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모토 시게루

 



'''닌텐도 대표이사 펠로우
미야모토 시게루
宮本茂 | Shigeru Miyamoto'''

'''출생'''
1952년 11월 16일 (72세)
일본 교토부 후나이군 소노베정(現 난탄시)
'''국적'''
일본
'''직업'''
게임 디자이너, 기업인
'''직책'''
닌텐도 정보개발본부장 (1984년 ~ 2015년)
닌텐도 전무이사 (2002년 ~ 2015년)
닌텐도 대표이사 펠로우 (2015년 ~ 현재)
'''소속'''
닌텐도 (1977년 ~ 현재)
'''수훈'''
영국 영화 텔레비전 예술 아카데미 평생공로상 (2010년 수상)
아스투리아스 공상 커뮤니케이션 및 인본주의 부문 (2012년 수상)
문화공로자[1] (2019년 수상)
'''서명'''
[image]
1. 개요
2. 상세
3. 어록
4. 작품
4.1. 20세기
4.2. 21세기
5. 개발 철학
6. 평가
7. 수상 이력
8. 기타
9. 외부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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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게임 회사 닌텐도게임 디자이너이자 現 대표이사 펠로우. 대표작으로는 마리오 시리즈, 젤다의 전설 시리즈, 동키콩 시리즈, Wii Sports, Wii Fit, 닌텐독스 등이 있다.
1984년부터 2015년까지 닌텐도 정보개발본부의 본부장직을 맡았으며, 2002년부터 2015년까지는 회사의 전무이사직을 동시에 역임하다가 이와타 사토루가 타계하고 키미시마 타츠미 사장이 부임한 해인 2015년 이후로는 닌텐도의 CTO격인 타케다 겐요와 함께 대표이사 펠로우[2]직을 맡았고 타케다 겐요가 은퇴한 2017년부터는 현재까지 단독으로 닌텐도의 펠로우직을 역임하고 있다. 닌텐도의 사장인 후루카와 슌타로 바로 아래 자리로, 경영 부문에만 집중하는 후루카와 사장을 대신해서 크레에이티브 부문[3]을 총괄하는 중이다.[4]
대내외적으로 비디오 게임 산업 최초의 스타 개발자로 평가되며[5] 이른바 게임계 5대 시상식[6]의 공로상을 전부 수상한 경력이 있는 현재 유일한 게임 개발자이기도 하다. 그밖에 리카싱, 모리타 아키오, 정주영, 락시미 미탈, 안도 모모후쿠 등과 함께 2006년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아시아의 가장 위대한 기업인들' 중 한명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2. 상세


1952년 11월 6일으로 일본교토부 출신이다. 어린 시절은 평범했다고 하며 예체능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성인이 된 이후 가나자와미술공예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7] 장난감 디자이너를 꿈꾼 미야모토 시게루는 아버지의 소개로 1977년, 닌텐도에 취직한다. 참고로 당시의 닌텐도는 화투트럼프 카드 외에 디즈니 보드게임, 그리고 광선총이나 유모차 문구 등 여러 가지 사업을 하는 회사였는데, 미야모토 시게루가 면접을 볼 때 가지고 간 포트폴리오의 내용은 '유아용 행어', '유원지용 기발한 시계', '아이가 3명 탈 수 있는 그네가 달린 시소' 등의 장난감들이었다.
당시 닌텐도는 전자 사격장 등 무리한 사업확장 때문에 막대한 빚을 진 채로 망해가고 있던 시절이었는데, 게다가 1차 석유파동의 후폭풍이 설상가상으로 겹치면서 신입사원을 아예 뽑지조차 않았다. 그랬는데도 미야모토가 닌텐도에 입사할 수 있었던 건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과 친구 관계였던 아버지가 특별히 소개를 해준 덕분이라고. 야마우치 사장은 친구의 부탁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채용하는 것을 내키지 않아했으나, 미야모토가 오직 그만을 위해 준비된 특례면접에서 본인이 직접 만들어 가지고 간 포트폴리오 제품들을 열정적인 태도로 소개하며 적극적으로 응했던 터라 마지 못해 억지로 자리를 하나 만들어서 채용시켜주었다고 한다.
처음 맡은 일은 게임기의 외장을 색칠하는 디자이너 일. 그러다 당시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8]에 급히 게임을 보낼 일이 생겨서, 사내 게임 제작 공모에서 뽀빠이 게임의 초안을 만들면서 게임 디자인에 발을 들인다.[9] 뽀빠이 게임은 라이선스 획득 실패로 뽀빠이는 배관공, 올리브는 히로인, 브루투스는 고릴라로 바뀐 동키콩이라는 게임이 된다.
자기도 모르는 포텐셜이 폭발한 전형적인 일본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 당시 게임 제작이란 게 대부분 게임 프로그래머가 직접 도트 찍고 사운드 만들고 해서 내러티브 등이 아예 없었던 데 반해, 만화를 좋아하던 시게루는 동키콩을 구상할 때 종이에다가 여자를 납치해가는 킹콩을 쫓는 남자를 그리는 걸로 시작을 했고, 테마 멜로디도 기타로 직접 작곡했었다.
동키콩의 출시 이후 마리오브라더스를 포함한 여러 게임을 히트시키면서, 미야모토 시게루는 그 능력을 인정받아 요코이 군페이의 개발제1부(R&D1)로부터 독립하여 새롭게 신설된 개발제4부(R&D4)[10]의 수장이 되어 패밀리 컴퓨터 전용 게임을 제작하게 된다. 테즈카 타카시, 콘도 코지 등 신입 사원들이 주축이 된 이 부서는 1985년 슈퍼 마리오브라더스를 만들어내었고, 북미 시장에선 아타리 쇼크 이후 무너진 비디오 게임 산업을 다시 부흥시켰을 정도로 유래없는 대흥행을 이루게 된다. 이후 젤다의 전설,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3과 같은 후속작이 연이어 히트를 치고 이 때부터 미야모토 시게루는 닌텐도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 되면서 전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현재 전체 조직 안에서 경영부문의 후루카와 슌타로 사장을 빼면 게임 개발 부문에 있어서 닌텐도의 대장이라 생각하면 된다.[11] 이와타 사토루 대표이사의 사망 직후에는 임시로 타케다 겐요와 함께 2인 체제가 되었으며 타케다 겐요의 은퇴 이후 현재는 단독으로 닌텐도의 펠로우직을 역임하고 있다. 닌텐도 내에서 미야모토가 내린 지시는 최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동키콩에서부터 시작한 그의 커리어는 닌텐도의 게임 개발 역사 그 자체.
특히나 그는 게임 개발뿐만 아니라 게임패드를 비롯한 하드웨어의 인터페이스적 측면에도 마찬가지로 심혈을 기울이기 때문에 슈퍼 패미컴[12], 닌텐도 64[13], 게임큐브[14], 닌텐도 DS[15], 닌텐도 Wii[16] 등등 하드웨어 제작에도 전반적인 개발이나 디자인에 참여했다. 오늘날 게임패드의 디자인을 확립시키는 데 선구적인 영향을 미친 셈. 다만 Wii U부터는 더이상 깊게 관여하고 있지 않으며 닌텐도 스위치의 경우 미야모토의 후임들인 코이즈미 요시아키카와모토 코우이치[17][18]가 대신 직접 관여했다.
그의 대표작인 슈퍼 마리오젤다의 전설패미컴 시절에 창조되어 현재진행형으로 전설을 써내려가고 있다. 소위 게임계의 거장들이 자기가 만든 회사에서 쫓겨나고 판권을 빼앗기고 다시 부활하기도 하고 심지어 먹튀로 전락하고 하는 와중에서도 이 사람만큼은 세계에서 제일 잘 나가는 게임 회사의 개발 수장으로 제일 오래 해먹고 있으며 심지어 지금도 잘 나가고 있다.
다만 현재는 직접적인 게임 개발에선 물러나 있으며 2000년대 이후로는 마리오 시리즈젤다의 전설 시리즈 같은 작품의 검수(프로듀서)를 주로 맡고 있었으나 그것도 2017년작인 ARMS,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를 끝으로 더 이상 프로듀서로 게임 개발에 참여하는 작품은 없으며, 이후로는 전부 검수 정도로만 게임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그가 주로 맡아왔던 제너럴 프로듀서 직은 현재 닌텐도 EPD 본부장인 타카하시 신야가 맡고 있다. 즉, 이 시점부터는 완전히 게임 개발에서 손을 뗐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실 그는 일찍이 후임들을 양성하며 닌텐도 내부개발팀의 체계를 잡아놓았기 때문에, 본인이 대표이사 펠로우로 승진한 이후에는 게임 개발을 전적으로 후임들에게 맡기고 대신에 자신은 슈퍼 마리오 영화유니버설 스튜디오슈퍼 닌텐도 월드 등 외부 프로젝트에 집중하고 있다. 실제로 한동안은 닌텐도 다이렉트에서 보기 어려웠으나 슈퍼 닌텐도 월드 다이렉트에서는 오랜만에 본인이 직접 단독으로 나와 다이렉트를 진행했을 정도.
회사에 엄청난 공헌을 한 개발자답게 특별 대우를 받고 있으며, 닌텐도의 전 사장 야마우치 히로시가 후임인 이와타 사토루의 후견인으로 뽑은 5명의 대표이사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연봉은 2010년까지 1억 2600만 엔 정도였으나, 2011년 닌텐도의 판매실적 저조[19]로 삭감되었고, 이후 또 한 번 삭감되어 5000만 엔 정도로 줄어들었지만 2015년에 대표이사 펠로우로 승진함과 더불어 닌텐도 스위치가 대성공을 거둔 덕분에 연봉이 다시 상승하면서 2020년 기준 1억 9200만 엔의 연봉을 수령하였다. #
한때 마이크로소프트게임계에 진출하면서 그를 '''닌텐도에서 일했을 때 연봉의 10배'''를 주는 조건으로 스카우트[20]하려고 했으나 미야모토는 '''"닌텐도엔 동료들이 있으니까 떠날 수 없다."'''[21][22] 라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 나중의 인터뷰에 따르면 게임 개발은 본질적으로 혼자가 아니라 마음이 맞는 이들이 뭉쳐서 해야하는 것이고 닌텐도에는 그렇게 같이 동고동락한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결국 마이크로소프트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23] 한편으로 저건 에둘러서 말한 것뿐이고 실제로는 닌텐도에서 게임을 제작하는 환경이 더 좋기 때문에 가지 않은 거라는 예측도 많다. 제시한 연봉의 10배를 연구 개발비로 쓸 수 있는 회사는 닌텐도뿐이라는 말도 있다.[24]
서양 게임계에서도 그에 대한 평가가 높고 인기가 많다. 아타리 쇼크 이후 닌텐도를 비롯한 일본 기업의 독무대가 된 북미 콘솔 게임 시장에서 대부분의 게이머들이 그의 게임을 플레이하며 자라왔고, 그중에 개발자가 된 사람들은 그의 게임을 플레이하며 게임 개발자의 꿈을 키워왔기 때문이다. 젤다의 전설, 마리오, 동키콩 등등 전설적인 게임 시리즈의 아버지이자 그리고 현역으로도 계속해서 좋은 게임을 만드는 데 노력 중이니 평가가 높을 수밖에 없다. 단순히 평가가 높은 정도 수준이 아니라 아예 비디오 게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원탑으로 여러 매체에서 거론된다.[25] 타임지는 그를 두고 '''현대 비디오 게임의 아버지'''라 평했고 뉴욕타임즈는 '''비디오 게임계의 윌트 디즈니'''라 평할 정도.

