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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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남천우(南天祐)

일포(一抱)
본관
의령 남씨[1]
생몰
1895년 3월 24일 ~ 1969년 6월 30일
출생지
강원도 홍천현 화촌면 장평리
(현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장평리)[2]
사망지
경기도 인천시
1. 개요
2. 생애
2.1. 목회 활동 및 민족 운동
2.2. 친일 행적
2.3. 해방 후 행적
3. 사후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였으나 1930년대 후반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락한 인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나 2010년 서훈 취소되었다.

2. 생애



2.1. 목회 활동 및 민족 운동


남천우는 1895년 3월 24일 강원도 홍천현 화촌면(현 홍천군 화촌면) 장평리에서 남상백의 3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한문을 수학했고, 1913년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상경하여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1915년 중퇴했으며, 1917년 경성중앙기독교청년회학관(YMCA) 야학부에 입학하여 2년 수료했다. 이후 1919년 세례를 받고 감리회에 입교했다.
1916년부터 1918년까지 3년간 춘천헌병분대 홍천헌병분견소 헌병보조원을, 1918년 9월부터 1년간 강원도 홍천군 재무계 고원을 지냈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홍천지구의 만세시위를 주도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연통제 강원도 단장으로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1920년부터 전도사 직첩을 받아 경기도 가평군 서면에서 2년간 전도사로 활동했다.
1922년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1924년 강원도 양구구역장을 맡았으며, 1925년 8월 감리교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8년 협성신학교 졸업 후 양구교회를 담임했고, 1931년 인제교회로 전임하여 인제 정의여학교 교감을 겸임했다. 그해 감리교 동부연회 홍천지방 감리사를 맡으면서 남궁억과 교분을 쌓았다.
1933년 4월 하순 남궁억이 홍천군 서면 모곡리 일대에 감리교 목사와 신자들을 결집하여 십자가당(十字架黨)을 결성할 때 참여했다. 십자가당 결성식에 참석한 사람은 유자훈, 남천우, 이윤석, 김복동, 남궁식, 어인손 등 10명이었다. 이들은 중앙총회, 전도ㆍ교육사업의 실행을 지도하는 중앙집행위원회와 중앙집행위원회의 지도하에 전도ㆍ교육사업을 담당하는 당회를 설치했다. 이후 간부진이 구성되었는데, 남천우는 사회사업위원 겸 교육위원을 맡았다.
십자가당 당원 모집은 철저히 비밀포섭 방식을 취해 보통학교 졸업 이상자 가운데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으로 한정했다. 새로 포섭된 당원들이 서로 만나는 경우 동지임을 식별하기 위해 손을 어깨까지 들었다가 내리며 악수하도록 했다. 또한 당원 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보여 정치학ㆍ사회학ㆍ경제학에 대한 특별교양을 실시하도록 하고, 당원 교육과 연락을 위해 당보를 만들기도 했다. 당기에는 십자가당이 지구를 지배한다는 의미에서 지구를 그려넣고 유대 시조의 아들 12인의 12민족으로 나뉘었을 뿐 아니라 예수의 제자가 12인이었음을 고려하여 12줄의 청색을 그려넣었다.
십자가당의 강령은 1. 세계의 기독교회를 통일하는 것, 2. 적극적으로 이 지상에 공존공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강령을 실현하기 위한 규약은 다음과 같았다.

1. 계급 및 민족의식을 타파할 것.

2. 토지는 가족 수효에 상응하게 하고 생활정도 이상을 소유하지 않을 것.

3. 상ㆍ공업은 1할 이상의 이익을 취하지 말 것.

4. 물질을 가지고 이웃을 억압하지 말 것.

5. 신구 도덕 중에서 선량한 것은 옹호할 것.

6. 개인생활로는 매일 1장 이상의 성경문을 읽을 것.

7. 남녀문제는 우의적으로 해결할 것.

8. 각 교회를 통일할 것.

9. 규약을 사수하고 노동은 절대로 신성주의를 취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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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월 2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그러나 1933년 11월 4일 홍천 주재소 순사들이 십자가당 관계자들을 일제히 구속할 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1933년 12월 14일 남궁억 등 10여 명과 함께 서대문형무소로 송치되어 심문을 받았다. 1935년 1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의 징역을 선고받고 상고를 포기하여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6년 2월 2일 만기 출소했다.

2.2. 친일 행적


출옥 후 바로 만주로 건너간 남천우는 공주령 감리교회를 담임하면서 1938년 부터 만주감리교신학교 교수를 맡았다. 이후 그는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협조하기 시작했다. 1939년 감리교 장로목사 안수를 받고 강원도 원산 충청리교회를 담임한 그는 1941년 3월 기독교조선감리교단 서기를 맡았고, 4월에 강원도교구 공익사업위원장을 맡았다. 1942년 원산 보혜고등성경학교 교장을 맡았고, 원산지방 감리사를 지내면서 그해 10월 기독교조선감리교단 강원도교구 대의원을 겸임했다.
1943년 10월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 상임위원 겸 함경교구장에 임명되어 감리회를 일본 기독교로 편입하는 데 협력했다. 같은 해 대전 제일감리교회로 전임했고, 1944년 대전보육원장을 맡았다. 1945년 7월 일제의 조선기독교 통폐합 정책에 따라 개신교 교파를 통합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이 성립하자, 그는 이 단일교단의 충남교구장을 맡아 일제의 정책에 순응했다.

2.3. 해방 후 행적


8.15 광복 후, 1945년 9월 대전 이재동포원호회 회장을 맡았고, 10월에 독립촉성국민회에 참가하여 충청남도 지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그해 11월 미군정청 충청남도 고문에 위촉되었다. 1946년 충청남도 후생협회장에 선임되었고, 독립촉성국민회가 대한민국회로 개편될 때 충청남도 본부위원장이 되었다.
1947년 대전 중앙감리교회를 설립하고 이를 담임하였으며, 충청남도 사회사업연합회장을 맡았다. 1948년 신탁통치 반대 충청남도 책임자로 활동하다 미군청에 의해 투옥되었다. 1957년에는 자유당 부정선거에 항의하다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58년 민주당 중앙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다 1960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후 인천의 대훈농목장을 건립해 경영하다가 1969년 6월 30일에 사망했다.

3.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3.1 운동 가담 및 십자가당 창립 행적을 사유로 남천우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후에 친일 행적이 드러나면서 2010년 서훈이 취소되었다. 하지만 그의 유해는 유족이 이장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까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1] 25세 우(祐) 항렬.[2] 의령 남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