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시구치 아키라

 


西口彰(1925~1970)
1. 개요
2. 생애와 연쇄 살인
3. 체포
4. 재판
5. 사건의 영향
6. 기타


1. 개요


일본의 연쇄살인범. 1925년 출생, 1970년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2. 생애와 연쇄 살인


니시구치 아키라는 1925년 12월 14일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부모 모두 독실한 기독교(가톨릭) 신자로, 아버지는 역사적으로 가톨릭 교세가 강한 편인 나가사키에서도 특히 카쿠레키리시탄의 전통이 강하게 잔존한 지역인 고토 열도 출신이었다.[1] 또한 니시구치 자신도 세례성사를 받았으며, 경제적으로도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고 한때 신부를 지망한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오이타현 벳푸로 이주한 뒤 중학교 2학년 무렵부터 탈선하기 시작[2], 절도사기죄로 소년원에서 복역했다. 하지만 출소한 후에도 갱생하지 못하고 공갈, 협박과 사기를 일삼다 또다시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니시구치의 탈선 배경에는 가정 환경이 있었다. 니시구치의 아버지는 고향인 고토 열도에서 큰 어선 수 척을 소유했을 정도로 꽤 잘 나가는 선주였으나, 천황을 신으로 여기던 전시 일본 체제 하에서 기독교 신자는 그저 걸림돌에 지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당시는 어업 종사자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징용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니시구치의 가치관이 붕괴된 데는 이렇게 국가 권력에 저항하지 못한 채 무력하게 따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아 왔던 성장 과정이 한 몫을 한 것이 아니냐는 견해가 있다.
이후에도 니시구치는 각지를 전전하며 사기행각을 벌이던 중, 1963년 10월 18일 후쿠오카현 미야코군의 한 산길에서 전매공사 직원을 살해한 것을 시작으로 같은 날 타가와군에서 운전사를 살해하고 행방을 감추었다. 당시 목격자의 증언 등을 토대로 니시구치가 용의선상에 올랐고, 이에 후쿠오카 현경은 즉시 전국에 니시구치를 지명수배했다. 자신에게 지명수배가 내려진 것을 알게 된 니시구치는 세토우치 해협을 오가는 연락선에서 배에 신발과 거짓 유서를 남기고 투신자살로 위장했으나 경찰이 이를 간파했고, 니시구치는 고베를 거쳐 오사카, 교토, 나고야 등지를 전전하며 도피 행각을 벌였다. 이후 시즈오카로 옮겨간 니시구치는 11월에 하마마츠시에서 여관 주인 모녀를 살해하고 다시 도주, 12월경부터는 변호사를 사칭하면서 도쿄, 지바, 홋카이도, 도치기에서 금품을 사취했다.
12월 29일, 도쿄 토요시마구에서 변호사를 살해, 희생자는 5명으로 늘어났다.

3. 체포


1964년 1월 2일 니시구치는 쿠마모토현 타마나시에 거주하던 승려 후루카와 타이류[3]의 자택을 방문했다. 당시 후루카와는 교회사[4]로 일하는 한편 엔자이 방지 운동에 전념하면서 자금난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니시구치는 이번에도 돈을 편취할 목적으로 도쿄대학 출신 변호사를 사칭하면서 활동을 지원하겠다며 후루카와에게 접근했지만, 당시 11살이었던 후루카와의 차녀[5]가 평소 등하교길에 보던 지명수배 전단지에 실린 사진과 니시구치의 얼굴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간파했고[6], 니시구치 자신도 변호사 단체명을 제대로 대지 못한데다 심지어 자신이 졸업했다는 도쿄대학 법학부 교수의 이름조차 모르는 등[7] 변호사로서의 기초 지식이 전혀 없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다.
결국 니시구치가 살인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루카와의 신고로 그는 다음날인 1월 3일 경찰에 체포되었다. 한 경찰 간부는 "전국 경찰이 니시구치를 체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수사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전국 12만 경찰의 눈이 어린 소녀 한 명의 눈에도 미치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한편 니시구치 체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후루카와의 딸은 이후 '공적을 세운 소녀(お手柄少女)'라는 이명으로 언론에 크게 보도되면서 기자들의 취재 경쟁이 과열되는 바람에, 한동안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한다.

4. 재판


니시구치는 살인 5건, 사기 10건, 절도 2건으로 기소되었다. 재판에 사용된 검찰의 논고에서는 니시구치를 '사상 최고의 검은 금메달 챔피언(史上最高の黒い金メダルチャンピオン)'이라 표현했고, 지방법원의 판결문에서는 '악마의 부산물(悪魔の申し子)'이라고 표현했다.
1964년 검찰은 니시구치에게 사형을 구형, 동년 12월 23일 후쿠오카 지방법원에서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니시구치는 즉각 항소했으나 1965년 후쿠오카 고등법원이 공소를 기각, 1966년 최고재판소에 상고했다가 취하하여 사형이 확정되었다.
1970년 후쿠오카 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향년 44세.

5. 사건의 영향


전쟁 이후로 자동차가 보급되고 도로와 교통망이 정비되면서 강력범죄자들의 행동 범위가 넓어지고 장거리 도주도 용이해졌지만, 경찰 수사력은 이를 따라잡지 못한데다 각 도도부현 경찰들 간의 수사 공조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이 니시구치 사건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이에 경찰청에서는 이런 광역 사건에 대비하여 '광역 중요 지정사건 요망'을 정립, 일본 전국의 경찰서가 공동으로 수사할 필요가 있는 사건을 '광역 중요 지정사건'으로 규정하여 대응하게 되었다.

6. 기타


니시구치는 슬하에 3명의 자녀[8]를 두었는데, 범죄자의 자식이라는 오명을 얻은 장남이 비뚤어져서 등교거부를 하자 크게 슬퍼하면서 장남에게 20여 통이 넘는 편지를 보내 갱생시켰다는 일면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니시구치 본인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물론 옥중에서 썼다고 알려진 수기의 문장에도 반성의 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과연 설득력이 있는지는 미지수.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1979년작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으며[9], 작중에서는 '에노키즈 이와오'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1] 니시구치가 오사카 출생인 것은 당시 부모가 돈벌이를 위해 일시적으로 오사카에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2] 가톨릭 계열의 미션 스쿨에 다녔지만 엄격한 규율과 기숙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3학년 2학기 때 자퇴했다.[3] 진언종 승려로 사형 폐지와 사형수의 엔자이 철회 운동에 전념했던 인물.[4] 교도소 수감자들의 갱생을 돕기 위한 각종 활동을 실시하는 사람. 여기서 교회(敎誨)란 형무소 등 형사시설 수용자에게 준법정신과 올바른 가치관 등을 정립, 교육시키는 일련의 활동을 말한다.[5] 일본 불교는 종파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승려의 결혼을 허용한다.[6] 후루카와는 처음에는 딸이 잘못 본 것이라 생각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직접 밖으로 나가 지명수배 전단지를 직접 확인하고 오기까지 하는 등 너무나 심각한 딸의 모습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고 이후 니시구치의 수상쩍은 태도를 직접 보고 나서야 딸의 말이 맞았음을 깨달았다고 한다.[7] 상당히 저명한 교수임에도 니시구치는 이 교수의 이름을 대지 못했다고 한다.[8] 아들과 딸, 다른 한 명은 불명.[9] 정확히는 니시구치 사건을 소재로 한 동명의 소설이 원작.