3. 어록


'''결국 저에게 있어 적은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이전에 제가 만들었던 작품들이 저의 적이지요.'''

''출처'' [26]

[27]

'''A delayed game is eventually good, but a rushed game is forever bad.'''

연기된 게임은 결국 좋아지지만 무리하게 발매한 게임은 영원히 나빠진다.

''출처''[28]

[29]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재미를 느끼는 '놀이'는 나라에 관계없이 통할 수 있다. '''사람들이 진심으로 즐겁게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제품을 만든다면 세계 어디에서도 팔 수 있다.'''

''출처''

성공하기 위해서는 첫째,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유사한 제품이 나올 수 있게 만들면 실패한다. 둘째, '''잘 팔릴 수 있다는 확신이 서기 전에는 제품을 판매하지 말아야 한다.'''

''출처''

저는 기획자입니다. 저는 제 자신이 무언가를 창조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사람들이 즐길 만한 제품을 만드는 것이 제 일이지요. 그것이 '''제가 저의 게임들을 예술이라기보다 상품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그건 단순히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그걸 구현하는 것에 대한 게 아니에요. 플래너(planner)의 일은 '''자신에게 주어진 제약 안에서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무언가를 만드는 것입니다.'''

''출처''

제가 닌텐도에 있다보면, 많은 어린이들이 자기가 생각한 아이디어를 우리가 직접 게임으로 만들어주기를 바라며 편지를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디어들의 대부분은 단지 스토리만 다를 뿐, 슈퍼 마리오브라더스드래곤 퀘스트를 그저 모방하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토리나 설정을 떠올리는 것은 게임 디자인의 핵심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단지 게임의 표면적인 부분만을 바꾸고자 한다면 그 어떤 부분도 진정하게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게임의 중심은 스토리라는 말이 종종 나오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스토리는 오직 핵심적인 게임 메커니즘을 정립한 다음에서야만 고려해야될 대상입니다.

''출처''

'''엔터테인먼트의 영역에서, 혁신은 늘 필요합니다.''' 이 산업 내에는 하나의 히트 상품이 나오면 그 성공을 복제하기 위해 모두가 똑같은 방향만을 좇아 매달리는 경향이 존재하지만 그렇게 된 순간, 혁신은 죽어버리고 사람들은 더 이상 즐거움을 얻지 못 하게 될 것입니다.

''출처''

다른 이들과 경쟁하는 것을 생각할 때의 중요한 문제는 이미 나왔던 것을 참고하고 이를 쓰러뜨리려 하는 일입니다. 다른 회사들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기보다, 닌텐도는 '''독특함(Uniqueness)'''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출처''

닌텐도는 게임 회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만, 사실 동시에 닌텐도는 장난감 회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장난감은 소비자에게 반드시 어떠한 '놀라움의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하드웨어적 측면에서 봤을 때, 다른 콘솔 제조사들은 하드웨어의 기능을 보강하기 위해 서로 비슷하고 통일된 접근법을 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든 하드웨어를 그것들과 차별화시키기 위해서는, '''사용자가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끔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출처''

제가 스토리를 좋아하지 않는다거나 스토리의 중요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게임을 플레이한 후 스토리가 머리에 맴돌게 하는 것은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제가 도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이야기를 설정하고 설명하기 위한 시간을 줄이는 일입니다.'''

제가 젤다의 전설 시리즈에서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플레이어가 스스로 충분히 생각할 수 있게 만들고 그 스토리 안에서 진정으로 살아가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동안 우리가 시리즈 내 수많은 게임들을 통해 도전해왔던 것입니다.

''출처''

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재미'라는 것은 단순히 말하면 '''컨트롤러를 들고 게임을 플레이할 때 딱 알맞다는 느낌이 드는가, 그리고 그것이 플레이어를 행복하게 만드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컨트롤러와 모니터를 통해 당신은 자유롭게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제가 생각하기에 정말 중요한 것은 게임의 '''핵심(Core)'''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에 기반을 하여 우리는 게임을 개발할 기술을 사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기술을 사용하거나 다른 개발 테크닉을 사용하는 것을 독특함이라고 여기는 것 같은데 저는 '''독특함이라는 것은 핵심이 남들과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똑같은 기술과 똑같은 개발 테크닉을 사용하더라도 다른 무언가를 만들 수 있습니다.

''출처''

고려할 만한 가치는 있겠지만, 사실 저에게 있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계획 같은 건 없습니다. 그저 완벽한 게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뿐이지요. '''저는 게임을 통해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은 오로지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일뿐입니다.'''[30]

''출처''

많은 사람들은 저에게 "새로운 캐릭터들을 만들어 봐. 그러면 재밌는 게임이 될 거야" 라고 말하곤 하지만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는 것이 반드시 그 게임이 재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독특하고 새로운 게임플레이 경험을 창조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31]

''출처''

단순하게 숫자로만 본다면, 닌텐도가 해야될 일은 가능한 한 개발자들을 많이 뽑는 것이고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리 쉽게 풀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최상급의 콘텐츠를 고객에게 제공하는 일이고, 단순히 개발진의 규모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우리가 목표로 삼는 최상의 퀄리티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꾸준한 퀄리티 수준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개발자들을 차근차근 가르치고 길러내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그 부분은 우리가 지금껏 늘 맞닥뜨려왔던 도전입니다.

''출처''

저 스스로는 일본의 게임을 만드는 것이 아닌, 교토의 게임을 만드는 것이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교토에서 만들어진 게임의 특색은 도쿄에서 만들어진 게임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으며, '''저와 같은 교토 출신의 사람은 유행을 따르는 것을 싫어하고 오히려 유행을 만들어나가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게임 산업의 문화를 바꾸고 싶었고, 슈퍼 마리오 64에는 그러한 우리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출처''

다른 회사들은 상식적으로 타당한 비즈니스를 합니다. '''그런데 그건 지루하잖아요.''' 같은 게임이 모든 플랫폼에 나오고 말이죠. 닌텐도는 크리에이터들이 서로 협력하고 기존에 없던 게임을 생각해낼 수 있는 환경을 원합니다.

''출처''

레볼루션에는 분명 최첨단의 기술을 적용할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어떤 식으로 기술이 사용되는가에 관한 부분입니다.'''

''출처''

왜냐하면 그건 트렌드이고 '''저는 트렌드를 벗어나려고 시도하기 때문입니다.'''[32]

''출처 동영상''

닌텐도의 캐릭터들이 지닌 매력은 가족 전체를 한 데 모으게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게임은 그것을 직접 플레이하거나 옆에서 지켜보는 과정에서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따뜻한 감정을 느낄 수 있게끔 디자인되어 있어요. 예를 들어 제가 최근에 손자와 함께 게임을 한 적이 있었는데, 가족 전부가 텔레비전 주위로 모여가지고 저와 손자는 스크린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집중하는 한편, 제 아내와 다른 가족들은 게임을 즐기고 있는 아이를 보며 흐뭇해 하더군요.

저는 우리가 이러한 공동의 경험을 이끌어낼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었다는 사실에 굉장히 기뻤습니다. '''플레이어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하는 것, 그게 바로 닌텐도가 하는 일의 핵심이니까요. 때문에, 제 자신은 그 어떠한 후회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즐거움과 웃음을 전달할 수 있었더라면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33]

''출처''

NX에는 우리가 중점을 두고 있는 아이디어가 존재합니다. 지금 시점에서 그 어떤 정보도 공개할 수가 없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에요. '''저는 다른 회사들에 대해 언급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단순히 성능의 개선에 관한 문제였다면 제품은 훨씬 더 일찍 공개되었겠지요.'''[34]

''출처''

역사적으로, 닌텐도는 위험을 감수해왔던 회사입니다. 저희의 이전 사장님은 이렇게 말씀해오고는 했지요, '''"다른 이들과 경쟁하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온리 원(Only one)이 되기 위해 노력하라"''' 라고 말입니다. 우리를 '온리 원'으로 만들어줄 그 무언가를 위해서라면 필요한 만큼의 예산을 투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출처''

닌텐도는 '''완전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하드웨어소프트웨어를 동시에 생각하는 회사'''이고 이런 회사는 세상에 흔치 않다고 생각해요. Wii의 개발 과정은 제 자신에게 다시 한번 이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고 닌텐도는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 때 가장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회사라는 것을 다시금 저는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35]

''출처''

저는 우리가 '경쟁'이라는 것에 대해 너무 의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는 닌텐도의 비교 대상이 되는 회사들이 여럿 존재하지만 저는 닌텐도가 항상 독특해야만 하고 '''그 어떤 기업들과도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 회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닌텐도는 경쟁자들이 하는 일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재미있는 게임을 내놓자''''는 게임회사의 본질에 집중하면, 자연스럽게 소비자들은 우리 제품에 참여할 것이라고 믿는다.

''출처''


4. 작품


아래의 목록은 영문 위키피디아 문서를 출처로 작성. 더 자세한 목록은 이 사이트를 참조하자.
리스트를 쭉 보면 알겠지만 엄청난 다작왕으로, 정보개발본부의 본부장이었기 때문에 90년대까지는 웬만한 닌텐도의 게임 개발에 전부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2000년대 이후로도 참모직으로 승진하기 직전까지 참여하는 게임에 밥상 뒤집기#s-7를 시전하는 등 닌텐도 게임 다수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특히 2001년과 2005년 사이에는 "이런 게임도 미야모토 시게루가 프로듀서로 참여했나?" 싶을 정도로 많은 게임의 프로듀싱을 맡았다.
사장이 묻는다 마리오 카트 Wii 편에서 본인이 프로듀서가 아닌 '제너럴' 프로듀서라고 직함이 붙는다면 제작에 거의 관여를 하지 않는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런 작품들은 주로 디렉터나 프로듀서로부터 제작에 대한 보고를 받고, 조언을 해주는 방향으로 게임 제작에 간접적으로 관여한다.[36] 하지만 마리오 카트 Wii 같은 경우 Wii 핸들이나 Wi-Fi 통신에 관한 부분은 아주 약간 관여를 했다고 하며, 뉴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Wii 같은 경우 그토록 원했던 최초의 다인 플레이가 가능한 마리오여서 그런지 개발 현장에 오래 머물렀다는 언급이 있었다.
디렉터로 참여한 작품은 굵게 표시. 검수나 원 제작진 등 직접적으로 게임 개발에 참여하지 않은 작품은 기울임 표시.

