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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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2. 생애
1884년 영어 학교인 동문학을 수료하였다. 이후 내아문 부주사, 칠곡군수 등으로 일하였으며 1894년 내부토목국장으로 중용되어 한성부 종로와 정동 일대 및 육조 앞~남대문 사이의 도로를 정비하고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을 세웠다.
1896년 2월 아관파천 후에 관직을 사임하고 1896년 7월 서재필,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1898년 9월 나수연, 유근 등과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해 국민 계몽과 독립협회 활동을 지원하는데 힘을 쏟았다. 대한제국의 정치 체제를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개혁해 의회를 설립하고 대대적 개혁을 단행하려는 독립협회 운동 지도자로 활동하다 1898년 11월 익명서 사건에 연루되어 16명의 지도자와 함께 체포되었다. 이때 이승만이 배재학당 학생들을 이끌고 경무처와 평리원에서 밤샘 농성을 벌여 석방시켰다.
1905년 3월 고종의 간곡한 요구로 다시 관직을 맡아 성주군수로 부임했다. 그러나 1905년 11월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외교권을 박탈하자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1906년 2월 양양군수에 임명되자 애국 계몽 운동에 참가하였다. 1907년 일본이 헤이그 밀사사건을 이유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 7조약을 체결해 침략 정책을 강화하자 사임하고 애국 계몽 운동에 주력하였다. 1910년 8월 한일합방 이후 교육을 통한 구국 운동에 노력하여 1910년 10월 배화학당 교사가 되었다.
1918년 건강이 악화되자 강원도 홍천군으로 내려갔으며 1919년 9월 모곡 학교를 설립하고 나라꽃인 무궁화를 전국에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하지만 무궁화 보급 운동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1] 에는 남궁억이 설립한 한서감리교회와 한서초등학교 등이 있으며 교회 옆에는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초등학교 뒷편에는 남궁억의 묘역이 있고 초등학교 주변에는 보기 힘든 무궁화 나무가 무리지어 있다.
1933년 11월 개신교 계열 독립운동 비밀 결사인 '십자당'을 조직해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8개월간 투옥되었으며 노령이 참작되어 석방되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남궁억의 외아들 남궁염은 이승만의 구미위원부 활동을 돕고 재미 교민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다.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뉴욕 총영사로서 12년간 근무하며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미군 유족 위로, 강연회 개최, 구제물품 수송 등 여러 업무를 수행했다.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물러난 직후 사임했고 1961년 11월 29일 롱아일랜드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2011년 대한민국 정부는 남궁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