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수
[CLEARFIX]
1. 개요
일제 강점기 후기와 한국전쟁 전후를 풍미한 트로트 가수이다.
2. 생애
경상남도 진주 출생으로, 원래 이름은 최창수(崔昌洙)였으나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진주 강씨 문중에 들어가면서 강문수(姜文秀)로 바뀌었다. 남인수는 가수로 데뷔하면서 작사가 강사랑이 지어준 예명이다.
남인수의 형이었던 최창도의 딸, 그러니까 남인수에게는 조카가 되는 최삼숙은 북한의 인민배우로, 무대 공연 2600회를 한 인기 가수라고 한다. 2016년 5월, 류경식당 종업원 집단탈북 의 탈북자들 중 최삼숙의 딸이 포함되었다고 보도되었다. #
학력 사항에 대한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가수 데뷔 전 경력 역시 일본에서 노동자로 일했다는 설과 중국어를 배우다가 경성부로 올라왔다는 설 등 여러 설이 분분하다. 다소 불우한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는 정도로 알려져 있다.
1936년 김상화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눈물의 해협〉으로 가요계에 데뷔하였고, 1938년 데뷔곡을 이부풍이 개사한 〈애수의 소야곡〉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후 약 20여 년간 타고난 미성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물방아 사랑〉, 〈꼬집힌 풋사랑〉, 〈감격시대〉, 〈항구의 청춘시(靑春詩)〉, 〈울며 헤진 부산항〉, 〈서귀포 칠십리〉, 〈청노새 탄식〉, 〈낙화유수〉, 〈남아일생〉, 〈일가 친척〉, 〈가거라 삼팔선〉, 〈달도 하나 해도 하나〉, 〈청춘 무성〉, 〈고향의 그림자〉, 〈고향은 내 사랑〉, 〈이별의 부산정거장〉, 〈청춘 고백〉, 〈추억의 소야곡〉, 〈산유화〉, 〈울리는 경부선〉, 〈무너진 사랑탑〉등 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약 1천 곡에 가까운 노래를 불렀고, "가요 황제"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대개 청춘의 애틋한 사랑과 인생의 애달픔, 유랑의 슬픔 등을 그린 노래였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대표곡 〈애수의 소야곡〉은 시에론레코드에서 취입한 데뷔곡으로 큰 반응을 얻지 못했던 〈눈물의 해협〉의 가사를 바꿔 다시 부른 노래였다. 남인수는 시에라레코드의 박영호, 박시춘을 통해 가수로 데뷔했다가 오케레코드에서 스타가 되었다. 이 당시 남인수의 등장은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미성의 가수 탄생'으로 크게 선전되었다. 그리고 이 곡은 토도로키 유키코가 <哀愁のセレナーデ>라는 제목으로 일본어 가사를 붙여 불렀고 1940년에 남인수와 듀엣으로 부르기도 했다.
남인수는 음역이 넓고 감정 표현도 풍부하여 가수로서의 천부적인 재질을 갖고 있었다. 목소리가 옹골찬 미성인 데다 음높이와 발음이 정확하여 고음 처리에 강점을 보였다. 남인수의 등장으로 채규엽, 고복수, 강홍식 등 이전 세대 인기 가수의 시대가 저물고 가요계의 새로운 판도를 열었다고 평가될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
3. 여담
*남인수의 부인은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은 김용환의 3녀 김은하이다.
김은하는 일제 강점기인16세에 일본으로 가서 아크로바틱을 배웠다.
귀국무대에서 대중가수로 인기가도를 달리던 남인수를 만났고 연애 끝에 결혼했다.
김은하는 무용의 길을 포기했다. 슬하에 4남매를 두고 아내와 어머니로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던 남인수의 그늘에서 내조의 길을 걸었다.
남인수와 동료가수 이난영의 불륜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어도 김은하는 묵묵히 가정을 지켰다. 이난영과 동거하던 남인수는 임종직전 김은하를 불러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자녀들을 잘 키워줄 것을 부탁했다.
남인수 사망 후, 김은하는 재혼하지 않고 4남매를 키웠으며(남인수 시망 시 김은하는 37세 정도였슴) 53세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남인수 49제 때 KBS초청으로 장남과 함께 내한하여<가요무대>에 출연했다.
김은하가 남인수와 이혼했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 사망 전 한국연예협회 부이사장, 대한레코드가수협회 회장 등을 지냈고, 장례식은 연예협회장으로 치러졌다. 진주의 생가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동상과 노래비도 세워져 있다.[3]
- 사진에 관해서도 유명한데, 이별의 부산정거장과 애수의 소야곡을 비롯한 모든 남인수 앨범의 커버가 전부 똑같은 사진이다. 이유는 불명이다.
- 친일가요 이천오백만 감격에서 3절을 일본어로 부르는데, 상당히 일본어 실력이 뛰어난지 발음이 꽤나 좋다. 유성음과 무성음 구분이 확실하다.
- 공연 후 앵콜곡으로 <희망의 나라로>를 주로 불렀다고 한다.
3.1. 친일 논란
일제 강점기 말기에 백년설, 박향림[4] 과 함께 부른 〈혈서지원〉을 비롯하여 〈그대와 나〉 등 태평양 전쟁을 지원하는 강제 동원 가요를 취입함으로써, 그 시대에 활동하였던 대부분의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간행한 친일인명사전에 그 이름을 올렸다.
또한 이러한 친일 경력으로 인해 진주시가 주최하는 예술제에 포함된 남인수가요제 개최를 시민단체가 남인수의 친일 경력을 들어 반대하는 등 여러 차례 논란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