4.1. 20세기


'''연도'''
'''제목'''
'''플랫폼'''
'''직책'''
1979
셰리프
아케이드
디자이너
레이더 스코프
아케이드
디자이너
1980
스페이스 파이어버드
아케이드
디자이너
1981
'''동키콩'''
아케이드
디렉터 / 디자이너
1982
'''동키콩 Jr'''
아케이드
디렉터/ 디자이너
뽀빠이
아케이드
디자이너
1983
'''마리오브라더스'''
아케이드
디렉터 / 디자이너
야구
FC
디자이너
1984
테니스[37]
FC
디자이너
골프[38]
FC
디자이너
'''동키콩 3'''
아케이드
디렉터 / 디자이너
데빌 월드
FC
디자이너
익사이트 바이크
FC
디자이너
어반 챔피언
FC
프로듀서
1985
아이스 클라이머
FC
프로듀서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FC
프로듀서 / 디렉터 / 디자이너
1986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더 로스트 레벨즈'''
FDS
디렉터
'''젤다의 전설'''
FDS/NES
프로듀서 / 디렉터 / 디자이너
1987
꿈공장: 도키도키 패닉/슈퍼 마리오 USA[39]
FDS/NES
프로듀서 / 디자이너
젤다의 전설 2 링크의 모험
FDS/NES
프로듀서
1988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3'''
FC
프로듀서 / 디렉터
1989
MOTHER
FC
프로듀서
1990
에프제로
SFC
프로듀서
슈퍼 마리오 월드
SFC
프로듀서
파일럿윙
SFC
프로듀서
1991
요시의 알
FC/GB
프로듀서
젤다의 전설 신들의 트라이포스
SFC
프로듀서
1992
슈퍼 마리오 카트
SFC
프로듀서
마리오 페인트
SFC
프로듀서
웨이브 레이스
GB
프로듀서
1993
젤다의 전설 꿈꾸는 섬
GB
프로듀서
별의 커비 꿈의 샘 이야기
FC
프로듀서
스타폭스
SFC
프로듀서
'''슈퍼 마리오 컬렉션'''
SFC
프로듀서 / 디렉터
요시의 로드헌팅
SFC
프로듀서
1994
동키콩
GB
프로듀서
와일드 트랙스[40]
SFC
프로듀서
킬러 인스팅트
SFC
프로듀서
''동키콩 컨트리''
SFC
고문
커비 볼
SFC
프로듀서
1995
BS 젤다의 전설
사테라뷰
디자이너
슈퍼 마리오 월드 2: 요시 아일랜드
SFC
프로듀서
1996
모구라냐[41]
GB
프로듀서
슈퍼 마리오 RPG
SFC
프로듀서
파일럿윙 64
N64
디자이너
포켓몬스터 레드·그린
GB
프로듀서
별의 커비 슈퍼 디럭스
SFC
프로듀서
'''슈퍼 마리오 64'''
N64
프로듀서 / 디렉터
웨이브 레이스 64
N64
프로듀서
마리오 카트 64
N64
프로듀서
BS 슈퍼 마리오 USA 파워 챌린지
사테라뷰
원 디자이너
1997
스타폭스 64
N64
프로듀서
요시 스토리
N64
프로듀서
1998
1080° 스노보딩
N64
프로듀서
에프제로 X
N64
프로듀서
포켓몬 스타디움
N64
프로듀서
'''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
N64
프로듀서 / 디렉터 / 디자이너 / 검수
''마리오 파티''
N64
검수
1999
에프제로 X 확장판
64DD
프로듀서
'''마리오 아티스트: 페인트 스튜디오'''
64DD
디렉터 / 프로듀서
거인 도신
64DD/GC
프로듀서
포켓몬 스냅
N64
프로듀서
닌텐도 올스타! 대난투 스매시브라더스
N64
프로듀서
동키콩 64
N64
프로듀서
2000
''별의 커비 64''
N64
검수
젤다의 전설 무쥬라의 가면
N64
프로듀서
마리오 스토리
N64
프로듀서
포켓몬 스타디움 금은
N64
프로듀서

4.2. 21세기


'''연도'''
'''제목'''
'''플랫폼'''
'''직책'''
2001
젤다의 전설 이상한 나무열매
GBC
프로듀서
슈퍼 마리오 어드밴스#s-2
GBA
프로듀서
방가방가 햄토리 2[42]
GBC
프로듀서
와리오 랜드 4
GBC
프로듀서
루이지 맨션
GC
프로듀서
웨이브 레이스: 블루 스톰
GC
프로듀서
마리오 카트 어드밴스
GBA
프로듀서
피크민
GC
프로듀서
대난투 스매시브라더스 DX
GC
프로듀서
2002
미키 마우스의 불가사의한 거울[43]
GC
프로듀서
슈퍼 마리오 어드밴스 2
GBA
프로듀서
이터널 다크니스
GC
프로듀서
슈퍼 마리오 선샤인
GC
프로듀서
슈퍼 마리오 어드밴스 3
GBA
프로듀서
메트로이드 프라임
GC
프로듀서
스타폭스 어드벤처
GC
프로듀서
방가방가 햄토리 3[44]
GBA
프로듀서
젤다의 전설 바람의 지휘봉
GC
프로듀서
2003
마리오 골프 패밀리 투어
GC
프로듀서
동키 콩가
GC
프로듀서
1080° 실버 스톰[45]
GC
프로듀서
팩맨 Vs.
GC
프로듀서 / 디자이너
젤다의 전설 4개의 검+
GC
프로듀서
커비의 에어라이드
GC
프로듀서
동키콩 컨트리
GBA
프로듀서
마리오 카트 더블 대시!!
GC
프로듀서
마리오&루이지 RPG
GBA
프로듀서
GiFTPiA
GC
프로듀서
방가방가 햄토리 4[46]
GBA
프로듀서
2004
젤다의 전설 이상한 모자
GBA
프로듀서
별의 커비 거울의 대미궁
GBA
프로듀서
메탈기어 솔리드 : 더 트윈 스네이크
GC
[47]
메트로이드 프라임 2 에코즈
GC
프로듀서
피크민 2
GC
프로듀서
페이퍼 마리오 RPG
GC
프로듀서
동키콩 정글비트
GC
프로듀서
마리오 vs. 동키콩
GBA
프로듀서
슈퍼 마리오 64 DS
NDS
프로듀서
2005
''마리오 파티 어드밴스''
GBA
검수
스타폭스
GC
프로듀서
Geist
GC
프로듀서
Chibi-Robo!
GC
프로듀서
닌텐독스
DS
프로듀서
''마리오 테니스 파워 투어''
GBA
검수
''슈퍼 마리오 스트라이커스''
GC
검수
''마리오 파티 7''
GC
검수
마리오 카트 DS
DS
프로듀서
2006
''마리오 vs. 동키콩 2 미니미니 대행진!''
DS
검수
''뉴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DS
검수
위 스포츠
Wii
프로듀서
젤다의 전설 황혼의 공주
Wii/GC
프로듀서[48]
2007
''슈퍼 페이퍼 마리오''
Wii
검수
''마리오 파워 사커''
Wii
검수
젤다의 전설 몽환의 모래시계
DS
프로듀서
''마리오 파티 8''
Wii
검수
메트로이드 프라임 3 커럽션
Wii

슈퍼 마리오 갤럭시
Wii
프로듀서 / 디자이너
''마리오 파티 DS''
DS
검수
마리오와 소닉 베이징 올림픽
Wii
프로듀서
링크의 사격 트레이닝
Wii
프로듀서
Wii Fit
Wii
디자이너
2008
''대난투 스매시브라더스 X''
Wii
검수
마리오 카트 Wii
Wii
프로듀서
위 뮤직
Wii
프로듀서 / 디자이너
2009
펀치 아웃!!
Wii
프로듀서
''마리오 vs. 동키콩 미니미니 재행진!''
DSi
검수
뉴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Wii
Wii
프로듀서
2010
슈퍼 마리오 갤럭시 2
Wii
프로듀서
''동키콩 리턴즈''
Wii
검수
2011
Steel Diver
3DS
디자이너
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 3D
3DS
프로듀서
스타폭스 64 3D
3DS

슈퍼 마리오 3D 랜드
3DS
프로듀서
마리오 카트 7
3DS
프로듀서
젤다의 전설 스카이워드 소드
Wii
프로듀서
2012
마리오 파티 9
Wii
프로듀서 / 검수
''마리오 테니스 오픈''
3DS
검수
뉴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2
3DS
프로듀서
닌텐도 랜드
Wii U
프로듀서
뉴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U
Wii U
프로듀서
2013
루이지 맨션 다크 문
3DS
프로듀서
피크민 3
Wii U
프로듀서
젤다의 전설 바람의 지휘봉 HD
Wii U
프로듀서
슈퍼 마리오 3D 월드
Wii U
프로듀서
''마리오 파티 아일랜드 투어''
3DS
검수
젤다의 전설 신들의 트라이포스 2
3DS
프로듀서
2014
''동키콩 트로피컬 프리즈''
Wii U
검수
''마리오 골프 월드 투어''
3DS
검수
마리오 카트 8
Wii U
프로듀서
''슈퍼 스매시브라더스 for 닌텐도 3DS / Wii U''
Wii U
검수
전진! 키노피오대장!
Wii U
프로듀서
2015
젤다의 전설 무쥬라의 가면 3D
3DS
프로듀서
''마리오 vs. 동키콩 모두와 미니랜드''
Wii U / 3DS
검수
''마리오 파티 10''
Wii U
검수
''퍼즐앤드래곤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에디션''
Wii U
검수
스플래툰
Wii U
프로듀서
슈퍼 마리오 메이커
Wii U
프로듀서
젤다의 전설 트라이포스 삼총사
3DS
프로듀서
''마리오 테니스 울트라 스매시''
Wii U
검수
''마리오&루이지 RPG 페이퍼 마리오 MIX''
3DS
검수
2016
젤다의 전설 황혼의 공주 HD
Wii U
프로듀서
스타폭스 제로
Wii U
프로듀서
스타폭스 가드
Wii U
프로듀서
''페이퍼 마리오 컬러 스플래시''
Wii U
검수
슈퍼 마리오 메이커
3DS
프로듀서
슈퍼 마리오 런
iOS / 안드로이드
프로듀서
2017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Wii U / NS
프로듀서
마리오 카트 8 디럭스
NS
프로듀서
ARMS
NS
프로듀서
''마리오 + 래비드 킹덤 배틀''
NS
검수
''마리오&루이지 RPG 1 DX''
3DS
검수
슈퍼 마리오 오디세이
NS
총괄 프로듀서
이밖에도 페이퍼 마리오: 스티커 스타[49]별의 커비[50], 007 골든 아이[51] 등이 빠진 것을 보면 실제로는 저것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엄연히는 발매원이 닌텐도가 아닌 포켓몬 GO까지도 직접적인 관여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피드백이 들어갔다고 한다.[52]

