후 나카 유지는 프로페에서 레츠 텝[6] 과 로데아 더 스카이 솔져를 비롯한 여러 게임을 내놓고, 여러 게임 회사와 협업 관계를 유지한다. 세가를 떠난 이후에도 세가 타이틀의 컨설턴트 역할을 겸임하였고, 소닉 시리즈의 앞날에 어느 정도 개입하고 있다. 실제로 마리오와 소닉 올림픽 시리즈 프로젝트를 제안한 것도 나카 유지 본인이라고 한다. 또한 SXSW 2016의 '''소닉 25주년 기념 스테이지'''를 포함하여, 소닉 시리즈와 관련된 행사 등에도 꾸준히 참석하고 있다. 여담으로 나카 유지와 이이즈카 타카시는 Summer of Sonic 2011 라이브에서 카니발 나이트의 원통 때문에 고생한 유저들한테 사과(…)하였다. 소닉 123의 레벨 디자인을 담당한 사람은 야스하라 히로카즈 였다고 한다.
2018년 1월에는 스퀘어 에닉스에 입사하여, 오리지널 액션 게임을 제작하고 있다고 언급하였다.
2020년 7월 24일 BALAN WONDERWORLD을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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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1965년 9월 17일에 태어난 일본 오사카 출신의 前 세가의 프로그래머이자 게임 제작자였다. 그의 이전 별명은 '''세가의 미야모토 시게루'''.[1] 오오시마 나오토, 야스하라 히로카즈와 함께 '''사상 최고의 속력을 자랑하는 고슴도치인 소닉 더 헤지혹을 창조한 사람이기도 하다.'''[2]
대표작으로는 일부 소닉 시리즈와 나이츠 시리즈, 판타시 스타 시리즈 등이 있다.
2019년 5월 크루즈 여행 둘째날에 한국 부산 관광에 다녀왔다.트위터, 페이스북
2. 성장 과정
2.1. 소닉 1 개발 이전
어린 시절 YMO에 빠져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있었다가 근처의 사람이 나타나 이런저런 해설과 가르침을 받으며, 신디사이저나 전자음악에 대해 흥미를 가지게 되어 PC-8001을 구입한 것을 계기로 컴퓨터에 빠져들었다. 여담으로 PC-8001을 처음 부팅했을 때 비프음이 울린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이후 고등학생 시절 독학으로 프로그래밍을 공부했고, 아르바이트로 시내에 있는 퍼스컴 업체 日本マイコン学院에서 OA용 프로그램과 게임을 제작했다. 당시는 퍼스컴 기종이 상당히 많았는데 이런 각 기종별로 똑같은 프로그램을 수십 개 포팅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후 선생님에게 넌 머리가 나쁘니 진학은 그만 두고 취직을 하라는 말을 들었고,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오사카부립 니시노다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84년 일본 도쿄에 위치해 있는 세가 엔터프라이즈에 입사하였다.[3] 신입 연수 시절 이미 '스크롤'을 제멋대로 구현할 정도였고 그런 특출난 실력으로 연수 시절 제작한 '걸즈 가든'이라는 게임은 상품화까지 된다.
이후 스페이스 해리어 기획을 전해듣고 좋아서 혼자서 멋대로 만들고 있던게 높으신 분의 눈에 띄어 프로젝트 시동. 이후 스즈키 유 아래에서 스페이스 해리어, 아웃런, 애프터 버너 2 등의 게임을 제작했다. 이때 스즈키 유로부터 프로그래밍 노하우 뿐만 아니라 플레이 감각을 만드는 방법 등에 대해 직접 전수받았다고 한다. 또한 마크3판 아웃런에 PSG음원이 만족스럽지 않아 동료들과 함께 또 멋대로 FM음원 보드를 만들어 대응시켰는데 그것이 높으신 분의 눈에 들어 또 다시 상품화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리드 프로그래머로 활약하는 동시에 북두의 권(세가 마스터 시스템)[4] , 판타시 스타 시리즈 등의 콘솔 게임기용 게임을 제작하였는데, 판타시 스타 2는 4메가비트 예정이었으나 상부에다 납기에 맞출 테니 6메가를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쇼부를 쳐서 만들어 냈다.
한편 어뮤즈먼트 게임 쇼에서 캡콤이 출품한 대마계촌을 보고 감격하여, 회사로 돌아오자마자 상사에게 '''이식하고 싶으니까 캡콤과 교섭해달라'''고 호소한 적이 있다. 그리고 1개월 정도 후에 캡콤으로부터 롬 및 그래픽 데이터, 소스 코드 등을 제공받아 진짜로 MD판 이식 프로그램의 제작에 착수했다. 이때 45메가의 대용량을 도저히 4메가에 담아내지 못했는데, 그래픽을 배제해도 프로그램만 4메가 이상이었기 때문에 결국 또 높으신 분에게 5메가 사용하게 해주세요! 했다고.
위와 같이 각종 아케이드 게임을 가정용 게임기로 이식하면서 하드웨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프로그램을 짜는 경험을 쌓아올렸다. 나카 유지 본인의 회상에 의하면 당시 세가 측은 프로그래머를 육성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고, 뛰어난 프로그래머가 되는 과정은 전부 독학이었다고 한다. 이때 특히나 이식하기 어려웠다는 작품이 대마계촌이었지만, 이때 습득한 기술 중 일부가 소닉 1에도 적용되기에 이른다.[5]
나카 유지가 직접 밝힌 대마계촌과 소닉 1의 관계
2.2. 소닉 1 개발 이후
1990년에는 콘솔 게임 부서에서 일하고 있던 오오시마 나오토, 야스하라 히로카즈와 함께 세가 최초의 마스코트인 알렉스 키드에 이어서 두 번째 마스코트인 소닉 더 헤지혹을 탄생시킨다. 이 시기에 나카 유지는 소닉 1의 개발을 맡았던 '세가 AM8'의 팀장이었으며, 캐릭터가 완성될 즈음에 팀 이름이 소닉 팀으로 개명된다.
