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애공

 


'''노(魯)나라 27대 국군
애공
哀公
'''
''''''
희(姬)
''''''
노(魯)
''''''
장(將)
'''아버지'''
노정공(魯定公) 희송(姬宋)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468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494년 ~ 기원전 468년
1. 개요
2. 재위 기간에 일어난 일
3. 후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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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나라의 제27대 군주. 노정공의 아들. 노도공의 아버지.[1] 이때 공자가 죽었는데, 노은공 때부터 이때까지의 일을 공자(孔子)와 그 제자들이 춘추에 기록해 남겼다. 즉 춘추는 노애공 시대에서 끝이 난다.[2] 그나마 이 때는 노나라 군주의 힘이 삼환보다 약하지 않았으나 그가 죽고 노도공 때에는 삼환보다 낮아지는 안습한 상황이 된다.[3]

2. 재위 기간에 일어난 일


노애공 5년(기원전 490년), 제경공(齊景公)이 죽었다.
노애공 6년(기원전 489년), 제나라의 진걸(陳乞)이 안유자를 죽이고 양생을 올리니 그가 바로 제도공이다.
노애공 7년(기원전 488년), 오왕 부차는 제나라를 쳐서 증나라에 이르렀다. 그리고 노나라로부터 돼지, 소, 양 등을 300마리를 바쳤다. 계환자의 아들 계강자는 위기감을 느끼고 공자의 제자 자공을 보내 오왕 부차와 태재 백비를 설득하게 했으나 실패했다.
노애공 8년(기원전 487년), 오나라가 추나라와 함께 노나라를 치니 노나라에서 회맹을 요청해 부차가 받아들였다. 오나라의 공격은 면했으나 제나라가 노나라를 쳐서 3개 읍을 빼앗았다.
노애공 10년(기원전 485년), 그 복수를 위해 노나라가 제나라 남쪽을 쳤다.
노애공 11년(기원전 484년), 제나라가 노나라를 치자 계강자가 공자의 제자 염유를 등용해 공을 세우니 계씨는 공자를 위(衛)나라에서 불러내 등용했다.
노애공 14년(기원전 481년), 제나라의 전상(田常)[4]제간공을 시해하고, 제평공을 세우자 공자가 노애공에게 토벌하자고 했으나 거절되었다.[5]
노애공 15년(기원전 480년), 자복경백을 사신으로, 자공을 부사로 삼아 제나라로 보내니 전상은 노나라로부터 빼앗은 땅을 돌려주었다. 그 이유는 바로 전상이 재상이 되어 제후들의 지지를 얻어 힘을 키워 결국 제나라를 먹을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노애공 16년(기원전 479년), 공자가 죽었다.[6]
노애공 22년(기원전 473년), 월왕 구천오(吳)나라를 멸했다.
노애공 27년(기원전 468년), 계강자가 죽었다. 노애공이 이틈을 타 삼환씨를 제거하려 했다. 월왕 구천의 힘을 빌려 제거하려 했으나 일이 누설되는 바람에 실패하여, 노애공은 위(衛)나라, 추나라, 월나라로 갔다가 다시 노나라로 돌아왔는데, 노애공은 유산씨의 집에서 죽었다. 그리고 그 아들 희녕(姬寧)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노도공(魯悼公)이다.

3. 후일담


노도공이 즉위했을 때 그 권력이 삼환씨만도 못했다. 그런데, 노원공 때 삼환씨의 권력이 약해지더니[7] 노목공 대에 이르러 공의휴를 재상으로 삼는 등 권력을 행사할 정도로 삼환이 약해져버렸다. 그러나 노나라는 노목공 때 중흥한 이후로 점점 약해져 소국으로 전락했다가 결국 초나라고열왕에게 멸망해 노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1] 노도공 때 가서는 삼환의 권력이 절정을 찍었다.[2] 그래서 춘추의 저자는 근본적으로 공자이나 그 뒤의 일이 기록된 것은 바로 공자의 제자들이 노애공 때까지의 일을 기록했기 때문이다.[3] 그 원인은 후술.[4] 원래 이름은 전항(田恒)이나 한문제의 이름인 유항(劉恒)을 피휘해 이것으로도 유명하다. 같은 사례로 조운의 고향인 상산은 원래 항산이었다.[5] 아마 노애공의 뜻이 아닌 삼환씨의 뜻이었을 것이다. 실권이 그들에게 있으니 말이다.[6] 자로가 죽은 충격 때문이다.[7] 기록이 적어 그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약간 짐작을 보태보면 삼환이 실정을 저지르거나 혹은 그 자손이 어리석은 짓을 하여,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된게 아닌가 싶다. 아니면 민심이 그들로부터 떠나가거나. 개혁의 여파로 갈려나가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