5. 개발 철학



'''[GMTK] - 미야모토 시게루의 플레이 우선주의'''
그의 게임은 모험과 탐구를 중시한다. 그러다보니 조작성과 인터페이스를 매우 중시하고[53] 이 때문에 그의 게임은 매우 직관적이다. '저건 이렇게 해보면 될 것 같은데?' 하고 해보면 '''된다'''. 예를 들어 머리 위에 있는 발판으로 점프하기 위해서 공중에서 >궤도로 움직이려 해보면... 된다. 관성의 법칙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지만, 모험 게임의 기본조건인 '''게이머가 가고자 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어야 한다'''라는 명제를 이만큼 적절하게 실현시킨 게임은 많지 않다.[54] 그는 게임을 제작할 때 캐릭터가 이동할 때 발생하는 마찰, 관성, 중력을 매우 섬세하게 설계하며 그가 만든 게임의 예술적인 조작감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정말 게임 속에 빠져들어간 듯한 느낌을 준다.
이렇듯 그는 게임의 조작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하드웨어소프트웨어를 동시에 디자인하는 방식을 추구하는데 가령 닌텐도 64에 아날로그 스틱을 도입하면서 그 기능을 백분 활용한 슈퍼 마리오 64를 같이 만든다든지, 닌텐도 DS터치 스크린을 도입하면서 동시에 터치펜을 통한 심플한 조작을 특징으로 하는 닌텐독스를 기획한다든지, 혹은 닌텐도 Wii에 모션 컨트롤을 도입하면서 동시에 기존의 조작 방식을 탈피한 Wii 스포츠Wii Fit 같은 게임들을 내놓는다든지 등등 자신이 디자인에 참여한 하드웨어들 각각의 고유한 기능을 어떻게 게임(소프트웨어)에 자연스럽게 접목시킬 것인지에 대해 그는 본인 나름의 답안을 항상 제시해왔다.[55][56]
반대로 그는 게임이 스토리나 설정에 얽매이는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싫어하는 편이다. 이른바 '영화 같은 게임'에 대해서 그가 꾸준히 반감을 드러내왔다는 사실은 유명하기도 하고[57], 슈퍼 마리오 20주년 기념 인터뷰에서는 마리오 시리즈가 지금처럼 규모를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마리오라는 캐릭터에 24-25세의 젊은이라는 것 외에는 이런저런 쓸데없는 설정이 없다는 점을 꼽았을 정도다.[58] # 젤다의 전설 시리즈는 탄생부터 나름의 스토리를 갖춘만큼 스토리에 어느 정도 신경을 쓰고 있지만 슈퍼 마리오 시리즈는 의도적으로 스토리를 배제시키려고 하는데, 특히 코이즈미 요시아키가 3D 마리오의 수장이 된 이후 제작된 슈퍼 마리오 선샤인슈퍼 마리오 갤럭시에서는 마리오를 나름 멋있어 보이게 하기 위해 연출이나 스토리를 만들었지만[59] 미야모토 시게루는 이에 대해 어느 정도 방관하면서도 마리오가 젤다처럼 되어가는 게 아니냐며 불만을 가졌다.[60] 슈퍼 마리오 갤럭시 2의 개발 때는 이건 아니다라는 것을 느끼고 결국 코이즈미와 담판을 벌여 과잉 연출을 배제하게 되었다고 하며 그 결과 갤럭시 2 이후로는 3D 마리오도 2D 마리오와 큰 차이가 없는 가벼운 스토리로 바뀌었다. 위에 그의 어록에도 나와 있지만 "게임에 스토리는 필요없다"가 아니라 "스토리는 게임플레이를 중점적으로 설계한 후, 그에 어울리게끔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장이 묻는다 번역[61]
조작성과 마찬가지로 탐구 역시 그의 게임에서 중요한 과제다. 이는 젤다의 전설 시리즈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젤다 시리즈에서는 액자가 걸려있는데 활로 위의 줄을 쏘면 액자가 떨어진다든가 표지판을 베어버리는 게 가능하다.[62] 슈퍼 마리오 시리즈도 어릴 때의 '파이프 안에 들어가면 무엇이 나올까?'라는 생각에서 토관 안에 들어가는 것과 배관공인 주인공을 착안했다고 한다.
사운드에 대해서도 상당히 신경을 쓰는 편이다. 그가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만큼 게임의 스토리는 매번 단순하게 만듦에도 불구하고 음악의 경우는 또 그렇지 않은데, 그는 일종의 무성 영화가 그런 것처럼 게임 내에서의 음악 역시 하나의 기능을 나타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게임의 사운드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한다. 그래서 슈퍼 마리오 갤럭시 제작 당시 요코타 마히토오케스트라 음원을 쓰고 싶다고 했을 때 미야모토 시게루는 안 될 게 뭐가 있냐면서 흔쾌히 허락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효과음의 경우는 상당히 엄격하게 선정하는 편인데 슈퍼 마리오브라더스는 효과음에 대해 상당히 많은 미야모토의 요구 사항이 있었다고 하고, 젤다의 전설패미컴 디스크 시스템의 새로운 음원을 오로지 효과음에 할당했다고 하며 워프 피리의 소리를 더욱 신비롭게 했으면 좋겠다는 그의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닌텐도의 사운드 제작부서는 효과음에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그는 무성 영화와 같은 접근법으로 게임을 만들기 때문에, 사운드에 신경은 써도 더빙이나 보컬곡 같이 직접적으로 목소리가 들어가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몰론 성우 더빙이 아예 없진 않지만, 대부분 효과음 정도로 쓰이는 수준이고 그가 제작한 게임 중 직접적인 대사가 포함된 더빙이 들어간 게임은 슈퍼 마리오 선샤인,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포켓몬 스타디움, Wii Fit, 스타폭스 시리즈 같은 극소수의 게임이고 그 중에서도 스타폭스 시리즈는 슈팅 게임이라는 특성 상 화면이 바쁘므로 음성을 지원한다고 말한 바 있다. Wii Fit 역시 몸을 움직이는 피트니스 게임이기 때문에 화면을 계속 보기가 힘드므로 음성 지원이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슈퍼 마리오 선샤인과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도 정작 주인공인 마리오와 링크는 말을 하지 않는다. 보컬곡이 들어간 게임은 슈퍼 마리오 오디세이가 거의 유일하며, 노래가 있더라도 동물의 숲 시리즈K.K.스플래툰 시리즈시오카라즈 같이 현실 언어로 부르지 않은 노래들이 많다.
또한, 그의 게임은 항상 보편적으로 재밌다. 본인 말로도 '만인을 위한 게임'이 자신의 지향점이라고 하는데 이는 '가족용 게임', '난이도가 낮은 게임'이 아니라 말 그대로 '만인을 위한, 만인이 만족할 수 있는' 게임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게임을 제작한다. 적어도 그가 만든 게임 중 쓰레기 게임은 없다. 품질 관리를 그만큼 잘 하는 것이다. 이처럼 완벽주의자 성미라 게임 제작 중 재미가 없으면 뒤엎고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경우가 잦은데, 보통 그런 게임일수록 더 재밌다. 자기가 기획하거나 프로듀싱하는 게임이 아니라도 뒤집는다. 별의 커비도 주문 다 받아놓은 발매 직전에 미야모토에 의해 뒤집혔다는 설이 있다. 다만 별의 커비 시리즈의 프로듀서 사쿠라이 마사히로 왈, '당시 닌텐도가 해준건 별의 커비라는 제목을 지어준 것과 롬 용량을 2배로 늘려준 것밖에 없었다'라고.
이를 팬들은 "미야모토의 밥상 뒤집기"라고 하며 '''미야모토가 밥상을 뒤집어 발매가 연기되면 오히려 환호한다'''. 2년 동안 판을 수 차례 뒤엎어서 완성했다는 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가 게임사의 전설이 된 걸 봐도 그렇다. 물론 판을 뒤엎으면 제작진은 그만큼 죽어나간다. 초대 스타폭스의 핵심 개발진 중 한명이었던 딜런 커스버트는 그를 '아주 약간 더 친절한 스티브 잡스'라고 평했으며 메트로이드 프라임의 제작 당시 미야모토가 레트로 스튜디오에 개발 과정을 점검하러 방문하곤 했는데 올 때마다 밥상 뒤집기를 시전하여 레트로 스튜디오의 제작진은 인터뷰에서 "'''미야모토 시게루의 방문은 다스 베이더급의 공포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더 무서운 건 작정하고 퇴근도 거의 안 한다는 것이다. 개발이 난항을 보인다 싶으면 집에도 안 가고 현장에서 매의 눈으로 제작진을 감시한다고 한다. 젤다의 전설 황혼의 공주를 같이 작업한 아오누마 에이지는 '''나이를 50살 넘게 잡수신 분이 자기보다 더 개발 현장에 오래 남아있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고 토로한 적이 있으며, 슈퍼 마리오 갤럭시를 제작한 코이즈미 요시아키의 인터뷰에 따르면 퇴근해서 집에 가서 자고 있었는데 '''새벽 3시에 새 아이디어가 생각났으니 당장 튀어나오라'''고 해서 새벽에 회사에 출근했었다고 한다.
미야모토가 기획하는 게임들은 대부분 높은 퀄리티를 유지하고 있어서 간과하기 쉽지만 그는 만인을 위한 게임을 지향하기 때문에 게임의 예술성보다도 상업성을 더 중요시 생각한다. 평론가나 게이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을 게임[63]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게임들을 만드는 셈이다. 당장 Wii 시리즈(Wii Sports, Wii Fit)만 보더라도 평론가 평점은 높다고 보기 힘들지만 그 참신한 컨셉 덕분에 여태까지 게임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한테도 체감형 게임이라는 점을 어필할 수 있었고 그 결과 2008년에 닌텐도는 창사 이래 최고의 영업이익을 기록할 수 있었다. 상업성과 품질은 완전히 별개의 영역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 때문인지 미야모토는 자신이 마리오 시리즈를 만들 때 마치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부모가 언제나 안심할 수 있는 게임'을 지향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게임을 예술이나 영화, 스포츠 같이 다른 매체에 빗대어 보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며, 게임은 게임 그 자체로 다른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만인을 위한 게임을 추구하는 그는 게임의 사회적이고 커뮤니케이션적인 측면을 늘 강조하는데 그는 여러 인터뷰에서 '게임이란 매체는 단순히 코어 게이머들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인의 생각을 명확하게 밝힌 적이 있다. 닌텐도가 슈퍼 마리오 64, 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 메트로이드 프라임 등 당대 최고의 기술력을 선보인 블록버스터 게임들을 만들어온 것과는 별개로 Wii 시리즈, 동물의 숲 시리즈, 닌텐독스 등 커뮤니케이션적 측면을 강조한 게임들을 꾸준히 내놓는 것도 그의 철학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포켓몬스터 레드·그린게임보이의 링크 케이블을 이용한 통신 교환 기능을 적용한 것도 역시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강조한 미야모토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멀티플레이 게임[64]에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인데, 슈퍼 마리오 시리즈는 무려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3 시절부터 다인 플레이 기능을 실험했었지만 당시 성능상의 한계로 무산되었고, 대신 세컨드 파티인 HAL 연구소가 제작하는 별의 커비 슈퍼 디럭스에서는 기획서가 제출되기도 전에 제작사에 다인 플레이 기능을 꼭 넣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65] 이후로도 3D 마리오에 이르러서까지 다인 플레이 기능을 실험했지만 번번히 무산되다[66] 슈퍼 마리오 갤럭시에서는 2인 플레이 모드로 제한적으로나마 구현시켰고, 시리즈 처음으로 다인 플레이를 완전하게 구현한 뉴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Wii는 미야모토가 개발 현장에 들어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고 했을 정도로 깊이 관여했었다고 한다. 슈퍼 마리오 카트도 멀티플레이 버전의 에프제로를 목표로 만든 게임이였고, 젤다의 전설 시리즈4개의 검 이래로 2D 시리즈에서는 꾸준히 멀티플레이 요소를 구현시키고 있다.
그 외에도 동시기의 유명 창작자들과 가장 차별화되는 부분으로, 후임을 아주 잘 키웠다. 대개 이 나이대 일본 게임 개발자들이 자신이 감을 잃는 시점까지도 끝까지 자기가 손을 대면서 욕심을 내다가 후계자 양성도 하지 못하고 네임밸류도 갉아먹는 경우들이 비일비재한데, 닌텐도는 미야모토 시게루 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90년대 초중반에 미리 후계자들을 점지해 두고 아주 열심히 키워뒀다. 테즈카 타카시가 좋은 예인데, 그는 입사 1년차에 미야모토 시게루 옆에서 슈퍼 마리오브라더스를 같이 디자인하고 입사 2년차에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더 로스트 레벨즈, 젤다의 전설,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3의 디렉터가 되었다.
그래서 1대 개발자들이 지나간 이후 마땅한 2세가 없거나, 능력 있는 2세들이 곳곳을 방황하는 일이 잦았던 여타 일본 개발사들과는 달리 닌텐도는 테즈카 타카시, 코이즈미 요시아키, 아오누마 에이지 같은 2세 개발자들이 잘 이끌어가고 있다. 당장 슈퍼 마리오 월드만 하더라도 미야모토 시게루는 이 때부터 프로듀서 직에 있었으며 총 디렉터는 테즈카 타카시, 맵 디렉터는 콘노 히데키, 코스 디렉터는 에구치 카츠야가 맡았다. 그리고 테즈카 타카시는 훗날 슈퍼 마리오 시리즈를 필두로 한 여러 게임의 프로듀서가 되었고 콘도 히데키는 마리오 카트 시리즈의 프로듀서, 에구치 카츠야는 동물의 숲 시리즈, Wii 시리즈의 프로듀서가 되면서 2세 개발자의 계보를 잘 잇고 있다.[67]
그 외에도 사쿠라이 마사히로, 타지리 사토시[68] 같이 닌텐도와 밀접한 외부 회사들에서도 이러한 계보를 충실히 이어나가고 있으며, 심지어 미야모토 이후 2세 개발자들도 또 3세 개발자를 양성하고 있어서, 옆동네 스튜디오 지브리처럼 불행한 사고라던지, 업계의 사정이라던지 등으로 2세, 혹은 3세 개발자 중 한 두명이 개발을 접더라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닌텐도는 지금의 닌텐도를 있게 해준 요코이 군페이버추얼 보이의 실패 및 교통사고로 일찍 잃었던 경험이 있었고, 이와타 사토루가 사장 재직 중 타계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휘청이지 않았다.
실제로 닌텐도의 경우 '기본 틀'만 유지하면서 그 외의 변화에는 매우 관대하다는 것이 특징인데, 당장 기존의 마리오 시리즈와 이질감마저 느껴지는 슈퍼 마리오 갤럭시의 경우 아주 호평을 받고 있고, 이후 또 다시 기존의 마리오와는 뭔가 많이 다른 슈퍼 마리오 오디세이의 경우에도 최고의 작품 줌 하나로 꼽혔을 정도다. 슈퍼 마리오 갤럭시는 게임랭킹즈에서 부동의 1위를 유지 했을 정도이다.
이것은 젤다의 전설 시리즈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이 쪽은 한 게임의 역사에서 크게는 3번이나 큰 틀 자체가 뒤바뀌기도 했다. 2D와 2D 횡스크롤, 3D와 오픈월드까지. 심지어 2017년 발매한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의 경우에는 개발 초기 기획 중 하나로 '외계인의 침략' 에피소드가 진지하게 논의되기도 했을 정도라고 한다. 게다가 이 외계침략 에피소드는 말단에 가까운 개발자가 제출한 시나리오라고.