소닉의 탄생은 특히 세가 아메리카를 구원했다. 그러나 소닉의 개발 과정은 나카에게 독이 되었고 결국 나카는 이 시점에서 세가를 그만둔다. 이를 놓치지 않고 세가 미국 지사에서는 나카를 직접 세가 테크니컬 인스티튜트로 영입한다. 이 과정에서는 당시 일본 세가에 근무하고 있었던 PS4의 설계자 마크 서니도 크게 관여하였다고.
나카의 미국 시절에는 깐깐했던 일본과 달리 제약사항도 적었고 개발실은 전부 개인실로 갖춰져있어서 놀랐다고. 처음엔 소닉은 다시는 만들지 않겠다는 조건이었지만, 결국 '2인 동시 플레이를 할 수 있게'라는 조건으로 개발을 시작. 소닉 1의 한계를 뛰어넘어 더욱 고속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이때 해외의 아티스트들은 성향이 너무 달라서 그래픽의 테이스트를 전달하기가 어려웠고 그 때문에 폐기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당초 미국측에서도 이런 문화적 차이로 인해 소닉의 디자인부터 캐릭터의 네이밍까지 사사건건 충돌이 잦았다. 소닉 더 헤지혹 3의 도트 그래픽이나 BGM 등을 보면 1, 2편에 비해 미국 스타일이 반영된 흔적이 보인다.
3. 소닉 팀에서의 활동
소닉 1이 성공한 이후 나카 유지는 야스하라 히로카즈와 함께 세가 미국 지사인 세가 오브 아메리카의 세가 기술 연구소로 이동하여, 개발팀과 함께 소닉 2를 제작하여 소닉 더 헤지혹 시리즈 중 1편을 제외하면 역대 최고인 603만 장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한다. 이후 소닉 더 헤지혹 3, 소닉 & 너클즈, 소닉 스핀볼을 제작하였다. 1998년에는 소닉 어드벤처를 제작하여 성공을 하였고, 2000년 7월에는 소닉 팀을 세가로부터 독립시켜 주식회사 '소닉 팀 리미티드(Sonic Team Ltd.)'를 세우고 CEO로 취임한다.
4. 프로페 시기
그러나 소닉 팀은 재정 악화로 결국 2004년에 다시 세가에 통합되고, 이후 나카 유지는 판타시 스타 유니버스를 마지막으로 세가에서 떠난다. 그는 2006년에 함께 일하던 동료 10여 명을 데리고 세가를 퇴사하여, 세가 게임 크리에이터 독립 지원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 '프로페 리미티드(Prope Ltd.)'를 설립한다. 이 퇴사가 소닉 더 헤지혹(2006)의 제작 팀이 와해되는 사태를 낳았고, 그 결과 소닉 시리즈의 명성이 추락하는 데 기여해 버리고 말았다.
이후 나카 유지는 프로페에서 레츠 텝[6] 과 로데아 더 스카이 솔져를 비롯한 여러 게임을 내놓고, 여러 게임 회사와 협업 관계를 유지한다. 세가를 떠난 이후에도 세가 타이틀의 컨설턴트 역할을 겸임하였고, 소닉 시리즈의 앞날에 어느 정도 개입하고 있다. 실제로 마리오와 소닉 올림픽 시리즈 프로젝트를 제안한 것도 나카 유지 본인이라고 한다. 또한 SXSW 2016의 '''소닉 25주년 기념 스테이지'''를 포함하여, 소닉 시리즈와 관련된 행사 등에도 꾸준히 참석하고 있다. 여담으로 나카 유지와 이이즈카 타카시는 Summer of Sonic 2011 라이브에서 카니발 나이트의 원통 때문에 고생한 유저들한테 사과(…)하였다. 소닉 123의 레벨 디자인을 담당한 사람은 야스하라 히로카즈 였다고 한다.
5. 스퀘어 에닉스 시기
2018년 1월에는 스퀘어 에닉스에 입사하여, 오리지널 액션 게임을 제작하고 있다고 언급하였다.
2020년 7월 24일 BALAN WONDERWORLD을 공개했다.
6. 외부 링크
7. 관련 문서
[1] 이 때문에 소닉 팬들 중 상당수는 나카 유지가 퇴사한 것이 아까웠다고 말한다.[2] 정확히는 소닉 1의 게임 스타일을 구상하였으며, 캐릭터 자체의 디자인은 오오시마의 것이다.[3] 원래는 남코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당시 모집을 하던 메이커가 세가와 타이토뿐이었기 때문에 세가에 지원했다고. 또한 애니메이션 셀화를 모으기 위해서 등등의 이유도 있었다고.[4] 북두의 권 게임들 중 명작으로 손꼽히는 작품. 그런데 훗날 인터뷰에서 자신은 선데이파라 북두의 권이 싫다고 했다.[5] 당시의 횡스크롤 액션 게임에는 경사진 길을 따라 이동하는 일이 별로 없었고, 나카 유지도 대마계촌의 소스 코드를 제공받고 나서야 경사 길의 원리를 이해했다. 그리고 이를 응용한 결과물이 바로 소닉 1의 그린 힐이나 스타 라이트 존 등에서 관찰되는 루프. 경사 길을 계속해서 기울이다가 아예 둥글게 이어붙인 것이다.[6] Wii 리모컨을 뒤집어서 상자에 올려놓고 그 상자를 두들기면서 즐기는 굉장히 특이한 스타일의 게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