6. 평가


[image]
'''E3 2004 스테이지에 마스터 소드 하일리아의 방패를 들고 등장한 미야모토 시게루'''[69]

'''그는 비디오 게임을 사회적 혁명으로 전환시켰고 그전까지 이러한 종류의 엔터테인먼트를 접하지 못 했던 인구에 이를 대중화시켰으며 (비디오 게임을) 성별, 연령, 사회적 혹은 문화적 계급에 관계없이 사람들을 한데 모이게 만들 수 있는 매체로 만들었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가족과 사회의 통합을 위한 요소로서, 그리고 참여자들에 의해 공유될 수 있고 그들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경험으로서 비디오 게임을 고안해냈다.'''

— 미야모토 시게루에게 아스투리아스 공상[70]

을 수여한 이유 (출처) (시상식 영상)


'''비디오 게임계의 스티븐 스필버그이자 현대 비디오 게임의 아버지.'''

TIME (출처)


'''디지털 세대의 월트 디즈니 앞에서 그보다 더 재미를 잘 아는 이는 없다.'''

뉴욕 타임즈 (출처)


'''닌텐도의 지도 정신(Guiding Spirit).'''

더 뉴요커(The New Yorker) (출처)


'''닌텐도의 가장 거대한 두뇌.'''

인디펜던트 (출처)


'''오직 그 자신만이 미야모토의 진정한 경쟁자일 것이다.'''

— 바이스(''Vice'') (출처)


'''미야모토가 남긴 유산은 비디오 게임 업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뿐만 아니라, 다른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가장 거대한 업적을 이룬 그 어떤 사람과도 비견할 수 있다.'''

BAFTA (출처)


'''그가 만약 영화 제작자였다면 알프레드 히치콕이나 스티븐 스필버그처럼, 음악인이었다면 비틀즈베토벤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을 것이다.'''

데일리 텔레그래프 (출처)


'''닌텐도의 장인(Master artisan)이자 가장 명망 있는 프로듀서.'''

블룸버그 (출처)


'''이와타와 미야모토는 십대들의 취미생활을 가족과 함께 하는 즐거움으로 확장시켰다.'''

파이낸셜 타임즈 (출처)


'''마리오의 큰 형님.'''

롤링 스톤 (출처)[71]


'''미야모토는 지금껏 줄곧 게임 산업을 가르쳐왔다. 하지만 섬세함과 상상력의 가치, 그리고 발현의 예술(the art of emergence)[72]

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게임 산업이) 배우지 못 한 교훈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게임 산업 역시 아직 그를 가르치지 못 했다. 그리고 아마도 평생 그러할 일은 없을 것이다.'''

Wired (출처)


'''미야모토 시게루는 게임을 만들었지만 사실 새로운 세상을 창조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빌 로퍼 (출처)


7. 수상 이력


  • 일본 문화 디자인 상 (1990)
  • 제1회 일본 소프트웨어 대상 MVP (1992)
  • 아사히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대상 '홈 부문 개인 상' (1996)
  • AMD Award 96 'Best Producer / Director 상' (1997)
  • 제5회 일본 소프트웨어 대상 MVP (1997)
  • 제1회 ALAS 명예의 전당 헌액 (1998)
  • 제13회 멀티미디어 그랑프리 1998 MMCA 회장상 수상 (1998)
  • 골든 조이스틱 어워드 '명예의 전당 올해의 업계인상' (2003)
  • 제7회 게임 개발자 회의 공로상 (2005)
  • 프랑스 문화 예술 공로 훈장 3등급 슈발리에 (2006)
  • 타임지 선정 아시아의 가장 위대한 기업인들 (2006)
  • 제12회 AMD Award 공로상 (2007)
  • 가나자와미술공예대학 영예 (2007)
  • 이코노미스트 소비자 가전 부문 혁신상 (2007)
  • 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2007)[73]
  • 제1회 CEDEC AWARDS 2008 특별상 수상 (2008) 
  • 제1회 일본 게임 대상 경제산업대신상 (2008)
  • 제3회 ELAN 어워드 비디오 게임 명예의 전당 헌액 (2009)
  • 제13회 문화청 미디어 예술제 공로상 (2009)
  • IGN 선정 역대 최고의 게임 개발자 1위 (2010)
  • 영국 영화 텔레비전 예술 아카데미 펠로우십[74] (2010)
  • 제61회 예술 선장 문부과학대신상 미디어 예술 부문 (2011)
  • 아스투리아스 공상 커뮤니케이션 및 인본주의 부문 (2012)
  • 일본 문화공로자 (2019)[75]

8. 기타




2016년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30주년 인터뷰
초반에 1986년 당시 촬영한 영상이 나온다.
1998년 도쿄 게임쇼에서 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 관련 인터뷰


2005년 니혼 TV와의 인터뷰[76]
2011년 젤다의 전설 스카이워드 소드 발매 당시 이와타 사토루와의 인터뷰
  • 애칭은 미야혼이다. 성인 宮本에서 本만 음독으로 읽은 것. 80년대 게임업계에는 인력유출이 빈번하여 닉네임이나 별칭으로 스탭롤을 표기 하는 경우가 많았다. 미야혼도 이런것에서 비롯된 것.
  • 별명으로 "마리오의 아버지", "게임계의 월트 디즈니", "게임계의 스티븐 스필버그" 등이 있다.[77][78] 이 중 스필버그와는 E3 게임쇼에서 서로 Wii 스포츠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 이명을 좋지 않게 생각한다. 인터뷰에 따르면 이유는 게임이 영화보다 못 하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게임 웹진이나 리뷰에서도 미야모토를 가리키는 별명으로 다른 업계 인물을 끌어오기 보다는 그냥 게임의 신이라는 호칭을 쓰는 경우가 많다.
  •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서양 사람들에게는 돈을 좋아하는 캐릭터로 이미지가 잡힌 듯한 느낌이다.이런 거나, 이런 거[* 옆에서 닌텐도 DS를 잡고 함께 웃는 사람은 이와타 사토루]를 보면 알 수 있다.[79]
  • 보통 미국 게이머나 게임 제작자들은 일본의 게임 디렉터를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 않는데[80] 유독 미야모토 시게루만은 미국, 나아가서 전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으며 그 인기도 높다.

글로벌적으로 인지도가 있는 게임 산업의 몇 안 되는 인사 중 한 명인지라 타임지에도 종종 그의 이름이 언급되고는 한다. 위의 사진은 스티브 잡스와 함께 타임지 인쇄판의 전자기기 섹션에 소개된 부분. 2006년에는 타임지가 선정한 "지난 60년 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아시아인" 중 한명으로 뽑힌 적이 있고 2007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한명에 포함되었다.[81] 또한 같은 해에 CNN이 뽑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비즈니스맨 중 20위에 뽑혔으며 이코노미스트로부터 '소비자 가전 부문 혁신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2009년에는 유력 경영지 Entrepreneur가 선정한 IT 분야의 최고 혁신가 리스트에서 6위에 올랐고 2010년에는 포춘지가 선정한 IT 분야의 가장 스마트한 50명의 인물 리스트에 포함되었으며 같은 해 7월에 실시된 "영향력 있는 일본인 TOP 100"을 뽑는 투표에서 65위를 기록했다. Academy of Interactive Arts & Sciences에서 선정한 명예의 전당에 최초로 등재된 인물도 미야모토 시게루이다.[82][83] 2012년에는 게임 개발자로서는 유일하게 스페인의 가장 권위 있는 상인 '아스투리아스 공상'을 받았다.[84]
  • 아래는 시게루 하면 유명한 영상 중 하나. 2004년 E3에서 젤다의 전설 황혼의 공주를 발표한 뒤 직접 링크의 방패를 들고 휘둘러 엄청난 환호성을 이끌어냈다. 이 장면은 워낙 유명해서 이후 E3 시즌이 돌아올 때마다 역대 명장면 중 하나로 꼭 나오기도 한다. 1분 이후부터

  • 개발자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아 전 세계 게임 개발자를 대상으로 자신들의 영웅을 뽑는 설문 조사에서 30%의 득표로 1등을 한 적이 있다. 2등은 존 카멕, 3등은 윌 라이트. 게임 철학에 있어서 반대 방향이라 할 수 있는 닌자 가이덴이타가키 토모노부마저도 인터뷰에서 젤다빠임을 인증했다. 실제로 닌가 1의 퍼즐들은 젤다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 포켓몬스터 1세대 게임과 일본판 포켓몬스터 애니메이션 시리즈에서 주인공 레드/사토시(한지우)의 라이벌그린/시게루(오바람)의 모델이다. 이는 자신의 이름을 주인공에게 차용한 타지리 사토시가 지은 것으로, 말 그대로 동경할 수밖에 없는 라이벌이라는 의미와 상통한다. 극중 두 캐릭터의 관계와 매우 흡사. 실제로 타지리 사토시는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포켓몬스터는 미야모토 씨가 지금까지 만든 그 어떤 게임보다도 유명해졌는데, 이를 청출어람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질문을 받자 "절대로 아니다. 포켓몬스터는 미야모토 씨의 조언들을 참고하여 만들어졌으며 그는 언제나 나의 멘토이자 롤 모델이다." 라고 말하며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엄연히 미야모토는 포켓몬스터 시리즈의 첫 작품인 포켓몬스터 레드·그린의 프로듀서 직책으로 개발에 참여했으며, 통신 기능이 들어가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포켓몬스터 시리즈의 20주년을 기념해 레드·그린의 프로듀서 자격으로 축하의 코멘트를 남기도 했다.
  • 2012년 4월 17일에 열린 기자 간담회에 참석하기 위해 처음으로 내한했다. 개그맨 안상태와 닮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수 년 전 루리웹의 한 용자가 교토 구석 닌텐도 본사를 쳐들어갔다가 우연히 그를 직접 만나 사진찍고 사인받은 것을 올렸는데 수수한 차림에 일수가방을 든 그냥 아저씨 모습이다. 하지만 웃음과 포즈에서 숨길 수 없는 본좌의 여유가 나온다.
  • 1999년 GDC에서 강연한 바에 따르면 슈퍼 마리오 64가 나올 즈음에 다마고치의 큰 성공을 보고 마리오 64가 다마고치에 질 수도 있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고 한다.[85]


  • 이와타 사토루에 대해 회고한 책 《이와타 씨》중 이토이 시게사토와 미야모토의 인터뷰도 포함되었는데 미야모토는 그에 대해 '무엇보다도 가장 소중한 친구'였으며 '절대로 그가 나의 상사처럼 느껴지거나 내가 그의 밑에서 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던 적은 없었다'고 하면서 그를 회고했다.
  • || || || ||
피크민 시리즈를 기반으로 한 단편 영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총 3편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는데, 2014년 도쿄 국제 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된 이후 3DSWii U에서 유료로 영상을 구매할 수 있었으나 시간이 흐른 후 2020년 피크민 3 디럭스의 출시 기념으로 유튜브에 영상이 무료로 풀렸다.
  • 4월 17일, 닌텐도 3DS의 한국 내 정식 발매 관계차 방한. 실제 미야모토 시게루의 Mii가 아니라고 카더라
  • 2014년 5월 3일에 출제된 SAT에서 그의 일생에 관한 문단과 문제가 출제되었다.

  •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개발 당시 최종보스의 이름을 강렬해보이는 이름을 붙이려고 개발진들이 의논할 때 누군가 무심결에 고깃집에서 국밥을 먹고 싶다고 말했는데, 이를 들은 미야모토 시게루는 국밥의 일본어 발음인 'クッパ'를 듣고 강렬하고 멋진 이름이라고 느껴 이름을 쿠파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고깃집 언급을 했기에 고기 요리라고 여겼다가 나중에 그냥 국에다 밥을 말아먹는 음식임을 알았다고 한다. 그래도 어감 자체는 좋아서 그대로 쿠파로 결정했다. 2012년 4월 17일 그가 방한했을 때 직접 언급한 이야기다. 일본어판 언사이클로피디아도 이 일화가 잘 알려졌는지 쿠파는 한국에서 요리재료로 쓰인다는 말이 적혀있다.
  • 마이크로소프트키넥트의 E3에서 공개 당시 시범을 구경하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었는데 표정이 가관이다(...). [86]
[image]
> ㅋ 내 몸은 레지임![87]
>저딴 쓰레기는 도무지 돈을 찍어낼 것 같지가 않아
그리고 이 사진은 마이크로소프트키넥트의 생산을 중지하면서 재발굴되었다(...).
  • 게임큐브 시절을 스스로 공식적인 흑역사로 인정했다. 인터뷰에 따르면 게임큐브가 실패한 이유는 성능에 대한 집착과 더불어 다른 회사들과 같은 방향으로 경쟁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그후에 절치부심하여 고안해낸 것이 바로 닌텐도 DS다. 야마우치 히로시가 처음 듀얼 스크린의 아이디어를 냈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미야모토가 나중에 터치스크린의 아이디어를 추가시켰다.

  • 다른 회사의 게임에 대해 잘 언급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포탈마인크래프트는 인터뷰 중에 놀라운 게임이라고 호평한 적이 있다. 특히 마인크래프트에 대해서는 닌텐도가 만들었어야 했던 게임처럼 느껴졌다고 말한 바 있다. 참고로 닌텐도도 N64 시절에 비슷한 컨셉을 실험해 봤지만 실제 발매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런 실험적 컨셉이 나중에 마인크래프트라는 완성품으로 출시된 것을 보고 매우 인상깊었다고.
  •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인디아나 존스라고 한다. 젤다의 전설의 개발도 이 영화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되었다고. 영화 자체가 액션 어드벤처물의 교과서격인 영화인데다 탐험의 요소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그의 성격을 생각해봤을 때 어떻게 보면 당연해 보이기도 하다.

  • 한 인터뷰에서 디즈니의 미키 마우스(TV 시리즈)슈퍼 마리오브라더스의 레퍼런스가 등장한 것에 대해 소감이 어떤지 질문받았는데 그 자리에서 처음 영상을 본 그는 '이거 저작권 문제에 걸리는 거 아니에요?(웃음)'라며 유머러스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또 미키 마우스가 향후 그의 게임에 등장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고개를 저으면서 '그들은 매우 엄격해요.(웃음)'라고 말하는 건 덤.
  • 닌텐도가 캐주얼 게임에 집중하는 이유에 대해 2007년 GDC 강연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가 보기에 게임 산업의 규모가 점점 커지는 것과는 반대로 시장이 코어 게이머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폐쇄성이 심해지고 산업을 바라보는 대중의 인식은 나날이 부정적으로 변하고 있음이 명백해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게임인구의 확대'라는 목표가 설정되었고 그는 자신의 아내가 어느정도 흥미를 가지는지를 게임의 접근성을 평가하는 척도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아내는 본인이 생각할 때 당연히 재밌게 즐길 것이라 보았던 테트리스는 물론, 딸이 즐기고 있던 시간의 오카리나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동물의 숲에는 조금씩 관심을 보이더니 자신이 제작한 닌텐독스의 경우 먼저 말을 꺼내기 시작했으며 두뇌 트레이닝에 이르러 그녀도 진심으로 게임을 즐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사[88]
  • 인터뷰에 따르면 본인이 후계자를 양성하는 방법은 철저한 도제 방식이라고 한다. 자신이 직접 제자를 키우고 그 제자가 스승이 되어 다시 제자를 키우는 방식이라고.
  • 2019년 초 주주들과의 문답에서 더 많은 개발자들을 고용해 닌텐도 스위치의 게임 라인업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필요성이 느껴진다는 지적을 받은 것에 대해 그는 개발팀의 규모 확대는 반드시 게임의 퀄리티를 유지할 수 있는 선에서 이루어져야함을 강조하면서도 자신도 직원들의 수를 늘리라는 요구가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닌텐도는 단순히 더 많은 개발자를 뽑는 데 집중하는 대신 회사에 적합한 개발자를 길러내는 데 더 집중한다고 대답했다.
  • 2004년 BBC에서 제작한 'Outrageous Fortunes'라는 다큐멘터리에서 '사장인 야마우치 히로시는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는데 본인은 모든 저작권료를 몰수당하고 그저 월급쟁이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정말 말도 안 되는 거 아닌가요?'[89]는 리포터의 질문에 그는 자신이 추진하는 프로젝트들에 본인이 원하는 만큼의 충분한 돈을 지원받고 있으니 상관없다고 답한 적이 있다. 본인을 야마우치의 자식과도 같다고 표현한 건 덤.[90]
> “그렇게 평가해줘 기쁘다. 하드웨어 설계는 축적된 경험이 있어야 하지만, 소프트웨어는 세상을 넓고 깊게 보고 사용자를 이해하는 능력이 있으면 단기간에 히트작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이게 소프트웨어의 매력이다. 한국도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하다.”
라고 국내 게임산업에 대해 덕담을 해주었다.
  • 더 머펫 쇼의 팬이라 하며 그 덕분인지 2015년 E3 당시 닌텐도에서 미야모토와 이와타 사토루, 그리고 레지 피서메이의 모습을 본뜬 머펫이 나오는 인형극을 선보이기도 했다. 후에 이 인형들이 어디서 제작되었는지 밝혀졌는데 다름 아니라 짐 헨슨 스튜디오에 닌텐도가 직접 의뢰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아래는 미야모토와 테즈카 타카시가 직접 스튜디오를 방문해 비하인드 스토리를 얘기하는 영상인데 인터뷰에 따르면 미야모토는 짐 헨슨을 존경하기는 했지만 그와 같은 인형사보다도 인형을 직접 제작하는 사람이 되는 게 어렸을 적 본인의 꿈이었다고 밝혔다.

  • 최근 들어 닌텐도가 VR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 중이라고는 하는데 본인은 VR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 이유로 VR 게임이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만든다'는 닌텐도의 모토에 어긋난다는 점을 들었다.



  • 참고로 그는 데이비드 존스[91]의 '바디 하베스트'라는 게임이 닌텐도의 투자를 받아 N64용으로 개발이 진행되고 있을 때 폭력성 때문에 가족용 게임으론 어울리지 않다고 거절했고 수정을 요구했으나, 존스도 거절했고 결국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아 데이비드 존스와 DMA 디자인은 닌텐도와의 퍼블리싱 계약을 파기하게 되었다. 후에 존스는 락스타 게임즈의 창업자 하우저 형제를 만나 GTA 2를 기획하게 되고 이 게임을 마지막으로 DMA 디자인을 떠났다.
  • E3 2018유비소프트 컨퍼런스에서 유비소프트의 신작인 '스타 링크'가 발표되었는데, 발표회 도중 스타폭스 시리즈와의 콜라보가 발표됨과 동시에 시게루 본인이 깜짝 등장해서 스타 링크 제작진들로부터 모형을 선물받았다. 다만 닌텐도 컨퍼런스가 아니라 유비소프트 컨퍼런스였으며, 정식으로 나온 게 아니라 깜짝 등장이어서 그랬는지 시게루에게 마이크도 쥐어지지 않았고, 통역도 나오지 않아서 서로 알아들을지나 모를(…) 인사만 하고 돌아갔다.
  • 과거 한 블로거(백금기사)가 그에 대한 미담을 올린 적이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고 꽤 감동적인 일화이지만 일본어 원문의 출처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게 흠. 지금은 블로그 자체가 삭제되어 스크랩된 글밖에 남아있지 않다. #


9. 외부링크


[1] 게임 업계 최초로 이 칭호를 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수상 이력 문단 참고.[2] 정확한 명칭은 크리에이티브 펠로우(Creative Fellow). 사실상 COOCCO의 위치에 있다고 보면 좋다. 키미시마 타츠미의 말에 따르면, 다년간의 업무 경험과 지식을 활용하여 회사의 장기적인 미래를 모색하는 직책이라고 한다. #[3] 이 중에서도 게임 개발에 대해서는 사실상 본부장 직책인 타카하시 신야가 담당하고 있고, 미야모토 시게루는 그보다 더 포괄적인 프랜차이즈를 총괄하고 있다.[4] 사실 이와타 사토루의 사망 직후 차기 CEO 후보 1순위로 거론되었던 인물이 다름 아닌 미야모토 시게루였다. 그러나 평소에 본인은 사장직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언급했던 터라 대내외적인 요구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펠로우직에 계속해서 머무를 가능성이 높다.[5] 게임 기획자의 중요성을 널리 알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가 동키콩을 개발하기 이전만 해도 엔지니어들이 프로그래밍과 기획을 동시에 맡는 경우가 대다수였는데 그런 방식을 고수한다면 닌텐도는 지금처럼 다른 회사의 카피캣만을 양산할 뿐, 절대 독창적인 게임을 만들 수 없다고 판단한 요코이 군페이가 처음으로 프로그래밍을 전공하지 않은 미야모토에게 기획자의 임무를 부여한 것이다.[6] BAFTA, GJA, GDC, VGX, AIAS[7] 원래는 '공대도 가고 싶고 미대도 가고 싶은데 그럼 둘 다 하려면 산업디자인을 하면 되겠구나'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전공했다고 한다. #[8] 영어권 버전의 공통점으로, 영어권 패미콤이나 NES 게임은 제작사 외에도 '''Licensed by Nintendo of America'''라고 표기한다.[9] 게임의 완성 과정에서는 요코이 군페이의 영항을 많이 받았다.[10] 1990년부터 정보개발본부(EAD)로 이름이 변경된다. 2015년에는 모든 개발부서가 통합되면서 기획개발본부(EPD)가 되었다.[11] 한 전문가는 닌텐도가 모바일 게임 시장에 한동안 진출하지 않은 것도 미야모토가 이를 거부했었기 때문이며 회사 내에서 이와타 사토루가 유일하게 건들 수 없었던 사람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12] 슈퍼 패미컴에 처음 도입된 L/R 버튼(숄더 버튼)과 4버튼 체계(ABXY)는 미야모토의 제안으로 추가된 아이디어다.[13] N64에 처음 도입된 아날로그 스틱은 순전히 슈퍼 마리오 64의 컨트롤을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고안된 아이디어다. 또한 스타폭스 64를 통해 진동 패드의 대중화를 이끌어내기도 하였다.[14] 게임큐브 컨트롤러의 디자인에 깊이 관여했다. # #[15] DS의 감압식 터치 스크린은 미야모토의 제안으로 도입되었다.[16] Wii 리모컨의 디자인 팀을 이끌었다.[17] 닌텐도 스위치의 제너럴 디렉터. 두뇌 트레이닝, 엇갈림 Mii 광장 등의 디렉터를 맡았고, 프로듀서로 승진한 이후로는 1-2 스위치, 닌텐도 라보, 링 피트 어드벤처 등의 제작을 맡았다.[18] 두뇌 트레이닝의 경우는 미아모토 시게루가 수장을 맡고 있던 정보개발본부(EAD)에서 담당한 게임이 아니지만 당시 이와타 사토루의 기획을 서포트하고 싶었던 미야모토 시게루의 지시에 의해 그의 후임 중 하나였던 카와모토가 개발에 투입되었다.[19] 이 당시 닌텐도는 '''1983년 도쿄증권거래소 상장 이후 처음으로 적자가 났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2011년 3월 11일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한 엔고 현상과 그로 인한 일본 경제 쇼크가 원인이었다.[20] 닌텐도의 세컨드 파티인 레어를 거액에 인수할 정도로 당시의 마소는 닌텐도 쪽 인력을 영입하기 위해 공격적인 공세를 펼쳤다.[21] 창작 과정에서의 팀워크를 중시하는 닌텐도의 특징이 잘 드러난 부분. 닌텐도가 창작 집단으로서 직원들 간의 유대를 중요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또 있는데, 훗날 Wii U의 실패로 회사가 최대의 위기를 겪는 와중에도 이와타 사토루와 미야모토를 포함한 이사회 전원은 본인들의 연봉을 자진해서 삭감하는 한편 그외의 직원들은 구조조정을 당하거나 회사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다. 이같은 결정에 대해 주주총회에서 이와타가 밝힌 바로는, '과연 자신이 해고당할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직원들이 세상을 놀라게 만드는 게임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닌텐도가 인적자원을 얼마나 각별히 여기는지 알 수 있는 대목. #[22] 미야모토는 일본 정부로부터 특별히 '문화 공로자'로 선정되었을 당시 인터뷰에서도 '오랜 세월 함께 했던 팀원들이 없었더라면 혼자서는 절대 게임을 만들지 못 했을 것'이라 말하며 공을 회사 직원들에게로 돌리기도 했다. #[23] 또한 '''"닌텐도로는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으니까"''' 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24] 연봉 테이블에서 특혜를 주는 건 상당한 부담이다. 특히 이슈가 된 만큼 연봉이 공개되는 건 피할 수 없는 수순인데, 회사에 공헌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을 영입하겠답시고 공헌도가 높은 사람보다 훨씬 비싼 몸값을 준다면 사내의 다른 사람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 충성도가 낮아지고 회사를 이탈하는 부작용이 생기게 마련이다. 어차피 비슷한 아웃풋을 낼 사람들은 몇몇 있으니, 마이크로소프트가 게임계를 평정하겠다는 강력한 인상을 줘서 업계의 기선제압을 하기 위해 오버 페이를 제시했던 것인 만큼 더 이상 매달리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즉 미야모토와 계약을 성사시켰어도 좋은거지만, 안했다고 해도 나쁠 건 없으니 한번 던져본 것 [25] 만약 미야모토가 아니라면 보통 놀런 부슈널이 1위를 하는 게 일반적이다.[26] 닌텐도 3DS의 한국 런칭 당시 방한하여 국내의 기자 간담회에 참석한 그에게 스마트폰의 보급이 앞으로 닌텐도에게 미칠 영향에 대한 질문이 들어오자, 다른 플랫폼들과의 경쟁 관계를 의식하기보다는 좋은 게임을 만드는 데 더욱 집중해야 한다는 의미로 한 말이다.[27] 사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마리오 시리즈는 비디오 게임 판매량 원톱이고, 젤다의 전설 시리즈까지 합치면 판매량에서 미야모토 시게루를 능가하는 비디오 게임 제작자는 '''없다.''' 기록 갱신을 하려면 우사인 볼트마냥 자기 기록부터 갱신해야 한다.[28] 미야모토 자신이 만든 게임 중 가장 불만족스러운 물건으로 링크의 모험을 꼽았다. 이유는 처음 계획한 그대로 만들어졌기 때문. 그의 얘기에 따르면 원래 게임을 만들다보면 계획이 변화해야 하는데 젤다의 전설 2 링크의 모험은 그런 일이 없었기에 본인 입장에선 실망스러웠다고. 실제로도 작품의 평가가 그리 좋지는 않다. 그래도 지금까지 나온 게임들 중에서 평가는 중 ~ 상위권에 속한다.[29] 이와타 사토루가 GDC 2009에서 밝히길, 본인이 HAL 연구소에 재직하던 시절에는 '닌텐도의 게임이 훌륭한 이유는 회사가 돈이 많기 때문이다.' 라고 단순히 생각했는데 막상 닌텐도에 들어와보니 그게 아니라 밥상 뒤집기를 비롯한 미야모토 시게루의 개발 방식이 훌륭한 게임을 만들 수 있는 진정한 비결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30] 코지마 히데오처럼 게임 내에 특정한 정치적 메시지를 포함시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31] 그는 다른 인터뷰에서도 자신이 생각했을 때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나 설정을 만드는 것보다는 기존의 캐릭터가 새로운 일이나 행동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 더욱 이상적이라고 본다며 마리오를 최대한 많은 게임들에 등장시키는 것이 본인의 바람이라고 밝히기도 했다.[32] 1990년대 후반 온라인 게임이 한창 유행하고 있었을 때 왜 닌텐도는 온라인 산업에 뛰어들지 않는가 묻는 질문에 대한 답.[33] 최근의 많은 비디오 게임들이 슬픔이나 근심, 상실과 같은 어둡고 성숙한 주제들을 중심으로 다루는 경향과 관련하여, 본인이 일생 동안 게임을 만들면서 그러한 주제들을 전혀 다루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한 적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34] 2016년 6월 당시, 경쟁사들이 PS4 ProXbox One X와 같은 업그레이드 콘솔을 발표하고 있을 때 닌텐도 스위치의 출시를 준비하고 있던 닌텐도 측에서 제품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공개하지 않고 신비주의로 일관한 이유에 대해 본인이 직접 대답한 내용이다. 그는 만약 스위치를 너무 일찍 공개했을 경우 '''다른 회사들이 제품의 아이디어를 모방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스위치의 공개를 미루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닌텐도 스위치는 그 해를 건너뛰고 이듬해 3월에 출시되었으며 사상 최초로 연말이 아닌 연초에 출시된 메이저 콘솔이 되었다. #[35] 게이브 뉴웰하프라이프 알릭스의 발매 이전 인터뷰에서 미야모토에게 직접 게임을 선보인 후 플레이한 소감을 듣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 이유는 하프라이프 알릭스 역시 미야모토가 게임을 만드는 방식처럼 하드웨어소프트웨어를 동시에 생각하여 개발한 작품이기 때문. 앞서 게이브 뉴웰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개발자로 미야모토 시게루를 뽑은 적이 있다.[36] 흔히 말하는 밥상 뒤집기도 디렉터나 프로듀서로부터 보고를 받고 미야모토 시게루가 "해당 부분을 완전히 갈아엎는 것이 좋겠다" 고 하면서 일어나는 것이다.[37] 심판이 마리오다.[38] 플레이어가 마리오와 비스무레하게 생겼다. 이후 닌텐도에서 골프란 타이틀을 단 게임들은 전부 마리오가 등장하므로 마리오 골프 시리즈를 정신적인 후속 시리즈로 봐도 좋을 듯하다.[39] 꿈공장: 도키도키 패닉을 개량하고 마리오 일행을 주인공으로 변경한 것이 슈퍼 마리오 USA로, 일본을 제외한 해외에서는 이것이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2라는 타이틀로 1988년 발매되었다.[40] 북미명은 Stunt Race FX.[41] 북미명은 Mole Mania.[42] 원제는 "とっとこハム太郎2 ハムちゃんず大集合でちゅ", 북미판 명칭은 "Hamtaro: Ham-Hams Unite!" 이다.[43] 북미판 명칭은 Disney's Magical Mirror Starring Mickey Mouse.[44] 원제는 "とっとこハム太郎3 ラブラブ大冒険でちゅ", 북미판 명칭은 "Hamtaro: Ham-Ham Heartbreak".[45] 북미판 명칭은 1080° Avalanche[46] 원제는 "とっとこハム太郎4 にじいろ大行進でちゅ", 북미판 명칭은 "Hamtaro: Rainbow Rescue".[47] 코지마 히데오와 협업[48] 개발 초기에는 디렉터였고, 아오누마 에이지가 프로듀서였으나, 이후 둘의 보직을 뒤바꾸었다.[49] 검수(Supervisors)로 참여. 이 작품에서도 밥상 뒤집기를 시전했다. 다만 이 밥상 뒤집기는 딱히 좋은 결과를 가져오진 못했다.[50] 실제로 크레딧에는 나오지 않으나 미야모토가 커비의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설이 있으며, 사쿠라이 마사히로와 커비의 색을 가지고 분쟁을 벌였고 출시 직전 밥상 뒤집기까지 시전했던 것을 보면 프로듀서 못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을 확률이 높다. 별의 커비 슈퍼 디럭스까지 이후 시리즈에서는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렸다.[51] 밥상 뒤집기를 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한창 게임을 개발 중이던 레어에 직접 팩스를 보내 게임의 폭력적 연출을 순화시키라는 권고를 하였다. #[52] 2015년 9월에 게임이 처음 발표되었을 당시,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던 이와타 사토루가 사망한 이후였기 때문에 그를 대신해 닌텐도의 대표로서 포켓몬 GO의 공식 발표회에 등장하여 나이언틱의 CEO 존 행키, 마스다 준이치, 그리고 이시하라 츠네카즈와 함께 게임을 소개했었고 당시 그는 포켓몬 GO를 본인이 이전에 이와타 사토루와 같이 제작했던 적이 있는 다른 포켓몬 게임인 포켓몬 스냅에 비유하기도 했다.[53] 젤다의 전설 시리즈의 링크가 왼손잡이임에도 일부 작품에서 오른손에 검을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콘솔의 키배치를 고려했을 때 공격 버튼은 오른손에 할당되어 있음에도 링크가 왼손으로 칼을 쓰면 직관적이지가 않기 때문.[54] 멀리 갈 것도 없이, 슈퍼 마리오브라더스에서 점프를 한 후 좌우로 이동만 해봐도 안다.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물리법칙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55] 이러한 개발 철학 때문인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닌텐도 게임기 역시 닌텐도 DS닌텐도 Wii라고 답한 적이 있다. 새로운 플레이 방식을 발명해내고자 하는 본인들의 노력을 잘 보여주는 제품이라고. #[56] 2003년 당시 인터뷰에서 닌텐도 게임의 멀티플랫폼화를 고려해본 적이 있냐는 질문에 그는 자체적으로 하드웨어를 만들어야만 비로소 본인이 원하는 게임을 만들 수 있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하며 자신이 만들 수 있는 게임들 중 다른 하드웨어에서 가능한데 게임큐브에서만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없다고 말한 바 있다.[57] 1996년의 인터뷰에서 '64DD에 왜 CD-ROM을 채용하지 않았냐'고 묻는 질문에 '우리는 영화를 만드려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라고 답하기도 했다.[58] 그는 기본적인 설정 외에는 작품마다 배경과 스토리가 제각각인 점에서 마리오 시리즈를 루니 툰에 비유하기도 했다.[59] 그는 닌텐도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영화를 좋아했으며, 젤다의 전설 꿈꾸는 섬의 시나리오를 작성했을 정도로 스토리를 만드는 것에 특기가 있다고 한다.[60] 사실 1999년 인터뷰에선 지금의 마리오는 귀여운 이미지라 향후 돌핀으로 나올 차기작에서는 마리오가 좀 더 성숙한 면을 보일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 당시엔 마리오를 멋있어 보이게 하려는 코이즈미의 생각에 어느정도 동의했던 것으로 보인다.#[61] 간혹 이와 같은 스토리 배제적 성향이 때때로 너무 과해져 이에 관한 비판 또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페이퍼 마리오 시리즈로, 페이퍼 마리오 스티커 스타가 시리즈 중에서도 매우 저조한 평가를 받은 이유 중 하나가 미야모토 시게루가 밥상 뒤집기를 하면서 페이퍼 마리오만의 매력요소인 오리지널 캐릭터와 오리지널 스토리를 쓰지 못 하도록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작인 페이퍼 마리오 종이접기 킹까지도 페이퍼 마리오 초기작들을 좋아하던 팬들의 불만은 상당하다.[62] 다큐에서 말하길 어릴적 동네 뒷산에 올라갔는데 무슨 작은 호수 같은 게 튀어나와서 어? 했던 경외감 같은 걸 게임으로 표현해보고자 했던 게 젤다의 전설이라고 한다.[63] 사실 미야모토가 게임을 처음 제작했을 당시는 비디오 게임이라는 것이 이제 막 생겨나던 시기라 게임 평론가나 게이머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필연적으로 상업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64] 그는 대면 접촉이 전혀 없는 온라인 멀티플레이보다는 옆사람과 나란히 앉아 함께 플레이하는 전통적인 형태의 로컬 멀티플레이를 더 가치있게 여긴다. 닌텐도 게임 중에는 마리오 카트 시리즈, 슈퍼 스매시브라더스 시리즈 등 아직까지도 로컬 멀티플레이로 유명한 게임들이 많을뿐더러 닌텐도 스위치의 핵심 요소인 조이콘은 아예 휴대용 게임기에서도 TV 앞에서와 같은 로컬 멀티플레이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65] 당시 디렉터였던 사쿠라이 마사히로는 미야모토가 마리오에 비해 커비는 느리게 움직이니 다인 플레이를 구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는데 커비도 휠 능력 때문에 마냥 느리게 움직이는 건 아니라서, 좋으라고 만든 카피 능력이 오히려 본인의 발목을 잡은 것 같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해서 헬퍼 시스템을 만들게 되었고, 미야모토의 기대에 부응했다.[66] 대표적으로 슈퍼 마리오 64의 루이지가 있다.[67] 특히 미야모토가 가장 잘 키웠다고 평가받는 개발자는 젤다 시리즈의 디렉터를 맡은 아오누마 에이지다. 아오누마 에이지의 경우 젤다 시리즈의 디렉터-프로듀서로서 함께 일해왔던 터라 미야모토와 접전이 많았으며 그 만큼 사이도 좋은지 공식적으로 같이 있는 모습을 자주 내비쳤다. 시게루가 아오누마를 자주 굴린 것으로도 유명한데, 젤다의 전설 무쥬라의 가면을 1년 내에 만들도록 지시한 것이 그 예시다. 이후 아무리 생각해도 1년은 짧은 거 같으니 시간을 더 주겠다는 시게루의 말에 오기가 생겨 정말 1년 내에 무쥬라의 가면을 만들어낸 아오누마를 보고 시게루가 놀랐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68] 타지리 사토시 같은 경우는 게임 프리크의 시작이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동인지였을 정도로 미야모토의 영향력을 크게 받았지만 일찍이 개발에서 손을 땠으며 마스다 준이치가 그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69] 젤다의 전설 황혼의 공주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황혼의 공주의 PV와 함께 등장하는 미야모토 시게루의 모습은 거의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70] 스페인의 가장 권위 있는 상이며 미야모토는 그중 커뮤니케이션•휴머니즘 부문의 상을 받았다. 동일 부문의 다른 수상자로는 철학자 움베르토 에코, CNN, 구글, 학술지 네이처 등이 있다.[71] 출처의 기사를 작성한 David sheff는 1년 후에 닌텐도를 주제로 한 책을 저술해 발간하기도 했다. 나름 닌텐도 관련 저서 중 유명한 축에 속하는 책.[72] 윌 라이트는 단순한 몇가지의 규칙들로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시스템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73] 2008년, 2009년에도 약 200인 가량의 최종 후보 명단(Finalist)에 포함되었으나 정식 리스트에서는 제외되었다.[74] 평생 공로상[75] 문화 공로자는 일본 내 창작 분야의 종사자로서 받을 수 있는 서훈으로는 문화훈장 다음으로 높은 등급에 해당한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비디오 게임 산업에 거대한 영향을 남긴 공로를 인정받아 게임 개발자로서는 최초로 이 상을 받게 되었다. 왜 하필이면 문화훈장이 아닌 문화 공로자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애니메이션, 만화, 비디오 게임 등 소위 서브컬처로 분류되는 산업의 종사자로서 문화훈장을 받은 인물은 2019년 기준으로 단 한명도 없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문화 공로자가 사실상 게임업계 종사자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나 다름없다. 참고로 2019년 기준으로 만화나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문화 공로자를 수여받은 사람은 요코야마 류이치, 미즈키 시게루, 치바 테츠야, 하기오 모토, 미야자키 하야오 이외에는 없다.[76] 당시 슈퍼 마리오 선샤인을 발매하고 2년 뒤 젤다의 전설 황혼의 공주를 개발하고 있던 시점이었다.[77] 1991년도 워싱턴포스트기사에서는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 스티븐 스필버그에 견주는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라고 서술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게임계의 스티브 잡스"나 "게임계의 스탠 리"라는 표현도 종종 쓰이고 있다.[78] 사실 스티브 잡스는 미야모토와 경쟁관계에 속한 인물이기도 했는데 한 강연에서 언급한 바에 따르면 잡스가 iPhone을 처음 발표했을 당시 미야모토는 '터치스크린은 우리가 먼저 했는데?'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훗날 잡스는 애플의 프레젠테이션 도중 직접적으로 아이팟 터치닌텐도 DSPSP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이 팔린 게임기라고 홍보하기도 했다.[79] 하지만 실제로는 한 인터뷰에서 기업의 재무적 성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유는 야마우치 히로시와 비슷하게 오락 산업은 변동성이 큰 산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80] 미국 게이머들은 어릴때부터 플레이 해온 미야모토 시게루의 게임철학, '높은 자유도', '직관적 플레이', '훌륭한 조작감'을 거의 숭배하다시피 하는데 정작 대부분의 일본 개발자들은 미야모토의 철학을 따르지 않는다. 대부분의 일본 개발자들은 '통제된 상황', '화려한 연출', '시나리오 위주의 플레이' 등을 중시한다. 예를 들면 FF13까지 이어진 ATB 시스템이라든가, 유독 일본에서 기를 못 쓰는 샌드박스 게임들이라든가. 그러니 미국 게이머 입장에서는 평가가 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이는 성향의 차이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어떤 방식이 옳다고 무작정 단언할 수는 없다.[81] 2008년에도 최종 후보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아쉽게도 정식 리스트에는 빠지고 말았다. 2009년에도 다시 한번 최종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82] 2015년까지 총 20명이 등재되었다. 미야모토 시게루에 이어서 등재된 인물로는 시드 마이어, 사카구치 히로노부, 존 카멕, 윌 라이트, 스즈키 유, 피터 몰리뉴, 트립 호킨스(일렉트로닉 아츠의 설립자), 리처드 개리엇, 마이크 모하임, 게이브 뉴웰, 코지마 히데오 등이 있다.[83] 어차피 이분이 없었으면 비디오 게임 명예의 전당따위는 생기지도 않았다.[84] 커뮤니케이션•휴머니즘 부문. 이 부문의 다른 수상자로는 움베르토 에코, CNN, 구글, 네이처 등이 있다. 출처[85] 자신들이 최신 기술에 집착하고 있을 때 간단한 아이디어로 재미를 선사하는 제품이 나온 것을 보고 자극을 받았다는 의미의 말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이 때부터 향후의 방향 전환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지도. 출처[86] 옆에 서있는 사람은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의 빌 트리넨으로 NOA의 마케팅 수장이자 로컬라이징 최고관리자이다. 북미 닌텐도 다이렉트에 종종 모습을 드러내며 일본어를 굉장히 능숙하게 구사하기 때문에 닌텐도 본사에서 요인들이 올 때 늘 통역으로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사진에서의 모습도 아마 영어가 능숙하지 못한 미야모토를 위해 통역으로 같이 행사장에 다니다 찍힌 것으로 보인다.[87] 레지 피서메이의 "My body is ready" 를 어감이 비슷한 "My body is Reggie" 로 바꾸었다.[88] 2010년대 이후로는 게임인구의 확대라는 목표에 한계점을 느끼고 IP를 활용한 미디어 믹스 사업으로 닌텐도의 고객 확대가 더 우선적인 목표가 되었다.[89]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 다큐 시리즈 자체가 디즈니, 월마트 등의 글로벌 기업들을 취재하여 대중에게 드러나지 않은 어두운 뒷면을 조명하는 것을 중심 내용으로 잡고 있다.[90] 한 인터뷰에 따르면 야마우치 히로시의 경영 방침 자체가 게임 개발자들을 절대 간섭해서는 안 된다라는 거라고.[91] DMA 디자인(현 락스타 노스)의 창업자. 레밍즈GTA 1을 기획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